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이곤 칼럼] ‘영문 밖’의 ‘대속제물’

창 22장에 대한 신학적 명상 2: ‘이삭’과 ‘예수’ 사이의 동형 이론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아브라함이 나이 100세 때 얻은 외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이었다. 나이 75세 되던 때, 아브라함은 그의 하나님으로부터 한 특별한 소명(召命)을 받고, 즉시 그 명(命)대로 고향을 떠나 ‘유랑의 나그네’라는 순례생활을 시작한지 꼭 만 25년, 드디어, 아들을 주시겠다는 신(神)의 약속이(창 15:4; 18:14) 성취되어 얻게 된 바로 그 외아들이 ‘이삭’이었다. 물론, 아브라함이 잠시 믿음의 본궤도를 떠나, 당시의 관습(쉬프카[대리모]관습)에 따라 아내의 몸종(쉬프카)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과 이스마엘에 대한 신의 축복까지 ‘분에 넘치는 축복’을 받은 바 있으나, 여기서는, 그 이스마엘 사건은 우리의 본 주제와 다른 영역에 있기 때문에 비껴간다.

어느 날 이른 아침 갑자기, 이삭은 아버지의 명(命)을 받고 일어나, ‘사흘 길’(G. M. Landes, “Inanna’s Descent to the Nether World,” 1967, cf. C. Westermann, Genesis 12-36, 1985, p. 358.)이나 걸어서 모리아 산에 도착하게 된다. 나이 어린 ‘아이’(naḥar, child, 창 22:5)인데도 이삭은 손에 불과 칼을 든 그의 아버지와 함께 단 둘이서, 아버지가 지워준 번제용 나무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순수한 생각만 가지고, 이제는, 모리아 산 산정(山頂)으로 오르고 있었다. 마을도 성소도 옆에 없는 한적한 산에서, 즉 영문(營門; 城門; 聖殿 영역) 밖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이삭)는, 그에게는 저승사자와도 같은 독한 마음을 품고 있을, 아버지와 단 둘이서 함께 그리고 또 사흘 길이나 걸어 온 피곤한 몸이지만, 그러나, 이젠 으슥한 ‘산길’인 모리아 산 산길을 깊은 고뇌 속에서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가 낮이었는지 아니면 밤이었는지는 모르나, 그러나 이삭의 마음에는 아마도 그것은 전적으로 칠흑 같이 어두운 밤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이삭은, 비록 나이는 어리다 하여도, 당시에 열병처럼 유행하고 있었던 ‘아이 희생제(human sacrifice / child sacrifice, cf. R. de Vaux, Ancient Israel, 2 vols. 1961,1965, Pp. 441-446. 출 22:29; 레 18:21; 삿 11:34-40; 왕하 3:27 참조.)라는 나쁜 종교관습’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얼마간의 침묵의 시간이 지났다. 이삭이 입을 열고 아버지에게 여쭌다. “아버지, 불과 장작은 여기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버지 아브라함은 대답한다. “내 아들아,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친히 살피고 계실 [친히 준비하실/손수 마련하실] 것이다.” 이 짧은 대화 사이, 그리고 그 후, 목적지까지 두 사람이 침묵 속에서 함께 걷는 동안의(창 22:8c) 그 공백 기간은 우리 인간의 문학적 필법으로서는 결코 다 묘사해낼 수는 없는 기막힌 상황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아버지 아브라함은, 그러나, 한 마디의 말은커녕 기침 소리도 한 번 내지 않고 신속한 몸놀림으로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여 놓은 다음, [곧장] 자기 자식 이삭을 묶어서(봐이야아코드, wayya‘aqōḏ 창 22:9d)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창 22:9) 아버지 아브라함의 이러한 동작이 숨 가쁘게 진행되는 동안, 아들, 이삭은 털끝만큼의 저항이나 항변의 말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을 수용하고 순응한다는 의미다. 울지도 흐느끼지도 않았다! 이 아들을 보라! 먼 후일 우리 가운데 오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으로만 성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예시(豫示)하셨던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이삭이야 말로 메시아 예수의 진정한 ‘예표’(prefiguration)가 아니고 달리 무엇이랴!

예수와 이삭 사이의 이러한 동형(同型) 유비(類比; typological analogy)는, 그 무엇보다, 그분들의 신앙적 승리가 일어난 곳이 모두! ‘영문 밖’이라는 점(!)에서 그 일치점을 찾을 수 있다. 놀랍지 아니한가?

예언자들(구약 예언자들)의 피맺힌 호소들이 웅변하고 있듯이. <성전/성소 중심주의>라는 ‘형식주의 신앙’은 오히려 하나님과의 만남 즉 하나님의 뜻과의 만남을 저해하는 바리새주의적인 신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언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너희는 벧엘(성소)을 찾지 말며, 길갈(성소)로 들어가지 말고 브엘세바(성소)로도 나아가지 말라!”(암 5:4; 4:4)라고 하기도 하고 “너희가 나에게로 나아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성전] 마당만 밟을 뿐이다!”(사 1:12)라고 외치기도 하며, 심지어는, “이것이 야훼의 성전이다! 이것이 야훼의 성전이다! 이것이 야훼의 성전이다!(三重 외침) 라고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4)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성전]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굴혈[掘穴])로 보이느냐?”(렘 7:11)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 마지막 인용구인 예레미야 예언자의 외침은 우리 주님 예수께서도 목숨 걸고 인용(引用), 선포하신 말씀이기도 하다.(마 21:13; 막 11:17; 눅 19:46)

우리 주님 예수께서 그의 선교(宣敎) 공생애(公生涯)를 단지 3년 밖에! 못 사셨다는 것, 이른 바,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예언자적 활동과 가르침[성서교육]을 3년 이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것은 <세상은 철저히 어둠이고 예수님은 철저히 빛이기 때문>이었다는 말로 설명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설명은 있을 수가 없다 하겠다. 그러므로 <그의 대속(代贖)의 죽음과 새 창조(創造)로서의 부활>은 그를 ‘죽여야 할 이단(異端)’으로 내어 몬 유대교의 그 성전 안에서는 일어날 수 없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가? 반복되는 종교의식과 종교행사만 요란하게 반복해서 되풀이하고만 있는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가?

그러나 <영문 밖> 즉 ‘모리아 산(山)’과 ‘골고다’ 언덕은 모두 <성전 밖 또는 교회 밖>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리 온 인류를 위하여 대속(代贖)의 피를 흘리시며, 죽으시고 또 우리를 영원히 살리실 확실한 한 표징으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곳>, 그곳은 어디까지나 <성전 제의(祭儀) 밖>이었다. ‘교회’/‘성소’는 단지 인류구원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는 <하나님 선교>의 전진기지, 즉 아방가르드(avantgarde)일 뿐이지 천국 문을 여닫는 그런 권세(=열쇠)를 가진 곳(마 16:19)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착각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리고 …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 내 백성이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에 마음이 빼앗기고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었느니라.”(호 4:6, 12-12). 그러므로 마태 16:19에 대한 문자주의적인 신앙은 결코 바른 신앙이 아니!!라고 하겠다. 오히려 우리의 교회로 하여금 영원히 희망 없는 ‘종교 단체’로 전락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먼저 회개하여야 한다. 세상의 소금과 빛인 기독교 공동체가 먼저 회개하고 파멸 직전에 있는 한국사회를 구하기 위한 ‘회개(悔改)와 자성’(自省)하기를 먼저(!!) 하여야 한다. 늘 반복되는 예배의전만 되풀이하고 있는 그것이 이 사회를 위하여 무슨 ‘소금’이고 ‘빛’이 되겠는가? 두렵고 떨릴 뿐이다. 우선, 회개부터 하자!

오늘의 한국 상황은 아브라함의 결단과 이삭의 결단이 있어야 할 시점에 처하여 있다. 생산성 없는 이념투쟁! 생산성 없는 권력투쟁! 생산성 없는 지방색 고집! 아, 앞이 캄캄하다. 왜 우리는 살고자 하지는 않고 결사적으로 죽고자만 애쓰는가?(암 5:14; 겔 18:31-32) 왜 우리들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인류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베드로’(마 16:23 -24)가 되려고만 애쓰는가?

‘영문’ 안에서(‘엔 에클레시아’=교회 안에서) 인간구원의 길(말씀)이 선포되면, 교회는 그저 그냥 거기에 머물러 있지만 말고! ‘영문’ 밖으로(‘디아스포라’ 즉 세상 속으로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영광의 ‘변화 산’에서 초막 셋을 짓고‘(막 9:5; 눅 9:32) 거기 산 위에서 ’우리끼리‘(divide and rule하며?) 살려고만 하지 말고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막 9:17-18; 눅 9;37-39) 산 아래의 사회 속으로’(마 17:9,15; 막 9:9; 눅 9: 37) 내려와야만 하였듯이. 우리는 결단코 변화 산(마태 17:4) 위에만 있겠다고 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늘의 지상교회들은 앞 다투어 교회 안에만! 머물기를 바라고 교인 수만, 수직적으로든 수평적으로든 늘리려고만 애쓴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성전이다! 성전이다! 성전이다!>(렘7:4) 라고만 외치다가 성전과 함께 망한 선민(選民) 예루살렘 시민들처럼, 우리도 그런 운명에 처해지지 않도록 우리 다함께 주님께 진심으로 회개기도부터 드려야 할 것이다. <영문 안에서> 죽지 말고 <영문 밖에서> 이삭처럼, 예수처럼, 부활하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본문은 이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이삭-예수 동형이론, 모리아-골고다 동형이론은 이처럼 <죽지 않고 사는 길>에 관한 복음 선교의 최선의 한 방식이다.

신약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바, <영문 밖의 그(주 예수)에게로 나아가자!>라는 외침(히 13:13)은, 그러므로, 우리네 신앙공동체에게 <죽음으로부터 삶에로> 나아가자는 피맺힌 호소로서, 진정한 구원의 메시지(복음)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에클레시아’(=모이는 교회)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디아스포라’(Diaspora=the Dispersion, 흩어지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용어(‘흩어지는 교회’라는 용어)를 들으면, 그만, 그 용어의 전후 문맥을 살피지도 않고 또 더 이상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그냥 뒤로 넘어져버리는 순진하신 분들도 계시기 때문에(!), 이 복음 전하기가 참으로 조심스럽다. 민족이 이토록 위기 속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이 민족의 살 길을 위해 무엇이 ‘생명의 길’인지 그 길을 제시하는 책임을 우리가! 우리네 교회가 감당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삭-예수’ 동형이론 그리고 ‘모리아-골고다’ 동형이론(同型理論, typology)이 우리 시대를 그리고 우리 사회를 향하여 주는 메시지는 그렇다면 과연 무엇일까? 우선은 ‘죽기보다 힘 든다는 그 회개’를 먼저 하는 것이다. ‘자기 부정의 회개’ 말이다. 아버지의 뜻에 대한 절대 복종 말이다. 이삭의 침묵(창 22:8 -10)과 예수의 고통스런 기도(마 26:39)에서와 같은 아버지 뜻에 대한 절대복종 말이다. 그러나 교회는! 무엇 때문이지 전혀 ‘진심으로’ 회개하지를 않으려 한다. 오히려 어깃장을 놓으며 ‘믿음으로만’(sola fide), ‘은총으로만’(sola gratia)이라는 종교개혁 구호만 곡해(曲解)하여 외친다, 마치 중세 로마 교황청이 ‘천국 입장권’을 금화 한 푼만 받고 마구 팔듯이 면죄부 발행하기에만 급급하다. 아무리 가르쳐도 듣지 않는다. 우리 죄를 다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러는가?

그러나 회개하면 ‘길’이 보인다. ‘살 길’이 보인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taḥaṯ benô ; instead of his son, 창 22:13d)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3)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야훼 예라에’(“야훼께서 나타나실 것이다”)라고 하였다.”(창 22:14a) 그 때야 야훼께서 자신을 우리에게(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나타내 보이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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