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연구원 '나무와 새' 최의헌 원장 |
상실은 인간의 실존이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 그런데 어떤 상실은 당연시 되면서 어떤 상실은 우리에게 깊은 상처로 남게 된다. 그 이유를 단순하게만 표현하자면 ‘계속 연결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계속 연결되고 싶은 욕구 중 일부는 부정적이거나 악한 근원을 갖는다. 예를 들어 주운 물건을 원 주인에게 돌려줘야 하는 상황에서 거부감을 느끼거나 하인처럼 부리던 동료나 아랫사람 혹은 애인과의 결별을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는 인간의 소유욕과 지배욕, 더 나아가 파괴욕구를 반영하고 있다. 상실이 아픈 이유는 상실을 당한 사람의 심리에 있지만 상실의 특성 때문에 생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상실은 전혀 예상하지 않은 순간에 찾아오고, 또 어떤 상실은 이른바 ‘빼앗겨서 상실당하는’ 피해 경험이다. 그렇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큰 아픔이지는 않았을 법한데 상실의 특성에 따라 아픔이 커질 수 있는 것이다.
상실을 치유하는 시간은 개인마다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단순하게만 설명하자면 상실에 있어서 사람은 두 번의 하향과 두 번의 상향을 경험하는데, 과정으로는 세 단계로 설명할 수 있다. 하향은 기운이 빠지는 것이다. 의욕이 상실되고 주변을 향한 관심에서 멀어진다. 상향은 기운이 올라가는 것인데,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는 별개이다. 기운이 올라가면서 기분이 좋아지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고 짜증과 분노, 불필요하거나 불건전한 생각과 행동이 늘어나는 식일 수도 있다. 두 번의 하향과 두 번의 상향이라고 했는데 과정으로는 세 단계라고 하니 순간 이해가 안 갈 것이다. 단계는 첫 번째가 하향이며, 두 번째는 상향이고, 세 번째는 하향과 상향의 혼재이다. 첫 번째 단계는 이른바 ‘멍한 시기’이다.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상황을 직시하기보다는 일단 멍한 상태가 되어 충격의 상황과 자신을 떨어뜨려 놓으려는 반응을 나타낸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는 없으므로 두 번째 단계인 ‘직면의 시기’로 이어지게 된다. 직면의 시기는 능동적인 재경험의 시기라고 부를 수 있겠다. 부정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점, 분명 벌어진 사실이라는 점, 이것이 현실이라는 점을 직시하며 자신을 그 현실에 맞닥뜨린다. 세 번째 단계는 ‘정리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삶으로 적응해가는 과정이다.
각 과정을 매우 단순하게 함축해서 표현했지만 매우 중요한 단계이다. 어느 단계도 빠지지 않으며 다음 수순으로 잘 이행되어야 전체적인 치유기간이 짧아질 것이다. ‘상실을 나누는 사람들’은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이 거쳐야 하는 심리 과정을 비교적 무난하게 차례대로 경험해가면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이다. 상실 회복의 각 단계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머무는 예를 생각해보자. 상실을 나누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머무는 상태에서 벗어나 다음 단계로 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인 멍한 시기에 머무는 대표적인 예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있다. 이 질환은 충격 이후 예민성, 둔감성, 재경험이 반복적인 증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의 재경험은 두 번째 단계인 직면 시기에서의 재경험과 질적으로 다르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서의 재경험을 수동적인 재경험이라고 한다면 직면의 시기에서의 재경험은 능동적인 재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재경험이 수동적으로 일어나면 그것은 멍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또 다른 충격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피해서 될 일이 아니다”라고 조언하는 것처럼, 멍한 시기에 머무는 사람이라면 가급적 그가 자발성을 가지고 상실의 충격에 현실적으로 다가서서 직면하는 과정으로 이어가게 하는 것이 좋다. 두 번째 단계인 직면 시기에 머무는 한 가지 예로 ‘집착’을 들 수 있다. 직면의 시기에서 보이는 집착은 충격을 벗어나기 보다는 충격에 머물게 하는 경향이 강하다. 끊임없이 상실의 이유를 찾으며 정당성을 타진한다. 상실이 보상이라는 법적 현실과 연결되어 있을 때 더욱 그러할 수 있다. 무엇을 정확하게 결론 내려고 하는 심리에서 출발하긴 했지만 나중에는 결론은 안중에도 없고 끊임없는 물음과 생각에만 빠져가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머무는 사람들에게는 ‘적절한 하향’이 필요하다. 어떤 이는 자기 힘이 있을 때까지 버티다가 더 이상 자력으로 버티지 못하는 순간에 가서야 하향이 이루어지는데 그러다보면 그 하향이 건전하게 흘러가지 못하고 극단적인 하향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여력이 있을 때 하향을 경험하게 해야 한다. 대개 죄책감, 우울, 외로움, 현실, 등의 주제를 함께 나누다보면 내면의 하향이 밖으로 이어지므로 상실을 나누는 사람들은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러한 감정들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정리의 시기에 이르면 하향과 상향이 반복되면서 대상의 상실과 자신의 홀로됨을 실존으로 인정하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두 가지를 통해 정리가 굳건해지는데 첫째는 혼자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둘째는 다른 대상을 만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로만 정리가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자살로 대상을 상실하는 것은 다른 상실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는 앞서 말한 상실의 특성 자체가 상처를 크게 만들 수 있는 대표적인 경우 중 하나이다. 극단적으로는 먼저 떠난 이와의 동일시가 깊어져서 유가족 자신이 자살의 충동을 느끼게 된다. 다른 상실에 비해 상향과 하향의 정도가 심해서 두 가지가 혼재되는 정리의 시기가 매우 불안정한 양상을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상실의 경우보다 ‘상실을 나누는 사람들’의 필요가 절실하다. 1년 동안 동성애와 자살에 대한 칼럼을 썼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깊이 관심을 가지시는 의미상의 히브리인, 즉 약한 소수자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따라 우리 모두 의도적으로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