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일 NCCK 선교훈련원 주최로 제5차 에큐메니컬 아카데미 심포지엄이 열렸다 ⓒ베리타스 |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개신교의 영향력이 민주화 운동을 전후해 급속도로 약화된 것은 누구나 다 공감할만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관한 원인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일도 전무한 것도 역시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한국 교회의 정치참여를 연대기적으로 살펴보고, 문제점을 진단하는 세미나가 열려 관심을 모았다.
19일 NCCK 선교훈련원 주최, 제5차 에큐메니컬 아카데미 심포지움에서 ‘한국정치와 교회’란 주제로 발제한 임혁백 교수(고려대학교)가 해방 이후 한국 교회의 정치적 역할을 분석하고,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인 발전을 위해 한국교회가 앞으로 수행해야 할 미래 역할을 제시한 것이다.
임혁백 교수는 먼저 뉴라이트로 불리는 보수 우익교회들의 정치권에 미치는 영향을 우려했다. 그는 “보수우익 교회는 한국 정치를 기독교 근본주의, 냉전 반공주의로 되돌려 놓으려는 세력의 중심에 서 있다”며 “그들은 예수님과는 달리 가난한 자의 편에 서지 않고, 부자, 기득권, 반공세력의 편에 선다”고 했다.
임 교수가 말한 보수우익 교회는 정치 뿐 아니라 정부의 경제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임 교수는 “미국에서는 실패한 부시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오바마라는 최초의 진보적인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키고 새로운 시민친화적이고 환경친화적인 비전과 전략으로 부시정권의 참담한 실패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국을 건설하려고 다짐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실패한 부시정권의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더 근본주의적으로 추진하려 하고 있어 많은 국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고 했다.
과거 70, 80년대 한국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진보 교회들의 영향력은 감소하고, 보수 교회들의 영향력이 강화된 것이 한국 정치가 보수 근본주의로 퇴행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민주화 운동을 전후해 진보, 보수 교회간 어떤 지형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 임혁백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베리타스 |
임 교수에 따르면 해방 이후 개신교나 천주교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이승만 정권을 암묵적으로 지지했다. 특히 개신교 지도자들은 “모든 정치 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세속 권력을 모두 따라야 한다”는 성 바울의 교리를 강조, 1960년대 후반까지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며 교회 구성원 절대 다수는 정치적으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시기 개신교 지도자들의 민주화 운동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었으나 대부분 개인 행동으로 이뤄졌다는 면에서 임 교수는 그 한계를 지적했다. 임 교수는 “개신교회는 1965년 한일 외교 정상화에 반대해 처음 조직적으로 반정권 운동을 벌였다”며 “1960년에는 김재준 목사나 박형규 목사 같은 개신교회 지도자들이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민주화 운동 초기 개신교회는 개인적 차원의 저항 운동에 머물렀지 조직적으로 반정권 투쟁을 벌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이 되자 개신교, 천주교의 지도자들이 단체로 그리고 교회의 이름을 걸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진보 교회들로 부류되는 이들이 민주화 운동의 전선에 뛰어 든 동기로 임 교수는 ▲ 교인들로부터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한 교회의 노력 ▲ 종교 단체들로부터 정통성을 획득하려는 민주화투쟁 사회운동으로부터의 유인 ▲ 교인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교회간의 경쟁 등을 들었다.
특히 이들 ‘사회운동’ ‘특수목사단’ ‘기독교 사회행동’ 등을 이끄는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에 정통성을 부여할 새로운 교리가 필요했는데 때마침 탄생된 것이 개신교 목사들이 중심이 된 ‘민중신학’으로 불리는 공격적인 신학이었다고 임 교수는 주장했다.
남미에서 발전한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이 민중신학은 기독교 신앙과 의례의 한국화를 강조했고, 개인의 구원보다는 사회의 구원, 종교적이고 광대한 신학보다 사회정치적인 신학 그리고 ‘민중’의 자유를 외쳤다.
임 교수는 “여기서 ‘민중’은 사회의 뿌리층 구성원으로 노동자, 농부, 저중산층, 중소기업인, 학생 및 진보적 지식인들을 자칭한다”며 “민중신학이라는 새로운 교리는 사회정의, 인권 그리고 미눚화를 주장하는 개신교회에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이렇듯 민중신학이라는 새로운 교리로 무장한 개신교회 지도자들은 우선, 도시 공장 지역에서 사회운동을 조직하고, 그 후 반정부 활동을 계속 벌였다. 특히 개신교 활동가들은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을 뿐 아니라, 학생, 지식인, 노동자, 농부로 이뤄진 반정부 운동 연합을 이끌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민주화 이행 과정에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임혁백 교수는 “기독교회는 민주화 이행에 필요한 공간을 마련했다”며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강제된 침묵을 깬 것이 기독교회였고, 교회는 민주화운동 진영 인사들이 정권의 억압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고 했다. 더불어 “기독교회는 광범위한 반권위주의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한국 진보교회의 정치적 역할이 대폭 축소하게 된다. 임혁백 교수는 민주화 이후 민주화를 주도했던 교회들의 급격한 위축을 가져온 원인을 1)“정치의 중심의 축이 운동에서 제도로 이전하는 전반적인 경향에 한국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민주주의 공고화 이론, 2)시민사회운동 내부에서 교회의 헤게모니 상실, 3) 젊은 세대가 이끄는 신유목적인 정치참여의 활성화, 4) 민주화 이후 교인들의 이동과 종교시장의 변화 등을 꼽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민주화 과정에서 아시아에선 유일하게 지도적 역할을 수행한 한국의 교회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공고화와 심화과정에서 지도자의 자리를 다른 시민운동 단체와 정당, 정치인에게 넘겨주고 교회로 돌아가고, 뉴라이트라는 우익보수 교회 집단이 등장하게 됐다는 것이 임 교수의 설명이다.
임 교수는 한국 교회의 바람직한 정치참여 방향과 관련, 보수 우익 교회가 지지하는 뉴라이트의 길로 가선 안된다며 “모름지기 한국 교회는 성경에 담긴 하나님이 좋아하는 길, 예수님이 걸어갔단 길로 가야 한다”고 했다.
한국 교회의 바람직한 정치참여는 청지기 정신에서 비롯돼야 한다는 임 교수는 “성경의 청지기 정신은 돈을 벌 때에도 정당하고 깨끗하게 벌어야 할 뿐 아니라 그렇게 번 돈을 남과 나누어 갖는 데에도 힘써야 하며 죽은 뒤에는 화원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성경은 이미 자본주의에 대한 교정책으로 복지민주주의의 이념을 이야기 하고 있다”고 했다.
임혁백 교수의 발제가 끝나자 박종화 목사(경동교회)가 논찬자로 나섰으며 이어 유종일 교수(KDI 국제정책대학원), 김용일 교수(해양대), 김호기 교수(연세대) 등의 주제별 발제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