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매우 고전적인 한 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은 인상을 심어 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배런 폰 트랩이라는 한 오스트리아 군 장교가 세계 제2차 대전 초 힛틀러 제국으로부터 군입대 소집 통지서를 받자 힛틀러 통치에 협력하지 않으려고 국경을 탈출하여 제 3국인 스위스로 도망치는 그 도주 과정을 줄거리로 하여 그린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오늘 설교와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영화 중 가장 긴장을 고조시키는 한 장면인, 이른 바, 독일 헌병에 쫓겨서 한 수녀원에 몸을 숨겼던 이 영화의 여주인공인 마리아가 그의 남편 폰 트랩과 함께 독일 헌병들과 숨막히는 숨박곡질을 하던 중 가장 절박한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잠시 숨을 몰아쉬며 수도원 뒤를 감싸고 있는 산들을 우러러 쳐다보면서! 절박한 도움을 기원하는 기도의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이 기도에 인용한 한 대사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데서 온 것입니다. 이 기도의 대사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시편 121편 1절인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는 말씀이 인용되었는데, 기적적이게도, 이 영화의 결론은 마치 이 산(山)을 향하여 울부짖은 이 여주인공의 그 기도가 그 산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기라도 하였듯이 그들은 이 위기로부터 기적적 탈출에 성공하여 국경을 넘어 마침내는 알프스 산 언덕에 이르러서는 구원받은 감격을 마음껏 노래하며 그 알프스 산 온 언덕을 휘저어며 기뻐 춤추는 모습을 “클로즈업”(close-up)해서 보여 주므로 그 모든 드라마가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고전적 영화의 전체 이야기는 마치 산을 우러러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에는 그 산이 또한 구원의 응답을 해 준다는 신앙을 전수해 주는 것처럼 구성된 특수한 하나의 종교영화로 오해되었던 것입니다.
이 영화 각본의 이러한 기본 구성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자 곧 이 영화의 제작진은 이 영화로부터 시편 121편 1절을 외우는 대사를 즉각 삭제하기까지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산들을 우러러 향하여 기도하면 산들이 또한 팔을 벌려 그 기도자들의 기도에 즉각 응답해 준다는 이런 신앙의 단순 논리는, 비록 그것이 하나의 영화 대사들 중의 하나에서 생겨난 것이기는 하여도, 그 영화가 고전적 가치를 높혀가면 높혀 갈수록 이러한 잘못된 신앙논리는 우리 현대지성인들의 사고에 까지도 대 혼란을 제공하게 되는 것임은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진정한 문제는, 비록 이 영화가 즉각 이 문제의 대사를 삭제함으로서 이 영화의 그 고전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기는 하였어도, 우리네 인간세계의 민간 신앙 사이에서는 여전히 산을 향하여 무엇이든 빌면 산이 그 기도에 응답한다는 식의 무속적 신념이 우리의 신앙세계를 압도하고 있다는데 그 진정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설령 그것이 그러하다 하여도, 성서의 기본입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확고한 반대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중심은, 아무리 똑똑한 지성인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사고를 좀 더 진솔하게 들여다 보면, 놀라웁게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보다는 오히려 산이! 그들의 지성을 가려서 참 신앙의 대상인 창조주 하나님을 못 보게 가리게 하고, 지성인들 조차 허구성을 지닌 저 산들을 마음 속에 우상처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향해 손을 펴고 구원을 요청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지식인들의 눈을 가려서 본질을 못보게 하는 그 산은 대체로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에 대한 지나친 매력의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식인들과 지식인인체 하려는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갖고 있는 약점은 대체로 “이데올로기”, 그 중에서도 저항적 또는 좌경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합리적이고도 편파적인 매력”을 느끼는 경향, 즉 “합리성의 결핍”이라는 지성인 특유의 이기주의적 성향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점이 지식인들의 최대 약점이고 또한 사회나 국가에 대한 최대한 불이익을 줄 수 있는 요소라고 봅니다만, 많은 지식인들이 이런 이데올로기 편향적 오류에 자주 빠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학교수들이나 인권을 강조하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자세히 살펴 보면, 그들이 선호하는 어떤 이데올로기에 대한 낭만주의적이고도 맹목주의적 신앙 같은 것에 지나친 애착을 갖고 있는 경향이 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무신론적 이념체계에 흥미를 가지는 버터란트 럿셀(Bertrand Russel) 식의 지식인들을 보면, 사회적 역학관계에 대한 논리 실증주의적 분석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는 듯한 인상을 많이 받습니다. 물론, 우리에겐 “경험논리”라는 것이 꽤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모두 경험논리에 맞아 들어 가는 것도 아니고 또 경험에 대한 논리 실증주의적 분석이 모두 다 옳은 것도 또한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심치 않게 빈번하게 우리 주변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질서들이 자주 그 합리성을 잃고 곤두박질치는 것을 참으로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제3천년기라는 21세기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천년기의 세계는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가변성이 우리를 숨가쁘게 예측 불가능한 세계로 휘몰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지금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급변해 가는 세계정세에 대해서 거의 속수무책일 따름입니다. 인간인 그 누구가 감히 오늘의 활화산 같은 중동분쟁이나 북한의 핵문제 같은 난제를 깔끔하게 매듭지울 수 있을 것입니까?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신지식주의라는 것도 겉만 번지르르할 뿐, 막상 불상사가 생겨나면 속수무책 그 무엇보다 더 쉽게 허물어지고마는 매우 미약한 것일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가리고 있는 저 산들의 외형만 보고서 거기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그 무슨 대단한 구원의 능력과 마력이 있으리라고 기대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산은 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성철 스님이 타계하면서 남긴 유명한 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말 그대로 산은 어디까지나 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본문, 시편 121편 기자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고 묻고는 즉각적으로 대답하기를 “나의 도움은 결코 산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야훼로부터만 온다”라고 말해 버립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 뿐이지 그 산과 그 물이 그 무슨 창조주의 기능을 해 줄것으로 기대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지성과 진정한 철학, 그리고 진정한 종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이념체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예는 예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친 것은 악에서부터 나오느니라”(마태 5:37)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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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실상을 바로 보는 것, 참을 바로 보는 것, 진리를 바로 보는 것,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진리를 진리로 볼 수 있고 참을 참으로 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진리를 가리고 있는 저 거대한 산악을 넘어서 그 산악 저 너머에 있는 진리의 진정한 실체를 바로 볼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진리의 실체를 가리고 있는 저 산악들이 사실은 우리 지식인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쉽게 그 비진리성의 마각을 쉽게 들키지는 않는다는 데 그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저 산들이란 유형물질로서 거기에 있을 뿐, 우리의 눈으로 볼 수는 없는 보이지 않은 진리를 가리고 있는 <진리의 무덤>들일 뿐입니다. 설령, 무덤을 파헤쳐 본다 하여도 흙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비록 요란 스러운 비석이 무덤 속의 실체를 장황스럽게 설명해 놓았다 하더라도 그 무덤 속은 단지 어디까지나 흙만이 있을 뿐인 그런 무덤 만이 거기 있을 뿐입니다. 산은 진리의 무덤일 뿐입니다.
현대의 지식인들은 흔히 “이념”이라는 것을 가리켜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저 산 저 너머에 있는 숨겨진 진리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교인들은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교리”가 산에 가려 있는 진리라고 믿는 경향이 또한 있습니다. 더욱이, 최 근년에 이르러서는 소위 “신지식(新知識)”이라는 것이 그 어느 것보다 더 거대한 산이 되어 진리를 가로막거나 더 나아가서는 자신이 곧 진리 그 자체 또는 하나님 자신인냥 위장하기도 합니다. 특히 현대 과학의 발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창조의 영역에까지 침범하게 하려고 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 뿐입니다. 즉 창조주는 창조주요 피조물은 피조물일 뿐입니다. 과학의 극치점이라고 할지라도 과학은 피조의 세계의 최대 한계점에까지는 갈지 몰라도 창조자의 세계에 침범하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충분히 예상됩니다. 성서의 “바벨탑 설화”가 갖는 씨니시즘(cynicism)은 그것을 잘 예고해 주고 있으며 인류과학은 오히려 자신이 만든 인조인간, 프랑켄슈타인으로부터 불가항력의 역습(逆襲)을 받게 될 뿐이라는 불안한 예측만 무성할 뿐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의 역섭은 아인슈타인이 원자탄을 만들어 그 핵무기를 한번 사용한 후 곧 받았던 것이기는 합니다만, 이 지구는 핵무기 제조를 해 놓고는 그 위협 앞에서 오히려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몸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핵 폭탄이 나치의 손에 들어가면 안된다는 절대적 불안감은 이젠 빈라덴이나 알카에다의 무리들의 핵무기가 손에 들어 갈까봐 염려하는 불안감으로 전이되어 갔지만 이번에는 나치 때처럼 그렇게 그 상대가 만만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현대문명이 원자력으로부터 받고 있는 그 엄청난 혜택! 그것은 실로 놀라움의 극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고 있는 수천 수만의 생명을 한 순간에 날려버리는 그 해악의 끔직스러운 파괴력은 후랑켄슈타인의 역습처럼 그것이 우리에게 안겨 주었던 그 모든 혜택을 한순간에 다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악마로 순식간에 둔갑해 버리고 말 것임이 확실합니다. 물론, 미국이라는 거대한 부호가 그 갖고 있는 모든 재산을 아낌없이 다 풀어내어 제3세계에 풀어 놓고 머리 풀고 잿더미를 덮어 쓰고 항복을 선언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그런 절대불가능의 현실이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미국은 미국이고 알카에다는 알카에다일 뿐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 3
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고 묻고는 더 이상의 논의의 틈도 주지 않고 곧장 “나의 도움은 산으로부터가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야훼에게서로다”라고 대답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도우심이신 그 분의 우리를 위한 역사적 행위를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야훼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너를 실족하지 않게 하신다. 너를 졸지 않고 지키신다. 너를 지키시노라 주무시지도 않 으신다. 네 오른 쪽에서 네 그늘이 되어 주셔서 늘 너와 함께 하셔서 너를 지키신다. 낮의 해도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게 하신다. 모든 환난으로부터 너를 지켜 주시며 너의 출입을 항상 지켜 주신다” 이것이 성서의 결론적 답변입니다.
그러나, “산”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도움이 되시며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이겠습니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 뿐이라고 하였는데,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과연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으며 바로 그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진정한 의미의 “구원의 진리”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과연 무엇으로 알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본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서는 야훼 하나님은 본질상 우리가 그 얼굴을 볼 수 없는 분이시라고 말해 왔었습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주목해야할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지상의 모든 종교들은 예외없이 모두들 그들이 믿는 신을 형상화하여 경배하고 숭배하였습니다만, 유독 우리 신구약 성서의 종교만은 신을 형상화하는 것을 철저히 금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출애굽기 33장 20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는 살 자가 없다”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볼 수 없는 신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기독교는 무신론적 종교에 불과하다는 말인 것입니까?
그리하여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하나님의 산 시내산을 떠나려던 시점에서 야훼 하나님을 향하여 “주님, 저에게 주님을 보여 주십시오”(출 33:18)라고 간청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33:19-23에서 성서에서는 단 한 번 이렇게 대답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야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러나, 나는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저 바위들 위에 서 있거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 주겠다.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그 때 너는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으나 나의 등은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은유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였습니다만, 이 말씀을 해석학적 방법으로 풀어 보면 이러한 의미의 뜻이 됩니다. 즉 이 말씀은 하나님은 본질상 인간이 그 얼굴을 볼 수는 없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 그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볼 수는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없다고 하여 존재하시지 않으시는 분은 결코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 남겨 놓으신 그의 행위들, 이것을 성서는 “등”이라는 은유적 언어로 표현하였습니다만, 그가 우리의 세계 역사 속에 남겨 놓으신 행위들을 보면서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고 그 하나님을 뜻을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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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며 이념은 이념일 뿐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본질을 만나는 길을 막는 장애물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이나 인간의 지성으로 포착할 수 있는 분은 결코 아니십니다. 단지 그 분이 우리의 역사 속에 남겨 놓으신 그 역사적 행위 또는 자연 현상적 행위 속에 남겨 놓으신 그 분의 족적(足迹)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의 뜻을 만나고 그 뜻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구원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고 묻고는 신속하게 “나의 도움은 산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산도 지으시고 물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은, 하나님의 창조물인 산, 그것은 단지 산 그것일 뿐입니다. 물도 하나님의 창조물인 물, 단지 물 그것일 뿐입니다. 이념, 교조, 신지식, 첨단 과학 기술, 등등, 산으로 비유될 수 있는 그 모든 것들, 그것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일뿐,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힘, 우리를 도울 수 있는 힘이 있는 구원자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인간 구원에 관하여서는, -불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것은 전혀 허상(虛像)일 뿐입니다. 태양도 찬란하고 한가위의 휘영청 둥근 보름달도 아름다우며, 망망 대해같은 저 검은 하늘에 금빛 가루 은빛 가루를 뿌려 놓은 듯 반짝이는 별들도 또한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러나, 태양은 여전히 태양이고 달도 여전히 달이며 별들도 또한 여전히 별들일뿐, 그들이 우리를 구원해 줄 구원자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가 창조자에 의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그 질서에 따랄 움직일 뿐이지 결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이념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햇빛의 고마움도 있고 달빛의 서정성도 있으며 산과 풀과 꽃과 바람 그 어느 것 하나도 우리에게 고맙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창조주가 부여해 주신 그 길을 달려 갈뿐, 우리의 구원을 목적하고 그들의 길을 달려 가지는 않습니다. 태양이 아무리 고마웁다 하여도 그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가면 그 태양의 열기에 “sunstroke"라는 질병에 걸리기도 하고 월색(月色)이 아무리 아름답다 하여도 거기에 너무 빠지게 되면 ”moonstuck"의 병에 걸리게도 됩니다. 원자핵의 위력도 따지고 보면 인류의 파라다이스 꿈을 이루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고는 있어도 그 위력은 창조주가 위임한 질서를 고지식하게 따라가기 때문에 지상의 인류전체를 모두 다 깡그리 화장시킬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 위험스러운 것이라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질서에 속하는 진리가 있다는 것이 성서의 분명한 입장입니다. 즉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자궁과 젖가슴의 모성성을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은 진리를 가장(假裝)한 이러한 거산(巨山)들과는 전혀 다른 질서에 속해 있었습니다. 창조주 야훼 하나님은 우리를 잉태하고 출산하신 어머니와 같으신 분으로서, 그가 친히 지으신 이 하늘과 이 땅, 이 온 천지가 각자 자기 극대화를 통하여 자기파괴로 가는 것을 그대로 가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들을 붙들고 지키시는 자애로우신 어머니요 너그러우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주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신 힘으로 자기 극대화의 권위와 위력을 시위하시지 않으시고, 단지 그가 만드신, 그가 손수 사랑으로 지으신 이 세계와 그 안에 있는 인류를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지치지도 않으시고 영원히 양육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지키시느라 졸지도 아니하십니다.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하여 결단코 주무 5
시는 법도 없습니다. 늘 우리의 오른 편에 계셔서 우리의 그늘이 되시어 낮의 해도 우리를 상치 않게 하시며 밤의 달도 우리의 마음을 쓸데 없는 상념의 질병으로 미치게 하지 못하게 막아 주시어 모든 환난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시되 우리가 들어가고 나가고 하는 모든 출입을 불꽃 같은 눈으로 지켜 주십니다. 결코 중도에서 변하시는 일없이 영원히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도움은 산으로부터가 아니라, 물로부터가 아니라, 이념으로부터가 아니라, 신지식의 위력으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창조세계를 가슴에 품으시고 잉태하시고 진통하시며 출산하셔서(사 66:7-9) 그의 양떼로서(시100:3) 우리를 양육해 주시는 창조주 야훼 하나님으로부터만 우리의도움과 구원이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여야겠습니까? 세리장 삭개오는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높은 산을 밀어제치고 기어히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참 진리에 접할 수 있었던 그 대표적 예라 하겠습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았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키가 큰 수많은 민중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고 마침내는 자신을 버려서라도 진리를 만나기로 결심하고는 당시 사회에서는 세도가 당당하였던 세리장이라는 사회적 신분도 아랑곳 않고 마치 어린 아이처럼 달려 나아가 체면 같은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어린 아이처럼 뽕나무(돌무화과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서 기어코야 예수를 만났고 회개를 하였으며 그 회개의 결단으로 구원받는 은총을 입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진리를 만나기 위하여서는 우리 앞을 가로막아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저 산악을 (뛰어 넘는 자기 부정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저 산을 넘어야 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저 군중들을 앞질러 달려가 저 군증들 위의 뽕나무 위로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