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
물론, 축복을 빼앗긴 자의 억울함을 아뢰는 장자 ‘에서’의 호소에 대한 아버지 ‘이삭’의 단호하고 냉정한 다음과 같은 대답, 즉 “네가 살 곳은 땅이 기름지지 않고 하늘에서 이슬도 내리지 않는 곳이다./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 것이며 너의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네가 애써 힘을 기르면 그가 네 목에 씌운 멍에를 네 스스로 부술 수도 있을 것이다.”(창 27:39-40)라는 대답은, 지난 번 칼럼(칼럼 24: ‘운명과 자유’)에서 이미 언급한 바, <운명과 자유>의 관계문제가 또 한 번 더 동일한 의미로 분명하게 설명되고 있다. 즉 ‘운명’은 ‘자유’를 이끌지만 ‘자유’를 전적으로 폐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장(章)에서서의 쟁점은 이러한 문맥 속에 등장한 매우 의외(意外)의 이 ‘축복’(‘베라카’)이라는 말이 갖는 그 신학적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주로, 하나님 앞에서의 ‘축복’이라는 말의 그 신학적 의미 규명에 주로 초점을 맞추려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축복’(‘베라카’)이라는 말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우선 우리는, 시편 1편과 그 외의 여러 곳에서 말하는 ‘복’/‘행복’(‘아쉬레’ happiness 시 128편과 144편 참조)이라는 말과는 이 ‘축복’(‘베라카’ blessing)이라는 말이 어떻게 다른지를 먼저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그 무엇보다, 시편 1편 등등에서 말하는 ‘복’/‘행복’이라는 말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더 강조점을 두어 사용하는 말인데 비(比)하여 ‘축복’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친히 선수(initiative)를 써서 부여하시는 그 선수행위’에 더 강조점을 두고 사용하는 말이라는 것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축복’이나 ‘행복’이나 간에 모두가 다 마지막에 와서는 ‘인간의 자유의지 행위’의 결과로서 이루어지는 결과물이지만, 그 강조점은 현저하게 구별된다는 것이 성서가 강조하는 점이다. 즉 ‘복/행복’(‘아쉬레’; ‘마카리오스’)은 인간의 자유의지 행위에 대한 신의 보상적 성격을 강조하지만, 그러나 ‘축복’(‘베라카’; ‘율로게토스’)은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그 선수행위’를 강조한다. 물론 둘 다의 그 구성내용은, 모두 히브리적인 사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주로 ‘복’을 물질적 보상과 번영으로 보고는 있지만, 그 결국은 모두 ‘신의 구원행위’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 장(章)에서 우리가 다루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으로서의 그 ‘축복’>의 의미규명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수를 사용하여 부여하신 그 ‘축복’>은 ①항구적이고 절대적인 힘(sovereign power)을 갖고 있다는 점과 [동시에] ②거센 파도치기를 통해서가는 ‘운명전환’의 기복(起伏)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보상으로서 받게 되는 그 ‘복[행복]’이라는 말과는 그 성격상 뚜렷하게 구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소서.”라는 말에는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어서, 따라서 “복 받으소서.”라는 통상적인 말과는 매우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즉 하나님께서 이삭[先祖]의 입을 통하여 두 아들, 야곱과 에서에게 선포한 ‘축복’은, 성서의 문맥에서 보면, 그것은 분명 ‘축복’(blessing)이지 ‘복’(happiness)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목사나 사제가 예배 끝 부분에서 행하는 ‘축도’는 ‘복’(happiness)의 선포가 아니라 ‘축복’(blessing)의 선포라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는지는 매우 궁금하다.
‘축복’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구원사적 의지를 강하게 담고 있는 말이라고 하겠다. 즉 하나님은 어떻게 하여서라도 인류를 ‘구원’하시려 하시며 복 주려 하시는 구원의 신이요 ‘긍휼’과 ‘사랑’의 신, ‘엘 라훔’(출 34:6)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증언이야 말로 ‘복음’인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문맥에서 보면, 특이하게도,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선택하여 ‘축복하셨다’는 것은, 마치 ‘운명’이라는 말과 결부시킬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인 통치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참으로 끈질기게, 그 선택하신 자와의 연결 관계를 결코 단념하시지 않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 ‘축복’은 ‘구원’에로 성취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구약성서에 기술되어 있는 여러 ‘구원사적 드라마들’과 ‘하나님의 종의 노래’(특히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들을 통하여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고 그리고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수난(受難)이라는 사건에서는 그 성취가 절정에 이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모든 구원사적 사건들을 우리의 본문은 감히 ‘하나님의 축복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야곱’과 ‘에서’, 그 두 아들에 대하여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행한 그 ‘축복’의 사건은, ‘운명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끈질기게 두 아들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에서’가 살 땅은 척박한 땅일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서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불평한다고 해서 척박한 땅이 주는 고난이 당장 해소되는 것이 아닌 것은 그 때문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야곱’이 살 땅도, 비록 교활하게 속이는 자의 땅이라 할지라도!, 그 풍요로운 땅이 곧 척박해지지는 않는다. 즉 ‘축복’의 위력은 부모의 힘[부모의 기도가 가진 힘]도 넘어선다. 거의!! 운명적이고 숙명적이라고 할만하다.
※[“내 아들아, 네가 받을 저주는 어미인 내가 대신 받으마.”(창 27:13)라고 어머니 ‘리브가’가 아들 ‘야곱’에게 한 말 참조, 그리고 ‘에서’에게 아버지 ‘이삭’이 남김 말, “내 아들아, 내가 그를 너의 주(主)로 세우고 그의 모든 친척들을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창 27:37)라는 말도 참조하라.]
그러나 창 27:40b가 말하는 대로, 이 거대하고 절대적인 힘, 이른 바, 운명과도 같은 저 거대 세력도 다음과 같은 아들 ‘에서’에게 준 아버지 이삭의 말, 즉 “만일 네가 애써 힘을 기르면, 너는, 그가 네 목에 씌운 멍에[=운명의 멍에]를 부술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 앞에서는 기이하게도 그 운명적인 말이 상대화된다. 말하자면, <운명과 자유>는 ‘대극’(對極)의 긴장 속에 있기는 하지만, 또한 ‘자유’가 아니라 ‘운명’이 모든 것을 주도하기는 하지만(즉 ‘자유’가 ‘운명’을 좌우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운명’이 ’자유‘를 무력/폐기시키지는 않는다. 이것이 ’신의 축복‘이 갖고 있는 고유한 성격이며 그리고 그 고유성은 그것이 지닌 구원사적 성격을 통해서 우리가 불가역적(不可逆的)으로 인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의 축복’(blessing)은 인간이 그의 ‘자유의지’만으로서 얻게 되는 ‘복’(happi- ness)과는 그 성격이 엄격히 구별되는데, 왜냐하면 신의 축복(blessing)은 반드시 운명전이의 역사(運命轉移의 歷史=救援史的 傳承 歷史)라는 힘겨운 ‘파도타기’를 반드시 전제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 야곱에게 어머니 리브가가 “네가 받을 저주는 내가 받으마.”(창 27:13)라고 하면서까지 ‘장자’의 배타적 특권에 감히 맞서서/항거하여 일어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은, 실로, 인간을 ‘축복’하시는 분이시다. 이 ‘축복’의 의미는 야훼의 이름을 빌려서 인간이 행하는 ‘축도’(祝禱)와 ‘축사’(祝辭)에서도 즉 모든 종류의 <하나님 앞에서의 축복>(창 27:7)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도’를 가지시고(‘구원의 의지’를 가지시고) 베푸시는 이 ‘축복’(blessing)은, ‘운명전이’(運命轉移)의 파고(波高) 높고 “험악한”(창 47:9) 세월(passing on)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사적 섭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것을 받는 자에게는 그것 때문에 특별한 ‘믿음’이 필요(!!)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축복’의 성취과정 속에는 ‘행복’을 파괴하고 그 ‘행복’에 역행하는 과정, 즉 일종의 인간으로서는 이겨내기 힘든 혹독한 ‘신의 시험’(test)이라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던 경우와도 상응 일치하는 것이다.
최소한 매주 1회 이상은 ‘야훼 하나님 앞에서’(=하나님의 이름으로 또는 삼위일체 하나님 의 이름으로) 축복을 받으시는 이 땅의 모든 평신도들!!!에게는, 그러므로, 그 축복을 받을 수 있을만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 풀어지는 ‘축복’은 그 축복의 성취과정에서 겪게 될 혹독한 ‘신의 시험’(test of God)을 믿음으로 이겨내어야만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 은 자에게는 모름지기 아브라함과 야곱이, 그리고 요셉과 모세가 가졌던 그런 ‘믿음’이 필 요하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 앞에서의 축복에는 반드시 시련극복을 전제한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즉 야훼 하나님 앞에서 공적으로[祭儀的]으로 늘 축복(blessing)을 받는 우리 신앙인들은, 저들처럼, 즉 혹독한 ‘신의 시험’을 이겨내고 극복한 저들처럼, 즉 모리아 산에서의 아브라함처럼(창 22장), 얍복 강에서의 야곱처럼(창 32장; 호 12:4[5]), 요셉의 집[總理 官舍]에서의 요셉처럼(창 45:4-15; 50:15-21), 미디안에서 이집트로 나아가는 광야길, 어느 야숙 숙소(野宿 宿所)에서 모세 혹은 그의 아들을 죽이려 하신 야훼 하나님의 길을 두 팔로 가로막고 나서서 그와 대결한 모세의 아내 ‘십보라’처럼(출 4:24-26), 그리고 거듭, 거듭 반역하고 배신하는 음란한 선민(選民) 이스라엘을 죽음의 광야로 ‘꾀어내어’
이 신앙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신앙이며, 이 신앙이야말로 마지막 심판을 이겨내는 진정한 승리의 신앙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신앙의 참 깊이를 체득한 신앙인이야말로 기독교의 왜곡된 물량주의적인(바알주의적인) 거짓 신앙을 극복할 수 있는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신앙인이야말로 종교개혁 이래로 개신교가 범해 온 반(反) 기독교적, 반(反) 교회적, 반(反) 성서적 신앙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