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 김대중 전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8주년 기념 강연회
강연회 : 한반도 평화를 위한 대강연회
주최 : 노벨평화상 수상 8주년 기념행사 위원회
일시 : 2008년 12월 16일
장소 : 여의도 63빌딩
발제자 : 돈 오버도퍼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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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김대중 대통령을 1972년 가을 도쿄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저는 워싱턴포스트 동북아시아 지역 특파원으로 새로 부임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계엄령을 내리고 많은 정치엘리트를 체포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이 때 마침 해외에 나와 있던 의사가 분명하고 용기를 가진 정치계의 한 인물을 발견하였습니다. 야당 정치인 중에서도 김대중 선생은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두려워하던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김대중 선생은 1971년 대선에서 근소한 표차로 박정희에게 졌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김대중 후보가 실제로는 더 많은 지지표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개표 조작으로 국민의 뜻이 꺾였을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계엄 시 김대중 선생이 한국에 있었다면 가장 먼저 체포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일본에서 김대중 선생은 조국에서 자행되는 독재와 부당한 탄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다가 거짓에 속아 1973년 8월 한국인들과의 오찬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맞고 마취되어 대기 중이던 차로 실렸고 동해, 또는 일본해상의 배로 재갈이 물린 채 끌려갔습니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였던 필립 하비브와 CIA 국장인 도날드 그레그는 그가 사망했을 때의 심각한 결과에 대해 납치자들에게 경고를 하는 등 신속한 조치를 취하며 김대중 선생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몇 시간 후, 그는 폭행을 당했고, 눈 가리개를 막 푼 상태에서, 그의 서울 자택에서 약간 떨어진 곳으로 풀려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선생이 겪은 여러 고난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생에 따르면 5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합니다. 또 6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고 10년을 연금 또는 타의에 의한 망명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위한 선생의 투쟁은 한번도 꺾인 적이 없습니다. 이 모든 고난을 겪어내고 선생은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되고 2000년 북한과의 화해를 가져온 노력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는 여기 계시는 용기 있는 의지를 가지신 분에 대한 경의의 찬사입니다. 정치적 분위기는 바뀌었지만 지난 10년 동안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정신과 그 실천은 지속되어 왔고 꽃을 피웠습니다. 지금은 청와대에는 보수주의자, 특히 실용적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이 공정한 투표를 거쳐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북한과의 갈등보다는 포용을 지지합니다.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및 여러분들의 노고 덕택에 포용 정책은 한국 국민과 정치계의 유일한 대안은 아닐지 몰라도 선호하는 정책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해, 전임자들처럼 군부 출신도 아니고 정치계 인물도 아닌 CEO 출신이라는 이명박 대통령을 두 차례 만났습니다. 이 대통령은 남북 관계에서 진전되어 온 성과를 바탕으로 더 크게 일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비난도 있고 여러 측, 특히 북한에서 이런 저런 추측이 난무합니다. 지금 같은 핵무기 시대에 그 위험성은 지금도 크지만 더욱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봤을 때는 한국은 새로운 국면, 새로운 시대에 이미 들어섰고 1970년대 초와는 아주 다릅니다. 이제는 신중한 리더십과 멀리 보는 상황 관리가 필요할 것이고, 한국, 미국 및 기타 동맹국들의 지속적인 지원이 있어야만 김대중 전 대통령 및 많은 한국인들이 그렇게 바라던 평화와 번영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Two Koreas;를 탈고하면서 썼듯이 미래는 극적이고 강력한 감정 및 엄청난 결과와 같이 전개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한국은 놀라움의 땅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