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이곤 칼럼] 하나님 앞에서의 ‘축복’(창 27장)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형을 밀치고 들어와서, 그것도 반인륜적인 속임수를 사용하여, 연로하신 아버지(‘이삭’)가 ‘신의 이름’으로 장자 ‘에서’에게 내리려한 ‘축복’(‘베라카’)을 가로챈 둘째 아들 ‘야곱’의 그 ‘속이는 행위’와 그리고 그 속이고 속임 당하는 과정 속에서 아버지와 두 아들 사이에 주고받은 전체 대화(창 27:1-38) 가운데 나타난 그 ‘축복’(‘베라카’)이라는 말의 개념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이 이번 장(章)에서 다룰 기본 주제이다.

물론, 축복을 빼앗긴 자의 억울함을 아뢰는 장자 ‘에서’의 호소에 대한 아버지 ‘이삭’의 단호하고 냉정한 다음과 같은 대답, 즉 “네가 살 곳은 땅이 기름지지 않고 하늘에서 이슬도 내리지 않는 곳이다./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 것이며 너의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네가 애써 힘을 기르면 그가 네 목에 씌운 멍에를 네 스스로 부술 수도 있을 것이다.”(창 27:39-40)라는 대답은, 지난 번 칼럼(칼럼 24: ‘운명과 자유’)에서 이미 언급한 바, <운명과 자유>의 관계문제가 또 한 번 더 동일한 의미로 분명하게 설명되고 있다. 즉 ‘운명’은 ‘자유’를 이끌지만 ‘자유’를 전적으로 폐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장(章)에서서의 쟁점은 이러한 문맥 속에 등장한 매우 의외(意外)의 이 ‘축복’(‘베라카’)이라는 말이 갖는 그 신학적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주로, 하나님 앞에서의 ‘축복’이라는 말의 그 신학적 의미 규명에 주로 초점을 맞추려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축복’(‘베라카’)이라는 말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우선 우리는, 시편 1편과 그 외의 여러 곳에서 말하는 ‘복’/‘행복’(‘아쉬레’ happiness 시 128편과 144편 참조)이라는 말과는 이 ‘축복’(‘베라카’ blessing)이라는 말이 어떻게 다른지를 먼저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그 무엇보다, 시편 1편 등등에서 말하는 ‘복’/‘행복’이라는 말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더 강조점을 두어 사용하는 말인데 비(比)하여 ‘축복’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친히 선수(initiative)를 써서 부여하시는 그 선수행위’에 더 강조점을 두고 사용하는 말이라는 것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축복’이나 ‘행복’이나 간에 모두가 다 마지막에 와서는 ‘인간의 자유의지 행위’의 결과로서 이루어지는 결과물이지만, 그 강조점은 현저하게 구별된다는 것이 성서가 강조하는 점이다. 즉 ‘복/행복’(‘아쉬레’; ‘마카리오스’)은 인간의 자유의지 행위에 대한 신의 보상적 성격을 강조하지만, 그러나 ‘축복’(‘베라카’; ‘율로게토스’)은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그 선수행위’를 강조한다. 물론 둘 다의 그 구성내용은, 모두 히브리적인 사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주로 ‘복’을 물질적 보상과 번영으로 보고는 있지만, 그 결국은 모두 ‘신의 구원행위’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 장(章)에서 우리가 다루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으로서의 그 ‘축복’>의 의미규명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수를 사용하여 부여하신 그 ‘축복’>은 ①항구적이고 절대적인 힘(sovereign power)을 갖고 있다는 점과 [동시에] ②거센 파도치기를 통해서가는 ‘운명전환’의 기복(起伏)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보상으로서 받게 되는 그 ‘복[행복]’이라는 말과는 그 성격상 뚜렷하게 구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소서.”라는 말에는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어서, 따라서 “복 받으소서.”라는 통상적인 말과는 매우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즉 하나님께서 이삭[先祖]의 입을 통하여 두 아들, 야곱과 에서에게 선포한 ‘축복’은, 성서의 문맥에서 보면, 그것은 분명 ‘축복’(blessing)이지 ‘복’(happiness)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목사나 사제가 예배 끝 부분에서 행하는 ‘축도’는 ‘복’(happiness)의 선포가 아니라 ‘축복’(blessing)의 선포라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는지는 매우 궁금하다.

‘축복’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구원사적 의지를 강하게 담고 있는 말이라고 하겠다. 즉 하나님은 어떻게 하여서라도 인류를 ‘구원’하시려 하시며 복 주려 하시는 구원의 신이요 ‘긍휼’과 ‘사랑’의 신, ‘엘 라훔’(출 34:6)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증언이야 말로 ‘복음’인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문맥에서 보면, 특이하게도,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선택하여 ‘축복하셨다’는 것은, 마치 ‘운명’이라는 말과 결부시킬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인 통치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참으로 끈질기게, 그 선택하신 자와의 연결 관계를 결코 단념하시지 않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 ‘축복’은 ‘구원’에로 성취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구약성서에 기술되어 있는 여러 ‘구원사적 드라마들’과 ‘하나님의 종의 노래’(특히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들을 통하여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고 그리고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수난(受難)이라는 사건에서는 그 성취가 절정에 이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모든 구원사적 사건들을 우리의 본문은 감히 ‘하나님의 축복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야곱’과 ‘에서’, 그 두 아들에 대하여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행한 그 ‘축복’의 사건은, ‘운명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끈질기게 두 아들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에서’가 살 땅은 척박한 땅일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서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불평한다고 해서 척박한 땅이 주는 고난이 당장 해소되는 것이 아닌 것은 그 때문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야곱’이 살 땅도, 비록 교활하게 속이는 자의 땅이라 할지라도!, 그 풍요로운 땅이 곧 척박해지지는 않는다. 즉 ‘축복’의 위력은 부모의 힘[부모의 기도가 가진 힘]도 넘어선다. 거의!! 운명적이고 숙명적이라고 할만하다.

※[“내 아들아, 네가 받을 저주는 어미인 내가 대신 받으마.”(창 27:13)라고 어머니 ‘리브가’가 아들 ‘야곱’에게 한 말 참조, 그리고 ‘에서’에게 아버지 ‘이삭’이 남김 말, “내 아들아, 내가 그를 너의 주(主)로 세우고 그의 모든 친척들을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창 27:37)라는 말도 참조하라.]

그러나 창 27:40b가 말하는 대로, 이 거대하고 절대적인 힘, 이른 바, 운명과도 같은 저 거대 세력도 다음과 같은 아들 ‘에서’에게 준 아버지 이삭의 말, 즉 “만일 네가 애써 힘을 기르면, 너는, 그가 네 목에 씌운 멍에[=운명의 멍에]를 부술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 앞에서는 기이하게도 그 운명적인 말이 상대화된다. 말하자면, <운명과 자유>는 ‘대극’(對極)의 긴장 속에 있기는 하지만, 또한 ‘자유’가 아니라 ‘운명’이 모든 것을 주도하기는 하지만(즉 ‘자유’가 ‘운명’을 좌우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운명’이 ’자유‘를 무력/폐기시키지는 않는다. 이것이 ’신의 축복‘이 갖고 있는 고유한 성격이며 그리고 그 고유성은 그것이 지닌 구원사적 성격을 통해서 우리가 불가역적(不可逆的)으로 인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의 축복’(blessing)은 인간이 그의 ‘자유의지’만으로서 얻게 되는 ‘복’(happi- ness)과는 그 성격이 엄격히 구별되는데, 왜냐하면 신의 축복(blessing)은 반드시 운명전이의 역사(運命轉移의 歷史=救援史的 傳承 歷史)라는 힘겨운 ‘파도타기’를 반드시 전제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 야곱에게 어머니 리브가가 “네가 받을 저주는 내가 받으마.”(창 27:13)라고 하면서까지 ‘장자’의 배타적 특권에 감히 맞서서/항거하여 일어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은, 실로, 인간을 ‘축복’하시는 분이시다. 이 ‘축복’의 의미는 야훼의 이름을 빌려서 인간이 행하는 ‘축도’(祝禱)와 ‘축사’(祝辭)에서도 즉 모든 종류의 <하나님 앞에서의 축복>(창 27:7)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도’를 가지시고(‘구원의 의지’를 가지시고) 베푸시는 이 ‘축복’(blessing)은, ‘운명전이’(運命轉移)의 파고(波高) 높고 “험악한”(창 47:9) 세월(passing on)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사적 섭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것을 받는 자에게는 그것 때문에 특별한 ‘믿음’이 필요(!!)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축복’의 성취과정 속에는 ‘행복’을 파괴하고 그 ‘행복’에 역행하는 과정, 즉 일종의 인간으로서는 이겨내기 힘든 혹독한 ‘신의 시험’(test)이라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던 경우와도 상응 일치하는 것이다.

최소한 매주 1회 이상은 ‘야훼 하나님 앞에서’(=하나님의 이름으로 또는 삼위일체 하나님 의 이름으로) 축복을 받으시는 이 땅의 모든 평신도들!!!에게는, 그러므로, 그 축복을 받을 수 있을만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 풀어지는 ‘축복’은 그 축복의 성취과정에서 겪게 될 혹독한 ‘신의 시험’(test of God)을 믿음으로 이겨내어야만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 은 자에게는 모름지기 아브라함과 야곱이, 그리고 요셉과 모세가 가졌던 그런 ‘믿음’이 필 요하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 앞에서의 축복에는 반드시 시련극복을 전제한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즉 야훼 하나님 앞에서 공적으로[祭儀的]으로 늘 축복(blessing)을 받는 우리 신앙인들은, 저들처럼, 즉 혹독한 ‘신의 시험’을 이겨내고 극복한 저들처럼, 즉 모리아 산에서의 아브라함처럼(창 22장), 얍복 강에서의 야곱처럼(창 32장; 호 12:4[5]), 요셉의 집[總理 官舍]에서의 요셉처럼(창 45:4-15; 50:15-21), 미디안에서 이집트로 나아가는 광야길, 어느 야숙 숙소(野宿 宿所)에서 모세 혹은 그의 아들을 죽이려 하신 야훼 하나님의 길을 두 팔로 가로막고 나서서 그와 대결한 모세의 아내 ‘십보라’처럼(출 4:24-26), 그리고 거듭, 거듭 반역하고 배신하는 음란한 선민(選民) 이스라엘을 죽음의 광야로 ‘꾀어내어’ 40여년 세월동안이나 혹독하게 채찍질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징계행위를 보면서 오히려 그 하나님의 징계행위(‘가시와 담’ 호 2:6[8]) 안에서 멸망할 선민(選民) 이스라엘로 하여금 참 이스라엘로 만들어 내시려 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그 참 사랑의 역설적(逆說的)인 구원교육 행위를 읽어낸 예언자 호세아처럼(호 2:6-7[8-9],14-15[16?17])!! 야훼 하나님의 심판행위, 특히, 야훼 하나님의 십자가 심판(저주, 신 21:22)행위를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행위와 부활의 구원섭리를 읽어낼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신앙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신앙이며, 이 신앙이야말로 마지막 심판을 이겨내는 진정한 승리의 신앙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신앙의 참 깊이를 체득한 신앙인이야말로 기독교의 왜곡된 물량주의적인(바알주의적인) 거짓 신앙을 극복할 수 있는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신앙인이야말로 종교개혁 이래로 개신교가 범해 온 반(反) 기독교적, 반(反) 교회적, 반(反) 성서적 신앙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겠다.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해 창조 신앙 무력화돼"

창조 신앙을 고백하는 한국교회가 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신앙이 사사화 되면서 연대 책임을 물어오는 기후 위기라는 시대적 현실 앞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마가복음 묵상(2): 기독교를 능력 종교로 만들려는 번영복음

"기독교는 도덕 종교, 윤리 종교도 아니지만 능력 종교도 아님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실존적 현실이 때때로 젖과 꿀이 흐르는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특별기고] 니체의 시각에서 본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무신론자", "반기독자"(Antichrist)로 알려진 니체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유대인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인? 무종교인들의 증가는 기성 종교에 또 다른 도전"

최근에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무종교인의 성격을 규명하는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정재영 박사(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종교와 사회」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신의 섭리 숨어있는 『반지의 제왕』, 현대의 종교적 현실과 닮아"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의 섭리와 『반지의 제왕』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숭실대 권연경 교수(성서학)는 「신학과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논문소개] 탈존적 주체,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 주체

이관표 박사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