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본지 회장). ⓒ베리타스 DB |
예수님의 이 포도원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한 것인데, 우리는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한 모형인 교회의 기본적인 특성 세 가지를 가르쳐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1.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는 곳이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불러오기 위하여 아침 일찍부터 시작하여 오전 9시, 12시 그리고 또 오후 3시와 5시에도 거리에 나간 것은 자기 포도원에 일꾼이 모자라서가 아니고 일을 얻지 못하고 있는 단 한사람이라도 더 불러와서 일을 시켜서 그를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세상에서 허무와 멸망의 비참으로부터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찾아 불러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랑을 가지고 계시며 교회는 그의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포도원이다. 이 포도원 비유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하여 나서는 목자의 사랑의 비유와 그 뜻이 같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는 것이고 우리의 믿음은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준비 곧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모든 일꾼에 대하여 동일한 사랑을 가지고 계신다. 일꾼들이 일하기 시작한 때가 달라도 다 같은 기준으로 품삯을 동일하게 지불하셨다. 우리가 교인이 된 때가 다 다르다. 모태신앙인도 있고 10~20세 때, 30~40세 때, 그리고 50~60대 연령에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다 동일시 하시고 동등하게 사용하시고 구원하신다.
그 포도원 주인이 일꾼의 노동시간의 양의 차이를 계산하여 임금의 차를 만들지 않은 것은 노동한 시간보다 일꾼들의 생명이 더 중요하고 귀하기 때문이었다. 늦게 와 단 한 두 시간을 일한 사람이라도 같은 삯을 받아 살아가야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은 시간의 길이로 그 가치를 측정하거나 계사할 수 없는 까닭은 노동에 바치는 정성과 열정과 땀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으며, 목숨까지 내어놓고 일하는 노동은 더더구나 그러하다.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명령대로 믿고 살아가는 헌신의 일은 신앙의 햇수로써 타산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조건과 타산을 문제시 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동일한 사랑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 하시기를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보내신 사람들은 한 사람도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그에게 온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포도원의 동일한 영구직 일꾼으로 간주하시고 자기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찍부터 불렸고, 그들은 유대인도 희랍-로마인도 아닌 ‘제 3종족’이라고 자부하였다. 그리고 이 제 3종족은 ‘새 이스라엘’인이라고도 불렀고 그리고 이 새 종족은 국적이나 인종이나 민족의 차이를 극복하고 다 하나님의 포도원의 같은 일꾼으로 생각하고 친교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새 피조물’이라고 자부하였다. ‘한국 그리스도인 교회’(Korean Christian Church)가 아니고 ‘그리스도인 한국교회’(Christian Korean Church)가 되어서 한국인의 모든 좋지 못한 고정관념과 편견과 악습에서 떠난 ‘그리스도인 한국교회’ 라야 할 것이다.
2. 교회에는 감격이 넘쳐야 한다
노동시간의 길이를 고려하지 않고 늦은 시간에 일한 자라도 꼭 같은 하루의 품삯을 받은 일꾼들이 포도원 주인의 큰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고 기뻐 뛰었을 것이다. 아침 일찍 나와서 일한 사람도 그 주인의 자비와 사랑에 함께 감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감격하는 마음은 주인의 사랑을 깨닫고 반응하는 것이 되어 그들은 계속 힘써 일하게 되고 구원도 받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에 감격하지 않는 사람은 오래도록 그 포도원에서 일할 수 없어 낙오자가 될 수 있다. 교회에 일찍부터 온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이나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받는 감격함이 없이는 그 신앙의 삶을 이어갈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예배하는 시간에 우선적으로 온전하게 나타나야 할 것인데 찬송도 감격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반드시 큰 소리나 미성으로 내는 목소리가 아니라도 마음에서 묻어 나오는 감격이 담긴 찬송을 불러야 할 것이다.
6.25때 납북되어 순교한 송창근 목사님을 회상하게 된다. 송창근 목사는 예배 중 찬송을 부를 때 찬송가책을 높이 들고 교인들을 내려다보며 서로 눈을 마주치고 흥겹게 찬송을 불러서 회중들을 감격에 넘치게 하였다. 그는 일제시대 「감격」이라는 글을 쓰고 감격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고 말하면서 교회 신도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들에서 주일예배 시간에 여러 가지 악기가 동원된 악단이 악기소리가 교인들의 감격스러운 찬송소리를 너무 압도해 버리는 경우가 다분히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이 감격은 신앙생활에서, 특히 고난을 당할 때 묻어나올 때가 많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할 때 불평과 원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면 그 고난을 통하여 그 구원의 사랑을 체험하는 때가 있다. 이럴 때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더욱 알게 되는 신앙의 인식이 생긴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이 신앙의 인식을 교회가 가르치는 신조나 교리의 차원을 훨씬 넘어가는 것이고 구원의 확신이 되는 것이다. 구약에 고난받던 욥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자기 영혼의 눈으로 보고 체험했다는 간증을 하였다. 보는 것은 만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포도원의 일꾼들은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씨도 뿌리고, 추수도 해야 하고, 받은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해야 하고, 이웃을 돌아봐야 하며, 갇힌 이를 찾아보고, 나그네를 대접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최대한의 도움으로 상부상조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 모이기를 힘쓰고 헌금에도 힘을 써야 하고…….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에 대한 감격과 반응으로 온전하게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이러한 협동적인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서 확장되고 성장할 수 있고, 이것이 우리 교회도 동시에 성장하고 확장되어 가는 길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지상의 보이는 가시적 교회는 크고 부흥하고 확장되어 갈 수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확장을 이룩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의 비밀을 가르치시기를 밭에 씨를 뿌려놓은 후 그것이 어떻게 언제 싹이 나고 크는지 사람이 알 수 없고 그 씨 자체가 때를 따라 자라나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우리 지상의 가시적 교회는 우리들의 일하는 노력에 따라 성장하지만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영적인 나라가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아시고 성장시키신다는 말이다. 바울은 씨를 뿌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은 교회 건물의 크기나 교인 수의 다소나 교회 재정의 힘에 달린 것이 아니고 신도들의 영적 성장, 곧 신도들의 신앙체험의 심도와 도덕적 인격의 위상과, 이웃과 사회에 대한 섬김과, 구원의 진리에 대한 확신과, 그 진리 전파에 대한 선교의 열의와 함께 성장한다.
3. 하나님은 일꾼들의 업적이나 공로의 차이를 계산하지 않았다
이 포도원의 주인은 일꾼들의 노동 시간의 길이나 업적이나 공로를 따지지 않고 다 같은 품삯을 지불해 주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서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등의 직종이나 그들의 업적에 따라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영적 성장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에 달려있다. 교회가 영적 성장이 없으면 교회의 평안과 신도들의 사랑의 친교가 유지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은 다 같이 하나님의 포도원의 동등한 일꾼임을 자각하고, 자신들의 직위나 직분은 어떤 공적이나 업적으로 내세우며 자랑하거나 그 어떤 직분을 탐내서는 아니될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는 교회 안에서 논공행상을 일삼는 일이 많다. 단순히 목사, 장로, 권사면 되는 것을 ‘공로’니 ‘명예’니 하는 관사를 붙여 높여주며 공적을 논하는 일을 하는데 외국의 교회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일이다. 교단 안에서 교권과 이권노름과 다툼은 자기들이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공로나 업적을 내세워 길이 자기 것으로 차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노자도 말하였다. ‘사람이 자기 공적을 사용하면 그 공적은 없어지지만 그것을 써먹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는다’고.
예수님은 소금인 신도들이 그 맛을 잃으면 땅에 버려져 사람들 발아래 밟힌다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무도 해낼 수 없는 인간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자처하시고 희생하신 공이 인류 만대에 영원히 찬양받고 감사함을 돌리게끔 남아있다. 예수님은 뭇 사람들에게서 높임과 숭배를 받으며, 이 땅에서 수많은 무리들의 추종을 받으며 영화를 누릴 수 있었으나 하나님이 보내신 바 그 뜻에 순종하여 목숨을 버리셨다.
예수님을 따른 신실한 종 바울은 자신이 한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게 하여 한 일이고 자신이 한 말이나 표징과 이적도 다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어 진 것이라고 로마서 15장에서 고백하고 있다. 바울처럼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그 어떤 인간적인 가시적 공과 업적이 있다 해도 그것은 진토가 되어 발아래 밟히고 말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가 쓴 서신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우리 신도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받은 어떤 직분이든지 서로가 존중하며 참된 사랑의 마음으로 합심하여 교회를 바로 섬길 것을 권하고 있다.
맺는 말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하나되고 연합되는 힘이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곧 그의 사랑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인식력과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면 모든 갈등과 불화와 미움과 분열이 사랑으로 치유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의 아버지께로부터 떨어져 이 세상에 살면서 온갖 고초와 박해와 조롱과 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자기도 아버지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이 성부와 성자는 하나가 되었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고난을 이겨내며 ‘다 이루었다’라고 승리의 감격을 절규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면서 자기의 죽음의 존엄한 가치와 그 결과에 대하여 개념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자기 영혼을 위탁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바로 지적하였듯이 하나님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죽음에서 살려 일으켜서 그의 공로를 높이고 밝혀 주신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는 모든 일의 공적인 업적을 사후에 하나님께서 알아서 논공행상 하여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