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최재건 교수(교회사)가 고등교육을 중심으로 한국 장로교회가 한국교육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는 논문에서 일반적으로 감리교의 아펜젤러가 배제학당을 설립한 것이 선교사에 의한 최초의 근대식 학교교육으로 알려져 내려온 상식을 깨고,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파송한 언더우드가 이보다 먼저 교육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음을 주장, 기독학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난 7일 한국장로교총회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며 열린 학술세미나에서 분과 발제자로 나선 최 교수는 언더우드가 1885년 7월 이전에 이미 자기 집에서 여러 명의 소년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음을 여러 가지 역사적 사료들을 들어 입증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에서 언더우드가 가진 공식적인 첫 직함은 ‘제중원 교사’였다. 언더우는 1885년 4월, 서울에 도착한지 3일째 되는 날부터 실제로 제중원에 근무하면서 물리, 화학 등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이미 독자적으로 학교를 설립할 계획도 품고 있었다.
▲7일 새문안교회 신관 3층 예배실에서 한국장로교총회설립1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이날 분과 발제자로 나선 최재건 교수(연세대, 교회사)는 상식을 깨고,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파송한 언더우드가 이보다 먼저 교육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음을 주장, 기독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베리타스 |
최 교수는 이어 언더우드의 교육 활동을 입증할 결정적 사료로 한국 생활 3개월째 되는 1885년 7월 6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엘린우드(F. F. Ellinwood) 총무에게 쓴 서한을 제시했다. 이 편지는 예수교학당(Jesus-doctrine school), 언더우드학당, 경신학교의 시원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로 언더우드가 자기 집에서 여러명의 소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이 기록돼 있다. 아울러 이 편지를 방증하는 자료로 최 교수는 알렌이 이 무렵 선교본부에 보낸 편지에서 "언더우드가 4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고 밝힌 점도 주목했다.
이 밖에도 언더우드 자신이 한국선교 20주년 회고담에서 나오는 "학교들이 필요하여 첫 해에 두 선교회가 남학교와 여학교를 시작했으며 물론 교과서도 준비했다"라는 구절과 또 그의 부인 릴리아스 호톤 언더우드가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한 일로서 언더우드로부터 고아들에게 매일 두 시간씩 산수와 영어를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받고 승낙하면서 "주님의 자비로운 은총을 보여주는 기관으로 병원 말고는 이 학교가 조선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것이었다"고 언급한 부분도 상기시켰다.
고등교육의 시초를 두고,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최 교수의 이 같은 발제에 박상진 교수(장신대)는 "본 논문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파송한 언더우드가 아펜젤러보다 먼저 교육선교를 시작했음을 규명하고 있다"면서 "이는 한국에서의 근대교육의 출발점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 장로교가 감리교보다 앞섰음을 분명하게 밝혀주는 근거가 된다"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또 "이는 장로교회가 한국의 근대교육의 효시를 제공함으로써 한국교육에 공헌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의미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