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윤응진 교수의 기독교 교육 아카이브<바로가기 클릭>
“생명, 생태, 신학”을 주제로 한국기독교학회가 개최한 제32차 정기학술대회가 끝났다. 이 기간에 우리는 얼마나 생명의 위기에 대해 진지했는가? 생명은 생명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학적 그물 안에서 존재함을, 그 관계성 안에서만 참된 생명임을 바르게 인지하였는가? 생명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추상적인 감상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생명은 생태학적 구조 속에서 인식되고 고려되어야 한다. 생태학적 구조 속에서 생명을 지닌 개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생태계 자체가 인간들에 의하여,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증식에 눈이 어두운 기업가들에 의하여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정치가들에 의하여 복원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사회구조적 모순을 분석적으로 비판하지 않고서 생명 자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오히려 비판적 문제의식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위험이 있다. 생명을 파괴하는 사회구조적 요인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과제들을 인식하지 않고는 생명과 생태에 대한 논의는 단지 논리적 유희에 끝나고 말 것이다.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흔히 제기되는 제안이 자연을 하나님의 몸으로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 앞에 경건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범재신론적 이해가 과연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하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바른 이정표가 될 것인가?
나는 이러한 논리가 또 다시 19세기에 유행했던 자유주의 신학의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본다. 진화의 과정 안에, 즉 서구역사의 발전 과정 안에 하나님이 내재한다는 신학적 논리는 결국 서구 사회를 변혁하는 혁명적 논리가 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구 자본주의 문명을 정당화하였을 뿐이다.
생태계의 파괴를 불러온 서구의 이른바 “기독교” 문명을 뒤엎을 혁명적 논리는 젊은 바르트가 찾아낸 절대타자로서의 하나님 이해로부터 비롯되었다. 인간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식할 때에만 인간이 이룬 모든 것은 - 그것이 아무리 기독교의 탈을 썼을 지라도! - 상대화되고 심판의 대상일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다르다! - 이 인식 앞에서만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다.
오늘날 생태계 파괴로 인한 생명의 멸절 위기는 다름아니라 간교한 인간의 지식과 끝없는 탐욕, 그리고 강력한 권력이 결합하여 발생한 것이다. 인간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인간이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엄청난 지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위기는 진정한 위기이다! 이제 이러한 인간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땅의 지배자들과 기업가들이 범재신론으로 설득될 리도 없지만, 낭만주의적인 자연이해로는 현실을 변혁할 인간을 양성하기는 고사하고,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자연에 도취될 개별적인 인간들만 배출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한편에서는 자연 안에 있는 신성을 예찬하고 자연과 동화되는 자연주의자들이 늘어나기는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태계를 파괴하는 거대한 기계장치는 아무런 방해 없이 인류와 생태계를 파멸의 나락으로 밀고 갈 것이다.
자연 안에 내재한 신은 현실을 변혁할 수 없다. 자연 밖에, 인간 세계 밖에 있는 하나님, 인간과 전혀 다른 인격적 하나님만이 현실을 변혁하도록 우리에게 ‘요청’할 수 있다. 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현실을 변혁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다. 인간 스스로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 분의 명령, 그분의 계명만이 위기를 타개할 사명과 의무, 그리고 용기를 준다.
생태계의 위기에 대한 의식을 지닌 사람들마다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성을 오히려 생태계 파괴의 근본 원인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답답한 일이다. 바르트가 말한 하나님의 초월성이 지니는 혁명적 논리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님의 초월성이 전제되지 않은 내재성은 현실체제를 옹호하는 논리로 전락할 뿐이다.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성서의 하나님, 역사를 변혁하는 야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필요하다. 자연으로 환원되고 마는 신은 자연을 되살릴 능력이 없다. 긴급한 문제는 대자연에게 신성을 부여함으로써 생태계 파괴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대자연 밖에서 그것들을 보호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경청하도록 하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태계 보존을 위한 신학적 토론과 기독교교육의 실천의 토대는 히브리적 역사신앙 전통일 수밖에 없다.(2003.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