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현 교수 |
이제껏 신앙인들에게 ‘믿음’에 대해 묻는다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물음은 여지없이 의심을 낳고, 의심은 결국 ‘믿음’과 정반대되는 성질의 것인 ‘불신’을 초래할 것이란 확신 때문이었다. 물음 없이 ‘무조건’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일 뿐, 믿음에 대해 물음표를 다는 행위는 불신앙으로 간주되기 일쑤였다.
13일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과 대학원 신학과가 공동 주최한 2012년 1학기 에큐메니칼 세미나에서 ‘나의 믿음 되돌아 보기’란 제목으로 주제 강연을 맡은 정 교수는 그러나 물음표를 제껴둔 ‘무조건적인 믿음’(unconditional faith)이 자칫 오해로 인해 ‘맹목적인 믿음’(blind belief)으로 둔갑할 수 있다며 "‘무조건적’이라는 것이 문자 그대로 ‘조건이 없다’는 것인데 ‘조건이 없다’는 것은 ‘따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키게 되고 이는 곧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거쳐 ‘덮어 놓고 맹목적이게’ 되는 데에 이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무조건적’에 대해 ‘맹목적’은 단순한 변질이 아니라 정반대의 양태임을 확인했다. 정 교수는 "‘맹목적’이라는 것은 무수한 조건이 얽혀 있음을 보지 못하니 ‘지극히 조건적’인 것이기 때문"이라며 "이와 같은 왜곡을 올곧게 직시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맹목성 안에 덮여지고 숨겨져 있는 조건적 욕망의 얽힘을 되돌아 살필 길이 없게 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어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참으로 무조건적인 믿음을 향하는 길목에서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란 질문을 던져 놓고, 이 질문에 그리스도 신앙의 결정판이라고 본다는 누가복음 9장 23절("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말씀을 꺼내 들었다.
정 교수는 "(예수께서)‘구원 받으려거든’이나 ‘복 받으려거든’ 또는 ‘잘 살고 싶거든’이 아니라 “따르려거든 따르라”라고 선언한다"면서 "‘따르라’에 앞서 어떠한 조건도 전제되어 있지 않음을 명백히 함으로써 ‘따름’으로서의 믿음의 무조건성을 확연하게 선포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믿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곧 따름"이며 "이 따름은 그에 앞서 어떠한 조건도 깔지 않는, 그야말로 무조건적인 따름이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어떻게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가’란 물음에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가 바로 가장 핵심적이고도 직설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며 (예수께서)‘자기를 버리고’에선 현실초월을, ‘자기 십자가를 지고’에선 현실참여를 가리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정 교수는 "현실초월을 구실로 하여 현실도피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경계하는 균형 잡기라고 하겠다"며 "나아가 대속적 구원만을 명분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우상화하려는 종교적 욕구를 정면으로 깨부수는 명령"이라고 말했으며, "결국 이 두 말씀은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적으로 한데 얽힘으로써 자기도취적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통속적 종교성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준엄한 요구가 된다"고도 했다.
끝으로 정 교수는 누가복음의 구절 속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권면이 결국 자기를 비우라는(kenosis) 명령이자, 동시에 자기 비움에서 오는 자기도취적 우상숭배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는 우상파괴(iconoclasm)의 명령이라고 재확인하며, 이러한 비움과 파괴의 ‘수행’이야말로 참 믿음의 길임을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