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충범의 길에서][15·끝][여행을 마치며]

이충범·협성대 신학과 교수

황당한 심정으로 길에 서 있다 보니 문득 내 머릿속에 ‘전주덕진공원’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그래, 날도 더운데, 게다가 주말인데 일단 공원이나 가보자. 가면 시원한 분수대도 있고 관광안내소도 있을 게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수다를 떨며 지나가는 세 여성을 붙잡고 길을 물었다. 직장인인 듯한 30대 여성 셋 역시 매우 불친절하고 성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어차피 대도시 한복판에서 이제까지 내가 걸어온 시골 인심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이제까지 갖고 있던 전주에 대한 나의 이미지가 계속 나의 기대를 포기하지 않게 만들었다. 전주의 거리는 어디 이런 곳에 한옥마을이 있을까 싶게 현대화되어 있었고 특히 덕진공원으로 가는 길은 매우 화려했다. 곳곳의 대형마켓과 음식점들은 마치 수도권 신도시를 연상케 하였다. 거리구경을 하면서 한참을 걷다 보니 공원 표지판이 나왔고 전북대 표지판도 나왔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전북대학교를 꼭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다행히 같은 방향이었다.

▲이충범 협성대 신학과 교수 ⓒ베리타스 DB
사람은 참 이상하다. 이미 광주, 정읍을 거치면서 나는 도시에 대한 혐오를 계속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전주에 도착해서는 도시에 대한 혐오와 함께 불친절과도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전주터미널을 떠나면서 서울행 버스의 막차시간을 흘낏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전북대를 가기 위해서 길을 들어서자 짧은 거리도 어깨를 부딪히지 않고 걸을 수 없을 만큼 사방에서 젊은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거리에는 온갖 노점상이 즐비하고 길거리 음식 냄새가 향기로웠다. 길가 음반가게와 커피집에선 활기찬 음악이 흘러나왔다. 도시가 혐오스럽다던 내가 갑자기 활기를 찾기 시작했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시장기까지 돌아 우선 거리에서 파는 과일주스부터 한 잔 사서 마셨다. 그리고 여기저기 널려 있는 주전부리를 사먹으며 거리를 걸었다. 물론 이 더위에도 죽고 못하는 뜨끈뜨끈한 커피 한잔까지 챙겼다. 이렇게 전북대와 공원을 거닐며 놀면서 왠지 모르게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그 순간 “어라? 이게 내 자리였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렇다. 결국 내 자리는 시골이냐 도시냐, 자연이냐 인공이냐, 나 자신이냐 대중 속의 익명성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이 많은 곳, 인공의 문명으로 꽉 찬 곳,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득한 곳, 나는 내가 이런 곳에 지쳐서 이 길을 걷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내가 피하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많은 곳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긴장관계가 지속되는 곳, 인공의 문명으로 꽉 찬 곳이 아니라 문명이란 미명 하에 자연을 꼬챙이로 쑤시는 곳,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득 찬 곳이 아니라 싸움의 격한 언어로 꽉 찬 곳이었음을 알았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살았던 나는 결코 도시를 혐오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나는 도시라는 미명 하에 저질러지고 있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간의 불협화음에 지쳐 있었던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겨났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올라가긴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일단 전주에 왔으니 비빔밥을 안 먹고 갈 수 없다는 생각에 비빔밥집을 찾았다. 그러나 거대한 규모의 식당의 음식 맛은 거의 분식집 수준이었다.

군것질에, 주스에, 커피에, 비빔밥까지 참으로 오랜만에 도시의 삶을 만끽하고 오늘 잘 곳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늘은 경비도 아낄 겸 찜질방에서 자기로 했다. 그런데 수도권에서는 여기저기 널린 찜질방을 이곳에서는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찜질방이 어디 있냐고 묻기도 좀 어색했다. 주변은 여전히 그 이상야릇한 네온사인이 번득이는 모텔뿐이었고 나는 그곳에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이번 여행을 통해 또 하나 배운 것은 시골 여관과 도시 모텔은 완전히 다른 숙박업소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정읍에서 이미 경험하였다. 여하튼 찜질방을 찾아 전주의 밤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보니 집이었다. 순간 나의 온 몸에선 땀이 쫙 배어 나왔다.

미국에 살던 시절 늦은 밤 한국에서 전화가 올 때마다 나와 아내는 가슴이 철렁했다. 귀국할 때까지 그런 철렁한 전화를 제발 받지 않기를 기도했으나 나는 결국 귀국을 몇 개월 앞두고 그런 전화를 받고야 말았다. 이번 여행을 시작하면서 아내와 나는 급박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서로 통화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핸드폰 소리에 가슴이 주저앉았다. 조심스레 전화를 받자 다행히 늦둥이 딸내미 목소리가 들려온다. 놀라서 웬일이냐고 묻는 아빠에게 초등학교 2학년은 “아빠, 보고 싶어요!”로 답한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나도 모르게 밑에서 치밀어 오르는 욱 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목소리를 수습한 나는 ”응, 아빠, 지금 집으로 가. 내일 아침 니가 일어나면 아빤 집에 있을 거야“라고 대답해 버렸다.

35분 정도 남았다. 아까 본 서울행 막차시간에 맞춰 터미널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대로를 무단횡단을 해서 무조건 택시를 잡았다. 막히는 길을 뚫고 터미널에 도착하자 또 택시기사들이 서울행을 외치며 나를 잡는다. 뛰어 올라가 표를 달라고 하자 판매원이 돈을 달라고 한다. 주말이었다. 막차표가 아직 매진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신기했고 나는 그제야 긴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나는 단 한숨도 자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일주일간의 하루하루를 다시 반추해 보았다. 그렇게 버스는 서서히 경부고속도로로 접어들었고 다시 내가 살아야만 하는 그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지난 일주일, 나는 지친 몸과 영혼을 이끌고 아귀다툼 나의 삶의 자리를 탈출했다. 그리고 여행을 통해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만끽했고 나와는 전혀 다른 착하고 순수한 분들을 만났다. 내 나라의 산하와 사람들은 내가 다시 아귀다툼 속으로 들어가서 나의 소명을 감당하고 살 수 있도록 내게 큰 힘을 주었다. 아직 방학이 많이 남았다. 집에 가면 나는 내일 아침부터 또 다시 방학계획표와 하루시간표를 만들면서 이 방학을 알차게 계획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의 삶의 자리로 되돌아가 하나님께 받은 이 땅에서의 소명과 의무를 다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 여행을 통해 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그리고 무사히 여행을 마치게 하시고 여행을 통해 힘주신 그 분께 깊은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버스 창밖의 까만 밤이 눈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지난 7월 어느 날, 모르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출판한 만족스럽지 못한 책 한 권 때문에 나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받아 본 인터뷰 요청을 쾌히 승낙하고 기자를 만나기 위해 나갔다. 학생 같은 20대 여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내 책에 관한 인터뷰를 마쳤다. 인터뷰를 마친 후 기자님은 나에게 문화비평칼럼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열악한 환경에서 기독교 정론을 꿈꾸는 젊은 사람들에게 내가 도울 길이 있다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망설임 없이 이 제안을 승낙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그것이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매달 문화비평을 쓴다는 것도 내겐 부담이겠거니와 내가 둘러 본 베리타스의 많은 글들은 나의 계획을 수정하게끔 했다. 최근 기독교계 인터넷 신문과 잡지들을 보면 최근신학의 주요 이슈들, 신학적 논쟁들, 게다가 감각을 자극하기 충분한 교계의 소식들을 주요 기사로 다룬다. 그리고 이 모든 기사들과 논의는 매우 적절한 뿐 아니라 수준도 대단히 높다. 이런 면에서 베리타스는 참 훌륭한 웹진이었다. 하지만 어디 한 군데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기사와 칼럼은 참 드물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그냥 내 마음대로 독자들이 편히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기로 결정하고 나의 여행기 한 꼭지를 송고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기자님의 판단에 맡겼다. 그런데 의외로 기자님은 내게 격려의 답신을 보내왔다. 이렇게 <이충범의 길에서>는 시작되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대단한 목적? 물론 없었다. 15회에 걸쳐 내가 여행하며 느끼고 경험했던 것들을 진솔하게 독자님들과 함께 나누면서 내 글을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이 내 글을 읽으면서 잠시 편히 쉬셨으면, 망각 속에 희미해진 오래된 추억들을 다시 꺼내보셨으면, 화석화된 감성을 다시 주물럭거리게 되셨으면, 읽으시면서 낄낄대는 여유를 찾으셨으면, 우리가 사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잠시나마 마음이 따듯해지셨으면, 그리고 글을 통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사랑을 조금이나마 느끼셨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이것이 대단하고 거창한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연재를 마친 지금, 얼마나 나의 이 거창한 목표가 달성되었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다만, 나 자신은 나의 2008년 여행을 회상하면서 즐겁고 행복했다. 게다가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는 행운까지 얻었으니….


나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신 베리타스 여러분들, 특히 내 나이 반 토막이나 될까 싶지만 늘 나를 격려해주신 멘토 이지수 기자님, 매회 댓글로 화답해주신 열혈독자님, 그리고 지속적으로 읽어주셔서 클릭 수 높여주신 수많은 무명의 독자님들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저와 함께 이 칼럼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다시 원기를 회복하야(?) 더 재미있고 즐거운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베리타스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그리스도의 은총이 늘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아~ 졸립다! 끝!!!)


※이번 편을 끝으로 [이충범의 길에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이 코너를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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