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박재순 칼럼] 색깔론과 국가기강의 문란

박재순 씨알사상연구소장 · 목사

우리나라는 해방 후 60년 동안 어려운 과정을 거쳐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다. 실질적이고 내용적으로 민주주의를 완성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최소한의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민주주의는 틀을 갖추어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나라 역사를 30년 이상 과거로 되돌려 놓는 정치사회 행태와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색깔론과 국가기강의 문란이 그것이다.

이번 선거에도 색깔론이 기승을 부린다. 색깔론은 비겁하고 떳떳하지 못한 정치적 술수다. 한국인들은 민족분단과 전쟁으로 수 백 만 명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고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독재정권 아래서 이데올로기와 색깔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 제대로 된 품격 있는 정치인이라면 한민족의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고 이데올로기적 공포심에서 벗어나도록 힘쓰는데 앞장 서야 마땅하다. 한민족의 역사적 상처와 공포심을 자극하고 이용해서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정치 행태는 비열하다. 그것은 우리 역사를 반세기 이전의 과거로 되돌림으로써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꼼수다.

더욱이 색깔론으로 공격당하는 당사자가 공격 내용과 사실을 승인하지 않을 경우에 색깔론은 상대방에 대한 일방적인 폭력이고 테러 행위다. 그것은 정치적 존재 근거를 박탈하고 한국 정치 마당에서 추방하는 것이고 정치적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색깔론을 펴는 것은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며 음모적인 정치행태다.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은 자유롭게 생각하는 데 있다. 정치사상과 노선의 차이는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기본을 지키지 않는 정치는 나쁜 정치다.

정치인과 정당은 정책과 미래상을 가지고 진정성과 실천력을 보임으로써 국민 앞에서 정정당당하게 경쟁해야 한다. 헌법정신에 따라 국민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바로 판단하고 선택하게 해야 한다. 색깔론은 과거의 상처와 악몽을 들추어서 국민을 협박하는 것이고 국민을 색깔도 구별 못하는 어린아이나 바보로 만드는 것이다. 국민을 존중한다면 정치인들은 각자 자신들이 잘 하는 것과 잘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정직하게 국민 앞에서 경쟁해야 한다.

지난 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여당 쪽 사람들이 중앙선거관리 위원회 홈페이지를 디도스 공격으로 마비시켰다. 디도스 공격으로 투표자들이 중앙선관위 홈페이지 접속을 못하게 한 것은 국가기강을 흔들어 놓은 중대한 범법 행위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는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일이다. 국가의 선거를 공격하고 훼방한 것은 국기를 문란케 한 행위다. 정권을 담당한 여당 쪽에서 국가의 근본 질서와 민주주의 절차를 유린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사안이 매우 심각하다.

또 총리실과 청와대가 민간인들을 불법사찰한 일도 자유 민주주의 헌정질서를 유린한 국기문란 행위다. 권력의 중심부에서 이런 일이 저질러졌다는 것이 놀랍고 당혹스럽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에 대한 상식과 교양이 부족한 사람들이 공인으로서의 품격과 윤리의식을 갖추지 못하고 권력의 핵심부에서 민간인을 불법 사찰했다는 것은 정치후진국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이처럼 국가의 기본 질서를 유린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는 원시적인 정치후진국이나 야만적인 독재국가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전형적인 불법행위다. 이것은 국가와 민주헌정질서에 대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테러행위다. 적어도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군사독재에서 벗어나 절차적 민주화를 향해 한 걸음씩 전진해 온 민주주의를 30년 전 군사독재 시대로 후퇴시키는 야만적 행위다.

국가기강을 문란케 하는 후진국의 야만적 행태는 정치권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세계 일류 기업이라는 삼성전자도 최근에 공정거래위원회의 감사를 물리적으로 저지하고 관련 자료를 폐기했다고 한다. 이런 행태는 삼류 후진국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삼성전자가 산업기술과 사업에서는 세계 일류인지 몰라도 정신 상태와 윤리의식은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음이 분명하다.

이 땅에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쳤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옥고를 치르고 삶을 희생했던가! 민주화 없이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정부와 기업이 국가기강을 문란케 하는 행태를 서슴지 않고 정치인들이 시대착오적인 색깔론을 펴는 것은 역사의 시계를 30년 전으로 돌리는 것이며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모독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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