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이곤 칼럼] ‘신의 약속’은 ‘기다려야 한다.’

-창 15:7-21, 17:1-14-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계약체결’에 관한 기록은 창세기 안에 두 번, 즉 창 15장과 창 17장에 중복 기록되었는데, 그 체결형식은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흔히는, 첫째 기사(창 15)가 둘째 기사(창 17)보다는 최소한 200여년은 앞 선 기록이라고들 말합니다만, 이러한 중복 기사들을 가리켜서 흔히들 성서주석 학에서는 ‘이중기사’(doublets)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이중기사’가 창세기에 자주 나타나는 것은(cf.두 개의 창조기사, 두 개의 노아 홍수기사, ‘야곱’의 ‘이스라엘’ 改名기사 둘, 등등으로 나타나는 것은) 각자가 가진 그 전승역사의 기원(起源)과 그 전래(傳來)의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 문학 현상이므로 이러한 현상이 성서의 권위를 손상시킨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는 그와는 반대됩니다.

우리의 첫째 본문(창 15:7-21)에 나타난 ‘계약기사’에 의하면, 그 계약방식은, 분명, 매우 고대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그 형식은 둘로 쪼갠 동물들의 주검들을 서로 마주 대하도록 진열해놓은 후, 그 주검들 <사이, between>로 두 계약 체결 자들이 [계약위반 시(時)에 받을] ‘저주 문’을 함께 되뇌며 지나가는 의식(儀式)의 형식을 취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계약체결 형식에서는 이러한 고대의 일반적 형식과는 구별되게, 아브라함은 단지 어둠과 두려움 속에서 ‘깊은 잠’(‘타르데마,’ 일종의 ‘엑스타시’)에 빠져있고 그 계약의 주체이신 야훼 하나님이 ‘홀로’ ‘화로와 횃불’ 모양으로 현현(顯現)하시어 그 주검들 사이로 지나가시면서, ‘저주 문’이 아닌  ‘구원약속의 말씀[言約]’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시면서 지나가시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야훼 하나님의 구원약속의 그 말씀’은 여기서는 ’출애굽‘의 전(全) 구원역사를 신학적으로 반성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습니다.(※일종 post eventum의 형태로 된 후대의 역사해석을 신의 예고 형식으로 소급[遡及] 채용한 모양새 또는 vaticinium ex eventu 형태로 된 후대의 역사해석을 예언형식으로 [신의 약속 형식으로] 소급 채용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아브라함 계약이 그 고대 중동의 통속 계약의식과는 다음 몇 가지 점에서 뚜렷하게 구별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1)두 계약 당사자들(하나님과 인간)이 동등한 위치에서(횡적관계에서) 계약을 맺지 않고 단지 계약 주체이신 야훼 하나님이 홀로 그 계약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cf.힛타이트 계약),
(2)계약체결의 중심요소는 ‘하나님의 약속으로써 전적으로 구원사의 진술로 구성된다는 점.
(3)신(神)의 약속의 성격은 비록 일방[片務]적이지만, 그 구원약속의 성취는 언제나 고통의 중간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점.
등등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점은 그 계약이 계약 당사자 쌍방의 협의로 이루어지지 않고 계약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끌고 가신다는 점과 그리고 그 계약 주체이신 야훼 하나님의 그 [구원]약속은 매우 오랜 시간의 지체(遲滯)를 거쳐서야만 성취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한다는(계약 맺는 자의 ‘忍苦의 믿음’을 前提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창 15:13의 “사백년 동안”이라는 표현과 창 15:16의 “사대[四代] 만에”라는 표현 참조[cf. vaticinium ex eventu]). 즉 ‘신의 약속’은, 본질상, 결코 파기되지 않고 끝내는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오랜, ‘고뇌(苦惱) 담긴 기다림’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는 특성을 갖는다는 점입니다. 즉 진정한 ‘믿음’은 신이 약속한 그 ‘불확정적 미래’를 끝까지 고뇌하며 기다려야만 하는 것(합 2:3)이라는 것을 우리 본문은 말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따라서 창 15장의 계약기사가 갖고 있는 메시지는 <신의 약속은, 비록 전능자의 약속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神이시므로? 출 34:6] 그 성취는 오래 지체된다는 것을 강조한다는데 그 중요 강조점이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계약은 비록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도하시는 ‘계약’이라고는 하더라도 그것을 가리켜서 곧장 ‘편무적’(片務的) 그리고 ‘무조건적’(無條件的) 성격의 계약이라고 범주화하기는 ‘아직은’ 이르다고 말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계약의 성취는 ‘오랜 지체(遲滯)’에 대한 고뇌(苦惱) 담긴 ‘기다림의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론은 또 다른 ‘계약기사’인 창 17장의 계약기사를 통해서도 얻게 됩니다. 즉 창 17장의 계약기사도 또한 역시 고대의 또 다른 계약체결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계약기사 메시지를 전하고는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 기본 가르침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창 17장에 의하면, 고대의 중동세계(이집트, 유다, 에돔, 암몬, 아랍 등지)에서는 결혼 적령기(13세?, 창 17:25)의 사춘기 남자 성기(性器)의 포피[砲徑]를 자르는, 일종의 ‘성인의식’(成人儀式)으로서 지켜왔던 관습이 이스라엘에 와서는 유아(幼兒, 난지 8일된 유아, 창 17:12; 레 12:3; P; 바빌론 포로기 이후)에게! 매우 앞당겨! 적용하면서 특별한 종교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던 것, 이른바, ‘할례’(割禮)라는 종교의식으로 재(再) 해석되어 하나님과의 계약체결 의식을 설명하는데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 번째(창 17장)의 경우에서도, 비록 그 체결형식에 있어서는 첫 번째의 경우(창 15장)와 매우 다르게 나타나지만, 그러나 그 전하려는 메시지에 있어서는 첫 번째(창 15장)의 경우와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계약을 체결하시면서, 일방적으로, 그리고 태어 난지 팔일 되는 유아(幼兒)에게 ‘할례’를 시행하도록 명하시면서, 이 ‘할례’행위가 계약의 ‘표징’(’oth)이 되고 이 계약이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후손들 사이에 맺은 ‘영원한 계약’(berîth ‘ôlām)이 되며 그러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는 계약 배반자이므로 ‘하나님의 백성’(cf. 나의 백성; 호 1:9←호2:1)이라는 은총의 세계에서는 끊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경고하셨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서 아브라함이 즉각 시행한 때 할례를 받은 자들의 나이는 아브라함이 무려 99세(창 17:24)이고 그의 서자(庶子, 하갈의 소생)인 이스마엘은 13세(창 17:25)였으며 아주 나중에 적자(嫡子)인 이삭만이 비로소 출생 후 8일(창 21:4)이 되었을 때 할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아브라함 시대보다 아득한 후대를 배경으로 한 모세와 여호수아 이후의 역사기록을 보면(출 4:24-26; 수 5:2-7), 할례계약 전통의 본격적 시작이 아직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그 ‘할례’ 전통에 본격적인 종교적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은 아브라함 시대부터 라기 보다는 바벨론 포로기를 거친 후부터(P 시대부터)라고 짐작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창 17장의 기록은, 비록 고대의 아브라함 시대를 그 역사적 배경으로 설정하기는 하였으나 실상 그 문서 자체(창 17장=P)는 바벨론포로기 이후(약 기원 전 500년 전후)의 기록이고 뿐만 아니라 모세와 광야 시대 그리고 여호수아 시대를 비롯하여 심지어는 왕조 시대를 그 역사적 배경으로 한 사료(史料, 주로 dtr의 史料)들의 그 어디에서도 할례계약의 ‘본격적인 정례화(定例化)’에 대한 분명한 시사(示唆)를 찾기란 어렵기 때문입니다. 특히 출 12:43-51에 나타난 ‘유월절 규례’와 결부된 ‘할례’에 관한 강조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자료(P)에 나타난 것이므로, ‘할례계약’의 시행에 관한 이스라엘의 전통은 ‘오랜 시련의 역사를 거친 이후에’야!  형성된 긴(!) 고난역사(苦難歷史)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 17장(P)의 기사에서도, 비록 이 계약이 ‘영원한 계약’이라고 정의(定義)되고 또 강조되고는 있지만, 포로기를 통해 정련(精鍊)된 사제 신학적(司祭 神學的)인 역사신학의 성격으로 보아, ‘신의 약속’이라는 것은 오랜 시련의 과정을 통한 ‘기다림의 믿음’을 거쳐야만 그 성취가 가능한 성격의 것이라는 것을 여전히 확고하게 증언한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창 15장(고대 자료)과 창 17장(후대 자료)이 공(共)히 말해주는 바에 의하면, 신의 구원약속은, 하박국 2:1-3이 열렬히 웅변하고 있듯이, 결코 ‘공연한 말’(현혹시키는 거짓말, kzv, 합 2:3)이 아니라, ‘더딜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기다려야만 하는 것’(합 2:3b- 4)임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 매우 분명합니다. 즉 ‘믿음’은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먹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아브라함의 믿음의 경우, 그 믿음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창 15:6 cf. 창 22장). 소위, 사도 바울의 ‘믿음으로만’(sola fide)과 ‘은총으로만’ 등의 교조 풍(敎條 風)의 ‘믿음’이라는 것도 또한 역시 믿음을 감히 ‘행함이 따르지 않는 헛된 믿음’(약 2:17,20)으로 무용화(無用化)시키려는 모든 가르침들은 모두 거짓 가르침(!)이라고 증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아브라함의 후손)이 가나안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은 괴롭고 힘든, 이른 바, 400년(? 1세기?)에 걸친 이집트 노예의 삶과 4 대(四 代)에 이르는 길고 지겨운 광야유랑의 삶(창 15:14,16)을 거쳐야만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성취된다는] 증언과 서로 잘 상응(相應)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예언자 호세아가 더욱 강력한 수사법을 사용하여 증언하고 있음을 봅니다. 즉 야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는 그 길(救援史의 路程에)에 어깃장으로! “가시를 놓아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호 2:6[8]) 연단(鍊鍛)시키시다가, 마침내는,! 아골 골짜기 같은 고난의 광야(수 7:26)로 ‘사랑하는 아내’(이 metaphor는 호 11장에서는 ‘아내’ 대신 ‘아들’이라는 metaphor로 바뀝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꾀어내시기까지’ 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라고 감히 표현하였던 것입니다(호 2:14[16]).

야훼 하나님의 ‘계약행위’는 이와 같이 저토록 ‘역마살’(役馬煞)이 끼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그] 때까지 [끝까지] 참고 견디십시오.”(약 5:7)라고 권면하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신의 구원약속’에 대한 ‘믿음’은 이렇듯 ‘참고 견디며 기다리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성서는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구원은총은 십자가 고난의 죽음(자기부정의 고뇌에 찬 참회의 아픔)을 통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계약’을, 흔히들 쉽게 생각하듯, ‘시내[산] 계약’과는 엄격히 반립(反立)되는 ‘무조건적 은총계약’이라고 대립시켜 놓고, 이른 바, ‘참고 기다려야하는 고뇌의 인고(忍苦)’를 통하여 가는 ‘믿음’의 진정한 본질을 생략해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sola gratia)을 그리고 그리스도의 그 구원 은총에 대한 믿음(sola fide)을 ‘값싼 믿음’과 ‘값싼 은총’으로 비하(卑下)시키는 것과 동일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약속[神言]에 대한 믿음은 참고 견디는 인고(忍苦)의 기다림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이 ‘바벨론 포로기’를 경험한 한 시인에 의하여 아름다운 송영(誦詠) 시(詩)로서 다음과 같이 잘 정리된 ‘신학’을 생산해낸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송영[誦詠]은 신학이다!).

아, 야훼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가득하였도다.
그 때에, 뭇 나라들은 “야훼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하였으니
야훼께서 이렇듯 큰일을 우리 위해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고도 기쁘도다.(시 126:1-3)

야훼여, 남방의 마른 시내에 물 다시 돌이키듯 우리 포로들도 돌려보내소서.(시 126:4)

아하,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려 나간 자는 정녕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울며 씨 부리러 나가는 자는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그렇습니다. 과거에 보여주신 바, 야훼의 그 구원개입 역사에 대한 회고(시 126:1-3)를 근거로 하여 현재의 운명전환을 호소하고 있는(시 126:4-6) 이런 유형의 ‘공동체의 기도 시’(community prayer)는 공동체에 대한 ‘위로의 정신’을 담고 있어서 곧장 마태 5:4-5를 연상하게 만듭니다.

애통해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 저들은 [중보자의] 위로를 받을 것이기에!
인고[忍苦]하는 자는=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저들은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기에!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이 둘째와 셋째 축복 사(祝福 辭)는 고뇌(苦惱)하며 신의 약속성취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인고(忍苦)의 신앙이 마침내는 거두어들일 최후승리를 찬양하는 일종의 확신의 선포라고도 하겠습니다.

계약(=신의 약속)에 대한 진정한 신앙은, 그러므로, 인고(忍苦)의 기다림을 전제(前提)할 뿐만 아니라 요구하기도 또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값싼 믿음과 값싼 은총’을 전제하지는 않습니다. ‘믿음으로만’(sola fide)이라는 종교개혁적인 구호도 또한 결코 믿음과 은총을 ‘값싼 믿음’과 ‘값싼 은총’으로 면죄부 팔 듯 팔 수 있는 것으로는 인식하지 않습니다. 신의 약속은, 그러므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고(忍苦)하며 기다리는 자만이 그 성취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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