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성서학당] 요한복음과 도덕경(1): ‘태초에’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1. 서론: 요한복음의 자리매김과 동아시아 정신세계와 대화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

20세기 세계적 정신과 의사였던 칼 구스타프 융박사(1875-1961)는 인간의 마음과 우주적 실재에서  온전성 혹은 전일성을 추구하는 정신적 생명의 지향성은 원이나 사각형을 통해서 표현된다고 말한바 있다. 소위 실재의 전일성 지향의 상징으로서 ‘만달라’와 ‘사위론’이 그것이다. 그리고, 무수한 사례를 드는 중에  신약성경의 복음서가 4가지로 구성된 것도 우연의 일이 아니라 전일성의 무의식적 표현이요 그 결과라고 보았다.

여하튼, 신약성경의 복음서중에서 마지막으로 씌여진 요한복음이 AD. 100년 전후하여  집필되고 복음서로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공관복음서라고 일컫는  마태, 마가, 루가의 세복음서는  AD.60-80년 어간에 집필되었고, 그보다 앞서 13개의 편지가 남아있는 데살로니가 전후서, 고린도전후서, 로마서 등 바울서신서 들은 AD. 50-60년 어간에 씌여졌다고 성서학자들은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본다.

그에 비하면,  요한복음은 신약성경의 두 광맥  혹은 대양의 두 해류에 비유할 수 있는 공관복음서와 바울서신이 초대교회 신도들에게 알려진 후에, 보다 더 높은 산정에서 대평원을 조망하면서 예수의 생애와 삶으로 말미암아 인류사에 일어난 우주적차원에서의  영적사건의 의미를 설파하려는 의도로 씌여진 것이다.

공관복음서가 ‘역사적 예수’를 기본바탕으로 하여 그의 교훈과 삶을 통해 예수가 구세주임을 증언 하려했다면, 사도바울은 역사적 예수의 삶에 대한 관심은 2차적일 뿐, 예수의 십자가사건과 부활사건에서 드러난 ‘새로운 존재에로의 변화체험’을 강조했다. 곧 ‘믿음과 성령의 은혜로 새사람 되고 영생을 얻는 구원의 길’을 모세율법종교와 당대 영지주의 종교관과 싸우면서 증언하였다.

요한복음서는 어떠한가? 요한복음은 평면적 차원에서의 ‘역사적 예수론’에 그치지도 않고, 유대교 종교전통의 ‘율법과 제사와 예언자 메시야론’에 머무르지도 않고, 그 모든 요소를 참조하되, 그것들을 넘어서 ‘영과 진리 안에서’(in Spirit and Truth 요4:24)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3의 새로운 복음해석을 설파해 놓았다. 요한복음서 안에는 유대민족종교 울타리가 극복되고 있다. 유대모세종교만이 아니라, 일체의 ‘거룩한 전통’의 권위와 교리로 무장한 인류사 종교전통을 상대화시킨다. 땅 속에 임한 하늘, 시간속에 들어온 영원, 마리아 탯속에 들어온 신성, 영성으로 변환하는 물질, 어린아이와 창녀 몸에서 빛나는 인간성의 신성을 보라고 강조한다.

동아시아 사람들, 그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은 요한복음을 특별히 사랑했다. 한국인들의 근원적 심성과 통하는 면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종종 도덕경과  대비하면서 삭개오작은교회 성서학당에 찾아오신 성도님들과 기탄없이 요한복음을 공부하려고 한다. 지나친 전문적 학술강의는 할 능력도 없고 하고픈 뜻도 없다.  그야말로 다락방에 모인 소수사람들이 요한복음서를 펴들고 성경 한구절 한구절을 함께 깊이 새김질하면서 음미하려는 것이다. 진리의 영께서 우리들의 공부하는 맘을 어여삐 보셔서, 은혜의 빛으로 우리 맘 속을 밝게 조명해주시기를 기도한다.

2.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요한복음 제1장 제1절, 그 중에서도 첫구절이 저 유명한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는 신앙적 선언이요 고백이다. 이 한 구절을 깊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과제만 하더리도 몇 달을 걸려도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문장은 세단어로 구성된 짧은 문장이지만, 이 문장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개인 인간과 공동체와 문명의 삶의 태도가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명관이 결정된다. 가장 핵심되는 세가지 어휘는 태초에(en archche), 말씀이(ho Logos), 계셨다(en) 이다.  그런데 사실인즉, 이 세마디 단어가 간단한 어휘가 아니라는데 요한복음서의 심오성이 첨부터 우리를 멈추어 옷깃을 여미게 한다.

(1) 태초를 사람이 생각 할 수 있는가?

헬라어 원문 단어 ‘아르케’는 영어성경에 ‘in the beginning'으로 번역했지만 본래 단어 ‘아르케’(arche)는 오늘 하루가 시작되는 자정시간 시계종이 ‘땡’하고 치는 그 하루 첫시간이란 뜻이 아니다. 그런 의라고 한다면 요한복음서는 “태초에 시간과 공간이 있었습니다” 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한문성경단어를 한글로 번역했지만 ‘태초’가 영서성경표현인 ‘In the beginning' 보다 낫다. 중국 성리학은 음양의 변화가 있기전 우주만물의 궁극적 실재를 표현하려고 ‘무극이 태극’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무극이면서 태극이라는 뜻이다.

‘태초’는 시간을 전제한 처음시간이라는 의미에서의 처음이 아니고, 시공간이 드러나기 전의 처음이라는 의미에서 ‘태초에’ 라고 했다. 기독교 신앙은 시간과 공간도 창조주의 창조물이요 선물이라고 고백한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이 철학적 난제를 이해하기 위해  칸트는 시간과 공간은 인간이 무엇을 체험하기도 전에, 인간 인식행위의 기본바탕으로서 주어진 선험적인 ‘직관형식’이라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인간에게 시간이란 소유하고있는 존재론적 자산같은 것이 아니고, 우리는 순간순간을 선물로서 받는 것 뿐이라고 보았다. 영화극장에서 필름 영상물 잔상이 우리 시신경과 뇌속에 남아서, 사건따라 시간이 객관적 실재로서 흘러간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인간정신능력으로서의  독특한 ‘기억과 기대’라는 인간심리적 관념이, 우리에게 시간의 실재성을 확신하도록 착각을 일으키는 것으로 어거스틴은 보았다.

현대 자연과학에서는 ‘시공연속체’라는 어휘처럼  함께 묶어서 생각해야하는 사물의 운동과 변화의 ‘백터’(vector) 곧 방향을 지닌 운동영향력의 구성요소로서  처리했다. 현대자연과학자들은  칸트가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 개념 곧 우주 어느곳에서나  동질적이고 균질적인 가치중립적이고 측정에 구애받지 않는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아인슈타인이 논증하듯이 시공간은 ‘사건속에 있는 실재의 구성변수’ 가 되었다.

그렇다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말 할 때, 요한복음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그 문장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란 것이 시간 안에서 피조되거나 생성된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펼처져서 우주의 빅뱅이 생기고, 천지만물의 생성과 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말씀’이 먼저 계셨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물리화학적 대자연물이 먼저 있어서, 그것의 질량적 변환에 의하여 결과적으로 정신 · 뜻 · 말씀이 뒤따라 생겨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정신 · 뜻 · 말씀 · 사랑의 의지가 시공우주보다 앞서 있었다는 신앙고백이다.

(2) 태초는 인식가능한 관념이나 사색할 대상이 아니고 신앙고백적 대상이다.

사실 시공의 궁극적 시작과 끝을 인간의 인식능력이나 인식구조로는 말 할 수 없다. 태초를 우주시간의 맨 첨 시작점을 의미한다고 말한다면, 고등학생 정도만 되어도 곧장 이렇게 질문한다. 그 맨 첨 시간 앞에는 무엇이, 어떤 시간이 있었지요?  우주의 무한공간 개념도 생각 할수 없다. 아무리 우주가 무한대라고 해도 인간인식능력은 무한 우주공간 “그 넘어의 밖에는 어떤 다른 공간이 있나요?”라고 질문할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정직하게 말하면, 인간은 유한한 피조물로서 시간과 공간의 처음이나 끝, 그 시작점과 그 넘어의 밖에 대하여 알거나 말 할수 있는 인식론적 구조가 아니란 말이다. 이는 귀뚜라미가 등산객과 함께 동일한 지리산 노고단에서 야영을 하지만, 귀뚜라미가 사람이라는 영물의 등산목적이나 의미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희랍철학의 명언은 허허막막한 대우주 속에서 진리와 사물의 이치를 탐색하는 인간 자기의식과 정신력의 불꽃 특히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지만, 흔히 오해하듯이 인간은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전능자이며, 인간이 인정하는 것은 존재하거나 의미가 있고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거나 아무 의미도 없다는 생각은 ‘이성의 교만이요 독단’이다.

동양의 지혜종교들은(불교, 유교, 노장철학) 아예 시공간을 통해 변화무쌍한 대우주 자연이, 그리스도교의 창조주처럼  ‘스스로 존재하는, 영원 무한자’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종교들의 신관은 범신론에 가깝다. 우주대자연이 곧 조화신의 몸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종교의 특징은 ‘깨달음’과 ‘대자연과의 조화일치’ 에 강조점이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창조주에 대한 찬양과 경배가 있다. 대자연이 아무리 위대한 공능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자연 그 자체를 경배하거나 찬양하지 않고 그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한다.  

여기에 전통적 동양종교와 그리스도교 신앙 패턴 사이에 소홀하게 생각할 수 없는 차이가 있음을 우선 솔직하게 말하고 난 다음에 더욱 주의해야 할 점을 그리스도인들은 알아야 한다. 특히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렇다. 그것은, 전통 동양종교의 자연에 대한  ‘경외하는 태도와 존경하는 신심’을 물질적 자연물을 우상화하는 행동과 같은 것이라고 매도하는 오해를 범하기 쉽다. 그런 오해는 도리어, 서양 그리스도교 문명권에서 근대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자연을 ‘죽어있는 비생명적 물질존재’로 간주하는 잘못된 편견에 기인한다. 동양 종교인들도  자연물 그 자체가 신적 존재가 아님을 잘 안다. 거대한 산, 큰 바위, 태양과 숲, 강과 거목을 종교적 대상으로 삼고 그것을 향해 종교적 몸짓을 하는 것은, 그 자연을 통해 드러나는 신성한 진리를 경외하는 맘 때문이다. 단순히 물질을 숭배하는 우상숭배가 아니다.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도, 불교에서 말하는 법성 혹은 불성, 유교에서 말하는 천리, 동학에서 말하는 지극한 원기를 대자연이 드러내고 있다는 성례전적 감성의 반응인 것이다. 그러므로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양 종교의 자연 숭배신앙은 범신론(pantheism)이라기보다는 범재신론(panentheism)에 가깝다. 

우주대자연과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존재자체에 상응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자기 내어줌의 결과로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하나님 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기독교는 믿는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근원적 본성으로서 영원자요, 우주만물은 하나님의 결과적 본성으로서 영원자이다. 하나님은 ‘없이 계신 하나님’ 이지만, 우주만물은 ‘있어 계신 대우주’이시다. 현대 그리스도교 신학은,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의 활동과 그 영광을 볼 것을 강조한다. 성경을 통하여 문자적 말씀을 매개로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신다고 한다면, 대자연의 창조적 진화, 소멸, 새로움의 탄생, 생명의 질적 도약, 비참함 속에서 아름다움등을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도덕경 첫장에 “유와 무가 도에서 함께 나왔고 다만 이름만 다를 뿐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없음(무)은 천지의 시작이요, 있음(유)은 만물의 어미라 했다. ‘태초’는 시간 없는 영원한 현재요, ‘역사’는 시간 있는 지속적인 흐름이다. ‘태초’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분화되지 않은채 수정된 시간성의 자궁이라 한다면, ‘역사’는  탯집속에서 이미 줄기세포가 형성된 기초 생명체와 같아서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에로 향한다.  시간 이해에서 시간의 흐름이 방향성을 지닌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교의 실재관은 생명 세계에서 시간의 불가역성을 강조하는 때문이다. 시간은 단순히 반복되기만 하거나, 무의미한 진동이 아니라, 변화하면서 질적으로 성장하고 앞선 경험을 축적해가는 과정으로 본다. 그래서, 모든 것은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우주가 수축해서 없어지고 다시 빅뱅 사건으로  시작된다고 가정하더라도, 제2의 우주가 제1우주와 같은 것이 아니란 말이다.

‘태초’는 하나님의 시간이다. 우리 사람들이 경험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가지 시간의 질적 차이 체험을 동시에 통전한 통체로서의 시간성이다. 단순한 시간이 없다는 때라고 말하는 시간성의 부정성으로서의 무시간성이 영원은 아니다. 동시에, 역사속에서 경험하는 시간이 끝없이 계속한다 해도 그런 끝없는 시간이 영원은 아니다. ‘태초’는 무시간성이 아니라 시간성을 잉태한 ‘충만한 비움시간’이다. 그러한 ‘충만한 비움시간’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로고스(말씀)는 무엇이며, 있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계속)  

위 글은 지난해 가을 5회째를 맞은 <갈릴리복음 성서학당>에서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발표한 강연문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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