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이곤 칼럼]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

창세기 18-19장(1)

▲한신대 김이곤 명예교수
소돔 성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상고(詳考)해보면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번영이 극에 달한 저 거대한 문화도시에 ‘의인’(찻디크) ‘열 사람’이 없다는 것 단지 그것 때문에(창 18:28-32) ‘소금 기둥’의 잔해(殘害=鹽害, 창 19:26) 이외에는 풀 한 포기도 남기지 못하고 멸망(창 19:24-28)하였다는 보도입니다. 이것은 분명 ‘소수(少數)의 의인’이 무엇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왜? ‘소수의 의인’은 ‘다수의 악인들’을 살려내는 ‘생명창조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대답입니다. 구약성서가 말하는 ‘정의’(체다카)의 의미에 대해서는 <김이곤 교수 칼럼 5>에서 이미 논한 바 있지만, ‘생명 구원의 지향점이 없는 여하한 흑백논리’도 ‘정의’의 의미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밝힌 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소돔 성 멸망의 사건>은 <신의 심판은 있다!>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보다 더 큰 의의(意義)를 가지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네 한국 사회는 ‘소돔’을 방불케 하는 ‘불의(不義)의 혼탁’으로 인하여 창조 이전의 ‘카오스’(chaos)를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이 카오스 위를 ‘하나님의 영’(루아하 엘로힘)이 ‘감싸 돌고’(메라헤펫트) 있었다고 성서는 말씀하고 있었습니다.(창 1:2) 그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였었는지는 모르나, 마침내 거기에는 “빛이 생겨라!”(여히 올!)라는 신의 말씀(창 1:3)이 들려오더니, 곧 거기에는 ‘카오스’(혼돈)의 물이 창공을 사이에 두고 윗물(좌?)과 아랫물(우?)로 둘로 나뉘어져서 온 세상은 ‘질서’(코스모스=우주)를 갖추기 시작하였노라고 성서는 증언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소돔과도 같은 한국사회에도 혹 태초에 카오스를 뚫고 들어온 그 ‘빛’이 나타나 새로운 ‘질서’가 창조될 수는 없을까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창조의 기능’을 가진 저 창조적 소수 ‘의인 열 사람’(창 18:32), 아니, 예레미야가 외친 경우처럼, 단 한 사람(!, 렘 5:1)의 의인이라도 만일 태초의 그 ‘빛’처럼 나타나기만 한다면, 저 ‘카오스’도 순식간에 물러가고 새 질서(코스모스)가 환하게 생겨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창조적 소수자인 의인 열 사람(창 18:32) 또는 의인 한 사람(렘 5:1)은 도무지 우리 사회에서는 나타날 기미가 있어 보이지를 않습니다. 물론, 눈에 쉽게 드러나지는 않으나 밭에 감추어진 보화(마 13:44)처럼, 누군가가 보화를 이 희망 없는 세상 속이라고 할지라도 땅 속 깊이 묻어 두어 그런 행운을 도모한 자가 우리 사회에서도 있을 수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그 蓋然性 때문에) 희망을 가질 수도 물론 있겠지만, 그러나, 이 땅의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결국에는 하늘의 간섭을 받고 중단할 수밖에 없는 ‘신성모독의 바벨탑만’ 쌓고 있기 때문에. 범인(凡人)인 저로서는 그만 저 시편 탄식시인의 대열 속으로 점점 매몰되어가는 느낌만을 가질 뿐입니다. “기초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이 마당에 의인인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시 11:3)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문제 해결의 공은 이젠 이 우주(萬有=존재하는 모든 것)를 창조하신 한 분 신(神)이신  –유일신(唯一神)이신-  그분 창조주 하나님에게로 넘어갔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의 혼돈(카오스)을 평정하는 일은 행정, 입법, 그리고 사법부를 이끄는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의 손에서는 이미 떠났다는 것이 우리 모두가 다함께 느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어떠한 희망의 여지마저도 다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주변 인물들은 거의 모두가 보통 도둑들이 아니고 열 번이라도 더 감옥에 수감되어야 할 ‘대도’(大盜)들이라는 것이 점점 시간이 갈수록 더욱 분명해지고 있고 입법부를 책임지고 있다는 국회의원들도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절대다수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부정부패의 원흉(元兇)들로 보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철면피의 근본주의적 악덕 정치인들이라는 것이 또한 역시 시간이 갈수록 더욱 분명해지고 있으며 그래도 재판 업무를 맡고 있는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신 1:17)- 법관들은 재판의 공정성만은 그래도 지키려고 하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출 23:3,6!!) 현금의 한국의 법관들은 자기 이념을 우선적 잣대로 삼아 재판의 공정성을 완전히 폐기하다시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들은 흔히 인성(人性)과 인격(人格)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육계(敎育界)를 향해 희망 섞인 눈길을 넌지시 보내곤 합니다. 그러나 현금의 한국 교육계는 초등교육(유치원, 초등학교), 중등교육(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고등교육(대학교와 교수사회) 기관 어느 곳을 막론하고 ‘왕따’와 ‘폭력’으로 막가고 있습니다. 숨 쉴 곳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후의 보루(堡壘)’로서 ‘종교계’를 생각합니다.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이라는 세계 삼대 유일신 종교를 비롯하여 불교, 유교 등 ‘윤리성’을 담보하고 있는 고등종교들을 향해 “우리의 희망이 되어 주시오!”라고 절박한 도움을 요구합니다(시 121:1). 왜냐하면 이들은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부름 받은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들 종교들은 ‘빛’이기를 포기한지 오래입니다. 그래도, 그래도 하면서 기대를 모았던 기독교가 불 회귀선(不 回歸線)을 넘기 시작한 것은 십자가군 깃발을 들고 기독교의 세계화 선교에 나서는 그 순간부터였던 것으로 보이고 이슬람의 붕괴도 ‘지하드’ 선교의 깃발을 드는 그 순간부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 가톨릭의 부패가 본격화된 것은 금화를 얻기 위해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시작한 때부터라면 개신교의 부패가 본격화한 것도 또한 ‘오직 은총으로만’(sola gratia)을 부르짖으며 구원의 은총을 교황청이 면죄부를 발매하여 팔듯이 팔면서 교회 기업화에 열을 올릴 때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교회주의’를 적극 경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종교가 사회의 구원을 염려하여 발 벗고 나서야할 때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세상이 오히려 종교를 염려하여야 하는 세상이 오고만 것입니다. 이른 바, 새 창조를 열기 위한 ‘카오스’가 한국 사회를 덮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카오스의 물 위로 움직이며 카오스를 보듬고 물결치고 있는 것입니다.(창 1:2)
  
마침내는 이 카오스를 향해 하나님께서 친히 “빛이 생겨라!”(창 1:3)라고 말씀하실 차례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남아 있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문제 해결의 공이 우리의 손을 떠나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넘겨졌기 때문에,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로고스)을 통하여 소돔 같은 이 우리 사회를 다시 구원할 <창조적 소수> ‘열 사람’(창 18:32) 또는 ‘한 사람’(렘 5:1)을 그분께서 출현하게 하시는 그 일 밖에는 다른 길은 없게 된 것입니다.
  
<창조적 소수>의 출현!! “빛이 생겨라!”(창 1:3)라는 신언(神言)에 응답할 그 ‘빛’의 출현, 즉 카오스를 몰아내고 새로운 질서(코스모스)를 가져 올 그 ‘빛’ 즉 ‘하나님의 영광’(케봇 야훼, kevôth YHWH)이 나타날 차례가 된 것입니다. 이 <창조적 소수>의 출현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빛’은 하늘에서부터 내려 온 것도 아니고 땅에서부터 솟아난 것도 아니라 오직 단지 그분의 ‘말씀’(로고스)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요 1:14), 그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육신이 되시는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있느냐는 것, 그것입니다. 우리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이 이 말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신 30:15). 이 말씀은 <빈 말(=헛된 일)>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신 32:47).
  
정답은 바로 이것입니다. 생명이신 ‘말씀’을 우리가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각 종교가 모두 이 말씀(經典: canon qaneh norm)을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앞 다투어 이 ‘말씀’을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이 ‘빛’을 우리가, 교회가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교회는 가르치려고도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고 않습니다. 결사적으로 외면하여 왔고 또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교회는, 마침내는, 중단되고 무너질 <바벨탑>을 쌓을 <벽돌 쌓기>에만 열심일 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마 16:23; 막 8:33)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회가 ‘빛’이 없는 혼돈(카오스)의 세계가 된 것입니다. 멸망 받을 다수(majority)를 살릴 소수(minority)인 저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를 외면하고, 밀어내고, 짓밟고 해서, 끝내는 죽이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냐? 아니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냐?(마 7:13-14; 눅 13:24)라고 묻고 싶을 지경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어디가고 멸망할 가증한 것(=바벨탑)을 세울 ‘벽돌과 역청’(창 11:3)만을 모아서 쌓기만 하니, 이 일을 어찌해야 할 것입니까?
  
“물이 없어 갈(渴)함이 아니요 야훼의 말씀이 없어서 갈(渴)함인데”(암 8:11),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 날이 오면, 아름다운 처녀들과 젊은 총각들이 목이 말라서 지쳐 쓰러질 것”(암 8:13)이라고 예언자 아모스는 절규하였던 것입니다. 열 사람(창 18:32)이든 단 한사람(렘 5:1)이든, 그 무엇보다 불의(不義)를 일삼는 멸망할 많은 대중(majority)을 살릴 ‘창조적 소수’ (creative minority)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는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절규하였습니다. “주님, 노하지 마소서. [숫자 줄이기를 다섯 번이나 한 후, 아브라함은 다시 말하였습니다.] 제가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게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열 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창 18:32)
  
예언자 예레미야도 이렇게 울부짖으며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아,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둘러보고 찾아보아라. 예루살렘의 모든 광장을 샅샅이 뒤져 보아라. 너희가 그 곳에서 바르게 일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라도 찾는다면 내가 이 도성을 용서하겠다.”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렘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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