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선(徐洸善, 80) 박사가 자신의 서재에서 오래된 파일 하나를 꺼내들고는 펼쳐 보였다. 한국 기독교통일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되고 있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1988년) 원문은 그렇게 그의 손에 들려 그 모습을 드러냈다. 원문은 깔끔하게 정돈된 상태로 남아있지 않았다. 군데군데 수정을 거듭한 부분도 있었으며 문단 전체가 통째로 삭제된 부분도 있었다. 이러한 흔적들은 당시 원문을 둘러싼 논쟁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암시해주고 있는 듯 했다.
순수 민간 차원의 아래로부터의 통일 운동의 기초석이 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하 ‘88 선언’)은 남북 7.4 공동성명에서 결의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 등의 3대 원칙에 더해 ‘인도주의 원칙’과 ‘통일 논의에의 민중의 참여’를 포함시켰다는 측면에서 당시 학계나 시민단체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주요 대북 전문가들은 지난해 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후 한반도를 둘러싼 급변하는 정세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정부의 계속적인 5.24 조치는 남북관계를 교착상태에 빠뜨리고 있다는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데 있어 민(民) 차원의 통일 운동의 중요성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본지는 지난 6일 ‘88 선언’의 주필로 참여한 직접적 당사자 서광선 박사를 만나 한국교회 통일 운동의 미래를 모색하는 것으로 신년특집을 꾸며봤다.
- 한국교회 통일 운동에 있어 진보, 보수 교회가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여전히 요원한 과제라고 여겨지는데 서로간 합의점을 찾는 것은 불가하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무의미하다고 보십니까?
▲신년특집으로 이화여대 명예교수이자 본지 논설주간인 서광선(徐洸善, 80) 박사를 서대문에 소재한 그의 연구실에서 만나 한국교회 통일 운동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봤다. ⓒ베리타스 |
“남남갈등 중심에 교회가 서 있다고 봐요. 교회 안에서 남남갈등이 해소되고, 교회 안에서 남남이 함께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면 문제가 많이 해결될 것이라고 봅니다. ‘88 선언’을 중심으로 한 교회 안의 남남갈등의 대표적 사례로는 앞서도 언급한 죄책 선언 그리고 미군 철수 등일 것입니다. 특히 미군 철수 문제와 관련해서는 오해를 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미군 철수를 전면에 내세우거나 이를 전제로 선언을 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먼저 비핵화가 되고, 평화협정이 되어 평화체제가 정착이 될 때, 비로소 국제적인 보장이 가능해 질 때, 즉 미군의 필요성이 없어질 때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 미군 철수에 관한한 선언문의 요지였습니다. 조건부거든요. 이 같은 서로간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진보, 보수 진영의 목사들이 한 자리에 앉아서 ‘88 선언’을 함께 얘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 ‘88 선언’에서 강조했던 부분들 중 남북관계에 있어 여전히 요원한 과제로 남겨진 것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평화협정, 비핵화, 군축, 미군 철수 등의 문제는 사실 옴짝달싹하지 않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 이후 북한은 핵실험을 강행했고, 남북한 모두 군축보다 군비 증강을 해왔습니다. ‘88 선언’이 제시한 이 같은 정치적인 부분들에 있어선 정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더 교착상태가 되어 있는 것 같아서 참 안타깝습니다.”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회원 교단들을 중심으로 최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과 관련되어 불가침조약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일찍부터 주장해 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아직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국제법적인 이해가 부족한 듯 싶고, 특히 평화협정이라는 말 자체도 휴전협정을 넘어선 어떤 불가침조약 정도의 생각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제가 휴전협정의 법조문을 찾아봤는데 굉장히 길더군요. 그것을 하나하나 검토를 하면서 국제법을 하는 전문가들이 평화협정의 내용을 가져다가 구상하고, 문장화하는 데까지 구체적으로 나가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평화협정이라고 하는 것이 휴전협정 체결 당사국들만 참여하는 것이냐는 문제입니다. 알고 있듯이 중국, 북한, 미국이 휴전협정을 할 때 이승만 전 대통령은 휴전협정에 조인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남한이 배제되었죠. 그렇다면 평화협정을 체결할 때 남한의 역할은 무엇이며, 휴전협정을 삼국이 폐지하고, 평화협정을 만들어낸 다음 남한과 북한이 별도로 평화협정을 체결한다면 그것은 불가침조약이 될 것이냐. 아니면 6자회담의 틀 안에서 북한의 핵문제 해결을 위한 회담으로 시작을 하여서 6자회담의 안건 중 하나로서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것’을 새로 넣을 것인가 하는 복잡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특히 6자회담에서 평화협정을 논할 때 휴전협정 체결에 조인국이 아닌 러시아, 대한민국, 일본 세 나라는 여기서 배제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도 고민해 볼 사항입니다.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큰 전제 아래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이러한 일들을 추진함에 굉장한 노력과 창의력이 필요합니다. 비무장지대를 남북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평화공원으로 조성한다든지요. 하여간 평화협정 조문 하나하나를 만드는데도 굉장한 노력이 필요해요. 그게 평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평화협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휴전협정의 조문을 그대로 두고, 평화협정을 외치는 것은 북한 붕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가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 한 가지 평화협정이 마치 항복협정처럼 되어선 안됩니다. 굉장히 대등한 입장에서 해야 하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것은 북한을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헌법 그리고 역시 남한을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북한의 법을 재고하는 일일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들 모두 유엔에 같이 가입되어 있으면서 서로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국의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어떻게 평화협정을 추진할 것인가도 심각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라 사료됩니다. ‘88 선언’이 나오기까지의 노력의 배 이상으로 하나하나 연구해서 공청회를 열고 여론을 일으켜 끊임없는 노력으로 평화협정의 초안을 만들어내야 할 것입니다.”
- 올해는 총선과 대선 등이 있는 그야말로 정치의 계절입니다. 남북관계 개선에 의지를 가진 정치 지도자들을 뽑는 것은 한반도를 넘어 동북 아시아에 평화를 가져올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자세로 선거에 임해야 할까요.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새로운 선거 바람이 불고, 우리 국민들도 정치적인 변화를 바라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변화를 바라는 것 같아요. 참 마음들이 조급한 모습도 있는데 그래서 대통령을 뽑는 게 아니라, 대통령 이상이 되는 사람, 천사, 왕, 하나님 같은 사람이 나오길 바라는데 얼마나 다급하면 그렇겠어요. 대통령이든 여타 정치 지도자든 우리가 뽑는 우리와 같은 사람의 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국민들의 인식이 먼저 달라져야 할 것 같아요. 대통령을 하나님 같은 그런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단, 민주적인 지도자를 선택해야 합니다. 민주사회에서 사는데 정말 민주시민으로서의 역할이란 대통령 뽑아서 청와대에 가둬두고, (국정운영 등을)알아서 하라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정치인들에게만 귀를 열고 소통하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도 소통을 해야 합니다. 참여를 해야죠. 한국교회 역시 책임을 지고 시민과 국민의 입장에서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인사가 누구인지를 찾아내고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야 할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민생복지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고, 남북 문제에 대해 식견이 있으며 도덕성이라든지 소통의 능력을 갖춘 지도자라야 할 것입니다. 자유, 평등, 정치적 민주화 뿐 아니라 경제적 민주화 그리고 남북 통일의 문제 등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지도자가 뽑힌다면 남북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민주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민을 대표하는 사람을, 나를 대표하는 사람을 뽑아야겠습니다. 2012년 정치의 해이고, 남북 분단체제의 중요한 전기가 되는 해입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북한에 새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위기로 만들지말고, 남북 분단체제의 극복을 위한 기회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북한의 굶어 죽어가는 민중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북한 정권의 안정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