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창세기 5:21-24; 마태복음 25:1-13
설교문
등을 “준비”하는 열 처녀에 관한 비유는 우리들에게 매우 익숙한 예수님의 “천국비유”들 중의 하나입니다. 등을 준비한다는 것은 신랑을 맞이 하기 위함입니다. 신랑을 맞이한다는 것은 천국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나, 등을 준비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것이 우리 본문이 말하려는 근본 의도입니다. 왜냐하면, “기름”이 없으면 등을 불 밝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불을 밝히지 못하면, 신랑을 맞이할 수 없게 되고 이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면, 결국은 바깥 어두운데서 이를 갈며 슬피 울게되는 심판을 받을 운명에 처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등을 준비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등잔도 중요하지만 기름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설령, 등잔은 없어도 기름 만이라도 있다면 솔가지나 휴지 뭉치에라도 기름을 척척 발라 붙여서 혼인 잔치집에로 가는 길을 불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등잔 보다 기름이 절대적으로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다고 하여, 이 비유가 말하려고 하는 목적이, “등잔”보다 “기름”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마치 그 무엇보다 “기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히려는데만 이 비유의 근본 목적이 있다고 보고 그 “기름”의 은유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은 이 비유의 의미를 상당히 확대해석 또는 곡해할 위험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대한 면밀한 주석을 통해서 보더라도, “기름”의 알레고리적 또는 영적 의미를 적용하는 일을 허락하기 시작하면 이 본문에 대한 이해에는 엄청난 혼란이 야기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극단적 성령운동가는, 그리하여, 이 “기름”을 “성령체험”이라고 단정하고 지나치게 “성령체험” 만을 강조함으로서 마침내는 성령체험을 외적으로 시위하지 못하는 교인은, 예컨대, 기도의 능력이 없거나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하였거나 한 교인은, 아예, 천국 갈 자격이 없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인양 취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극단적인 인권운동가들은 이 “기름”을 형식적 교회주의를 비판하는 증거자료라고 보고 교회 확장 운동에만 열을 올리되 인권문제에는 냉담한 사람들은 아예 천국 갈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매도하는 도구로서 이 본문을 자주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극단적인 종교 내면 운동가들은 이 “기름”을 등잔 “내부”에 <숨겨져 있는 것>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야단스러운 외형상 의 교회활동 또는 종교활동을 <보이는 등>에 비유하고 내면적 종교생활을 <등잔 속의 보이지 않는 기름>에 비유하여 <명상이나 불교의 참선행위>와 같은 그 어떤 내면적인 신앙을 기독교 신앙의 참 본질인 것처럼 강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조용한 교회, 큰 소리 안나는 교회가 제일 좋은 교회다 라는 편견을 가장 올바른 교회관으로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모든 주장과 성서해석들에는 다들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고 또 어느 정도는 응용할 수 있는 논리라고는 하지만, 그러나, 이 비유가 근본적으로 목표하는 바와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이 비유의 “목표”에 대한 규명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본문 안에는 이 비유의 중심이라고 추론되는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1) 첫째로, 등을 준비하는 열 처녀 중에서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롭다라고 한 점, 즉 열 처녀가 다 등을 준비한 자이었지만, 그러나, 그 절반은 슬기로웠고 다른 절반은 미련하였다는 점을 교훈의 중요한 초점으로 보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랑을 기다리는, 즉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인들은 많이 있지만 기다린다고 다 신랑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라는 사실에 주안점을 두는 경우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신자들 중에서도 적어도 50%는!, 즉 그 절반은! 기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警告(경고)”의 의미가 이 본문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그 첫 번 째의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조점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비유의 중심점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천국 비유에서도 다 그렇지만, 이 비유에서도 또한 천국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 라는 것을 가르치고 지시하는데 그 근본 목적이 있는 것이지 천국의 도래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그 “기다림”의 성공여부를 그 퍼센트에 따라 數値的(수치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려는데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2) 또 그 다음으로 둘 째로 이 비유에서는 “다들 졸았다”라고 한 표현에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사실, 미련한 처녀들 뿐만 아니라 슬기로운 처녀들도 다 함께 졸았다고 하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즉 너 나 할 것 없이 다(!) 졸았다고 하였으니, “졸지 않고 깨어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이 비유의 중심교훈이 아니 겠느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비유의 근본목적은 종말을 준비하는 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깨어 있는 것” “조는 것을 경고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비유의 결론도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문을 자세히 살펴 보면, 미련한 처녀들 뿐만 아니라 신랑을 맞는데 성공한 슬기로운 처녀들도 또한 다 함께 졸았을 뿐만 아니라 슬기로운 처녀들도 또한 신랑이 들어 닥치는 그 순간까지는 미련한 처녀들과 함께 깊은 잠에 빠졌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라는 가르침이 비록 중요하기는 하여도 이 열처녀 비유의 중심적 가르침이 될 수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졸고 잠든 처녀들도 슬기로운 처녀로 간주되었고 또 기름을 갖고 있는 처녀들도 다 함께 졸았기 때문에 유독 깨어 있는 것만이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니라고 하겠고 또 깨어 있는 것 만을 특별히 강조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만일 “깨어 있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라면, "슬기로운 처녀들은 졸지 않고 깨어 있었다" 라는 형식으로 이야기의 줄거리가 구성되었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결론부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라는 말로 끝나고는 있다 하더라도 “졸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고 늘 깨어 있으라”라는 것이 이 비유의 중심 교훈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철야기도”는 칭찬 받을 일이기는 하여도 “철야기도”가 곧 천국시민이 되는 필수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3) 뿐만은 아닙니다. 셋째로 이 열처녀 비유에서는 신랑이 오는 그 시간이 “예상키 어려운 시각”이고 신랑이 온 그 시각도 또한 낮이 아니라 한밤중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으니까 아마도 이 비유는 “종말이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는 사실과 “재림의 때는 매우 더디 이루어 2
진다”는 사실, 그리고 “그 시와 때는 인간으로서는 잘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천국비유”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도 또한 일리가 있기는 있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종말의 時(시)를 성급하게 정하여 온갖 난리를 다 치는 것은 오히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간에 기독교의 가르침을 가장 욕되게 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경험해 온 사실이라고 하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처녀의 비유가 전적으로 이 점을 강조하여 경고하고 가르치려하였다고 보는 것은 전혀 그럴듯 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종말의 시기를 모른다는 것과 재림은 매우 늦게 이루어진다는 점만! 너무 강조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기다림에 지치다 못해 무신론/불가지론(無神論/不可知論)으로 빠져버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언제나 착하고 언제나 경건하고 언제나 변함없이 영적일 수 만은 없습니다. 때로는 화도 내고 때로는 세속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턱없이 잠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강한 성적 충동 때문에 상대방의 인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상대방을 압도하기도 하고 또 프로 스포츠 경기에서 상대방 팀이 억울하게 패하여 땅을 치며 통곡하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고 그 날 저녁은 잠도 잘 오는 그런 매우 속된 경험을 가지고 사는 동물이 우리들 “인간”이라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하여도 사람이 부처가 되거나 사람이 하나님이 되거나 하는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처녀 비유를 통하여 졸지도 말고 자지도 말고 늘 깨어서 그 날, 그 종말의 날이 오기 까지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강요한다는 것은 “無理(무리)”라고 하겠습니다.
(4) 넷째로, 우리는 또한 이 열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신랑이 온 이후에는 “문이 닫혔다”라는 점에 강조점이 있는 비유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발견합니다. 말하자면, 문이 닫힌 후에는 뒤늦게라도 각성하여 늦게나마 기름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다시 호소한다고 하여도 더 이상 문은 열려지지 않는다는 점, 따라서 “기름”이라는 것은 이러한 마지막 상황에서는 “나누어 가질 수는 없다”는 점을 가르치려는데 이 천국비유의 목표가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말하자면, 구원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철저히 “個人(개인)”의 엄격한 책임 아래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공동으로 힘을 합해서 일구어 낼 수 있는 것만이 구원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는 철저히 “개인”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렘 31)와 에스겔(겔 18)도 말한 바와 같이, 즉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을 통해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라고 함은 어찌됨이냐?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말라. 신 포도를 먹는 그 사람의 이만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가 지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으리라”라고 외쳤던 바와 같이 구원이나 심판은 그 개인의 믿음과 그 신앙행위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문에서도 보면, 미련한 처녀들이 위기의 상황을 맞았을 때,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달라”라고 호소하지만,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라고 하면서 냉정하게 거절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제는 철저히 개인의 문제이지 나눠 가질 수는 없다는 가르침이 이 열 처녀비유이 목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그것이 곧 이 비유의 중심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도 또한 매우 의문스러운 논리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기름을 사러 나갔다가 돌아와서 이제야 기름준 3
비가 되었으니 뒤늦었지만 문을 좀 열어달라고 애원하는 처녀들에게 냉정하게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기독교의 십자가 사랑의 정신이나 기독교의 선교 정신과도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 “열처녀 비유”가 우리에게 교훈하려는 그 중심적인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성서해석의 여러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오늘 읽은 우리의 본문에 접근해 보면, 이 물음에 대한 우리 본문의 대답은 이 비유의 실질적인 결론구인 10절 말씀을 통하여 매우 선명하게 대답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 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핵심은 여기 있었습니다. <준비하였던 자들> 즉 <예비하였던 자들>이라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 주제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준비하라”라는 말은 이러한 빛에서 볼 때 바로소 우리 본문의 결론구인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라는 말과도 일치한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준비한 자들은 비록 졸더라도! 늘 깨어 있는 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말이 결론적 언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준비한 자들>만이! 천국잔치에 들어 가고 이 준비의 기회들을 이러 저러한 이유로 놓친자들에게는 문이 닫혔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포인트입니다.
준비한 자들! 예비한 자들! 여기에 초점이 있었습니다. 열 처녀를 비유로 한 이 천국비유는, 그러므로, 천국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성실한 “준비”를 하되 종말론적인 급박함을 가지고 하라는 촉구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준비”의 시간적 급박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준비”는 반드시 필요하고 동시 에 그 준비는 항상!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準備(준비)”는 본래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종말은 본래 예고없이 찾아 오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準備(준비)”는 부단한! 훈련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즉 인격의 함양, 천국시민이 되는 것, 그것은 그렇게 短時日(단시일) 안에 또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어진 기간을 할 일 없이 빈둥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서둘러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때는 늦으리!”라는 말보다 더 비극적인 말은 없다는 것입니다. 영어에서도 too late!이라는 말은 기회가 상실되어 회복불가능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자주 쓰이는 말입니다.
너희가 만일 제 때에 준비를 갖추지 못하면, 마치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하였던 것처럼 너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늦을 것이다.too late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무엇보다 “항상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때가 늦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는 한없는 것이고 값없는 것인데, 뉘우치고 돌아 온 자들에게 그들이 조금 늦었다고 하여 그토록 잔인하게 문을 닫을 수가 있느냐? 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에 의하면, 이 경우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입니다. 恩惠(은혜)도!! 준비없는 자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문맥에 4
서는 sola gratia 즉 오직 은총으로만! 이라는 교리를 논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그리고 부단하게 준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恩惠(은혜)”는 그렇게 준비없이 공짜로 얻는 그런 무시간적으로 값싼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면 기독교의 은총이란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니라 참으로 값비싼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서는 <항상 준비하는> 그런 “準備(준비)”가 그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준비”는 분명 여기서는 “信仰訓練(신앙훈련)”을 의미합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얻을 수도 있고 만날 수도 있고 문을 열고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저는 신약성서 히브리서 5장 7-9절의 말씀을 읽고는 깊은 감동과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육체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러한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얻었느니라. 그는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그 받으신 고난을 통하여 순종 하는 법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으므로 그는 마침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과 모범이 되셨느니라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고 그가 당하는 모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 복종하는 법!을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들은 이와는 정반대로 이런 경건훈련과 준비는 하지 않고 무상으로 은총에 의한 구원만 얻으려고만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맥에서는 Sola Gratia 교리는 죄악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이렇듯, 기회 있을 때마다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드리는 경건훈련이 필요하셨다니 정말 우리같은 인간이야 말로 더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준비가 필요합니다. 항상!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나는 더 이상 신앙의 훈련이 필요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말로 그의 그 생각이 곧 종말의 심판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네들 교회들의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신앙의 훈련”을 게을리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안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습니다. 설령, 기도를 하더라도 거의 형식적으로 합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십자가 성호를 이마에 그리는 것보다 더 형식적으로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0.1초 만큼이나 빨리 해치웁니다. 그리고, 성경말씀을 읽는다 할 때도 또한 역시 거의 건성으로 읽습니다. 염불 외우는 것보다 더 형식으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 본문은 “燈(등)”보다 “기름”이 더 중요하다고 경고하기도 하였습니다. 燈(등)은 한 번 준비해 놓으면 늘 거기 그대로 있지만, 기름은 늘 거기에 그대로 있지를 않습니다. 점차로 소멸하는 것이 등잔 속의 “기름”의 특징입니다. 한번 선택을 받고 예정되었으니 더 이상 신앙의 훈련이 왜 필요하냐 하면서 기득권에만 안주하는 것, 그것은 등만 믿고 기름 준비를 함께 하지 않은 미련함에 비유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한 번 신앙고백만 잘 하면 그 때부터 평생가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구원이란 한 번 “믿습니다!”라고 고백만 하면 그 때부터는 모든 것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준비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그런 燈(등)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등잔”의 문제를 예정론이나 선택론에 의거해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등 준비가 아니라 등과 기름을 “함께” 준비하는 것 5
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교회는 종말을 위한 준비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단지 비본질적인 일들로 너무 분주해 하고 너무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그 비본질적인 것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기까지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열처녀 비유의 말씀은 다른 그 어느 누구에게나 또는 교회 밖의 세상을 향하여 말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네의 교회들을 향한, 즉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주의 나라가 어서 속히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오늘의 우리네 지상교회들을 향해 던져진 매우 종말론적인 급박성을 가진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분명히, 다들 등을 준비한 자들이긴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정된 자들이고 선택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다!! 등과 함께 기름도 준비한 자들인지 아니면 기름 준비는 없이 燈(등)만 준비해 가지고 요란스럽게 9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는 자들인지는 누가 알겠습니까? Who knows?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우리는 나중에 가서 등을 잘 준비한 다른 사람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달라”라고 말할 심산으로, 기름이 없는 燈(등)만 요란스럽게 들고 왔다 갔다 하며 교회 다니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분명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러고 저러고 하면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언제 종말이 임할른지는 어느 누구도 모르는 매우 불확실한 불확정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진실과 정직을 다 기울여 구원에로 가는 길을 불 밝힐 수 있는 기름 준비가 잘 되어 있는 등불을 꾸준히 그리고 항상!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항상! 준비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몇주 전 저는 강남에 있는 새길교회라는 한 평신도 교회의 설교 초청을 받고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예배를 마친 후 서로들 인사를 나누는 시간에 그 교회의 선배 교수님 한 분이 제게 말하기를 "65세 은퇴를 한 이후부터의 자신의 최대 관심은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깨끗하고 단정하게 죽는 것"이라고 하면서 제 어머님께서 만 93세를 일기(一期)로 아주 건강한 몸으로 그렇게 곱게 하늘나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것이 자기에게는 가장 부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메시지의 초점은 “항상!! 준비(準備)한다”라는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생의 종말을 유감없이 맞이하기 위하여서는 그 무엇보다 항상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인간의 몸을 가진 우리가 어떻게! “항상” 준비할 수가 있는 것이겠습 니까? 미련한 처녀만이 아니라 슬기로운 처녀들도 또한!!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들 졸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남는 문제는 이 “어떻게”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성서는 이 물음에 대하여 단 한마디로 “임마누엘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최선의 “준비”는, 그러므로, 논의의 여지없이 창조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 그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신구약 성서는 “임마누엘” 신앙이라고 말합니다만,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종말이 에녹을 비껴 갔던 것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별칭을 받은 예수께서도 죽었셨습니다만, 그는 임마누엘이시기 때문에 그는 그 죽음의 절대 권세도 깨뜨리시고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종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이기지 못해 비껴 갔던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라는 것과 그리고 그 창조하신 생명 6
들을 자기 자신 이상으로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는 것,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요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자신있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종말을 위한 최선의 준비를 가리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 “임마누엘의 삶”이라고 정의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임마누엘 신앙이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성격의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 하는 성격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지식은 오류와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그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경우 우리는 그를 놓칠 위험이 있지만, 하나님의 경우는 달라서 즉 하나님의 지식은 오류나 한계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놓치실 위험은 결단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기를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기름과 등을 함께 항상 준비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에녹이 감히 죽음의 절대 세력을 상대화시키며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이 임마누엘 신앙 때문이며 또 예언자 이사야가 장차 오실 메시아는 “임마누엘”로 오실 것이라고 한 것도 바로 이 임마누엘의 절대성과 영원성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