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이곤 칼럼] 야훼께서 너희 대신 싸우실 것이다

구약의 ‘거룩한 전쟁’(聖戰) 신앙의 관점에서(창 50:19; 출 14:10-14)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구약성서가 낳은 ‘성자’라고 부를만한 사람인 ‘요셉’이, 그의 형들과 함께, 아버지 ‘야곱’을 가나안 땅에 장사지내고 애굽으로 돌아 온 직후에 있었던 일이었다. 과거, 동생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넘겼었던 그들의 그 비정한 악행 때문에, 동생 ‘요셉’과는 철천지원수지간이라고 할 만한 관계가 된 그 형들이, 이제는, 그 동생 ‘요셉’이 통치하는 애굽 땅에서 동생 ‘요셉’의 녹을 얻어먹으며 외국인 신세로 살고 있는 동안은 그야말로 늘 바늘방석 위에 앉은 것 같은 불안 속에서 지내야 하는 삶이었다. 그럼에도 거기엔 동생 요셉의 매우 특별한 역사신앙고백이 있었기 때문에, 즉, <형들이 자신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넘긴 그 비정하고도 불의한 일이 비록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은 형들이 한 일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하신 일, 즉 먼 미래를 내다보시고 야곱 가문을 중동 땅에 임한 저 살인적 흉년으로부터 살려내시려고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사적 행위에 불과한 것>이라고 증언하는 ‘요셉’의 그 특별한 신학적 신앙고백 때문에, 일단은, 그 불행스럽고 비극적인 과거사가 다 잘 정리되어 넘어간 것으로는 되었었으나, 그러나, 막상 아버지를 여의고 장례까지 다 치루고 나자마자 그 과거사가 다시 현실문제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저 형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절대 권력자요 애굽의 총리대신인 동생 ‘요셉’이, 비록 아버지께서 생존해 계실 동안은 그 일을 문제 삼지 않고 그렇게 은혜롭게 잘 넘어갔지만, 그러나 이젠, 아버지께서도 돌아가신 이 마당에, 자신들이 저지른 그 지난날의 악행에 대하여 동생 ‘요셉’이 혹 자신들을 향한 복수의 앙갚음을 하려는 생각을 다시 생각해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생각 때문에 그들은 큰 두려움 속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문제가 다 잘 해결되고 넘어간 것 같았던 하나님의 그 구원사적 과거사가 다시 역사 신학적이고도 해석학적인 논제의 주요 주제가 되어 ‘불안한 현실’로 되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고민하다/고민하다 못하여 동생 요셉에게 미리 전갈(傳喝)을 넣어서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아우님,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이전에 아우님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이런 유언을 남기신 적이 있습니다. ‘너의 형들이 너에게 몹쓸 일을 저질렀지만, 그러나 이 아버지는 이젠 네가 네 형들의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바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우님은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신 그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몸을 한없이 낮추어 말하였던 것이다.(창 50:16-18)

그러나 창세기 49장에 기록된 저 유명한 <야곱의 유언> 내용을 아무리 샅샅이 살펴보아도 그러한 내용의 유언을 하였을 것이라는 증거가 털끝만큼도 발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였을 그 어떠한 가능성 조차도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형들의 그 전갈은 다분히 자신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임기응변의 최후수단에 불과했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이야 어찌되었든 이러한 역사적 사건의 수수께끼는 그냥 그렇게만 정리하고 넘어가 버릴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것, 이른 바, 해결하여야 할 주요문제가 아직도 더 남아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성서는 분명히 하고 있다고 하겠다.

예컨대, 일본 제국으로부터 조선이 독립을 한 8.15 해방 사건을 함석헌 선생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의 第32章, ‘해방’이라는 장(章)에서 해석했던 것처럼, 그렇게, ‘도둑같이 찾아온 해방’이라든가, ‘하늘이 준 떡’이라든가, 또는 ‘씨알의 해방’이라든가 하는 말로 해석한 그러한 역사해석 정도로서만 끝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처럼, <요셉 생애에 나타난 하나님의 그 구원역사>도 또한 또 다른 한 중요한 보충적 해석이 더 요구되는 사건이었다는 그런 말이라고 하겠다.

즉 그 요셉 역사는 그저 단순히, <우리 인간 역사에는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역사심판의 개입이라는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만을 말해 주는 사건이거나, 또는 인간역사는 勸善懲惡, 즉 최후의 승리는 선이고 정의이지, 악이거나 불의는 결단코 아니라는 소위 神正論的 신앙을 가르치는 그것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의미 깊은 역사적 사건이라고 하겠다.

그렇다. 인간역사는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그래서 요셉 이야기의 제2의 결론은 창 45장의 제1결론에서와는 다르게, 즉 창 50:19에서의 ‘요셉’은 좀 더 격조 높은 말로 말하기를 “형님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라고 오히려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이러한 구원역사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요 인간이 그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인간이 그 역사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여서도 또한 안 된다는 것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는 그 점이다. 좌파 지식인들은 흔히 역사를 읽을 때, 바로 이점을 자주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한 때, 한국의 신학계는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을 한국 신학의 대세로 몰고 가면서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민중이다> 또는 <밥이 하나님이다>라는 캐치워드를 내어 걸고 예수의 십자가 대속신앙까지도 어용논리라고 비난하기까지 하였던 일이 있었지만, 그러나, 무신론적-인본주의적 신학은 때로는 지식인 사회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기도 하지만, 그 결국은 허무주의로 끝나는 것을 자주 본다. 이것을 나는 좌파 이념의 근본적인 약점이라고 본다.

창 50:19가 말하고 있는바,“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라는 ‘요셉’의 증언은 요셉의 생애를 통하여 역사하신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란 정의와 선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역사의 ‘유일한’ 주인으로서 활동하신다는 것을 증언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와 동시에! ‘사람’이 그 역사의 주인이 되려고 하여서는 결단코 안 된다는 것, 즉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역사의 주인이 되어서 자신을 괴롭혀 온 원수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대로 ‘앙갚음’하는, 이른 바, ‘복수’를 하는 권리와 자유까지 행사하여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강하게 증언하고 강조하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즉 ‘복수는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비즈니스이므로 사람이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다.

‘복수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요 ‘사람의 일’은 결단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이 구약성서가 말하는 ‘거룩한 전쟁 신앙’이 이슬람의 ‘지하드 이념’이나 중세 기독교의 ‘십자군 전쟁 이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그 이유이다. 그래서 요셉은 보복 받을 것을 두려워하며 떨고 있는 형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마소서. 제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셨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 악을 선으로 바꾸어 오늘과 같이 이렇게 수많은 생명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형님들과 형님들의 자녀들을 돌보아드리겠습니다.”라고 응답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전쟁은 하나님의 일이다. 전쟁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행하시는 하나님의 고유한 하나님 자신의 비즈니스다. 그러므로 ‘원수’는 사람이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전쟁은 사람에게는 ‘터부’(taboo)요 ‘아나데마’(anathema)다. 마찬 가지로 복수도 또한 ‘하나님의 일’이 다. 복수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하시는 하나님 고유의 일이므로 ‘복수’는 사 람이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원수는 인간이 손을 대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전리품 헤렘’이다.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니 너희 인간에게는 ‘부정 타는 일’이니, 손대 지 말아라.’

이것이 바로 둘째 결론부인 창 50:19에서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한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신 32:35; 롬 12:19). 이러한 신앙을 가장 중심적 신앙으로 나타낸 것이, 놀랍게도!, ‘야훼 하나님의 전쟁’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구약성서 기록들을 지배하는 중심사상이요 중심이념이다. 즉 구약의 거룩한 전쟁 이데올로기가 갖고 있는 중심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평화공동체’를 이 땅에 수립하려는 것이지, 그 어떤 특정 종교를 확장하고 그 어느 특정 종교를 확대하려는 ‘종교전쟁 운동’과 같은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하겠다.

내가 이 강연을 통해서 말하려는 중심요지는, 소위 구약성서 기자들이 말하는 바, ‘야훼의 전쟁’ 즉 ‘거룩한 전쟁’이라고 말하는 바가 갖고 있는 그 사상은, 흔히들 말하는 바, 이슬람의 ‘지하드 사상’/ 중세 기독교의 ‘십자군 전쟁 사상’/ 20세기 한국교회를 풍미하며 한국교회를 광란하게 만들었던 바, ‘힘에 의한 세계 복음화이론’(마 28:16-20에 대한 해석학적 오류)과는 전혀 다른!! 매우 특이한 구약(성서) 고유의 ‘전쟁 사상’이라는 것을 말하는 데에 있다. 물론 구약학계에서도 이 주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합의(consensus)를 이끌어낸 것은 아니다. 그래서 구약학자들은 아직도 이 거룩한 전쟁 이념을 본격적으로 공론화하여 해석학적 해결을 지으려고 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구약성서학 학자들의 ‘명백한 직무유기’!!라고 나는 보고 있다.

실로, 구약성서의 고유한 거룩한 전쟁 이념, 즉 ‘만군의 야훼’(야훼 체바옷) 이념, 이른 바, 출 15:3이 말하는 바, ‘야훼는 전쟁용사이시다’(Yahweh is the Divine Warrior.)라는 구약 신앙은 구약역사서 전체를 지배하는 중심신앙인데, 그럼에도 이 부분을 해석학적으로 정리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려는 것은 신학자의 ‘신학적 직무유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구약 역사서를 지배하고 있는 중심신앙은 분명 ‘하나님의 전쟁’ 신앙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나라, 즉 하나님의 평화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하여 전쟁하신다는 신앙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는 이 세상을 자신이 원하시는 나라, 그 나라[천국=하나님 나라]를 자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 안에 이룩하시려고 즉 이 땅위에 당신의 나라를 임하시게 하시려고 이스라엘도 선택하셨고 또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치며 시작하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실상은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의 전쟁 운동’이요 ‘거룩한 전쟁 운동’이며 ‘하나님의 평화운동’이라고 하겠다.

이 모든 운동을 총칭해서 나는 ‘하나님의 인간 구원역사’/‘신(神)의 인간 구원사’(救援史) 즉 Heilsgeschichte의 운동라고 부른다. 이른 바, <출애굽 구원사→출 바벨론 구원사→예수의 십자가 대속(代贖)에 의한 인류 구원역사 …→>로 이어지는 이 모든 역사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인류 구원역사’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역사라고 하겠다. 여기서 말하는 바, ‘하나님의’라는 말이 성서역사 신학의 출발점이요 동시에 그 신학적 기반이라고 하겠다. 어디까지나 인간역사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흔히 우리 기장(基長)에서 ‘기장 신학’이라고 하면서 자주 말해 온 소위 ‘미시오 데이의 역사’가 바로 전통적인 언어로는 ‘하나님의 인간구원역사’ 또는 ‘하나님의 전쟁의 역사’라는 것이라고 하겠다. 말하자면 인간은 이 하나님의 전쟁 역사에서는 단지 하나님의 소명을 따르는 <협력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단지 synergy(시너지) 역할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시너지즘’(synergism)이 구약의 ‘거룩한 전쟁’ 이념의 중심사상이요 핵심신앙이며 기본신앙이라고 하겠다.

요셉이 형들에게 말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창 50:19)라는 이 말은 바로 이 신앙을 대변한 말이다. 즉 “나는 이 역사의 ‘시너지’(synergy)에 불과할 뿐인데, 내가 어찌 감히 하나님을 제쳐놓고 ‘원수 갚는 그 하나님 고유의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나님을 대신하여 복수(復讐) 행위를 한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라는 말이다. 신명기 32:35와 로마서 12:19도 증언하였듯이,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일로서 하나님께 맡겨 둘 일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본문인 출 14:10-14의 마지막 결론부의 말씀,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기만 하라. 너희가 오늘 본 애급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는 아니하리라. 보라,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즉 너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라는 말씀도 바로 이 신학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외아들이시오 동시에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우리 대신 죽기까지야 하실 필요는 없었다고 하겠다.

그렇다. <전쟁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전쟁은 사람이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것, 히브리어로 표현해서 ‘herem’이라는 것, 인간이 손을 대면 부정(不淨)타는 일, 즉 taboo요 anathema이므로 전쟁은 인간이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복음적/케리그마적인 말씀이라 하겠다. 출애굽기 14장의 이 선언은 구약성서 최 고대의 시문서(詩文書) 중 하나인 출애굽기 15:3(기원전 12세기경의 문서)이 말하고 있는 “야훼는 전쟁의 용사이시다.”라는 말씀을 후대에!(최소한 2-300년은 후대에) 산문체로 해석했던 구약 최고대의 산문문서자료(J, 다윗-솔로몬 시대 문서)로서, 이른 바, 홍해 도해(渡海) 사건을 산문체로 해석한 신학적 언어이다. 좀 어려운 언어이지만, 구약비평 학의 전문용어로 말하면, 우리의 본문, 출 14:13-14의 말씀은 ‘홍해 도해 사건’을 산문체로 말하되, 특히 ‘예배의식(禮典/祭儀)의 언어’(cultic language)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배 언어에 담긴 문학적 과장법을 단지 문자 그대로만 이해하려는 일반적 성서 관(聖書 觀) 때문에, 즉, 소위 말하는, ‘성서문자주의’ 때문에, 18세기 계몽주의 이래의 모든 역사과학적 성서연구는, 그 피눈물 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끊임없이 정죄만을 받아왔고, 그것이 분명 올바른 성서연구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강단에는 근방에도 다가서지 못하였던 것이 한국교회를 비롯한 세계 개신교회의 교회현실! 이었다. 지동설(地動說)이나 지구가 둥글다는 말을 하였다가는 출교처분 내지는 화형처분까지도 각오하여야 하였던 그 원시적 중세 암흑기가, 놀랍게도, 기독교 신앙세계에서는 아직도! 계속되고는 있지만, 우리는 어서 속히 이러한 살인적 무지의 터널을 빠져 나와야만 할 것이다. 이런 문제에 관한 더 이상의 논의는 오늘 내게 주어진 과제는 아니므로, 여기서는 일단 제쳐놓고, 단지 해석학적인 그리고 신학적인 언어로만 오늘 본문에 대한 해석을 말씀드린다면, 오늘 본문과 또 이와 유사한 여러 성서본문이 말하려는 그 중심적 증언은 이러하다. 즉 전쟁은 하나님의 것이고 인간이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것이며 따라서 원수는 하나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거두어들이신 하나님 자신의 전리품이므로, 하나님 소유의 성물(聖物=헤렘)인 이 원수는 ‘신의 것’이므로 사람이 손을 대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다.

역설적(逆說的)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전쟁’ 즉 ‘거룩한 전쟁’에 관한 성서의 기록은, 특히, 구약성서의 이 기록들은 ‘실제로는’ 하나님의 평화운동에 관한 증언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대단한 패러독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성서문학의 진정한 fact요 성서문학의 진실 그 자체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은 원수를 갚지 말라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즉 전쟁이나 복수는 모두 ‘하나님의 것’이니 사람은 손대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지!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인류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지켜보기만 하라.”(출 14:13a,b)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지! 오직 단지! ‘믿음만!’이라는 말인데, 홍해 도해(渡海) 사건에 대하여 증언하는 우리 본문의 그 ‘믿음’ 요구는, 그러므로,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두려워말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그 믿음만’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리고 요셉 사건에서는 그 어떠한 고난의 상황에서도 인간은 하나님의 승리와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그 모든 다른 일은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그 ‘믿음’만을 가지라는 것이다.

오늘 이 시간에 내가 강조하려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즉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전쟁신앙’ 또는 ‘거룩한 전쟁 이념’은 이슬람 종교가 시도한 바, 소위 자기 종교의 확장을 노리는 전쟁, 이른 바, 이슬람의 <지하드>(jih?d) 전쟁 논리나 중세기 서(西) 유럽의 기독교가 일으킨 바, 힘에 의한 기독교 포교를 확대(세계화)하려는 기독교의 <십자군 전쟁>의 논리(11세기와 13세기)와 한국교회가 지향해 온 <대교회주의> 논리, 등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므로, 그러므로, 어떠한 종류의 전쟁이든 상대방을 힘으로서 제압하는 전쟁에는 인간이 개입하지 말기를 요구하는 성격을 가진다는 그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하나님 전쟁’에 관한 기사들 속에 나타난 그 중심적 증언들을 살펴보면, 그것들은 전적으로 전쟁을 그 무슨‘칼, 활, 창, 병거, 많은 군대, 외국의 도움’ 등등에 의지(依支)해서 하지는 말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뿐인 것이다.

모세가 이끄는 전쟁뿐만 아니라 구약시대가 끝나는 그 때까지, 심지어는 신약성서 맨 마지막에 나타나는 특히 사탄격파 문제를 다루는 묵시문학까지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모든 전쟁은 모두가 이렇게만 해석되었을 뿐이다. 성서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전유물로서 하나님 자신의 구원사적 목적에 따라 진행될 뿐, 인간의 목적이나 인간의 전술전략의 능력에 의하여 주도되는 것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심지어는 야훼 종교의 확장을 위하여서도! 인간의 전술능력이 주도하여 전쟁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러므로 ‘전쟁’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래서 그것은 ‘신의 거룩한 성물’이므로, 인간에게는, 전쟁이란 no touch요 taboo요 인간이 손을 대서는 안 되는<저주받은 물건>이라는 것이다. 

모세 사후, 여호수아가 이끄는 전쟁에서도 이러한 계율의 중심사상은 철저하게 적용되었다. 인간은 예배 때의 찬양응답과 신앙행위 이상은 결코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말도록 금하였던 것이다.

여리고 성을 정복 소유한 것도 이 전통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사건이고 인간은 ‘은총의 선물’로 단지 그 땅과 그 성을 거저 받은 것일 뿐이었다. 성서기록에 의하면, 여리고 성의 함락은 전적으로 통치마를 입고 언약궤(법궤)를 맨 제사장들의 뒤를 따라 백성들은 예배의전적인 행진을 할 뿐이고, 제사장의 나팔 소리에 따라 “큰 소리로 합창하여 외치는 것” 즉 “야훼께서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라고 외치는 것(‘테루아’) 뿐이었으며, 인간은 전쟁이 끝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전리품을 거두어들이는 일만 할뿐이었다. 이 전리품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 어느 것도 사람이 손댈 수는 없는 신의 축복 또는 신의 저주를 받은 ‘신의 물건’ 즉 ‘헤렘’이었다.(수 6-7장, 특히 7장의 ‘아간’ 이야기 참조)

이러한 <신(神)의 전쟁>의 전통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기 시작할 때, 그 땅의 가장 위협적인 세력들인 가나안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칠 때에도 또한 그대로 적용되었고 그 사건에 대한 증언은 예배의식에서 계속 늘 동일한 방식으로 재연(再演)되었다. 이 경우에도 이스라엘에겐 그들을 억압하는 원수들을 물리치는 해방 사건에서는, 오직, <부르짖음>(outcry, 일종의 예배적인 외침) 만 필요했을 뿐이었다. 칼이나 활, 창 그리고 군대나 병마는 전혀 필요치 않았다는 고백이 늘 동반되었다.

물론 사사(士師) 시대의 해방 사건들과 왕정 초기의 기록들은, 모두가 초기의 자료들이기 때문에, 아마 시기적으로, 기원전 12세기경의 자료인 출 15:3의 시가(詩歌)자료와 기원전 10-9세기경의 자료인 출 14:13?14의 산문(散文) 자료(J 자료)와의 사이의 중간 시기쯤(기원전 11-10세기쯤)으로 보이는 자료일 뿐만 아니라, 더욱이, 현재의 우리 본문은 특히 매우 후대의 역사가인 신명기적 역사가(dtr, 약 기원 전 6세기 초쯤에 활동한 역사가)에 의하여 역사 신학적으로 손질된 자료이기 때문에, 설혹 완전하고도 전형적인 도식적 문형(typical formula)을 제시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전쟁>에 관한 신명기적 신학의 관점에 의하여(!!) 재해석되어간 흔적들을 우리는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고 또 <하나님의 전쟁>에 관한 구약성서의 고유하고도 특별한 이념을 읽어낼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몇 가지의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겠다. 사사기 7장에 나오는 바, 미디안 족과 싸운 기드온의 전쟁에 관한 보도를 보면, 그 전쟁사건의 fact는 분명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해석하고 후대 사람에게 가르치는 그 교훈은 전적으로 ‘후대의 신학적 입장’과 ‘문학적 과장법의 기교’가 한데 어울려 그리고 경전적인 권위를 등에 업고서 ‘하나님의 인간해방전쟁’ 사상, 이른 바, ‘거룩한 전쟁 사상’을 다음과 같이 각색하여 전개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기드온의 미디안 격파라는 그 실제의 전쟁은 전적으로 ‘거룩한 전쟁’이라는 형식으로 각색되고 재편집되어 나타난다. 미디안 군대는 메뚜기 때처럼 골짜기에 수없이 널려있고 미디안 군대가 병마로 사용했던 낙타 떼들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반면에 이스라엘 군대는 본래는 32,000명이었으나 적군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 22,000명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나머지 10,000명 중, 그 중에서도 전쟁터에 나와 물을 마시는 그 자세에 따라 적격자 300명만을 뽑아 미디안 군대를 향해 대진(對陣) 시켰는데, 그것도 그 300명의 군사들에게는 무기가 아니라 나팔과 그리고 횃불이 들어있는 항아리 하나씩을 들게 하고는 적진 끝에 도열해 서 있다가 기드온이 나팔을 불면 모두들 일제히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높이 치켜들면서 단지! “야훼의 칼이다! 기드온의 칼이다!”라는 함성(teru`ah, outcry)만을! 외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오늘날의 지상교회와 신학 사이의 심각한 괴리와 그리고 교회가 교회되지 못해 온 근본적 이유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하겠지만, 오늘 나의 강연은 이 문제를 다룰 성서개론 비평학의 문제까지 다루기에는 전혀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에, 이 문제는 따로 독립된 주제를 가지고 <글>로 쓰기로 하고, 오늘 여기서는 단지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전쟁(거룩한 전쟁) 이념의 핵심사상, 즉 ‘전쟁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상의 핵심이 무엇인지>만을 간추려 전달하려한다.

즉 기드온 전쟁에 관한 성서기록의 핵심 메시지는 <전쟁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것, 그것은 만군(萬軍)의 야훼 하나님(=야훼 체바옷)만의 전유물! 이므로 인간은 손대지 말라는 것, 인간은 만군의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여 그분의 해방/승리를 보고 그분의 승리를 찬양만 하라!>는 메시지다. 분명 그렇다. 기드온 전쟁에 관한 기록에서는 군사력과 전쟁의 전술전략에 관한 보도는 거의 생략된다. 단지, “야훼의 칼이여!” “기드온의 칼이여!”(삿 7:20)라는 야훼의 인간해방과 야훼의 구원 승리를 확고히 믿고 찬양으로 응답하여‘외치는 것’만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기드온 전쟁 사건에 관한 기록의 삶의 자리, 즉 그 기록의 환경(Sitz/im/Leben)은 예배의식이고, 그 기록의 대본(臺本, Vorlage)은 예배 의전문(禮拜 儀典文)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성서학자들은 추론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전쟁>에 관한 기록은 fact의 기록만이 아니고 fact에 대한 신앙적 해석이기도 하므로, 그러므로, 그 전쟁사건을 가리켜 성서학자들은 post-eventum이라고 부른다. 즉 <지나간 사건의 신학적 해석/신앙적 회상/예배에서의 재(再)진술(retelling)>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성서문학은 본질적으로 사건 자체의 보도와 그리고 사건 후(後)의 신앙 고백적 기록의 신학적 결합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옷니엘-삼갈-드보라-기드온-입다-삼손 등의 사사들의 전쟁 기록은 ‘지나간 사건들에 대한 신명기 역사가(dtr)의 역사신학이요 역사해석’이라고 성서학자들은 증언한다. 그러므로 그 모든 사건들은 문자적으로 이해하여서는 안 되고 성서사가의 신학적 증언을 그 이해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겠다. 

이것을 전제하고, 이제 나는 ‘거룩한 전쟁’에 관한 또 하나의 그러한 대표적 전거(典據)를 소개함으로 ‘하나님의 전쟁에 관한 구약 기록’의 복음적 증언을 마무리하려 한다.

소년 다윗이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또는 삼하 21:19에서는 엘하난이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을 격파한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이야기(삼상 17장)에서는, 소년 다윗은 투구와 갑옷 그리고 칼로 무장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그 모든 병기는 다 내어던져 버리고 단지 양치기를 할 때 사용하던 막대기와 시내에서 주운 매끄러운 돌멩이 다섯 개만을 주머니에 넣고 나섰는데 비하여, 골리앗 장수는 방패든 병사를 앞세웠고 그 키는 약 3미터, 머리에는 놋 투구를 쓰고, 온 몸은 놋으로 만든 비늘 모양의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갑옷의 무게만 하여도 80kg이나 되었고, 손에는 칼, 창, 투창을 들고 많은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 그러니, 이 싸움의 승패는 뚜껑을 열어 보나마나 이지만,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전쟁’에 관한 전승(傳承, Uberlieferung)자료를 각색한 신명기적 역사가가 특별히 강조하여 강하게 증언한 신학적 메시지는 오직! 진실로 오직! 저 블레셋 장수를 마주보고 서서 외친! 목동, 소년 다윗의 입에서 나온 ‘말씀’과 그를 ‘격파한 방식에 관한 문학적 묘사’였었다. 그 소년 다윗의 외침의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골리앗)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아왔으나, 그러나, 나(다윗)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야훼의 ‘이름’만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 오늘 야훼께서 너를 나의 손에 넘겨주실 것이므로, 내가 오늘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사람의 시체를 모조리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밥으로 주어서 온 세상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도록 하겠다. 또 야훼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를 사용하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전쟁은 야훼의 것이라는 것 그리고 주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셨다는 것을 이 온 회중의 무리(‘카할’ 삼상 17:47, 삿 20:2)가 알도록 하겠다.”(삼상 17:45b-47) 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다윗의 외침의 현장, 즉 그 다윗의 말의‘삶의 자리란 실제의 전쟁터가 아니고 예배환경이라는 것은 47절에 나타나는 “온 회중의 무리”(카할)라는 말과 “우리 손에”라고 다윗이 말할 때 그 “우리”가 “나의 손에”라는 단수가 아니고 “우리의 손에”라는 복수로 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50절에 표현되어 있는 바에 의하면, 다윗이 골리앗을 격파한 최후의 승리는 <칼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특이한 수사문학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그 구절을 보면,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멩이로만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 죽였으나 그의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라는 표현에서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 철기시대를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땅에 도입한 저 막강한 절대적 강적인 블레셋 세력을, 단지, 나무 막대기와 돌멩이 다섯 개만을 가진 다윗이 감히 가나안 땅에서부터 몰아내고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 백성을 거인국 블레셋의 마수로부터 해방시킨 것은, 전적으로 그것은, <인간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전쟁이란 결단코 칼과 창 그리고 군마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전적으로 만군의 야훼 하나님의 해방행위, 그의 구원행위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한 것, 즉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 일뿐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예배회중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본문 창세기 50:19와 출애굽기 14:10-14에 나타난 복음적 증언은, 즉 우리 본문의 케리그마는, 전적으로,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것’이므로 사람이 손을 대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전쟁의 전리품(‘헤렘’)인, 즉 <포로가 된 저 원수(‘헤렘’)>도 또한 하나님의 것이니 결코 인간이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것, 이른 바, 반전(反戰)/ 비(非)폭력의 평화 이념을 선포하고 가르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전쟁은 하나님의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 악한 원수와 싸우실 것이므로,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의 힘의 논리로 이 땅에 평화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허구(虛構)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은 그 어떠한 경우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인본주의적 유토피아주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름 아닌, 성서, 특히 구약성서의 하나님 전쟁/거룩한 전쟁 신앙의 요지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요셉 역사와 출애굽 역사가 증언하듯이. 하나님의 인간 구원역사 속에서는 단지 ‘시너지’ 역할만을 담당할 뿐, 하나님의 전쟁에 손을 대려해서는 또는 그 전쟁의 전리품인 ‘하나님의 원수’에게 인간이 손을 대려 하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약 역사가, 특히 신명기적 역사가가 이 ‘미시오 데이’(Missio Dei)에서의 인간의 역할을 제한하되 오직 인간의 ‘시너지’ 역할에만 국한하였다는 것, 단지 ‘두려움 없는 하나님 의지(依支) 신앙’과 ‘하나님의 구원 승리를 크게 외치는 외침, 이른 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절대 신뢰의 신앙고백만을 요구하였다는 것은 성서의 전쟁 기사에서 우리가, 즉 성서를 가르치고 또 배우는 우리 모두가 가장 주목해 보아야 할 분분이라고 하겠다.

매우 역설적이겠지만, 이 땅에 아직까지도, 이른 바, 137억 년 전 빅뱅이 일어나 우주가 생긴 이래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평화가 이 땅위에 이룩되지 않는 이유,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한지도 2000년, 즉 예수 오신지 20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예수의 그 대속적인 죽음의 사랑이 이토록 충만하게 이 지구를 뒤덮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그 이유를, 나는, 이 땅의 ‘하나님의 전쟁’ 역사에서 인간이 손대지 말아야 할 그 하나님의 것에 인간이 오만스럽게 손대려하는 인간의 그 ‘도덕적 오만’에 그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이른 바, 인간이 오만스레 나서서 전쟁하고 인간이 오만스레 나서서 친히 원수도 갚고 인간 자신이 스스로 오만스레 나서서 인간 자신의 구원을 인간 스스로가 다 이루어내려고 하는 저 인간의 독선적 오만, 인간의 저 거인주의적인 ‘휴브리스,’ 이른 바, 하나님의 전쟁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이 모두 다 장악해서 하려는 그 ‘도덕적 오만’에 그 원인이 있다고 성서는 믿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이란 이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단지 하나의 ‘시너지’에 불과하다고 하는 저 ‘시너지즘’(synergism)이라는 거룩한 전쟁 신앙의 ‘신념’을 감히 깨뜨리는 인간의 그 ‘도덕적 오만’과 ‘거인주의’(Titan-ism)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지연되는 근본 이유가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께 맡겨두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원수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원수이니! 원수 갚는 것도 또한 모두 하나님께 맡겨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우리 인간들이 할 일은 단지 ‘두려움 없이’ ‘가만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믿고 찬양하기만 하라’는 것이다. 인간은 전쟁에서부터 손을 떼라는 것이다. 인간은 원수 갚는 일에서는 손을 떼라는 것이다. 야훼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야훼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원수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형님들이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동생이 어찌 감히 하나님을 대신하여 형님들에게 복수하기라도 하겠습니까?”라고 성서는 요셉의 입을 빌려서 오늘의 우리에게도 감히 담대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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