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 김이곤 명예교수 |
따라서, ‘자유’(freedom)가 ‘운명’(destiny)을 타개한다고 보는 우리의 신념(cf.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I[1951], 182-186; vol. II[1957], 62-66)은 우리의 경험 현실에서는 부단히 도전과 저항을 받아 왔다. 오히려, 우리는 ‘운명’이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를 신비롭게 운영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죽게도 하고 살게도 하시며, 상하게도 하고 낫게도 하시기 때문이다.(신 32:39; 삼상 2:6)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운명’에 걸려든 석녀인 이 구제불가능의 아내를 위하여 그 아내가 감히(!) 아이를 갖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이삭이 하나님께 기도드리자, 야훼께서는 저 운명의 여인 리브가로 하여금 쌍둥이를 잉태하게 하셨다.(창 25:21d)!!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상황은 신학적으로 매우 풀기 어려운 국면에 접어든 셈이다.
이러한 국면 속에서, ‘리브가’는 다음과 같은 매우 특별한 신탁(神託; oracle)을 받는다. “두 민족이 너의 태 안에 들어 있다./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창 25:23) 말하자면, 동생 ‘야곱’이 형(兄) ‘에서’를 제치고 ‘약속의 아들’이 되고 ‘선민’(選民)의 조상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른 바, 이 말씀은 매우 해명하기 어려운 ‘예정론’ 교리에 관한 문제를 포함하여 ‘선택론’ 문제라든지, ‘운명론’ 문제라든지,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라든지, ‘하나님의 주권’ 문제라든지, 등등의 난해(難解)한 신학적 문제들과 얽혀지게 된다.
<그렇다면, ‘야곱’이 ‘에서’를 제치고 ‘약속의 아들’ 또는 ‘신(神)의 선민(選民)이 된 것은 운명적인 것인가? 아니면 ’야곱의 자유의지(공적/노력) 때문‘인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 어떤 다른 요소 때문인가?>
우리의 미래는, 그렇다면,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의지나 우리의 주장에 의하여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만들어갈 수 없는 것인가? 성서는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하나님은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마 3:9)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약속)이란 요지부동의 철칙으로서, 하나님 자신도 이 원칙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절대적인 것,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은 ‘운명’(‘숙명’)적인 것인가? 그러나 자기 아내를 위한 이삭의 기도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창 25:21)은 그런 단정을 속단이라고 보게 한다. 그러므로 운명과 자유, 자유와 운명의 대극 관계(polarity, cf. Paul Tillich의 조직신학)는 진지한 성서해석학적 토의를 요구하게 된다.
이 토의주제에 대한 <최선의 대답>은, 우리의 본문에 의하면,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위하여 그의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때, 야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만드신 운명>(the destiny that is already decisively shaped by God)이라는 문맥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운명! 실로, 야곱의 미래의 삶, 그 파괴적이고도 “험악한”(창 47:9) 삶은 ‘하나님의 말씀’(=리브가 신탁[神託])에 의하여 이미 결정/선포된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 하나님이 ‘결정하신 그 운명’은 또한 결코 인간(야곱)의 ‘자유’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자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야곱을 위하여 마련하신 그 ‘선택’들로 둘러싸여 있는 ‘자유’이다. 마치 다음과 같은 ‘욥’의 탄식을 듣는 것과 같다. “아,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하나님은] 빛을 주셨는고?”(개역 개정)/ “아, 어찌하여 하나님은 길 잃은 사람을 붙잡아 놓으시고, 사방으로 그 길을 [하나님은] 막으시는가?”(욥 3:23)
여기서 주목할 점은, 리브가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창 25:30; 리브가 신탁)의 중심내용은 <운명전환>에 관한 말씀이라는 점이다. 즉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마 19:30; 20:16; 막 9:35; 10:31; 눅 13:30), 이른 바, 대(大) 운명전환의 복음증언을 예견(豫見)하게 한다는 점이다.
성서비평학의 문맥에서는, 이러한 ‘리브가 신탁’과 같은 기사(記事)들을 가리켜서, 흔히, <후대의 사건을 통하여 고대의 사건을 ‘예견’(豫見)의 형식으로 설명하는 특이한 예언 문학>(vaticinium ex eventu)이라고 부른다. 즉, 이 신탁(神託; oracle)의 본질은 역사적 거리가 큰 두 시기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일종의 ‘시적 기교’(詩的 技巧; poetic craft)로서 이해된다. 그러므로 신학적 해석학의 차원에서는 이러한 시간적 거리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게 된다. 그럼에도 교회의 강단은 이러한 성서 문학적 표현들을 잘 설명해주는 친절(노력)을 외면하다보니, 성서의 진리가 엉뚱하게 왜곡되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모순’을 일으키게 되며 그러다 보니 [개신교]교회들은 개혁 이전의 중세 로마 가톨릭이 범한 자기모순보다 더 큰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런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의 참 모습의 등장은 더욱더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개입(심판의 종말 사건)이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신학적 해석학은 이러한 우주적 혼돈(카오스, chaos)을 헤쳐 나가는 유일한 출구(出口)이기도 하다 하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결정/선택하신 운명>에 따라, 야곱은 그의 ‘자유’(freedom) 의지(意志)를 가지고 그의 길을, 그의 그 “험악한”(창 47:9) 길을 감내(堪耐)하면서 걷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야곱이 승리한 그 길이기도 하였던 바로 그 길이다. 예언자 호세아는 이러한 감추어진 신의 역사 섭리를 예리한 예언자적 눈을 가지고 탁월하게 이해하고 해석해낸다. 즉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야곱이 모태에 있을 때에는 형과 싸웠으며, 다 큰 다음에는 하나님과 대결하여 싸웠다. 야곱은 하나님과 싸워서 이기고 울면서 은총을 간구하였다.”(호 12:3-4[히브리 본문은 4-5절]; 창 32:28[히브리 본문29절; 이하 [ ]안의 절수는 히브리 본문의 절수임]; 호 12:4[5]에서 말하는 ‘이기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는 ykl인데, 이 말의 뜻은 endure, be able to, can, be superior, win 등등의 뜻을 가진다. 호세아서에서는 야곱이 함께 씨름한 자를 ‘’하나님‘으로부터 천사’로 바꾸었다. 히브리어 ykl은 여기 창 32장과 호 12장에서는 모두 endure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엘로힘’은 본래는 gods, 즉 ‘강의 神들’ ‘divine beings’등을 의미하였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엘로힘’이 ‘야훼 하나님’과 연결되자 곧 ‘천사’[ἄγγελος]로 전이[轉移]된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관점에서 볼 때, 야곱 출생에 관한 이 기사(記事)는 야곱의 생애가 ‘하나님이 야곱을 위하여 선택하신 운명’과 그리고 ‘야곱 자신의 자유’ 사이에 진행된 대극(對極) 관계의 긴장을 극명하게 보여 준 한 매우 모범적인 예[範例]가 된다고 하겠다. 즉 야곱 생애의 실질적인 시작과 끝은 야곱이 리브가의 복중에 있을 때 리브가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리브가 신탁기사(神託記事)’>로부터 시작(창 25:21-26)하여 이중(二重)의 ‘야곱→이스라엘 개명기사(改名記事)’(①창 32:28 [29]; ②창 35:10)로 끝이 난다는 사실에서 그 모범됨을 볼 수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시작과 끝 사이에 들어있는 야곱의 생애(inclusio)는 험악한 세월’(창 47:9)이었음이 분명하고 그 내용은 또한 거듭되는 ‘운명 전이(轉移)의 파도치기’였음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운명’이란, 위에서 언급한 야곱 출생에 관한 우리의 본문(창 25:21-26)과 그리고 야곱 이야기 전체(창 25B-35장)에 대한 신학적/해석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신 ‘운명’은 결단코 하나님과 인간(야곱)이 모두 굴복하여야 하는 그 어떤 ‘숙명적인-절대 원리’는 아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운명’과 ‘자유’가 파도치기를 하되, 그러나 그 파도치기 운동은 언제나 철저히 ‘운명전이’(運命轉移)의 방식으로(만)!! 거듭되어 왔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예컨대, 야곱 이야기 다음에 이어지는 ‘요셉 이야기’(창 37-50)와 ‘모세 이야기’(출→신)가 또한 바로 그러하다.
그렇다. 야곱 출생에 관한 <리브가 신탁(神託)>은 분명 현실적 상황의 ‘뒤집힘’ [convertible, 顚倒]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이 사실은 모든 ‘자유’가 거기에 절대적으로 굴복해야 하는 그런 경직된 ‘숙명’이라는 것이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한다고 하겠다. 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시대에 있어서는 ‘장자’가 으뜸이 되고 첫째가 되어야하며 가장 많은 사랑과 축복을 받아야 하는 ‘천부적인 권리’를 갖고 있다는 신앙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이 리브가 신탁에서) 이러한 질서를 완전히 뒤집어엎으시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를 먼저 되게”(마 19:30; 20:16; 막 9:35; 10:31; 눅 13:30)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처럼, 하나님은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 1:28)라고 증언한 바가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자주, 매우 자주, <나그네, 고아, 과부>를 통하여, 그리고 신약성서에서도 또한 역시 매우 자주 <세리와 창기>를 통하여 <운명전이>의 구원을 수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부여하시는 운명’은 그러므로 경직된 불변의 철칙이 아니라 그의 운명전이(運命轉移)의 구원역사를 통하여/파도치기 운동을 통하여 ‘자유’를 자유 되게 하는 ‘구원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하시고 부여하시는 ‘운명’은 ‘자유’를 자유 되게 하는 ‘구원역사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 하나님을 구약성서는 ‘긍휼의 신’(‘엘 라훔’/ 출 34:6)이라고 하였고 신악성서는 그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하였다(요한 1서 4:8,16; cf. 요 3:16). ‘긍휼’이라는 히브리말은 ‘산모의 자궁’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 사랑과 그 긍휼은 ‘자궁의 진통’을 통하여 구원의 영광과 기쁨을 창출해내는 성격의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선택하시는 ‘운명’은 ‘자유’를 자유하게 하는 ‘구원사건’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부여해주시는 그 ‘운명’은 ‘운명전환’의 ‘파도치기’를 통하여 우리를 기어이(!) 구원해내시는 ‘고난신학적인’ 구원사건 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