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이곤 칼럼] '본향' 찾는 나그네

-히브리서 11:13-16- 중심으로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오늘(1월 23일)은 설날입니다. 모두들 고향 찾아가는, 소위, ‘민족 대 이동’이라는 것을 하는 날입니다. 다들 고향 찾아가는 날입니다. 평상 때보다는 두 배, 세 배 시간이 걸리고 또 자동차는 고속도로 상에서 거북이걸음을 한다 해도 다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즐거워하고 기뻐들 하는 그런 명절날입니다. 어쨌든 이날만은 우울한 표정은 접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고향 가는 날이고 고향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고향’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①자기가 태어나서 자라난 곳, ②자기의 조상이 오래 머물러 살던 곳, 그래서 ③마음의 안식을 느끼는 곳, 이 세 가지가 갖추어진 곳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도 이런 요소들을 다 잘 갖춘 ‘나의 고향’은 과연 어디일까? 하고 생각해보니까, 딱히 꼭 집히는 곳을 말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한 느낌은 저의 삶의 내력(來歷)이 대략 다음과 같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제가 태어나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이전까지 살았던 곳은 만주 땅 ‘신양’(심양/봉천)이라는 곳이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중학교 시절까지 10년 정도 살았던 곳으로서 부모님의 묘소가 있는 곳은 경상북도 청도라는 곳이지만, 그러나,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장가가고 자식 낳고 직장 생활하고 또 직장에서 은퇴하기 10여 년 전까지의 약 25여년 세월 중 외국 유학생활을 뺀 나머지 기간을 살았던 곳, 즉 가장 많은 세월을 보낸 곳은 서울이며 그 나머지 15여 년 동안 이사 한 번 안 가고 직접 집을 지어서 지금까지 죽치고 산 곳은 지금의 경기도 분당입니다. 말하자면, 저는 만주-경북 청도-서울-경기도 분당으로 옮겨 다니며 살아 온 셈입니다. 그럼에도 저의 말씨는 아직까지도 서울 말씨로 고치지는 못하고 여전히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고 있는 채로, 조상의 선산(先山)은 경북 청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이가 “당신 고향이 어딥니까?”라고 묻게 된다면 저는 꼼짝없이 ‘경상도 땅 청도’라고, 즉 사과와 감이 많이 나고 ‘소싸움’의 명소로서 널리 알려진 곳인 그 ‘경북 청도’가 ‘내 고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특히, 프로 야구 시즌이 되면, 제가 응원하는 팀이 ‘대구’를 연고지로 하는 ‘삼성 라이온즈’ 팀이니까 속절없이 저는 ‘경북’이 ‘내 고향’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을 내리는 데에는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마음의 안식을 느끼며 자주 가고 싶어지고 또 그리움으로 가슴 설레게 하는 곳이 경북 청도냐?’라고 다시 물으면 저는 분명코 아니라고 대답하게 된다는 그 점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제가 ‘경북 청도’가 ‘내 고향’은 아니다 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당장 저에게 “당신은 고향을 배신하고 있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 곳, 경북 청도가 비록 일반 상식과 이론으로 보아서는, 분명, ‘내 고향’이라고는 하더라도, 그러나, 실제로는, 저는 너무 일찍부터 고향을 떠나서 고등학교 시절부터는 ‘친척’이라고는 한 곳도 없는 서울이라는 객지를 혼자 떠돌며 살았고 단지 위로를 받으며 정신적으로 의지하였던 곳이 한 곳 있다면 그 곳은 단지 저 서울시 성북구(당시는 동대문구) 보문동 2가 30번지 언덕바지에 서있는 ‘신암교회’가 조금 뒤늦게나마 ‘실질적인’ 나의 모교회가 되어 마음의 안식처 구실을 해왔을 정도입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그저 언제나 문자 그대로 <나는 ‘길손’이며 ‘나그네’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 왔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의 기자가 아브라함의 생애를 가리켜서 <‘길손’과 ‘나그네’의 삶>이라고 부른 것처럼, 저도 역시 언제나 그저 <나는 ‘객지 사람이요 길손’이다>라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 온 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설날’이니 ‘추석’이니 하는 큰 명절이 되면 오늘 본문 히브리서에 기록된 바, 저 ‘본향 찾는 길손, 아브라함’을 자꾸 떠올리게 되고 그런 아브라함의 이미지 속에서부터 ‘나’ 자신을 찾게 되는 버릇이 생겨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설날 칼럼>을 구상하려 했을 땐, 별 주저 없이 이 히브리서 본문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서북쪽에 위치한 바빌로니아 땅의 ‘우르’라는 곳에서 두 동생 즉 ‘나홀’과 ‘하란’을 ‘아래동생’으로 하고 아버지 ‘데라’의 맏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그 곳에서 막내 동생인 ‘하란’을 일찌감치 사별한 후, 아버지 ‘데라’와 함께 고향(Ur, ‘우르’)을 떠나 ‘하란’(Haran)으로 옮겨 왔지만, 여기 ‘하란’에서는 아버지마저 사별하게 됩니다. 비록 ‘아브라함’은 ‘사라’라는 미모의 여성과 결혼을 하기는 하였으나, 그러나, 그 ‘사라’는 임신 못하는 소위 ‘석녀’(石女)였습니다. 기원전 15-6세기경의 고대 중동의 동양세계에서는 ‘임신 못하는 여인’이란 가문의 대를 이어주지 못하는 가장 불행한 여인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더욱이 삼형제 중 막내 동생인 ‘하란’은 이미 고향 땅에서 사별하였기 때문에 그에게서 태어난 조카 ‘롯’은 천애(天涯)의 고아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마저 ‘객사’(客死)한 ‘하란’ 땅에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각박한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은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하나님의 召命)을 받았는데, 이 때 하나님께서는 아무 가진 것도 없는 이 빈털터리인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그리고 내가 네게 장차 보여 줄 그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이 낳지 못하는 불행한 불임여성인 석녀(石女), 사라’와 ‘천애의 고아인 조카 롯’만을 데리고 신의 약속의 땅인 그 미지의 땅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갔던 것입니다.
  
이 일련의 움직임을 가리켜 성서는 ‘믿음’의 행위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아무 가진 것도 없는 그에게 그나마 하나 남은 동생인 ‘나홀’ 가족마저도, ‘친척을 버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부응하기 위해, ‘하란’ 땅에 남겨두고, 단지 대책 없는 천애의 고아인 조카 ‘롯’만을, 비록 성가신 짐이기는 하였지만, 자신이 그의 유일한 후견인이었으므로 그 조카만을 대동하고, 비록 가야할 그 곳이 어디인지도 아직은 확실하게 모르는 그 미지(未知)의 땅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그 ‘신의 약속’ 하나만 믿고 무조건 떠난 그런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은 그를 가리켜 ‘길손’(새번역) 또는 ‘나그네’라고 명명하였습니다. 더욱이 그가 향해 나아간 곳은 ‘半사막 지역’인 광야였고 동편에는 물 한 방울 없는 끝없이 넓은 사막이 있었으며 서편에는 서구문화의 입구인 지중해라는 만경창파의 바다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어디로 보나 <아브라함, 사라, 롯>은 가진 것이 없는 극소수의 유랑민이었으며, 게다가,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인데도 아직까지도 자식 낳을 소식은 전혀 기대하기 힘든 그런 불행한 광야 길을 헤매는 민초(民草)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각박한 여로(旅路)에 나선 나그네 신세의 저 길손을 가리켜서 오늘 본문말씀인 히브리서 11장14절은 ‘본향 찾는 나그네’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고향이 없는 자는 분명 아니었으므로, 두고 떠나온 그 고향을 만일 그가 그리워하며 찾는 바로 그 본향으로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라고 우리의 본문은 덧붙여 증언하였습니다. 즉 어디까지나 그들은 고향 ‘우르’와는 다른 ! <본향 찾는 나그네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강조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떠나온 그 ‘우르’가 결코 그들이 찾는 그 진정한 ‘본향’은 아니라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에 오늘 본문 말씀의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들이 찾는 본향은 따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게 그들은 다른 고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 즉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모두 버리고 떠나온 저들이기에, 저들은 분명 <진정한 본향을 찾아다니는 나그네>이었을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오늘 여기서 우리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 대답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이 분명하게, 결코 모호하지 않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즉 “이 사람들은 모두들 ‘믿음’에 따라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자신들은 단지 길손과 나그네라는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네가 다른 고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일 떠나온 곳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돌아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더 좋은 곳을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고향으로 그리워하며 사모(思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성을 마련해 두셨던 것입니다.”라고 우리의 본문은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들은 이런 말씀들이었습니다. 첫째(1)그들은 비록 약속하신 바를 받지 못하였을 때도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다고 증언하였고,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신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둘째로(2) 그들은 이 ‘믿음’ 때문에 그들 자신들을 가리켜 스스로! ‘길손’이요 ‘나그네’라고 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자기들이 동경하며 찾는 고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이 세상을 무조건 나쁘게 본다든가, 아니면, 이 세상에 대하여는 비관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이 세상은 본질상 ‘나그네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나의 영원한 고향은 아니라는 것, 단지 지나가는 여로(旅路)라는 것, 단지,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넓고 넓은 온 우주가 모두 하나님의 거처라고 하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 시편 90편 시인이 그의 시 90편 1절에서 고백한 바도 있는데, 이것은 또한 요한복음 기자가 그의 복음서 14:1-3에 기록한 그 예수님의 말씀과도 정확히 서로 일치 상응한다고 하겠습니다. 즉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리라.”(요한 14: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점에서, <고향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참 고향, 진정한 본향을 그리워하며 찾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본문 결론부에서는 마침내, 셋째로(3),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한 도성을 예비해 두신 것을 확인했다는 확신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본문 끝 절, 즉 16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더 나은 곳을 사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고향으로 알고 그 곳을 그리워하고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성’을 마련해 두셨던 것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의 요소가 불가분리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즉 첫째로는① 그들은 더 나은 그곳을 그리워하고 사모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②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며, 그 다음 셋째로③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한 도성을 마련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첫째, 그들은 더 나은 곳을 ‘그리워하고 사모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좀 이상하게 들리실지 몰라도, 이 점이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첫째 주제입니다. 즉 그들은 그들의 그 고향을 그리워하고 사모하고 있었다는 그 점입니다. 사실, 예수를 나의 주로 고백한다고 교회 앞에서 서약을 하고 또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를 반복하는 기독교인들을 보고 “정말 !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며 정말 ! 그 뜻을 사모하고 그리워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정말’이라는 말을 듣는 그 때에야 대부분은 그만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머뭇거리며 자신 없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믿음의 선조들은 이 세상이 자기 고향이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자신들은 타향사리를 하는 나그네요 길손일 뿐임을 확실히 알고, 그래서, 그 ‘다른! 고향’을 찾으며 그 ‘다른 고향!’을 그리워하고 사모하였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백성,’ 이른 바,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 더 그리워하며 사모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신학적 학술용어로 말한다면, 저들은 ‘이론상의(theoretic) 하나님의 백성’이라기보다는 ‘실천적인(practical)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성서가 자주 언급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이삭의 삶 속에서, 야곱의 삶 속에서 그들 개개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신학은 ‘살아계신 하나님’ 또는 ‘역사의 하나님’(조상 대대로 이어오며 활동하시는 하나님) 또는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말하자면 이론적, 교리적, 종교적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 속에 실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셋째, 그리하여 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을 위해 ‘한 도성’을 예비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망망대해 같은 이 넓디넓은 우주 속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있을 곳을 이미 예비하셨다(‘헤토이마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신앙적 승리를 선언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뿐만은 아닙니다. ‘다른 고향’을 마음에 간직하고서, 그 ‘다른 고향’을 실제로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즉 이 세상은 어디까지나 타향사리요 나그네의 삶이지만 그러나 그 마음은 언제나 ‘다른 고향’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삶, 즉 ‘타향 사람’으로서 사는 그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김 아무개의 하나님’ ‘이 아무개의 하나님’ ‘박 아무개의 하나님’ ‘김이곤의 하나님!’ 등등 이러한 인격 대(對) 인격의 만남을 통하여 역사 안에서 우리와 만나시되 구원의 사건으로 우리와 만나시는 그 하나님이야 말로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히 살아계시는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그런 말입니다. 이 하나님을 자기 삶 속에서 만나며 그를 늘 그리워하며 사모하는 그 사람은,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고향이 다른 사람’이며, ‘본향 찾는 나그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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