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32:22-32[23-33]
*[ ]안의 절수 표시는 히브리 성서의 절수 표시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
야곱의 긴 인생여정의 마지막은 <두 개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로 정리된다. 그 하나는 얍복 강변(=브니엘)에서 하나님과 만난 이야기이고, 그 다른 하나는 이 일이 있은 직후에 이루어진 형, 에서와 만난 이야기이다. 여기서는 첫 번째의 만남, 즉 <하나님과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 속에 담긴 그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야곱은 형, 에서가 받을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던 일 때문에, 형의 보복살해의 위협(창 27:41-45)을 받아 멀고도 먼 밧단아람(메소포타미아)의 외삼촌댁으로 도망가서 20여년의 세월(창 31:41) 동안 피신하고 있다가 마침내 큰 부자가 되어(창 31:1) 금의환향(錦衣還鄕), 고향 땅(창 31:13)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러나 야곱은 고향 문턱인 얍복 강변에 이르자 형, 에서의 보복살해의 증오가 자신과 자신의 모든 가속(家屬)을 덮치려고 400명이나 되는 사병을 이끌고 멀고도 먼 에돔의 세일 땅(창 32:3[4])에서부터 여기 이곳 얍복 땅을 향하여 마중 나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심히 두렵고 걱정이 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창 32:6-7[7-8]). 그리하여 야곱은 <매우 종말론적인 생각으로>! 형, 에서를 만날 만반의 준비를 한다. 즉 형의 분노한 마음을 풀기 위한 방법으로 자기 소유물 중에서 <암염소 200, 숫염소 20, 암양 200, 숫양 20, 젖 나는 낙타 30과 그 새끼, 암소 40, 황소 10, 암나귀 20, 새끼 나귀 20을 [아마도 巨額의 全 財産을 贖罪의 代價로] 준비하되, 그래도 미심하여서인지, 그것들을 세 떼로 나누어 앞세우되 각각 거리를 두게 하여 나아가게 하였다(창 32:13-21[14-22]; [ ]안의 절수는 히브리 성서의 절수임)
그리고는 우리 본문 서두에서는, 그 모든 예물들을 앞세운 야곱은, 온 가속(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얍복 강 개울을 밤을 틈타 모두 건너보낸 후 자신만은 그 밤에 홀로! 뒤에 남았다고 하였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과 감히 <단독 대면>을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바로 그 때, 정체불명의 한 사람이 야곱을 붙들고 씨름을 하기 시작하였다. 즉 씨름의 도전을 시작한 것은 야곱이 아니라 그 사람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사람은 그러나 하나님(神, 엘/엘로힘)이셨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먼저 선수를 취하여 도전해 오셨던 것이다. 즉 하나님이 친히 먼저 야곱을 공격해 오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야곱에게 씨름을 건 그 사람을 가리켜 <강의 신> <강의 정령>이라고 추론하는 것은 단지 이 설화의 종교사적 배경을 아주 고대로 소급해 살펴보는 경우에만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 본문에서는 그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엘로힘/엘) 자신이셨다. 밤에 (철야 도중에) 경험한 하나님과의 대면(하나님과의 씨름) 체험에 대한 이 은유적(metaphorical) 표현은, 결국은 야곱의 엉덩이뼈(허벅지 관절/환도뼈/생식기) 부분을 파손한 것(=야곱의 희망 파손)으로 끝장이 났다는 점(창 32:25[26],31-32[32-33])으로 미루어볼 때, 이 사건은 야곱에 대한 가장 결정적이고도 가장 심각한 <신의 시험>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겠다. 이 경험은 실로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겪은 <하나님의 시험>경험과도 평행을 이룬다고 할 수 있고(cf. 창 22), 그것은 또한 모세가 이끈 이스라엘도 능히 견디어내지 못한 사건(출 19:1-25; 20:18-20)을 야곱이 홀로 견디어 낸 사건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죽음을 통한 부활승리를 기대케 하는 사건(Cf. Karl Elliger)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야곱(=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잔혹한 시험의 공격을 거쳐서 비로소 만들어진 사람(민족)이라고 하겠다. 즉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혹독한 공격(시험)을 받으며 비로소 영걸어지고 만들어진 민족이라고 하겠다. 그렇다.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 얍복 강변의 야곱,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 매국노로 지탄받았었던 진정한 애국자 예레미야, 고난 받는 의인인 야훼의 종,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겪었던 바, 그런 그 특이하고도 역설적인 하나님의 공격을 통하여서야 비로소 참 인간이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성서 이야기이고 야곱 이야기이다. 얍복 나루터의 <씨름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얍복 강 나루터에서 밤에 야곱에게 일어난 그 놀라운 상황은 대체로 이러하였다. 야곱은 형, 에서가 받을 축복을 간교하게 가로챈 다음 20여 년 간 멀리 도피하였다가 이젠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고, 지금은 거의 고향 어구에까지 와 있었다. 그러나 막상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이른 바, 형의 노가 풀렸으리라고 기대한 그 믿음은 여전히 전혀 불확실하였다. 더욱이 야곱이 용서 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더욱 오리무중이었다. 그리하여 고향 땅으로 들어서기 전에 그는, 우선, 형의 근황을 알아보기 위하여 수하의 심부름꾼들을 풀어서 형의 근황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 알아본 결과 역시 염려한 것 이상으로 최악이었다. 왜냐하면 그 먼 에돔의 세일 땅에서부터 이미 형은 가병(家兵) 400명(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하여 차출하였던 가병은 318명이었다. 창 14:14)을 이끌고 야곱을 치려고 이미 매우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야곱은 서둘러 형의 마음을 가라앉힐 예물을 준비하였다. 거의 전(全) 재산을 차출하리만큼 많은 투자를 하여 마련한 후 그것을 앞세웠다(창 32:13-15[14-16]). 그리고 자기 살붙이인 가솔들을 세 떼로 나누어 모두 앞 서 가게 하되, 거리를 두고 가게 하였다(창 32:16 [17]). 실로, 완벽하리만큼 보복의 비극적 사태에 대해서 대비하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불안을 떨칠 수 없었던 야곱은 얍복 강변에 홀로 남아 밤잠을 물리고, 철야를 하며, 대책을 궁구(窮究)하고 있었다. 바로 이 때, 야곱에게 후손번성을 약속하셨던 바로 그 <약속의 신>이신 야훼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을 찾아오시어 야곱을 <공격>해 오셨던 것이다. 즉 씨름을 걸어 오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야곱에게는, 특히 히브리 신앙전통에서는 문자그대로의 <죽음의 위협> 그 자체였다(출 33:20). 비록 <씨름>이라는 말이 단순한 <은유적 언어>라고는 할지라도,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만 보아도 죽는다는 그들 신앙의 전통에서 보면, 감히 그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살을 부비면서 씨름을 하고서야 살아남을 수는 없다는 것은 상식임이 분명한데, 갑작스레, 바로 그 하나님이 친히 달려들어 씨름을 시작하였다니, 야곱의 목숨은 그 순간으로 <죽은 목숨>임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야곱은 그를 향해 공격해(시험해) 온 저승 사자와도 같은 그 하나님을 피하지 않았다. 그 공격을 동이 틀 때까지 끌어안고 <견디어내었던>! 것이다. 이 <견디어내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말 <야콜>(yakol)은 여러 가지 번역의 가능성을 가진 말(endure/be able to/can/be superior[win])이지만, 우리말 성서는 이 말을 주로 <[야곱이]이기다>(win)라는 말로 번역하여 왔다. 이것은 은유적(隱喩的)으로 해석된 말이다. 왜냐하면 ⓐ본문의 전후 문맥과 ⓑ야곱 설화 전체의 맥락 모두에서 볼 때, 이 말을 <이기다>라는 말로 번역한 것은, <씨름판>에서 하나님께서 모래판에 먼저 무릎을 꿇으셨다는 말이 아니라, 야곱의 그 결사적 <끈질김>(처절한 볼썽사나움) 때문에 이 씨름에서부터 아예 물러나시려 하신 것을(야곱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아예 포기하시려 하신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야곱의 인간성은 하나님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be not able to=impossible) 데까지 [구제 불가능에까지] 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야 말로 야곱에게는 최대의 위기였다.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엉덩이뼈>를 <치셨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곱은 씨름 때문에 자기의 엉덩이뼈를 다치게[違骨되게] 되었던 것이다>(창 32:25[26]) 즉 야곱은 졸지에 신의 심판을 받고 절뚝발이가 된 것이다. 무릎을 꿇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희망의 거점(생산축복의 자리)까지 잃어버린 것이다. 왜? 그의 <엉덩이뼈(캎-예렉)>는 그의 자녀 생산력(후손 축복)의 근본인 그의 <성기>(性器)>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즉 후손 번성에 관한 <신의 약속>을 성취시킬 그 그루터기 희망을 치명적으로 타격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었다.
<캎-예렉 야곱>(야곱의 性器=후손번성에 관한 신의 약속을 성취시킬 곳)을 격파하시는 하나님의 공격!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향하여 100세에 얻은 그 외동아들을 번제 제물로 도로 내어 놓으라고 욱 죄며 <공격>(시험)해 오신 것과도 비교되는, 아니, 그것보다 더 절망적인 공격(창 32:25[26])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다음 절, 즉 창 32:26[27]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가(=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날이 새려고 하니 나를 놓아 달라’고 말씀하셨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시면 보내드리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즉 야곱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허리가 무너져 모래바닥에 무릎이 꿇리고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모래바닥에 나동그라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공격[하나님의 시험]을 피하지 않고 그것을 정직히 액면 그대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즉 하나님 당신의 이름으로(창 27:27-28) 아버지께서 축복하셨던 그 축복만은 죽더라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무너져도, 즉 아버지를 속인 죄의 값은 피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잃는 것으로 보응 받겠지만(창 32:13-15[14-16])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은 축복만(창 27:27-28)은 죽음의 심판을 받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죽음의 심판과 신의 축복을 맞바꾸겠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하나님의 반응이 나타났던 것이다! 하나님은, 돌연, 만신창이의 패배자 야곱의 팔을 힘껏 들어 올리시며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네가 [오히려] 이겼다!>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역설(逆說)이다. 이것이야말로 마치 십자가 위에서 완전 패배하고 죽으신 아들 예수를 무덤에서 살려내시고 아들의 패배를 <부활>의 승리로 확증시키신 하나님의 그 역설의 한 예표(豫表; prefiguration)가 아니고 달리 무엇이겠는가!
실로 이스라엘(=야곱)은 자신의 노력이나 자신의 간계(奸計)의 지혜나 뚝심 또는 선택받은 자라는 그 어떤 특권에 의해서 이루어진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격>(하나님의 시험=神의 테스트)에 의하여 만들어진 민족이었던 것이다.
발뒤꿈치(야아콥=야곱)가 깨어지고 무릎이 모래 바닥에 꿇리고 또는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모래 바닥에 시체처럼 나동그라졌는데도 그 하나님의 축복약속만은 여전히 붙들고 버티는 사람, 저 야곱을 향해 하나님은 드디어 입을 열고 대화의 문을 여신 것이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은 대답한다. <야아콥=heel=발뒤꿈치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야곱을 향해 드디어 이렇게 선포하신다. <너는 하나님과 씨름하고서도(하나님의 공격을 받고서도) 피하지 않고 수용하여 그것을 견디어낸 사람! 그러므로 네 이름을 다시는 야아콥[발뒤꿈치]이라 부르지 말고 이스라엘(하나님이 싸우신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보존하신다. 등등의 뜻)이라 부르라, 왜냐하면 너는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겨(=견디어)내었기 때문이다.>(창 32:28[29])
<네가 [오히려] 이겼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이 매우 기이한 선언을 들은 야곱은, 그제야 비로소, 그러나 매우 재빨리 제 정신이 들어, <신학적 리비도>(libido theologica)의 충동을 받는다. 그리하여 야곱은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라고 말하였고 하나님은 야곱에게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라고 대꾸하시면서 즉각(!) 그를 축복하시었다. (축복의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 모든 일이 야곱에게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서로 간에 <이름>을 물으며 인사를 나누었다는 것은, 즉 하나님께서 야곱이 누구인지 모르셨을 리 없고 또 야곱도 그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몰랐을 리 없었을 텐데도, 이름을 묻는 질문이 오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상대편 실재의 그 정체성을 알고자 한 것일 것이다.(Nomia sunt realia.) 야곱은 자신이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태어난 사람>임을 고백하였고 하나님은 <네가 왜 내 이름을 묻느냐?>라고 되물으심으로 자신은 <이름이 없는 분>(nameless God)이심을 밝히신 것이다. 이렇게 주고받은 문답은 매우 풍부한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야곱의 정체성은 <형[제]의 발뒤꿈치를 붙잡는 그의 간계함(奸計性)>에 있고 그리고 그 심각 도(度)는 신(神)으로부터 <급소>(急所)의 공격을 받을 만한 <나쁨>(badness)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급소>는 야곱의 성기(性器) 부분을 가리키는데, 한국어번역 성서는 전통적으로는 <환도 뼈>라고 번역하여 왔으나 최근에는 <허벅지 관절>(개역 개정판), <엉덩이뼈>(새 번역판), 또는 허리 및 혈통(출 6:1)이라고 고쳐 번역하였다. 이 말은 <그것이 후손 번성에 관한 신의 약속을 성취시킬 자리>라는 특수한 신학적 의미를 가진 말이었다. 아브라함 때부터 조상 대대로(아브라함-이삭-야곱-모세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대표적 조상들이 대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약속>은 ⓐ후손번성과 ⓑ땅 소유였다. 이 둘은 <선민>(選民)이라는 한 민족 또는 한 국가 형성의 기초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급소인 이 부분을 공격하여 <치셨다>(나가아)는 것과 그래서 그 부분이 <다쳤다>(새 번역) 또는 <어긋났다>(개역 개정)는 것은 <신의 축복약속>이 그 약속을 주신 바로 그 신(神) 자신의 공격을 받고 바로 그 신(神)에 의해서 부셔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야곱(이스라엘)에게는 치명적인 것이고 분명 그것은 그의 전(全) 실존과 희망의 깨어짐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바로 그 치명성을 지닌 희망의 깨어짐을 통하여 야곱이 최상 최대의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는 그것이다. 바로 여기에 <버려야 얻는다.>는 교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옛 자기를 버려야 비로소 새로운 자기를 얻는다.>는 교훈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옛 야곱(발뒤꿈치)이 깨어지고 다 무너진 후에라야 비로소 새 야곱인 이스라엘(엘이 싸우신다. 엘이 다스리신다. 엘이 승리하신다)이라는 선민(選民)으로 다시 태어나 거듭나게(born again) 된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케리그마적(복음적) 상황을 우리 본문은 이런 형식의 은유(metaphor)의 기법(技法)으로 묘사한 것이다. 놀랍다 아니할 수 없다.
졸지에 <절룸발이>가 된 야곱이 <절뚝거리며>(창 32:31[32]) 걷는 그 등 뒤로 드디어 [희망의] 해가 솟아올라서 그를 비추었다고(창 32:31[32]) 말하며, 야곱의 얍복 나루터 설화는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던 것이다. 브니엘(=하나님의 얼굴) 땅에 솟아오른 저 희망의 태양!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은 사람, 저 <절뚝거리는> 야곱의 뒷모습을 비추는 희망의 햇살이 참으로 따사롭다.
모든 인생도 또한 새롭게 창조되기 위하여서는(갈 6:15) 허리(급소)가 무너지는 자기부정(自己否定)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별들의 진화단계 중 최종단계에서나 일어나는 저 대폭발(big bang)의 <초신성>(超新星) 탄생처럼, 그리고 몸의 부활을 이끌어낸 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처럼, 우리가 새롭게 창조되는 길도 자기의 전 존재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항복(회개)하는 그 때에야 비로소 열리게 된다는 그런 말씀인 것이다. <이기고도 울면서 하나님께 간구한 저 야곱>처럼. (호 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