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이곤 칼럼] 죽음을 극복하는 길

창세기 22장에 대한 신학적 명상 1: ‘야훼 이레’

▲한신대 김이곤 명예교수
구약 창세기 22장을 가리켜서 유대인 전통은 특별히 ‘아케다’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아케다’라는 히브리어는 구약 전체에서 오직 여기 창 22장에서만 나타난다. 이 말의 의미는 ‘희생제물의 발을 묶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qd 창 22:9)에서 기원된 말이다. 분명, 발이 묶인 이삭의 모습은 먼 후일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의 대속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우리 주님의 두 발이 포개어져 묶인 채 못 박혀 있는 그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들고서 그 두 발이 묶인 외아들, 이삭을 향해 칼을 겨누고 찌르려고 하는 그 순간! 그야말로 하늘도 땅도 모두 숨을 죽이든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사자(使者)는 황급히 아브라함을 향하여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창 22:11)라고 두 번 반복하여 부르고는, 숨을 몰아쉬며 다급하게,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창 22:12)라고 울부짖듯 천사는 부르짖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만일 그 곳이 모리아 산(山) 산정(山頂=非 聖所)이 아니고 ‘성소’였더라면, 마치 먼 후일 지성소와 성소를 구별하는 ‘휘장’이 찢어지듯(마 27:51; 막 15:38; 눅 23:45), 그렇게 그 제의(祭儀) 성소의 휘장도 또한 찢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극복하는 길이란, 알고 보니,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성서본문 기자는 바로 여기서(창 22:12c–14) 다음 세 가지의 주요한 사건을 지적하였기 때문이다. ①첫째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을 본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향하여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야] 알았다.”라고 말하였다는 것(창 22: 12b), ②둘째는 하나님에게 번제로 드리려든 그 ‘아들’ ‘대신’에 숫양 한 마리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다는 것(창 22:13), 그리고 ③셋째는 아브라함이 이런 일을 경험한 이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여호와 이레’)라고 이름 붙였다는 것 등이었다(창 22: 14).

이 세 가지 사건은 창세기가 말하고 있는 아브라함 생애에 관한 증언 중, 아브라함 생애의 절정(climax)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모리아 산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조차도 그의 생애의 절정에서는, 이와 같이, 결정적인 한 ‘시험’(test)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시험을 가리켜 창 22장의 성서기자는 놀랍게도 ‘하나님이 주신’ 시험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신학적 쟁점이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구미(歐美)의 많은 대표적 구약학 학자들은 여기서 이 <‘하나님이 주신’ 시험>의 신학적 의의를 특별히 강조해왔다.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test)에 빠뜨리신다니, 분명, 성서 문헌으로서는 처음 대면하는, 매우 새로운 신학적 이슈이기 때문이다. 오늘 날의 기독교 교인들에게는, 저 아득한 옛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조차 감히 이러한 일이 일어났었다는 보도는 충격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비록 여기서 말하는 ‘시험’(test)이라는 말이 ‘주기도’의 ‘시험’(temptation)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고는 하더라도,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test)하신다는 것은 어쨌든 우리에게는 하나의 ‘걸림돌’이다. 왜냐하면, ‘시험’은, 비록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 하신다는 말씀(고전 10:13)도 있기는 하지만, 많은 아픔[苦難]을 반드시 동반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의 인생을 마감하는 그 인생 절정에서는, 그는, 사람이면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시험에 직면하게 된다. 왜냐하면 나이 100세에 얻은 그 외아들을 그 ‘주신 자“ 자신이신 하나님께서 도로 제물로 내어 놓으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곧 모리아 산으로 오른다. 그러나 이 모리아 산 등정(登頂)은, 분명,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일 다음에! 일어난 일이었다.(wayehî ’aḥar : Now it happened after …, cf. C. Westermann, Genesis 12-36, 352-353)

실제로, 아브라함이 살던 그 고대나, 또는 이 고대 이야기를 쓰고 있는 성서기자(E)가 살던 그 시대나 간에, 심지어는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도, 우리 자신의 믿음의 ‘한계’에 대한 질문은 신앙인들의 신앙 역사(信仰 歷史)에서는 일종 최대의 ‘시험’(test)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의 믿음의 정도는 과연 어디쯤에 도달해 있는 것일까?”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충절(忠節)을 원하시는 신(神)이신가?”라는 질문은, 그것이 극대화될 때는, 이 시험(test)은 곧장 고통스러운 ‘시련’(試鍊)으로 전이(轉移)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종탑들이 마치 “바벨탑은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높고 또 높은 것을 우리가 보는 것은 그리 새삼스럽지 않으며, 바로 여기에 사람이 헤어나기 어려운 한 ‘미로’(迷路)가 있게 마련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이 그 신앙적 삶의 절정 및 결실기에 이르렀을 무렵, 예기치 못하게도, 하나님으로부터 그가 100세에 받은 그 외아들 ‘이삭’을 ‘번제제물’로 내어 놓으라는 요구(창 22:2)를 받는다.

자기 ‘믿음’의 정도(程度)에 대한 평가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신앙인들의 세계에서는 최대의 관심일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고 하겠다.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고 젊은이들은 노래하고는 있지만, 과연, 그러한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희망 사항일 뿐, 노래하는 그들 자신도 그 미래를 모르는 것이 이 시대의 실상이다.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가 온통 ‘카오스’(Chaos)다. 실상이 이러한데도 그들은 노래하고 춤추는 일에만 몰두한다.(그 노래와 춤이 그토록 전문화되고 세계 각 곳에 한류열풍을 일으킬 정도이면 지극히 전문화되지 않고는 그렇게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카오스’라는 이 확신은 이 지구촌 곳곳에서 일고 있는 자연재난들이 바로 그것을 입증하고 웅변해준다. 이 흐름을 멈추게 할 자는, 인간 중에는 없다. 단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신 32:39; 삼 2:6 참조).

아브라함은 결단한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한 결단이었다. 만일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의 그 칼 든 손을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아들도 죽고 아들이 죽은 바로 그 자리에서 아비(아브라함도)도 죽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리아 산정으로 오르는 그 길>은, 분명,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였다. 말하자면 우리 주님 예수께서 골고다(=갈보리) 산정으로 오른 바로 그 길이기도 하였다. 산정에 오르자 아브라함은 즉시 <아들[의 발]을 묶어서> (waya‘aqod)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고 칼 잡은 손을 들고 아들을 향해 내려치려 하였다. 하늘도 땅도 잠간 그 숨을 멈추는 순간이었다.

그 때! 하나님의 사자(使者: 天使)가 ‘황급히’ 칼 든 아브라함의 팔을 제지하면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라고 말하였다. 이 천사의 말 속에 나타난 ‘이중의 중복’은 일의 다급함과 중요성을 나타내는 수사적 표현이다. 그리고는 ① 아브라함의 그 ‘하나님[하늘]을 두려워하는 신앙’을 칭찬하시는 하나님의 뜻(=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② 아들을 잡아 번제로 바치는 일 대신에 숫양을 번제물로 보여주었다. 이른 바, 사람(주로 자식[子息])을 죽여 번제로 바치는 것 대신에! 동물 번제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전달된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③ 아브라함이 이 일(사건)이 일어난 그 곳의 이름을 ‘야훼-이래’(=여호와-이레)라고 명명(命名)하였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사건(①②③)이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우리의 기본 주제(=죽음을 극복하는 길)에 대한 바로 그 정답이라고 하겠다.

모리아 산 사건의 증언의 결론은 바로 이것, 즉 <죽음을 극복하는 길>에 관한 증언이다. 그것이 바로 창 22:12-14의 주요 내용이며, 이 내용은 위에서 이미 암시한 바대로 다음 세 가지 사건을 소개한다. 즉 다음의 ①②③이 바로 그것이다. 즉 ① 하나님(=하늘)을 두려워하는 아브라함의 믿음, ② 아들번제 대신에 숫양번제를 드리는 종교/제의(宗敎/祭儀)의 개혁, 그리고 ③ 야훼 이레(=여호와 이레) 선포가 바로 그것이다.

①아브라함의 경우, 그가 마치 죽음보다 더 가혹하게 느꼈었던 그 신(神)의 시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그 첫 번째 동력은 하나님(하늘)에 대한 “두려움” 신앙이라는 구약 최대의 경건(출 1:17,21)을 그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인간구원의 시작점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하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여 그가 그 무슨 특별한 신앙형식을 따로 갖추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하늘)에 대한 두려움, 즉 자기 양심에 대하여 ‘진실한 자’였다. 결국 그는 ‘하나님’(하늘)에 대한 ‘경외’(敬畏)가 모든 지식과 지혜의 근본(根本; 잠 1:7)임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②그러나 이러한 아브라함이기에, 오히려 그는 한 단계 위로 그의 신앙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즉 그는 여기서 <자식을 번제물(燔祭物; ‘ôlᾱh)로 드리는 이교(異敎)의 희생제의>를 철폐하고 그 대신! 그것을 <동물번제의 희생제의(犧牲祭儀)>로 바꾸는 종교/제의개혁[宗敎/祭儀改革]을 단행한 자의 조상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 시대는 ‘자식’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종교적 열정을 실천하는 사람이나 그러한 종교행위를 위대한 신앙이라고 문자적으로 믿는 신앙인은 없겠지만,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신앙적/종교적 열정을 추구하는 신앙인들 –이른 바, 광신/열광주의자들-은 오늘날도 얼마든지 있다. 구약에서는 ‘바알주의’(Baalism)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왕상 18:25-29). 21세기도 또한 신형 바알주의(물량신앙/교회주의 신앙 등등)가 오늘 교회를 지배하는 대세(大勢)가 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즉 이삭을 살린 것은(=우리를 죽음에서 살리는 것은) 인신희생제(人身犧牲祭)를 거짓종교로 보고 그것을 과감히 철폐한 곳(제의개혁[祭儀改革])에서만 비로소 가능하였던 것을 우리는 직시(直視)하여야 한다.

③아브라함은 또한 이러한 놀라운 사건, 즉 그의 신앙적 승리가 일어난 이곳을 가리켜 ‘야훼-이레’(=‘여호와-이레’)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야훼-예라에’라는 본래의 히브리어 글자(YHWH yērᾱ’eh; 마소라[Massora] 본문)를 시리아 역본과 라틴어 역본의 번역(‘야훼께서 보실 것이다/야훼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Yahweh will see.)에 따라 읽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히브리 ‘마소라’ 본문의 뜻(Yahweh will be seen=Yahweh will appear.)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옳다고 나는 본다. 비록 두 번역(①“야훼께서 보실[마련하실/준비하실] 것이다”와 ②“야훼께서 나타나실 것이다.”)이 모두 가능하기는 하나, 나로서는, ②의 번역이 더 나은 그리고 더 옳은 번역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죽음→다시 삶의 구원사건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곳’[‘야훼 예라에’=‘하나님의 현현 장소’]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롬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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