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의 기원을 언제로 잡을 것인가를 두고 ‘수용’의 입장과 ‘전래’의 입장에 선 교회사 학자들 간 팽팽한 줄다리기가 있었다. 22일 오후 한국교회발전연구원(원장 이성희 목사, 이하 한발연)이 주최한 6차 발표회에서 연규홍 교수(한신대학교)는 한국 개신교의 기원을 ‘수용’의 입장에서 해석한 반면, 이종전 교수(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는 ‘전래’의 입장에서 서술했다.
▲연규홍 교수(한신대, 교회사) ⓒ베리타스 |
연규홍 교수는 "민족근대사의 주체로 역사 전면에 드러난 민중층의 봉건적 질곡과 외세의 침략에 대한 해방적 열망을 수렴한 갑오농민전쟁의 이념과 동학으로 기능한 동학민족 종교운동의 좌절은 이를 대체할 새로운 종교 운동을 강력히 요구하게 되었다"며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개신교는 조정의 정치적 통제가 기능할 수 없는 변경지역인 만주 땅에서 새로운 삶의 가치와 역사의 이상을 추구하였던 한국 민중에 의해 수용되어졌다"고 주장했다. 개신교 전파가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뤄졌다기 보다 민중들의 주체적 ‘수용’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인한 것이다.
연 교수에 따르면, 우리민족의 역사와도 깊은 연관을 가진 만주는 일찍이 중국선교를 담당했던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의 선교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중국선교를 담당하며 한국과 한국선교에 크게 관심하고 이를 지원한 윌리암슨으로 인해 일찍부터 한국선교의 열의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는데 따라서 이곳 봉화성의 고려문으로 장사를 하러 다니던 의주를 비롯한 관서지방의 자각한 민중층들은 어렵지 않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와 복음의 진리를 접할 수 있었고, 또 복음의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한국 민중층에 의한 개신교의 ‘수용’ 주목해야
만주에서 이뤄진 민중층에 의한 개신교 ‘수용’에 큰 의미를 둔 연 교수는 "1876년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중국어로 된 성서를 읽고 결심해 기독교신자가 되고자 하는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 4명의 한국 청년들에게 세례를 배풀었다"며 이를 "한국 최초의 개신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봤다. 이들은 당시로서는 수세(受洗)가 생명을 건 의식인 줄 알면서도 세례를 받고자 예수를 공개적으로 시인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결단자들이었음도 덧붙였다.
이들은 스코틀랜드 성서공의회의 선교 방침에 따라 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로스와 맥킨타이어를 도와 성서를 번역하며 의주를 비롯한 관서지방에 교회를 세우는 기초를 놓았고, 1878년 봄, 드디어 요한복음과 마가복음 번역서를 출간하고 뒤 이어 1887년 신약전서인 <예수성교젼셔>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연 교수는 "우리는 흔히 로스 번역성경(Ross Version)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 성서의 간행은 최초의 세례자 4명과 그후 세례를 받은 서상륜, 그리고 김청송 등이 참여해 이루어낸 공동작업이었다"고 주장했다.
연 교수는 "실로 이것은 한국민족사에 이어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라며 "왜냐하면 이것은 조선조 500년 동안 지배문화의 논리와 문자인 한문과 한자의 구속과 차별로부터 벗어나고자 원했던 민중의 열망을 한글로 이루어 내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한글성서는 개신교의 복음이 "철저히 민중층에 전달되어 한국개신교의 성격을 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한국어로 번역된 성서, 헌신적인 민중 개종자들에 의해 민중층에 전달돼
실제로 연 교수의 말대로 한국어로 번역된 성서는 비록 그것이 국경을 넘어야 하는 검색의 위험한 과정과 반포의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헌신적인 개종자들에 의해 광범위한 민중층에 전달됐다. 연 교수는 "최초로 한국 번역성서가 반포되어 자발적인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곳은 김청송의 전도로 이루어진 서간도에 대한 한인촌 교회였다"고 설명했다.
연 교수는 이어 "그 후에도 백홍준, 이성하, 서상륜에 의해 평안도 의주와 황해도 송찬에 수많은 개종자가 생기고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세워졌다"며 "한국개신교 초대교회의 설립은 한국 민중의 주체적인 복음 수용과 한글 성서를 매개로 자발적인 전도활동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연 교수는 한국 개신교는 이러한 민중층에 의해서만 ‘수용’된 것이 아니며, 또 다른 한 통로가 일부 개화파 인사들이었다는 것도 짚고 넘어갔다. 그에 따르면, 개화파에 속한 김옥균이나 유길준 등은 기독교의 도입은 나라를 부하게 하고, 민족을 강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개화파들의 기독교 수용에 대한 수용자세의 연장선상에서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외국 선교사들로 하여금 한국선교의 디딤돌을 놓은 이가 이수정이었음도 확인했다.
▲22일 오후 6시 서울 기독교회관 2층 에이레네 홀에서 한발연의 주최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 한국 개신교의 기원 언제로 잡을 것인가?’란 주제의 제6차 연구발표회가 열렸다. ⓒ베리타스 |
“1883년 4월 29일 세례를 받은 이수정은 신앙고백을 남기고 일본에 온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1883년 말에 7, 8명의 한국인 수제자를 얻음으로써 일본에 최초의 한인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다. 이 사건은 한국 선교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수정이 남긴 또 다른 업적으로 연 교수는 "유학생층과 국내의 지식인층에 성서를 널리 반포할 목적으로 헌토성서를 번역해낸 것"을 들며, "이 성서는 한국개신교 수용 초기 만주에서의 민중층을 대상으로 한 한국 성서번역과는 대조적으로 민족자강과 개화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층에 크게 영향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
초대교회는 민중에 의해 세원진 교회
이어 초대교회가 민중의 의해 세워진 교회임을 강조한 연 교수는 초대교회의 구성원들의 면면을 살피면서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그는 "최초로 김청송의 전도로서 세운 서간도 한인교회는 구성원이 거의가 순박한 농민들과 몰락한 변방무인계급의 군졸들이었다"며 "그리고 백홍준과 서상륜이 개척한 관서지방의 의주와 솔내교회 역시 노비나 빈농, 그리고 조금 나아가 중인계층에서 타락한 수공업, 임노동자 등이 중심이 되어서 세워졌다"고 말했으며, 이에 더해 "가부장적 권위주의 체제에서 눌리고 차별당하던 여자들도 이 구성원들 중의 중요한 하나였다"는 점도 곁들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초기 교회에서는 쟁이나 예수꾼 등 양반과 중인계급을 제외한 상민과 천민, 칠천역 등 인간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나 불리는 의미가 달리고 기독교인들이 능멸을 당하는 사태가 빚어졌는데 이에 대해 연 교수는 "그것은 사실 정당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초기 교회구성원들의 입교동기에서 보듯이 봉건적 전통과 권위체제로부터 배제된 자들이 그 체제에 구조 속에서 어떠한 권리와 보호도 주장하거나 누릴 수 없었기에 자연 스스로 생존과 권익을 위한 새로운 자위집단으로 기독교를 택하였다"고 단언했다.
한편, 개화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서양 선교사들에 의한 개신교 선교 사업이 활기를 띄게 되는데 이 역시 "(이수정 등)개신교인의 순수한 선교지원요청에도 그 중요한 원인이 있다"고 진단한 연 교수는 조정과 왕으로부터 신임을 받은 언더우드(미국 북 장로회 소속)와 아펜젤러(미국 감리회 소속) 등의 서양 선교사들의 과제는 "‘거두는 열매’로써 이미 그들이 입국 이전에 형성되어졌거나 형성되어지는 자생적인 신앙공동체를 바른 복음적 교훈으로 지도하고 그들의 성장을 관리하는 것과 ‘뿌리는 씨’로써 민족계몽과 근대화를 지원하는 것"이었음을 확인했다.
‘전래’가 없는 ‘수용’은 없다…‘수용’ 과정에 동반되는 토착화 문제 직시해야
그러나 이종전 교수는 "필자에게 주어진 ‘전래사’의 입장의 서술은 근본적으로 ‘전래’가 없는 ‘수용’은 없다는 전제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왜냐하면 수용의 과정에서 동반되는 토착화는 본질에 대한 왜곡이나 변질에 대한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전래’를 중심으로 ‘수용’을 통한 교회형성과 발전을 살펴보아야만 한국교회의 실체를 성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며 한국 개신교의 기원을 ‘전래’의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에 무게 중심을 뒀다.
이 교수는 먼저 "한국교회사에 있어서는 일면 수용자의 노력이 선행된 사례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며 앞서 연 교수에 의해 언급된 이수정의 사례를 들었다. 그러면서도 "사람을 통해서든 문서를 통해서든 ‘전래’, 즉 전달자의 입장에서 전해준 것을 계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복음전파사에서 부인할 수 없는 일"이라며 "만일 전달자가 어떤 것을 전달했는지에 대한 이해나 그 노력 내지는 그 과정을 배제한 채 전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에서만 해석한다면 정작 무엇(또는 어떤 것)을 수용했는지에 대해 스스로 확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래’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수용’에 대한 바른 해석이 가능하게 될 것이란 말이었다.
또 수용자에 의해서 적용될 수는 있으나 복음의 본질 자체가 바뀔 수 없다란 점도 재차 강조했다. 이 교수는 "수용의 과정에서 수용자들의 정서나 문화적 의식과 환경에 의해서 한국적인 정서나 문화적 요소가 담긴 신앙의식이나 기독교적인 문화를 형성할 수는 있다"면서도 "그러나 어떤 경우라고 해도 기독교의 본질을 수용자의 입장에 따라서 바꾸거나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역설했다.
한국 개신교의 출발, 선교사들의 입국한 시점
이어 한국 개신교의 출발에 대한 이해도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연 교수는 만주의 민중층에 의한 신앙공동체의 형성으로 분석한 반면, 이 교수는 "개인적으로는 선교사들이 입국한 시점을 한국교회의 출발점으로 본다는 것에 대해서 그 이전의 전래(또는 수용)의 과정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함께 한국교회사를 정리하는 데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며 "왜냐하면 선교는 단지 복음을 전달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덧붙여, 이 교수는 "비록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 사실상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그 신앙공동체가 교회로 세워지는 과정은 선교사들의 입국과 그들이 이미 형성되어있는 공동체를 찾아가 세례를 베풀고 교회로 세움으로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부연했다.
한발연의 이날 세미나에는 이 밖에 임희국 교수(장신대)의 기조발언과 김명구 교수(한국교회사학연구원 상임연구원)의 논찬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