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禧年: the year of Jubilee: לבויה תנשׁ)이라는 말의 뜻은 “큰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부는 해”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큰 수양 뿔나팔 소리로 좋은 소식[gospel]을 내외에 크게 선포하는 이 “희년선포”는, 레위기 25장의 문맥을 통하여 보면, 분명 논의할 여지 없이, “원래(原來)의 출발(出發) 상태(狀態)로 돌아가라!”라는 의미(restitutio in integrum)를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본래, 이 희년(禧年)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새 땅 가나안에 들어 간 바로 그 때를 그 출발점으로 계산하여 안식년을 일곱 번째 맞이하는 해, 즉 7년을 일곱(7)번 하면 7×7=49해서 49년이 되는데, 이 49년을 보내고 난 후 처음 맞는 해, 즉 “50년째 되는 해”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년수를 따져 건강한 경우 80-90년으로 잡는다면, 일생에 한 번 이상은 더 이상 만나기 힘든 해가 “희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이 “희년”은, 특히 7이라는 숫자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볼 때, 이 희년은 안식년의 정신과 긴밀한 연결점을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안식년”을 “안식일” 수(數)만큼 일곱 번 반복한다는 것이나, 또 레위기 25장의 “희년” 본문을 “안식년법”의 연속 씨리즈로 구성하고 있다는 점등은 그러한 추측을 하게 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안식년과 희년의 공통된 기본 정신은 “쉼” “휴식” “안식” “종식” 심지어는 “끝” 또는 “끝장”을 통하여! “새로운 시작”을 열자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희년선포는 철저한 “대(大) 회개(悔改)”를 거친 후 선포하는 대 사면(赦免)의 선포, 대 탕감(蕩減)의 선포, 대 속죄(贖罪)의 선포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해를 예수님은 “은혜의 해”라 불렀던 것입니다. 즉 180도 돌아서서 모든 것을 탕감하고 원점에서 “다시!!” 출발한다는 데에 그 기본 정신이 있다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목할만한 것은, 여기서, “다시”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새롭게 시작”을 하되 그 시작을, 결단코, 전적인 무(無)로부터 새롭게 창조적으로 시작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은 하였었지만 한때 시작하면서 설계하고 꿈꾸며 계획하였었던 그것이 50여년 세월 동안 너무 많은 시행착오(試行錯誤)!를 하였기 때문에 이젠 더 이상 현재의 상태대로는 앞으로 나아가기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이 되어서, 그래서, 과거 50년에 대한 철저한 자기비판을 통하여! “전면적으로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다시”라는 말을 쓰고 있다는 그 점입니다.
그런데, 금년은 우리 기독교 장로회가 출발한지 50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그러므로, 금년 2003년은 “기장의 희년”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호칭(呼稱)이 향후 50년[반세기] 동안은 결코 다시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그런 일생일대에 단 한번 밖에 없는 중요한 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희년”은 지금부터 50년 후(後)가 되니까, 그 때는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다 70세 정년은퇴를 한 후(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장 출발 반(半) 백년을 회고하는 금년 총회는, 정말 하늘이 내려 준 특별한 기회를 맞는 총회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금번 총회는 그 여느 때처럼 하나의 일과성(一過性)으로 지나갈 수는 없는 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격의 자기 반성적 회고는 결코 “복고주의적(復古主義的) 논리의 한 일환”으로 보아서는 안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조명해 보는 일을, 그 무슨 억지춘향이 형식으로, 50년이 되었으니까 할 수 없이 한다는 식으로 하는 것은 분명히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희년법”(禧年法: 레 25: 8-17, 23-55)의 중심적 요구가 <“돌아가라!”라는 원상회복(原狀回復) 또는 원상복귀(原狀復歸)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희년정신을 강조하는 일이 그 무슨 복고주의(復古主義)를 강조하는 낡은 사고방식인양 오해를 받을 수도 있으므로, “희년 정신”에 기초한 우리 기장의 자기 반성은 반드시 해석학적 사전 점검(事前 點檢)을 선행(先行)시켜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희년” 또는 “희년법”의 기본 정신이 “원상복귀”의 요구, 즉 출발점으로 “돌아가라”라는 요구에 있다면, 이에 대하여 우리가 묻게되는 질문은 분명 다음 세가지, 즉 ①첫째, 돌아가야 할 그 “원상태(原狀態)” 즉 그 출발 때의 원상태(原狀態)라는 것은 “무엇이냐?(what?)” 라고 하는 것(what의 문제)이고 ②둘째는, “왜(why?)” 우리는 그 원상태로 돌아가야 하는가? 라고 하는 것(why의 문제)이며 그 다음 ③세째로는, 우리가 원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how?)” 돌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how의 문제), 이 세가지 문제가 제기된다고 하겠습니다.
희년법에 관한 가장 고전적(古典的)인 성서본문인 레위기 25: 8-17, 23-55에 의하면, 매우 놀라웁게도, 본래의 인간 출발점인 그 원상태는 “토지” “가옥” 그리고 “몸”이라고만 규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가지는 하나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천부의 인간(人間) 자산(資産)으로서 그 성격상 인간이 노동한 그 대가로 얻은 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인생을 살아가야할 그 “인생 자금”으로서, 인간 생명 활동의 가장 기본적인 자금(資金)으로서 주신 것이라고 규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산(資産)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것”이므로 인간은 단지 “소작인”(小作人)으로서, “임대인”(賃貸人)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품꾼”으로서만 그 자산(資産)을 이용할 뿐이요 인간이 마치 그 자산의 주인인 것처럼 임의(任意)로 사고 팔고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기본자산을 가리켜 여기 레위기 25장에서는 히브리말로 “아훗짜”(הזחא)라고 불렀는데(레위기 25장에서는 단 한 차례 25:46에서만 לחנ의 hith -pael 동사가 사용되었고 명사 הלחנ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고 있다), 이 말을 우리말로는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소유” 또는 “기업”(基業)이라는 말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토지” “가옥” 그리고 “몸”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한 평생의 인생을 살아 갈 가장 기본적(基本的)인 출발자금으로 주신 것으로서 그 원주인(原住人)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을 자의(自意)로 매매(賣買)하여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는 언제나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므로!(신 15:11), 인간은 본의(本意) 아니게도, 자기의 생을 살아가면서 부득이 하게 “빚”을 지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되어 있고, 그 “빚”에 “이자”가 붙어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마침내는 그 “이자”를 더 이상 갚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부득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서는, 자신의 “몸”을 파는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노예제도(奴隸制度)!!”라는 것을 만들어 내었던 그 원흉(元兇)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단지 경제적 이유 하나 때문에 “노예”로 만들고 그 노예를 또 사고 팔고 하는 일이 있어서는 결단코 안된다는 것이 희년을 선포하게된 성서의 그 근본동기였던 2
것입니다.
(1) 희년법의 기본 쟁점은, 그러므로, 단호하게 말하건대, 바로 이 “노예제도”라는 인간 비인간화(非人間化)의 현상을 타개하려는 동기, 이른 바, “인간 구원”이라는 분명한 동기를 가지고 일어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what"의 문제). 이것이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그래서, 희년선포의 제1성은 “자유”(自由; “떠롤” רורד)의 공포(公布)!!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자유”(自由)의 선포(宣布)가 희년 및 희년법 선포의 중심 정신이었던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의 자유,” “인간의 해방,” “인간의 구원(救援)”이 바로 다름 아닌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그 우리의 출발점, 그 우리의 시작점, 그 우리의 원상태라는 것!!을 이 희년법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유명한 누가복음 4:18-19(cf. 사61: 1-2)에 의하면, 예수님의 그 증언도 또한 실상은 명백한 희년선포의 메시지로서, 우리가 돌아가야 할 바로 그 “새로운 시작점”이 바로 그 <인간의 자유/해방/구원>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인간구원”을 출발점으로 하지 않는 모든 종교는 거짓 종교요 우상 종교입니다. 이것은 성서적 신앙의 기초요 상식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기초와 그 상식이 무너졌다 는 그것입니다!(cf. 시 11:3[4],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2) 우리 기장이 50년 전에 출발하였던 그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한 다는 것은 이젠 자명하고 당연한 과제가 된 것입니다. 즉 우리가 그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분명, 인간 구원을 동기로 하여 출발한 우리의 그 출발이 50년 세월을 지나는 동안 더 이상 현 상태대로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인간구원의 본래적 과제로부터 많이 일탈(逸脫)을 하는 결정적인 “시행착오”(試行錯誤)를 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왜 돌아가야 하는가?”라는 이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직 이 대답 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why?"의 문제).
인간 구원을 동기로 하고 또 인간 구원을 목표로 한 우리 기장의 출발이 이젠 희년 회기(回歸)의 결단을 촉구할만큼 “결정적인 시행착오”에 빠졌다면, 이것은 우리에겐 대단한 위기(危機)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리고 교회의 강단이 구원의 방주 또는 구원의 지표가 되지 못하고 신학적 씨니시즘(cynicism)에 빠져 있다면(“구원의 방주”라는 그런 전근대적인 교회지상주의적 언동은 삼가하라 라고 빈정대는 유형의 씨니시즘에 빠져 있다면), 즉 우리 기독교 신앙 공동체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을 스스로 이미 포기해 버린 상태라면, 그것은 의인 열명이 없어서 불바다가 된 소돔성(창 18:32)이나 의인이 한 사람이 없어서 멸망한 예루살렘(렘 5:1)과 결코 다름이 없는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이러한 위기를 불러들인 장본인들인 그 원수가 과연 무엇인지를 규명해야할 과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새 문화에 접하였을 때, 이스라엘의 존재기반을 가장 살육적으로 위협했던 최대의 원수를 구약성서(출 17: 16)는 단 한마디로 “바알주의”(=“가나안주의”=“아말렉주의”)!!라는 말로 표현하였던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알주의” 또는 “가나안주의” 또는 “아말렉주의”라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신명기는 이것을 가리켜 “말씀종교”와 대립하는 “형상종교”라고 간명하게 설명하였고 형상종교의 위험을 강력히 경계한 바가 있었습니다(신 4: 9-24, 25-31, 32-40) 말하자면, “바알주의”라는 것은 “말씀종교”에 대립하는 이교적 신앙 또는 이교적 이념 일반 3
을 가리킨다고 짧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반(反) 말씀주의”는 가나안주의적 ①물질주의, ②향락주의(sex종교), 그리고 ③힘의 이데올로기(권력지상주의)를 숭상하는 이념체계 일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념체계는 하나님의 산이 있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토라”를 주시며 자기를 계시(啓示)하신 그 토라종교의 신정이념(神政理念)과는 그야 말로 “물과 불의 상극관계였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주의(바알주의)의 이념체계는 아말렉과의 전쟁을 통하여 “야훼 하나님의 영원한 원수”(출 17:16)가 되었던 바로 그것입니다.
50년 전, 우리는 “말씀종교의 바른 수립”이라는 기치를 내세우고 물질주의, 향락주의, 힘의 논리를 추종하는 가나안적 세속주의와 그리고 정치권력 또는 교권으로 신앙양심을 짓밟는 바리새주의적 형식주의 종교로부터 신앙양심을 추구하는 “말씀 종교”의 엑소더스(exodus)를 단행하여 지금까지 50여년이라는 반세기 역사를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기장 예장 할 것 없이, 장로교든 감리교든 성결교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보수든 진보든 그런 것과도 상관없이 모두들 한결같이 바알주의의 세찬 바람에 휘말려 서구 교회가 걸어갔던 “말씀이탈의 교회”가 가는 그 몰락의 길을 우리도 또한 도도하게 답습(踏襲)해 왔었음이 들어 났습니다. “말씀이탈”의 신(新) 바알주의(Neo-Baalism) 물결이 한국교회에도 도도하게 상육하게 된 것을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생명력”이 신(新) 바알주의의 위력 앞에서 여지없이 무릎을 꿇어 버렸던 것입니다. 마치 엘리 제사장 통치 말기의 상황인, 이른 바, “말씀이 희귀하여 비젼이 전혀 보이지 않더라”(삼상 3:1) 라고 하였던 상황과 똑 같은 상황 속에서 지상교회들이 스스로 그 생명력을 상실하고 있거나 아예 포기하고 있거나 하고 있음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부터 말씀중심의 교회가 몰락하는 소리가 요란한 소음을 내며 들려 오고 있는 것을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접근조차도 하지 말아야 할 “터부”(taboo)인 바알주의(Baalism)와 우리 기독교가 감히 아예 손을 잡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기독교의 바알주의화(化)를 마치 “세속화 신학”이라는 선교신학의 한 양식인양 변호하기까지 하는 “신학적 악”까지도 등장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강단의 말씀 이탈! 이것은 그 무엇보다 가장 확실한 종말의 징조입니다. 그러나, 우리중 어느 누구도 이 상황이 그토록 위급한, 이른 바, 희년 나팔을 불어야 할 만큼 그런 다급한 상황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바로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바알주의의 위협은 “신 바알주의”(Neo-Baalism)라는 절묘한 모습으로 자신을 철저히 변신(變身)하고 위장(僞裝)하여 보수든 진보든 가릴 것 없이 오늘 날의 지상 교회를 닥치는대로 다 잠식해 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날의 정치 현실이나 경제 현실에 대한 개탄은 이미 도를 넘은지 오래지만, 그러나 교회의 강단에 만은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 호세아가 말한 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 “[왜냐하면],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모두가 다] 일반(一般)이기 때문이다”(호 4:9)라고 졀규한대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이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할 교회도! 교회의 강단도! 이미 소금이 되고 빛이 되기를 “공공연히!” 거부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네의 교회들도 또한 이젠 그 어느 때보다 대담하게 “선이 악을 이긴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마지막 승리자는 항상 악(惡)이었다!” “말씀따라 살자라는 것은 하나의 종교적 구호일 뿐이지 진실이거나 현실인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란, 적어도, 이 세상에는 결코 없다!” “교회 안에서라 할지라도 바알이 실제의 주인이지 야훼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주인인 4
것은 아니다!” “오직, ‘힘’ 또는 ‘돈’만이 정의다!” 그러므로, “선(善)을 추구한다는 것은 위선이요 패배주의 논리다!” “십자가 사랑은 하나의 어용논리에 불과하다!”라는 구호가 매우 그럴듯하게 형태변화를 하여 오늘 날에 와서는 “적극적 사고”라는, 소위, positive thinking이라는 신조어(新造語)의 미명(美名)을 달고 더욱 매력적인 신형 바알로 분장하여 되살아나고 있 음을 우리는 봅니다. 그리하여, “꿩잡는 것이 매다!” “이 역사에서 과연 언제 선(善)이 승리하는 것을 본 일이라도 있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담대하게 불의(不義)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용감하게 악(惡)하자!”라고 하는 확고한 신념의 기치를 들고 아예 “말씀의 교회”가 되기를 스스로 거부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구원의 방주인 교회가 말씀종교의 깃발을 아예 내려 버린 것입니다. 저는 감히 이러한 현상을, 외람되게나마, 우리들이 신학교를 졸업하기가 무섭게 성서주석학과 성서해석학의 고(苦)된 과제를 즉각 내어 버리고 현실에 맞는 자기 류의 목회방법론을 개발하여 그것을 복음이라고 믿었었던 그런 새로운 신념체계 속에서 감히 저는 그러한 신(新) 바알주의의 태동(胎動)이라는 위험을 보았었습니다.
(3)그러나, 이제라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오직 한가닥의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그것을 저는 “희년의 뿔나팔을 큰 소리로 부는 것과 그리고 그 희년 나팔 소리를 듣고 우리 모두가 귀를 막지 않고 다 가슴을 치며 그 처음 출발지로 돌아가서!! 회개하고 다시 출발하는 것 그것 뿐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how?)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가장 중심적인 문제는 언제나 방법의 문제요 실천의 문제로 남습니다(how의 문제). 왜냐하면, 우리가 기장의 출발정신을 몰라서 그 출발정신을 우리 스스로가 왜곡(歪曲) 훼손(毁損)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희년법은 이러한 와중(渦中) 속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새 출발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50년간 우리가 범해 온 그 “시행착오”(試行錯誤)를 완전 휴식(休息)시키는 것, 완전 안식(安息)시키는 것, 완전 종식(終熄)시키는 것, 완전 끝장을 내는 것, 그것입니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에게 완전 사면의 은총과 희년의 평화가 우리 안에 수립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희년정신의 실천을 보여 준 최상 최선의 모델을 우리가 성서에서 찾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창세기 12:1-3, 4-9에 수록된 “아브라함의 소명기사(召命記事)”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이러한 희년정신의 구체화 및 역사화는 아브라함의 소명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선, 희년의 복음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본토, 친척, 그리고 아비의 집”을 버려서, 그것에 얽매인 전근대적(前近代的)인 세속적 연결고리를 먼저 완전 끝장내는 결단을 하여야 한다고 확신하였던 것입니다(창 12:1). 아브라함은 과거의 모든 것을 끝장낼 줄을 알았고 또 끝장을 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비로소!, 진실로 그렇게 함으로서 비로소!, 하나님의 세계 구원사(救援史)가 아브라함의 소명사건으로부터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야훼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향하여 억겁(億劫)을 헤아리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침묵하시었던 그 입을 드디어 여시고 말씀하시기를,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 2-3)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버려야 할 유산은 버려야 합니다. 버리지 않고는 우리의 미래가 결코 보장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본토를 버려 지연(地緣)의 고리를 끊는다는 것”은 그 무슨 단순 5
한 향토애(鄕土愛)의 문제나 지방색에 의한 민족분열의 문제 같은 것 만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또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혈연관계와 인맥관계의 연결고리를 끊는다는 것도 또한 단순히 친인척 비리의 끈을 단호하게 끊는다는 의미 만을 갖고 있는 것도 또한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문제는, 오직, 하나님이 지시하여 “말씀해 주시는 그것”을 지향하여 모든 세속적 고리를 끊고! 떠나간다는 것, 그것 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창세기 12장 1-3은 <오직 “신의 약속의 말씀”에만 따라!!, 비록 갈바를 알지 못하였다 해도 그는 바알주의적 세속주의와의 고리만은 끊고 떠나갔다>라는 말로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당도하여 벧엘과 아이 사이에 제단을 쌓고 야훼의 이름을 불렀지만 야훼 하나님은 오히려 “이 땅은 네가 아니라 너의 후손에게 줄 땅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아브라함도 또한!! 그 말씀 따라 즉시 그 곳을 떠나 “남방으로 남방으로” 옮겨 갔다라고 하였습니다. 남방으로! 남방으로! 그러나 거기가 도대체 어디입니까? 거기가 애굽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 갔다가 다시 헤브론으로 올라 올 뿐입니다. 또한 그 “헤브론”에서도 또한 그는 어디까지나 “나그네”로서만!(창 23:4) 살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하나님이 지시하여 말씀하시는 그 곳>만!이 그가 가야 할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출향(出鄕)은 이 땅에서는 영원한 순례(巡禮)일 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시행착오를 한 바의 과거 유산에 대해서는 완전한 종결과 철폐요,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의 지시, 그것 만이 그의 영원한 새로운 출발점 이었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출향의 문제는 그 어떤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희년정신의 결단을 실행하는 문제로서, 진리와 비진리 사이의 문제요 합리와 불합리 사이의 문제이며 정도(正道)와 사도(邪道) 사이의 문제요 정경(正經)과 위경(僞經) 사이의 문제이며 하나님의 뜻과 사탄의 뜻 사이의 문제요 희망과 절망 사이의 문제이며 삶과 죽음 사이의 문제요 성공과 실패 사이의 문제이며 그리고 마침내는 구원과 멸망 사이의 문제였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브라함이 범했던 시행착오의 과거유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패거리 논리로 나아가게 하여 우리 사회를 포함한 이 세계의 모든 질서를 모두 병들게 만들고 멸망케 한 원흉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역주의, 혈연과 학연 등으로 뭉쳐진 패거리 논리, 힘의 논리, 이른 바, 말씀종교의 원수!, 신(新) 바알주의 논리, 그것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버려야 할 유산이었습니다. Neo-Baalism! 그것은 말씀종교를 무력하게 만들고 모든 말씀의 질서를 무의미하게 만든 원흉이며 말씀종교를 한낱 병약한 비현실적 이상(理想)으로 정죄한 기독교 복음의 영원한 원수였습니다. 그것은, 그러므로, 단호하게 휴식, 안식, 종결, 끝장을 선포해야 할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치 떠나간 탕자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하던 그 때, 바로 그 때, 제정신이 번쩍 들어 스스로 돌이키고!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야겠다!>라고 뉘우치며 돌아가기로 결단을 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출발정신으로 돌아가는 그 길 밖에는 달리 다른 길은 없습니다. 돌아가서 아버지의 품에 안기며, “제가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라고 말할 그 때에만, 그 삭막하던 집안이 순식간에 풍류소리와 춤추는 소리로 충만한 대 탕감의 희년축제의 한마당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회개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시행착오로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된 저 낡은 과거의 유산, 저 멸망할 가증스러운 세속주의(new Baalism)와의 연결고리들을! 정말로! 우리의 이 역사현장 여기서! 끝장 내는 그 길 밖에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희년선포는 오늘의 우리에게 바로 이런 의미를 갖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끝)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