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역시 장소가 중요하다. 목회자나 그밖에 사회적 공인의 신앙적 감수성은 그 자신이 몸담고 거동하는 그 자리, 그 장소가 특징짓는 것이다. 시간이라는 추상적 세계와 달리 우리 삶이 공간과 만나 만들어가는 장소는 인간이 두 발을 땅에 디디며 살아가는 필연적 여건에 비추어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물론 모든 공간이 장소가 되지는 않는다. 공간 역시 추상적이지만, 거기에 우리 삶이 깃들고 우리 몸이 길들여지며 공적인 가치로 돋을새김 될 때 비로소 우리 삶은 장소성을 띤다.
목회자의 공적인 장소성은 주로 그가 몸담고 목회하는 교회와 그 안팎의 동선에서 고유한 빛을 발한다. 그 장소는 사람들이 만나고 어울리는 장소이고 그 사람들은 특정한 목적 아래 모이는 특정한 집단의 사람들이다. 따라서 목회자의 장소성은 불가피하게 사회성과 계급성에 연동된다.
가령,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몸을 드러내는 장소는 주로 그 ‘대형’의 사이즈에 걸맞은 자리이다. 그가 의도적으로 그런 장소를 선호하지 않더라도 그런 목회자를 초청하는 대상은 대체로 그 ‘급’에 어울리는 사회적 계급이나 평판과 교양, 웅숭깊은 배려심을 갖춘 이들이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공적인 집회와 설교를 농촌의 한미한 교회나 도심의 궁상맞은 개척교회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교회의 사이즈에 따라 발휘되는 금력과 권력, 인맥의 파급력이 얼마나 부조리하고 비성서적인 목회와 선교의 지형을 조장하는지에 대한 탄식과 비판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개별적 목회자가 몸담고 운신하는 장소의 특이성에 비추어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성찰하는 일은 드물다.
예수는 당시 마음먹기에 따라 자신의 추종자들을 정교하게 조직하여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까지 거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로마는커녕 팔레스타인의 종교적 정치경제적 중심지인 예루살렘도 간신히 막판에 들렀을 뿐이다. 거기서도 그는 주로 음지에서 운신하였고 성전에 들어가거나 종교지도자들을 대했을 때도 까칠한 이단아처럼 행동하였다. 거기가 그의 삶이 깃든 장소가 아니었던 게다. 그의 공생애 대부분이 자리한 갈릴리에서도 그는 당시 헬레니즘 문명의 온기가 충만했던 세포리스나 티베리아스를 일부러 회피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의 장소는 시골이나 소읍의 작은 집이나 회당, 움직이는 선교 현장으로서의 산과 광야와 길거리에 집중되었다.
나는 여름이면 홍수로 물난리를 겪는 전주의 골목길 지하교회에서 7년 넘게 목회하면서 수요일 예배모임에 정기적으로 이 땅의 유명하다는 목사들 설교를 동영상으로 들으며 많이 배웠다. 그중 신세대 목회자로 성가를 날리며 한국교회에 매우 개혁적인 예언자의 목소리를 높이는 한 분을 이 교회 사경회나 수요예배 설교자로 초청하여 온라인동영상 아닌 육성으로 설교를 들으면 우리 교인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몇 차례 상상하며 실제로 초청해보려는 의욕을 품기도 했다. 이메일을 써볼까 궁리하다가 한번은 그분을 잘 안다는 어느 목사에게 우리 교회의 사정을 알리고 꼭 모시고 싶다는 메시지를 연락처 메모와 함께 간접적으로 전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가 노회모임에서 그 메시지를 제대로 전했는지도 의문이지만, 전해졌다 한들 이런 바람이 실현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아무리 개혁적인 목소리로 공중파를 탄다 한들, 아무리 많은 대규모의 교인대중을 감화시킨다 한들, 그의 몸이 머무는 장소성은 이 땅의 인습적 관행에 따라 정형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설사 그가 농어촌으로 장소를 이동한다고 해도 그건 대개 농어촌 목회자들의 연합집회 정도로 선회될 가능성이 크다.
내가 대형교회 목회자의 사회적 겸손을 외교적 제스처로 치부하고 아무리 그 설교가 달콤하고 강력해도 그 진정성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 몸의 대중적 계급성에 순치된 장소성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일상예배든, 해외집회든, 지역순회 부흥사경회든, 무슨 워크샵이나 세미나든, 결국 그들의 리그에서 기대되는 세계를 누비면서 그 장소성의 구속을 벗어나기가 (불가능하지 않다면) 그다지도 어려운 것이다. 그게 대중을 상대하는 목회자나 공적인 리더의 신체적 존재 여건을 규정짓는 구조이며 체계이다.
그렇다고 7년이 지나도 여전히 개척교회인 내 목회적 삶의 장소성이 오지랖 넓게 범우주적이고 세계적인 것도 아니다. 나 역시 여전히 내가 부르는 찬송가를 배반하면서 ‘소돔 같은 거리’나 ‘아골 골짝 빈들’과 별 상관없이 내 몸을 거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한미한 지역의 신학교 선생으로 지방의 몇몇 교회에 초청을 받아 설교도 하고 강연도 하지만, 대형교회의 그 화려한 강대상에 한 번도 서보지 못한 신세를 내 무의식이 은연중 한탄하며 덧난 욕망을 달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아, 그대가 내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듯이, 내 몸이 내 삶의 숙주인데도 그 깊은 속을 모르는 일이 이다지도 많다니!)
이즈음 SNS 신세대 매체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대세를 이루면서 우리의 신체는 디지털 전파로 변신하여 손가락에서 타전된 자기표현과 인정 욕구는 금세 화상 공간으로 퍼져 다채롭게 이합 집산한다. 이 디지털 공간이 삶의 배타적 장소성을 극복하고 그 계급적 폐쇄성을 녹여주는 광장이 될 수 있을까. 활자와 사진으로 교감되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신기한 역동이 인간의 개별적 신체를 대신하여 우리시대의 화두인 ‘소통’의 진정성을 구제할 수 있을까. 그 낙관적인 희망의 극대치를 살려 봐도 나는 여전히 몸의 육성이 그립고 살의 교감이 고프다. 몸의 겸손이 아쉽고, 그 몸의 치열한 탈주와 횡단으로 개척하는 삶의 장소성이 (오줌 마렵듯이) 마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