▲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모두가 다 ‘변(變)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시간’은, 분명, 절대적 세력을 갖고서, 정말 겁도 없이, 모든 것을 다 아낌없이 집어삼키며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하여 우리 인생들은 모두 대책 없이 낡아지고 늙어지며 마침내는 죽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이 모든 생사과정(生死過程)을 꼼꼼히 지켜보며 인생을 관조(觀照)하던 이스라엘의 한 지혜 자인 구약 전도서 기자는 구약성서를 마감하는 그 끝자락에서 이렇게 탄식하는 말을 남겨놓았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2-3)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서학자들은 이 ‘전도서’(Ecclesiastes)라는 책은 구약성서 말미(末尾)에서 새로운 경전인 신약성서의 등장을 간절히 기다리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책이라고들 말들 합니다.
사실, 인생살이의 흥망성쇠(興亡盛衰)와 영고성쇠(榮枯盛衰)를 자세히 지켜보노라면, 분명히, ‘시간’은 모든 것을 소멸시키며 지나가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시간,’ 그 자신은 결코 힘이 진(盡)하여 지치는 일이 전혀 없이! 창세 이래로 지금까지, 천문학자들의 가설에 의거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137억 년 전에 일어난 Big Bang과 더불어 이 우주가 처음으로 생성된 그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그리고 137억년을 촌음도 쉼 없이, 앞을 향하여 달려가기만 해왔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 중에서도 놀라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비록 역설적(逆說的)이기는 하지만, 바로 이 사실로부터, 즉 ‘시간’이란 앞을 향해서 지치는 일 전혀 없이, 그리고 끊어지는 일도 전혀 없이 힘차게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다는 바로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오히려, ‘영원’의 실체라는 것을 보게 된다는 그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한국의 여류작가로서 널리 잘 알려진 박완서 씨가 쓴 ‘호미’라는 산문집도 또한 그 특별한 문학적 혜안을 가지고 이 ‘영원’이라는 개념을 또한 이와 비슷하게 이해하고 정의하였습니다. 즉 그는 그의 저작 ‘호미’의 45쪽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작년에 그 씨들을 받을 때는 [그] ‘씨’가 종말이더니 금년에 그[씨]들을 뿌릴 때가 되니 [오히려 그] 종말이 [다시] 시작이 되었다. [이] 작고 가벼운 [씨]들 속에 시작과 종말이 함께[!] 있다는 그 완전성과 영원성이 가슴에 짠하게 경이롭다.”라고 썼습니다. 즉 ‘종말’은 ‘시작’이 되고 ‘시작’은 또 불가피하게 ‘종말’이 되고 또 이 ‘종말’은 진통의 과정을 통하여 다시 ‘시작’을 낳고 그 ‘시작’은 또한 불가피하게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것, 이것이, 이른 바, 창조주께서 그가 창조하신 세계 속에 설정해 놓으신 바로 그 ‘완전성’과 ‘영원성’이었다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또 한 사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또한 그 역시 이러한 동일한 역사적 진리를 선포하였었던 한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그의 예언서가 끝내 밝혀주지 않아, 학자들은, 그의 예언이 이사야 예언서에 연결되어 있다는 그 이유를 근거로 하여, 예언자 이사야보다도 200여 년이나 후대에 활동한 그이지만, 그에게 ‘제2 이사야’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되었는데, 이 제2이사야도 또한 그토록 도도하고도 교만하게 이스라엘을 괴롭혔었던 저 초 강대제국 바벨론 제국조차 ‘시간’이라는 세력 앞에서는 별 수 없이 무너지고, 더욱이 그 무너진 시체더미로부터는 놀랍게도 70여 년 동안이나 포로로 잡혀 있었던 그 죽은 줄만 알았던 저 약소민족 이스라엘이 오히려 죽지 않고 살아서 그 바벨론 땅 사지(死地)로부터 살아서 빠져나오는, 이른 바, 저 경이로운 제2의 출애굽 사건인 출 바벨론이라는 새 창조 사건을 보고서는, 아, 하나님의 그 신비한 역사 섭리! 이 섭리에 감동한 그는 이렇게 외첬습니다.‘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는 그것을 알아라.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어서 너희를 구원해내리라.’(사 43:18-19)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옛 것은 낡아지고 [그 대신] 새 것이 반드시 어김없이 동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옛 것’ 즉 이전(以前)에 겪었던 그 고통스러웠던 옛 것에 대한 기억 때문에, 기필코 다가 올 그 ‘새 것’을 맞아들이지 못한다면 이야 말로 불행스럽고도 불행스러운 ‘어리석음’이라 아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익명의 예언자 ‘제2 이사야’는 이스라엘과 지상 열국들에게 참 복음, 즉 정말로 새로운 복음이 될 종말론적 희망의 사건인, 이른 바, ‘메시아의 대속적(代贖的) 죽음’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이 온 세계 인류를 구원하실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의 출현, 이른 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사건, 즉, 기독교 복음의 출현이라는 ‘새 것’의 출현을 감히 예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새 것’을 가리켜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는 것 New Creation in Christ라는 말로 설명하였습니다.(갈 6:15)
말하자면, 이 ‘새 것’ 이외의 모든 것은, 모두, ‘옛 것’으로서 ‘낡아지는 것’이고 ‘지나가버릴 것’이라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기억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기억할레야 기억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옛 것은,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아닌 것’(nothing! 헬라어 ouk)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 말을 두 번 반복함으로서 “이것도 저것도 다 아무 것도 아닌 것”(우테-우테)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새 것’이외에는 ‘이것이든 저것이든’ 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nothing! 이라는 것입니다. ‘무’(無)라는 것입니다. 이 ‘무’(無)를 붙들고 있다는 것은 어리석음 중의 어리석음이라 아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에 해당하는 것을 사도 바울은 구체적으로 ①‘할례’와 ②‘무(無) 할례’라고 적시(摘示)하였습니다. 이 아무 것도 아닌 두 가지, 즉 ‘할례’와 ‘무 할례’는 기억지도 말고 생각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nothing 즉 ‘무’(無)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즉 부부 사이나 부모와 자식 사이나 또는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연인관계의 사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죽으면 비록 한 동안은 슬픔을 참지 못하겠지만 시간이 가면 죽은 사람은 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잊지 못하면 자신도 병들거나, 심하면, 그 그리움이 치명적인 것이 되어 그 자신도 따라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Cf. Narcissus, 나르시스) 그러므로 시체는 싸늘합니다. 껴안고 함께 살 수는 없습니다. 땅에 묻고 돌아서야만 하는 것이 ‘주검’이라는 것입니다. 애틋한 일이기는 하지만,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는 이렇게 냉혹한 사이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전 것은 이미 지나갔기 때문(無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전 것은 필연적으로 낡아지고 없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새롭게 창조되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할례와 無할례는 둘 다 모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새로운 창조! 그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은 우리의 신앙적 삶 속에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말이겠습니까?
‘할례’는 택한 백성이라는 것을 몸에 표시하는 ‘외적 표식’입니다. ‘세례’나 ‘영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이다.’라고 하는 것을 ‘형식’으로서 나타내는 것이 ‘할례’라면,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하는 것을 교회법적으로 나타내는 형식은 ‘세례’ 또는 ‘영세’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비록 종교의 제도권에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기는 하여도 그것들이 ‘영원성’을 지닌 것은 결코 아니며 더욱이 그것으로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에 목을 매고 사는 것은 어리석음 중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에 목을 매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 종교적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그것 또한 거짓 가르침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를 비판하는 모든 비판들도 또한, 대부분, 기독교 본래의 길, 이른 바, 복음의 ‘완전성’과 ‘영원성’을 비(非) 본래의 것, 이른 바, ‘지나가버리는 것’에 목을 매라고 강요하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컨대,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분명 진리이지만, 사랑의 마음과 사랑의 실천 보다는 ‘사랑의 형식’을 의무화하고 그 형식을 본질인양 율법화하여 강요하면, 그 사랑이 오히려(!) 사랑의 걸림돌이 되고 마는 경우와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사랑의 후원금을 강요하거나 더 나아가 그것을 잘 이행하지 못하는 자를 비난정죄하거나, 심지어는, 그 후원금을 그 관리하는 자가 자기 이익을 위하여 갈취하는 경우에는 그 상황은 더욱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부흥 발전’을 가장 저해하는 것은 오히려 ‘교회주의’라고 하는 비판도 또한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날의 ‘기독교부패’는 바로 여기서부터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형식’은 때로는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형식’이 ‘내용’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할례’ 뿐만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無’할례도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는, 특히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현대는 더욱 이 ‘無할례’가 대단히 오만한 모습으로 자기를 시위하고 그 세력을 확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스스로 자기가 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 부류에 속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무신론을 부르짖고 나온 이래로, 현금에 이르러서는, ‘無神論 布敎/ 無神論 傳道’라는 말이 무신론을 주창하는 지식인들 사회에서 자주 나올 정도입니다. ‘내게는 신(神)이 필요 없다. 성숙한 사회란 신(神) 없이 사는 사회다.’ 라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지식인 사회에 비록 이러한 주장이 있다고는 하여도 그러나 거기에는 무엇 하나 ‘새로운 창조’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라고 아무리 매혹적인 언어들로 외쳐대어도(cf. 니체) 죽어서 다시 사는 ‘새로운 창조’에 관한 가르침은 거기엔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 지나가고 말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움이 돋고 새 싹이 나고 생명이 약동하는 신의 창조질서 안에서 죽음을 딛고 새 생명을 창조해내는 그 ‘새로운 창조의 세계’를 향해 전혀 지치지도 않고 질주하는 저 <시간>이라는 거물 앞에서는 지식인 사회의 그 <無할례주의>라는 ‘자존심’이란 전혀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할례이든 무할례이든 그 모두는 다 아무 것도 아니지만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갈 6:15)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은 부활을 창조해낸, 이른 바, 새 창조의 모체! 였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종교적인 언어 또는 신학적인 언어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천문 물리학적 언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라는 실체와 본질 그 자체가 바로 그것을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지나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또한 ‘다가오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 그것 때문입니다. 이 ‘시간운동’은 Big Bang 이래 137억년 동안을 조금도 쉼 없이 결코 멈추지 않고 반복해 왔고, 뿐만 아니라, 이 무한대의 우주도 또한 이 시간운동을 무한 반복해 왔지만, 신기하게도, 이 우주는 결코 줄어드는 일 없이! 기이하게도 오히려 팽창‘만’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2이사야 예언자는 말하기를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 43:18-1)라고 외쳤으며, 사도 바울도 또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었기 때문이니라.”(고후 5:17-18a)라고 역설하였던 것입니다.
실로, 이 사도 바울의 증언 속에는 전에 없는 놀라운 각성과 감격이 들어 있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음’은 시간에 매여 있는 우리네 인간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즉 ‘새 창조의 시작’을 모범적으로 열어 놓았다는 그 ‘각성’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새로운 창조물이다”라는 증언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서구(西歐)의 잘 알려진 한 신약성서학자(O. Cullmann)는 우리의 잠정적 미래의 그 끝 마디 지점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기다리고 서 계신다고 하였고 그리고 그 ‘예수의 죽음과 다시 사심’은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가 다시 창조되도록 하시는 역할을 한다고 하여, 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중간점’(mid-point)!!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영원의 실체를 비로소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고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는 아버지의 그 ‘영원하심’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서 우리네들에게 확증해 보이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 큰 은혜는, 그 ‘영원성’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면 누구에게나’ ‘중간점’이신 예수님 자신을 그 기점(起點)으로 하여 모든 인류에게 열리도록 하셨다는 그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인간들 개개인의 운명적 종착점을 마지막 ‘종점’(終點)으로가 아니라 그 ‘종점’(終點)을 새로운 미래를 여는 ‘중간점’(mid-point)으로 만드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소식, 아, 이 소식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진정으로 새해를 희망차게 맞아하게해 주는 소식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소식은 진정, 놀라운 소식이요 복된 소식이며 참 복음입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이 소식이 오늘 여기의 우리 모두에게 참 반가운 ‘신년 메시지’가 되어 우리네의 온 누리에 밝게 전달될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