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서 55:6-11
너희는,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너희는, 가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불러라. 악한 자는 그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주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주님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땅을 적셔서 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하고,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고 나서야,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아멘.
히브리서 3;12-13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믿지 않는 악한 막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여러분은 조심하십시오.‘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디지 않도록 하십시오. 아멘.
누가복음서 8:4-8
무리가 많이 모여들고, 각 고을에서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오니,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부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쪼아먹기도 하였다. 또 더러는 돌짝밭에 떨어지니, 싹이 돋아났다가 물기가 없어서 말라 버렸다. 또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았다. 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자라나,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하고 외치셨다. 아멘.
설교문
저는 설교단에 설 때 마다 성가대 칭찬을 합니다. 이 칭찬하는 말은 제가 감동받았다는 뜻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면 저희들이 주일날 다 모여서 예배드립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읽고, 듣고, 선포 합니다. 저는 이렇게 예배에 참여하면서 어떠한 마음가짐이 서느냐 하면 “오늘이 성탄절이구나!”하는 것이 첫 번째 생각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예배 순서 순서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기도의 옷을 입고, 찬양의 옷을 입고, 말씀의 옷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구나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크리스마스!", 바로 그렇죠. 그런데 그런 줄만 알았더니 또 있읍니다. 우리한테 오신 예수님이 찬양, 기도, 말씀의 옷을 입고 오셔서 우리한테 감동을 주시고, 사람의 마음을 그리고 생각을 변화시킵니다. 그 때마다 “아하~오늘이 부활절이구나!”, 그리 생각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한테 오셨습니다. 오셔서 새역사를 이루고, 새로운 삶을 주셨습니다. 찬송 가사와 곡속에, 기도의 음성과 내용 속에 그리고 모든 말씀 속에 성탄과 부활이 항상 곁들어 있다고 생각하시고, 찬송 들어 보시죠! 그렇게 생각하시고, 찬송 불러 보시죠! 말씀도 읽고, 들어보시죠. 그러면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구나하고 생각하십시오. 앞으로 여러분 그런 심정으로 찬송 많이 부르시고, 성가대도 성가 잘 불러 주시고, 우리 모두 하나님께 찬양하며 사십시다. 이것이 우리가 예배드리는 목적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느 모임에 갔다가 불교 조계종의 사회문제연구소의 연구원 한 분이 발제를 한 걸 듣고 마음에 많은 깨달음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한 10년쯤 지나면 불교는 쇠퇴해서 명맥유지하기가 어려울 것 아닌가(?) 하는 자가비판의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이유 중에 하나는 요즘에 스님 되려고 출가하시는 분들이 급격히 줄고있다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출가를 해야 하는데, 출가자가 없어서 나중에 사찰을 맡길 사람이 없데요, 그래서 걱정이랍니다. 그리고 불교신자들의 열성이 너무 없어서 걱정이라고 그럽디다. 그에 비하면 개신교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안수받은 목사 수는 엄청나게 많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사회적 비난을 받아서 개신교는 줄다줄다 못해서 쪼그라들것 같답니다. 그러면 남는 건 무엇이냐? 한국에 남는 것은 천주교 하나 남아서 다수의 국민종교 비슷하게 융성할 것 같답니다. 제 말이 아니고, 불교 스님이 하는 이야기 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아 그럴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혹시 여러분 얼마 전에 신문에 실린 사진 하나 보신적 있으십니까? 동대문 근처의 어느 상가에 있는 교회 사진이었습니다. 상가 위에 있는 교회에 종탑이 높이 서있는 사진인데, 종탑 위에 십자가가 달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십자가 옆에 달린 꼬부라진 십자가 있지요? 그 십자가를 뭐라고 하냐면 갈고리 십자가가 입니다. 그 옛날에 히틀러가 쓰던 하켄크로이츠(갈고리십자가) 비슷한 모양입니다. 그 종탑위의 십자가 글자획에 선 하나씩 올리면 이상한 십자가가 되지요. 이게 무언가 하고 보았더니 교회 개척 후 목회를 하다가 교인들이 없어 교회를 판 모양입니다. 그래서 팔았는데 절에서 샀습니다. 절은 사가지고 십자가를 안고치고, 갈고리 하나씩만 돗붙여 불교표시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갑자기 교회가 사찰로 바뀌었습니다. 제가 사진을 보면서 서구라파 교회를 생각했습니다. 요즘 우리 비판 중에 하나가 교회에 사람이 오지 않아 유지할 수가 없어 독일 그리고 영국의 일부 교회건물들이 팔려나갑니다. 팔면 그 교회는 맥주홀로 바뀝니다. 엊그제까지 찬양을 하던 곳을 맥주를 마시는 홀로, 댄스홀로로 바꿉니다. 가게로 바꿉니다. 그리고 체육관으로 바꾸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 말이 “아이고 서구라파 교회는 죽었구나, 교회를 팔아서 술집을 만들다니...", 그렇게 말하죠. 그런데 실제로 좋은 그리고 명품의 교회건물은 안 팔리고요, 건축물로서는 별로 가치가 없는 교회만 팔립니다. 서구교회들 자주 이야기 하면서 한국 교회는 참 좋다고 했었는데, 이제는 정말로 할말을 잃었네요. 우리 교회는 팔려서 술집 되는 게 아니라, 교회에서 절로 되어버렸읍니다. 저는 이것을 지켜보면서 정말로 심각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곳곳에 교회가 있다가 많이 없어집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가 세상으로 부터 너무나 많은 욕을 듣다 보니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국교회가 살려면 일단 종탑에 위에 있는 모든 십자가를 다 내리자. 다 내려놓고 그 지역의 주민들한테 주민투표를 붙이자. 동네에 있는 교회가 이 동네에서 소금과 빛을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 투표 결과가 좋아 당선이 되면 십자가 다시 달고, 투표해서 점수를 못 얻으면 얻을 때까지 십자가 달지 말자"고. 괜찮습니까? 혹시, 너무 성적이 좋아서 “이 교회는 어두운 밤에도 등불처럼 환히 빛나는 교회입니다.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의 밝음입니다” 하고 투표가 많이 나오면 밤에 네온사인처럼 십자가를 밝게 비추자. 그 전까지는 다 내리자. 그런 생각인데, 너무 과격한가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이럴 것 같은데요, “내가 이 세상을 위해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위해서 죽은 희생의 십자가, 그 십자가 둘레를 덮고 있는 부활의 영광, 그 십자가를 함부로 달지 말라. 나 괴롭다. 나 아프다. 내려 놓으라. 이러지 않겠습니까?”
자랑해서는 안 되지만 저희 경동교회는 종탑위에 십자가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손"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는 손이 되자고 여러분이 디자인했고, 그렇게 십자가 대신 올려놓았읍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경동교회는 십자가가 없냐고 묻습니다. 요즘 생각하면 하도 욕먹으니까 “세상 보기 미안해서 없습니다”하고 답변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 대신에 교회에 나오면 제단에는 주님의 십자가를 밝힙니다. 우리가 노래하는 찬송과 드리는 기도와 선포하는 말씀이 진심이면, 소금되고 싶으면, 교회 제단의 십자가는 밝힙시다.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지탄 받을 일인건 압니다. 실은 너무 답답해서 그러니까요. 자기 비판적인 입장에서 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오늘 예수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우리한테 몸을 입고 오셨는데, 그리고 몸 된 교회로 오셨는데 막상 교회에 예수는 없고, 그 분의 십자가는 외형(crucifix) 만 있고, 그 분의 복음을 담은 부활생명의 십자가(cross)는 사라진지 오래고. 그냥 빈 껍질만 남았다고 합시다. 거기서 찬양하며 살까요. 거기서 은혜가 있다고 난리치고 살면 됩니까?
교회가 단순히 건물 만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인격이, 인간의 삶이 또한 교회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오늘 예수의 이름으로 옷을 입습니다. 그런데 옷을 입으려고 봤더니, 그 교회에 갔더니, 씨앗인 하나님 나라 복음을 뿌리려고 토양을 찾아 갔더니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교회가, 우리 사회가, 이 세상이 너무 단단한 아스팔트길이어서 뿌리가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 씨앗이 뿌려 졌는데 딱딱한 땅에 뿌려지면 새들이 와서 쪼아 먹거나, 사람들이 밟아서 버리거나 한답니다. 하늘나라가, 하나님이, 그 분의 아들 예수께서 씨앗으로 오셨지만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서서, 새가 쪼아 먹어서, 마귀가 와서 잡아먹어서,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길가 밭도 하나의 문화현상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어떤 문화냐 하면 딱딱한 길 같은 문화요, 심리현상 입니다. 예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비유내용 마다 각기 답을 하나씩 주셨습니다. 그렇게 답을 주신건 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유일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씨앗처럼 뿌려 졌는데 돌짝밭과 같은 문화에 뿌려지면 흙이 조금 있고, 돌이 많아서 영양분 섭취를 못하고, 뿌리가 내리지만 조금 밖에 못해서 태양이 작렬하면 말라 비틀어 집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믿다가, 예수를 믿다가 유혹이 오면 그리고 환란이나 박해가 오면, 못 견디고 실족하는 경우의 사태를 의미한다고 하십니다. 이런 문화, 이런 인간 보셨습니까? 세 번째로 하나님의 씨앗인 말씀은 가시덤불 밑 토양에 뿌려 졌는데 씨를 뿌려서 뿌리가 나고 줄기가 잘랐지만 위에 덮여진 가시덤불 때문에 자라지 못해서 결국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향락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자양분으로 못 받으면 뿌려져도 나무로 자라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교권주의, 물질숭배, 권력숭배가 지배하는 곳, 글쎄 뭐든지 인간의 욕심이 지배하면, 하늘씨앗은 자라지만 이것들이 엉겅퀴처럼 막기 때문에 열매 맺지 못합니다. 마지막에는 하나의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이런 방해요소들 없이 씨앗이 옥토에 뿌려지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성탄의 토양, 부활의 토양입니다.
경동교회는 진정으로 옥토이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다 옥토이고 싶으시죠. 그러니까 찬송할 수 있지요, 감사할 수 있지요, 진실로 사랑할 수 있지요. 그래야 된다고 봅니다. 세상에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씨앗이라고, 밭을 문화라고 하면서 복음과 문화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이중에서 제일 권위 있는 학자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 강원용 목사님 스승이었던 라인홀드 니이버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 분의 동생인 니이버도 있었습니다. 리차드 니이버(Richard Niebuhr)라는 사람이 있었읍니다. 우선 복음이 떨어지 땅을 문화라고 합시다. 언어, 습관, 예술, 음악, 미술, 등등의 이 모든 것을 일단 문화라고 합시다. 그러면 복음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돌짝밭, 길가 같은 땅, 가시덤불로 덮힌 땅을 다 옥토로 바꿔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이분의 지론이 있읍니다. 복음과 문화의 관계가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가장 바람직한 관계는 “복음이 땅에 떨어지면 그 땅을 옥토로 바꾸는 역할을 하는 것이 복음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화를 변화시키는 복음" (Gospel as transformer of culture), 이렇게 주장을 합니다.
제가 보기에 거기까지는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같은 이야기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이 있읍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불평, 불만 없이 공평하고 공정하게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돌짝밭에 떨어질 줄 알면서 하나님의 씨앗은 뿌려집니다. 하나님이 태양을 주시되 나쁜 사람에게는 태양 빛 안 비춥니까. 비가 오는데 좋은 사람한테만 비 옵니까.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자기의 말씀이, 자기 몸이, 새한테 주어먹히고, 발에 밟힐 줄 알면서도 하나님은 우리한테 씨앗으로 오십니다. 저는 그래서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모든 인간에게 믿든/안 믿는 그리고 선하든/악하든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저는 고맙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단, 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 은혜가, 진실로 하나님의 축복을 담을 수 있으려면, 은혜를 받아 드리는 우리 사람이, 우리의 삶이, 우리의 문화가 옥토가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옥토인 조건하에서만 하나님의 은혜가 뿌리를 내립니다. 옥토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면 오늘 말씀에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 속에 주님의 은총이 임하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습니다. 여기까지는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 여러분 그것들이 무언지 다 압니다. 거기에 씨앗이 어떻게 뿌려져도 좋은 역사는 못 만들지요. 회개해야죠? 중요한 것은 똑같이 땅에 뿌려 지는데,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도 땅의 주변여건에 문제가 있으면 않됩니다. 씨앗이 좋은 땅에 뿌려서 열매 맺는다고 해도 문제가 있읍니다. 무슨 열매입니까? 저는 예수님이 오늘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고 오늘 구약성경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다시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 만나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그 때 하나님을 만나라". 그런데 중요한 것은 "너희들 생각과 내 생각은 다르다. 너희 아는 것과 내가 아는 것은 다르다. 너희가 가는 길과 내가 가는 길이 다르다"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말씀과 구약의 말씀을 비교 한번 해보시죠. 무엇이 다릅니까? 양쪽에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씨앗은 분명히 옥토에 뿌려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옥토에 뿌려져야 합니다. 마음이 옥토여야 하지요, 그 이외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옥토에 뿌려지는데, 그 곳에 뿌려지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이고, 하나님 자신이 씨앗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의 역사 속에 뿌려집니다. 어떻게 뿌려지는지 아십니까? 씨앗 뿌려서 곧바로 열매 맺는 게 아니고요, 씨앗은 뿌려져서 썩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썩겠답니다. 예수가 썩겠답니다. 씨앗이 땅에 뿌려져서 썩어야 열매 맺지, 그대로 있으면 열매 못 맺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썩는 것을 원하십니다. 자기가 썩을 곳, 핍박당할 곳, 매 맞을 곳,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 곳, 이곳을 찾습니다. 가시덤불은 죽어봤자 열매맺지 못하니 소용없읍니다. 땅에 떨어져서 죽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오늘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저 제단위의 십자가 말입니다. 왜 여러분은 십자가가 고맙습니까. 저에게는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죽을 죽음을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당할 화를 대신 짊어 지셨습니다. 죄값을 그 분이 스스로 갚으시고, 제 죽을 대신 죽어 주신 분, 제 대신 고난당하신 분...감사해서 제가 찬양을 드립니다. 저는 그래서 예수 믿습니다. 성탄에 오신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 몸을 입고 오셔서 죽겠답니다. 예수께서 죽으셨죠. 그게 십자가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희도 죽어라. 죽어야 산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여기서 다름이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죽으실 때, 예수님 당시 전 세계는 두 개의 큰 문화권이 있었습니다. 첫째 문화권은 소위 말하는 예수를 중심으로 한 팔레스틴에 있었던 히브리 문화권이고, 또 하나의 문화권이 있었읍니다. 히브리 문화권을 감싸고 있던 로마와 희랍문화, 즉 그레코-로만 문화, 또는 헬라문화 입니다. 두 문화권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문화가 십자가를 두고 각기 답을 합니다. 히브리문화에 속하는 유대교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 옥토에 씨앗처럼 뿌려져 죽는구나. 무능한 사람, 왜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죽어야해. 왜 옥토에 뿌려서 반드시 썩어야 하느냐. 썩지 않고 열매 맺을 수 없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썩지 않고, 죽지 않고 부활의 생명을 주어야 하는데, 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소위 이스라엘의 히브리 문화와 문명이 생각하는 해답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보시죠:" 너희들 생각과 내 생각은 달라. 너희는 썩지 않고, 죽지 않고 살기를 원하지만, 나는 썩어서 죽어야해. 그래서 사람들이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은 무능하다"고 말하지. 하나님 말씀이 인간적으로 무능하지만, "나는 인간의 무능을 뛰어넘는 나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마".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면서 "인간의 무능력 속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아라. 이것이 신앙이니라". 이렇게 말이죠. 썩지 않는 씨앗은 열매를 못 맺습니다. 썩는 씨앗만 열매를 맺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씨앗에는 생명력이 있어서 설령 썩어도 새로운 생명을 창출합니다. 이 사실을 인간의 능력으로는 파악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무능 속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헬라 문화권으로 가보겠습니다. 그레코-로만 문명, 헬라문명 또는 로마문명으로 불립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동시에 최고에 지혜로운 하나님이어야 하는데. 도대체가 십자가에 죽어가는 바보가 어디 있냐. 그런 신은 우리한테 없다.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위대한 신의 지혜는 죽지 않고 사는 거다. 이런 사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보고 유대사람들은 무능하다고 했고, 그레코-로만문명에서는 예수는 바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온 하나님은 바보다, 지혜롭지 못하다 그랬습니다. 부활하신 다음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무지무능하고, 바보 같은 속에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를 썩음을 통해서 부활 하셔서 입증하셨노라고. 우리 신앙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의 무능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 인간의 바보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지혜. 이것을 신앙이라 이름 합니다. 구약이 말씀하는 해명을 들어보시죠. 이사야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비와 눈을 하늘에서 내리시는데, 항상 싹이 뜨게 하시고, 싹이 튼 씨앗을 주시고, 씨앗이 나중에 썩고 문들어 지고 열매를 맺으면 모든 인간에게 먹거리 주시고, 그리고 씨앗의 세계로 돌아오느니라.” 옛날 옛적 이사야를 통해서 구약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의 비유를 알게하는 해석의 단초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습니다. 썩으셨으니까요? 썩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냥 "옥토"가 아닙니다. 내가 그대들 대신 썩을 곳 마련했고. 그대들 대신해서 매 맞을 곳 마련했고, 내가 그대들 대신해서 눈물 흘릴 곳 마련했고, 그곳에 내가 성탄의 옷을 입고 와서 십자가의 죽음을 죽고, 부활하여 새 생명을 주마고.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들이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 있느냐. 그러면 내가 그 옥토속에 “성탄”하마. 죽고 “부활”하마.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 모시고 싶습니까. 그 분이 씨앗되어 썩을 장소 제공하시겠습니까? 그 분이 썩고,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 되어서 우리한테 일용할 양식이 된다고 확실히 믿으시면 찬양하시죠. 감사하시죠. 오늘 히브리서 말씀에 감사와 찬양은 어제 했다는 것으로는 안됩니다. 내일 하겠다는 것으로도 안됩니다. 모든 시간의 순간순간마다 "오늘"이라 믿고 "오늘" 찬양하고, "오늘" 감사하십시오. 이 분을 생명의 주로 지금 믿으십시오. 그 믿음이 이 옥토 중의 옥토입니다. 씨앗은 지금도 뿌려 집니다. 하나님께 영광,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기뻐서 하나님도 웃으시고, 우리도 웃습니다. 이 사실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모셔드리세요. 성탄 하시게 하세요. 부활 하시게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