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권이 들어 설 무렵, 즉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삼파전의 대선과정이 한창 열을 낼 무렵, 저는 우리 민족의 최대 비극은 “지역주의(地域主義)의 갈등”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우려가 노태우 정권을 뒤이을 양김 구도의 대선전이 진행될 때는 더욱 심화되는 것을 느꼈었습니다. 민족의 정서가 이와 같이 양김 구도로 엄격히 구분되고 민심의 향배가 극명하게 동서(東西)로 나뉘어 지는 현실은 실로 우리 민족의 낯부끄러운 망국적 비극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특히,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삼파전일 때의 동서 갈등의 경우, 놀라웁게도, 군사정부에 항거하던 인권운동가들 사이에서조차도 “YS가 대통령이 되느니 보다는 군부 출신인 노태우가 당선되는 것이 더 났다”라는 전혀 이외의 정서가 곳곳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참으로! 놀란적이 있었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당시 어느 기독교 인권그룹의 모임에서 만난 한 기독교 지도자는 전혀 스스럼 없이 “나는 김 아무게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나의 신앙으로 삼고 있습니다. 나는 가끔 꿈을 꾸면서도 김 아무게 선생의 이름을 부르다가 잠에서 깨어나곤 합니다. 아마 내가 죽을 때도 김 아무게 선생의 이름을 부르면서 죽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는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말이 "내노라!" 하는 잘 알려진 기독교 지도자였다는 점에서는 할 말을 잃을 정도 였습니다만, 이 말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대결 보다는 지역주의의 대결 정서가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반영해 주는 매우 좋은 사례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금번에 있은 대선에서도 이런 이분법적 지역주의 갈등은, 조금은 다른 양상을 띄기는 하였어도, 여전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지 얼마되지 않은 어느 날 저는 대구에 있는 어느 교회의 창립기념주일 설교를 부탁 받고 아침 첫 새마을 호 열차를 타려고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인 이른 새벽에 분당에서 서울 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겨울 바람을 맞으며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었었습니다. 한참 동안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 중 전혀 낯선 한 가족 식구들이 그 새벽 추위 속에서도 너무 기분이 좋아 들뜬 기분을 참지 못하여 입을 다물지 못한체 웃고 떠들고 하면서 아무 면식도 없는 제게로 이유도 없이 다가와서는 친절하게 말을 건네고 농담도 하고 그러는 것을 보고는 저분들이 왜 저렇게 기분이 좋아 들떠 있지? 하는 생각을 하고는 서울 역에 다 와서 버스에서 내려 역(驛)을 향해 갈 때 저는 그분들에게 “어디로 가는 기차를 타시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그 분들은 매우 고조된 음성으로 “광주!”라고 힘찬 합창으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그분들이 그토록 이유도 없이 기분이 좋아 들떠 있었던 그 이유를 잘 알 수 가 있었습니다.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대한 기쁨과 흥분이 아직도 가라 앉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정작 대구행 새마을 열차를 탔을 때의 분위기는 전혀 정반대였습니다. 꼭 그 무슨 부모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황급히 내려가는 상주들 같았습니다. 그리고 동대구 역에 도착하여 역에서 교회까지 가는 택시를 탔을 때, 택시 기사 양반의 풀이 죽은 탄식 소리는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TV 뉴스도 듣지 않습니다. 살맛 안납니다. 이러다가 우리나라가 빨갱이 나라가 되는 거 아닙니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뭔데, 국민의 반 쪽은 잔치집 분위기가 되고 나머지 반 쪽은 초상집 분위기가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비극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민족적 비극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이것은 단순히 한국에만 있는 특이한 현상일까요? 아니면, 이것은 이 지구 인류의 일반적인 현상일까?
그리하여, 저는 이스라엘 역사를 신앙사적으로 다룬 "구약 역사서"를 통하여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디 있는지를 찾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결론 같은 것을 도출해 낼 수 있었습니다. 즉 “이러한 인류불행의 시작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뜻’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 오해에서부터 비롯되었다!”라는 생각에 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처음에는 “한” 인간 “아담”을 창조하셨지만, 곧 하나님은 이 “혼자 있는 인간은 좋지 않다”(בוט־אל=evil)라고 판단하시고는 이 “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분리시키셔서 그 둘이 더불어 함께 살게 하시되 그러나 그들이 결단코 둘로는 살지 말고 비록 둘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하나로!! 조화된 존재 즉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적 존재로서 살기를 요청하셨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여자는 남자의 뼈 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므로 그 둘은 불가(不可) 분리(分離)의 동일체라고 결론지었었습니다. 이러한 결론은 창세기 2장 보다는 약 4세기 정도는 늦게, 그것도 바벨론 포로기라는 지극히 고통스러운 시기를 겪은 후에 쓰여진 창세기 1장은 이 결론을 더욱 더 신학적으로 심화시켜서 “둘이 하나되는 인간이 바로 다름 아닌 <하나님의 형상>이다”라고 까지 역설한 바가 있었습니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니요.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영광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둘이 하나될 때에만 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는 인간창조에 담긴 이러한 하나님의 근본 뜻을 어기고 형식논리로만 생각하여, 인간은 남녀 둘로 갈라져 있으니까 그 본질도 또한 이원구조로 된 것일 것이라는 “오판”(誤判)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첫 심문을 받았을 때, 그 첫 인간은 “하나님 당신이 내게 주셔서 나와 함께 <더불어 살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줌으로 내가 먹었나이다. 그러므로, 제게는 근본적인 책임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두 인간의 조화로운 “하나됨”을 거부하고 반목 반립의 “둘”로 분리시키고 대극화(對極化)시킨 이분법적 사고, 그것이 바로 인류타락을 부채질 하였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타락 징후는 낙원 밖의 삶이 시작되었을 때에도 나타났었습니다. 이유없이 아우 아벨을 죽인 형 가인을 향하여 하나님은 또다시 심문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지만, 역시 여기서도 가인은 아담보다는 좀 더 분명한 어투로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항변을 하기 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나고 아벨은 아벨입니다. 내가 왜 동생 아벨을 지키는 자여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왜 우리 둘을 둘로 보지 않으시고 이 둘을 <서로 책임을 져야 할 하나!>로 보시는 것입니까?”라고 도전하며 항변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인류의 역사는 하나되라!는 하나님의 지상명령을 거역하고 이원구조의 2
힘의 논리, 또는 흑백논리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서로 물고 먹으며, 그리고 서로 찢고 싸우며 반목의 삶을 살아 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경우에도 이러한 지역주의 갈등은 극명하게 나타나 사사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심각한 내적 분열의 내홍을 겪다가 급기야는 솔로몬 왕조 직후 한 왕조가 남북 왕조로 분리되는 데까지 나아갔고 이러한 갈등은 또 북왕조 이스라엘의 멸망과 연결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남왕조의 멸망에까지 파급이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사사시대의 무정부 상태에서는 이러한 지역주의의 갈등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야만적으로 심화되어 나타났었습니다. 성서가 갖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는, 이른 바, 길르앗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 사이의 지역 갈등이었습니다.
길르앗 지파 사람으로서 “입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생”이 낳은 아들이라고 해서 그 사회에서 천대를 당하고 소외를 당하며 살아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힘께나 쓰는 시정 잡배들과 어울려 반 사회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길르앗 지파의 장로들과 백성들은 그를 여전히 냉대하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었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 길르앗 지파 백성들이 암몬족이라는 이방 부족의 침입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백성과 장로들이 힘을 모아 싸워 보았지만 그들로서는 전혀 역부족 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어서 그들은 비록 시정잡배이지만 힘께나 쓴다는 이 입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를 또한 길르앗의 통치자로까지 옹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입다는 이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개선하여 돌아 와서는 명실공히 이 길르앗 지파를 다스리는 “사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런 시정잡배 출신인 돌깡패를 최고 통치자로 모시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명약관화한 일이었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는 그 현실 그대로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역감정은 더욱 심화만 되어 갔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이 길르앗 지파 사람들과 반목, 질시, 갈등의 관계를 갖고 있었던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깡패 출신의 이 길르앗 지파 사람의 입다가 전쟁에서 한 번 승리를 하였다 하여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거들먹 거리며 잘난척 하는 꼴을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어서, 마침내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찾아 와서는 이 암몬과의 전쟁 때 왜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배제하고 전쟁에 동참하도록 부르지 않았느냐라고 시비를 걸면서 싸움을 걸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입다는 다시 군사를 모아, 자기에게 도전해 오는 이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을 힘으로 격파를 해버렸는데, 문제는 길르앗 지파 사람들이 요단 강 서편으로 도망하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을 철저히 도륙하려고 그 도망자들 보다 앞질러 달려 가서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는 요단 강을 건너려는 사람들 마다 일일이 검문하면서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을 가려내어 살륙하려 하였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길르앗 지파 사람들이 강을 건너려는 사람 마다에게 묻기를 “당신은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지?”하고 물었고 그 때 만일 그 사람이 살아 남기 위하여 “나는 에브라임 사람이 아니고 길르앗 사람이요”라고 거짓말을 하면, 그러면 이 쪽에서 말하기를, “그러면 <쉽볼렛תלבשׁ>이라고 발음을 한 번 해봐!”라고 하면, 에브라임 사람들은 히브리 말 “쉰”(שׁ) 소리를 내지 못하여, 애써 발음한다고 해도, 겨우 “사멕크”(ס) 소리 밖에 내지 못하게 되므로(마치 제가 경상도 산골에 살다가 서울로 올라 와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 그 첫 학기에는 서울 말을 잘 못해 “쌀”이라는 말의 발음을 잘 못해서 “살”이라고 발음하여 웃움꺼리가 된 적이 있었듯이 그렇게) 에브라임 사람들이 <쉽볼렛תלבשׁ>이라 3
는 발음을 하지 못하여 <십볼렛תלבס>이라고 발음을 하면 “네 이놈, 너는 에브라임 사람이구나!”하면서 그를 당장 목을 쳐 죽여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파 간의 갈등은 가히 망국적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다소 황당스러운 아주 고대의 무정부적 혼란기의 이스라엘 사회에서 일어났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이런 성서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민족도 오래 전부터 누가 만든 것인지는 몰라도 망국적인 지역 감정의 갈등을 가슴에 안고 지금까지 살아 왔습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러한 전근대적이고도 야만적인 지역감정의 이분법적 갈등구조를 우리는 당연시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갈등구조로 이제는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가지 이르게 된것입니다.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 하고 고민하는 쥐들처럼 우리들도 또한 지금 이 망국적 지역주의 이원론(二元論)의 치명적(致命的) 질 병(疾病)에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지금 체험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가인의 항변이 우리의 지성을 바르게 대변하는 것인양 착각하고 이 질병이 악성 암이 되어 온 몸으로 번지고 있는데도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속수무책 손을 놓고 있는 셈입니다. 어느 지도자가 감히 이 문제를 능히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까? 어느 종교가 감히 이 문제를 그들 종교의 가르침으로 능히 치유해 낼 수 있는 것입니까? 많은 지성인들이 있어도 그들도 또한 어느새 이 지역주의의 사슬에 매여 있는 것을 볼 때는 참으로 심한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종교가 있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속수무책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 교인이 우리 국민의 25%나 된다고 하는데 거기다가 불교도와 유교 사상을 가진 사람들까지 합치면 우리 국민의 반 이상이 종교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러나 그 종교들이 이 지역주의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자 한 편에서는 너무 기뻐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들떠있는가 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너무 슬퍼 복장이 터지는 것 같아서 초상집 상주처럼 죄인된 기분으로 만사에 기쁨을 잃어버리고 있는 이런 민족현실에서부터 우리는 과연 무슨 희망을 찾겠습니까?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시절의 지역감정의 폐해에 하나 더 덧붙혀 이번 경우는 “세대간의 이원적 갈등 구조”라는 것이 시대적 변화와 조기 은퇴를 조장 강요하면서 구조 조정의 열풍을 몰아 오는 저 성급한 세대 교체론으로 인하여 50, 60대 이상의 사람들은 거의 인생 살 맛을 잃고 고등 룸팬이 되어 가는 그런 현실이 오늘 우리네의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 어느 일간 신문에 실린 시론에서는 “오륙십대 기성 세대의 소외감”을 이렇게 풍자적으로 전해 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나이 많은 부모님께서 아들네 집으로 며칠 간 방문하여 묶는 동안 집안을 가만히 살펴 보니까, 아들네 집에서 제일 첫 번째로 귀하고 소중하게 대우 받는 사람은 손주이고 두 번째는 며느리이고 세 번째는 가장인 아들이며 네 번째는 애완용 강아지이고 다섯 번째는 가정부이 고 그 다음 마지막 여섯 번째는 자신들 늙은 이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님이 아들네 집 방문을 마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갈 때 작별인사를 한다면서 아들에게 하신다는 말씀이 이랬다는 것입니다: “3등 애비야, 잘 있거라. 우리 6등은 간다!”
그러나, 저는 이 모든 모순 형태가 핵가족이니 세대 차이이니 하는 그런 사회현상에 4
서 보다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이 하나님 형상 파괴적인 이원구조적 인간이해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고 싶고 또 진단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본래는 “둘”이 아니라 “하나”였고 이 “하나”가 남 녀 “둘”로 나누어진 것은 <“둘”의 상호 보완과 조화를 통하여 “하나되는 것”이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진정한 뜻이요 인간을 향한 간절한 기대라는 이 사실>을 우리 인간들은 망각하고 또 이러한 망국적이고도 반 사회적인 이원적 갈등구조를 인간지성들은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 하지는 아니하고 단지 <힘의 평형 논 리>로만 유지할 수 있다고만 판단한 데서부터 기인되었다고 생각해 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인간 창조 후 맨처음으로 외치신 그 제1성인 저 유명한 말씀, “인간이 혼자 있는 것은 악(惡)이다”라는 말씀을 하신 후, 그 인간에게 돕는 배필을 지어 주신 다음,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인 인간이 “둘”이 되되 결코 대극적인 “둘”이 아니라, 그 “둘”이 마치 “하나”인 것처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뼈중의 뼈, 네 살중의 살처럼 하나되는 조화와 사랑의 삶을 살아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모세의 법의 중심부에도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붙박아 두셨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며 예수님도 모든 율법의 대 강령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결론지으셨던 것도 이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러한 <더불어 함께 사는 인간 사회>를 만들어 가라는 신의 과제를 받고 이 땅에 태어난 종교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와 오늘의 교회는 이 사명에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히려 그러한 신의 과제를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진보주의라는 명분 속에 자신의 위선을 감추어 두고나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기독교만큼 하나되지 못하는 종교도 없다고 할 정도로 우리는 배타적 이원구조의 인간이해를 가지고 이 사회를 지도하며 이끌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라 하겠습니다.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철학교수 한 분이 교양특강을 하면서 우리 사회를 세 카테고리로 구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즉 그는 우리 인간 사회를 “jungle society" "sports society" "symphony society"라는 세 범주로 구분하면서, jungle society는 약육강식으로 일관된 사회로서 오직 ”힘“만이 선(善)이고 정의(正義)인 그런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사회이므로 논의의 여지 없이 배척해야 할 사회라는 것이며, sports society는 엄격 한 경기 법칙이 있으므로 그 경기 룰(rule)만 잘 지켜져 페어 플레이를 하기만 한다면 그런 대로 생각해 볼만한 사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스포츠 사회도 역시 엄밀히 따져보면, 경기법칙이 잘 지켜지지 않아 부정심판 논란이 자주 생길 뿐만 아니라, 설령 규칙대로 경기가 진행이 되었다 하더라도 과열된 경기에서는 오직 승자에게만 기쁨을 주고 패자에게는 재기 불가능의 아픔과 고통을 주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하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스포츠 사회도 또한 “모두가 다 함께 기뻐하고 모두가 다 하나가 되는, 즉 모두가 다 승자(勝者)가 되는 그런 친교 공동체”는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포니 사회”는 이상의 두 사회와는 달라서 즉 여러 사람들이 제 각기의 다른 소리를 낸다 하더라도 그 소리가 규칙을 지키며 한 곳으로 모아지면, 거기에는 승자(勝者)도 패자(敗者)도 없는 “다 함께 기뻐하는 하나의 조화로운 화음”이 이룩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심포니 소사이어티가 가장 바람직한 사회라고 결론 짓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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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분명코 우리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사회는 이러한 심포니 사회처럼 각기 자기 일에 충실하면서도 하나로 조화를 이루 는 더불어 사는 사회, 즉 승자와 패자가 있는 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다 승자가 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도 많고 교회도 많고 지성인을 교육하는 대학도 많고 사회의식이 뚜렷한 엘리트 단체들도 많이 있는데 왜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정글 소사이어티 지향적 삶을 사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 빨리 이러한 망국적, 자기 파멸적 이원구조를 탈피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깨달은 바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이 한 말씀 안에 다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라고 한 그 말씀을 결코 복잡한 신학이론이나 종교적 궤변으로 그 진의를 외곡시키지 아니하고 그것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바르게 실천하기만 한다면, 분명, 우리의 이 사회도 매우 희망적일 것이라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원론적 사고, 이원주의적 행동, 흑백이념논리, 자기 옳음의 극대화(極大化)와 상대편의 불의의 극대화(極大化), 이것들은 모두가 다 반 기독교적 원리들입니다. 학문적 시각에서 볼 때, 매우 놀라운 현상은, 구약종교가, 그토록 심각한 다신론적 사고의 지배를 받고 있는 중동세계 속에 있으면서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유일신 신앙만을 견재해 오면서 그리고 스스로를 또한 역시 비판하면서 과감하게 민족주의를 극복하려고 하였다는 것은 놀라움 중의 놀라움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헤브라이즘은 신약시대의 유대교나 오늘의 이스라엘 시온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상사회를 추구하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아벨을 죽인 자는 사실 가인이라기 보다는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구조가 진정한 의미의 아벨 살해범이라 하겠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구조를 극력으로 배척하고 있는 경전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본문은 우리의 상식을 훨씬 넘어가는 방식으로, 아무런 이유없이 동생을 쳐 죽인 저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 조차도, 결단코,! 일벌백계로 교훈한다는 명분 아래 엄하게 다스리는 방법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전혀 오히려, 그 가인에게 보복의 공격을 가해 올 모든 위험으로부터 그 가인의 생명을, 비록 살인자의 생명이라 할지라도 그의 생명을 지켜 주시는 은혜의 야훼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총의 표, 즉 헤르만 헷세의 작품인 데미안에 나오는 “가인의 표”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야훼 하나님의 은총의 표”를 가인에게 주어서 비록 극악무도한 큰 죄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인의 생명 만은 지켜 주자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복을 통한 질서유지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것 보다는 그 생명이 살인자의 생명이라 할찌라도 그 생명의 보호가 오히려 더 중요하다는 것이 성서의 입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의는 자기 의를 포기하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하나님의 논리요 성서의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 그것은 자신의 의를 포기하고라도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셔서 그들의 생명을 지켜 보호해 주시는 의(義)였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으나, 그라나, 하나님은 그 가인을 오히려 죽음의 보복으로부터 방어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분이 성서의 하나님 야훼이시었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