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일치기도]정진석 가톨릭 추기경 메시지

2009. 1. 18.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한 분이신 주님을 믿고, 예수님을 인류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하나의 세례로 결합되어 한 형제자매가 된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저는 지금 이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서로가 비록 다양한 이유로 갈라져 함께 주님을 찬미해 오지는 못했지만, 오늘 이 시간 이 곳에 모인 우리 모두는 일치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로 같은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는 한 형제자매임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입은 옷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찬미하며 드리는 기도의 형태와 방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목소리로 찬미하는 하느님과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결코 다를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함께 체험하고 있습니다. 갈라져 살아온 지나온 과거들에 대해 함께 참회하고, 하느님 말씀을 함께 들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선사하신 평화를 서로 나누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예수님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눠주신 참된 평화였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주님께서는 다락방에서 불안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주신 이 평화를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삶 속에서 받은 상처와 고통 속에서, 이 사회에 얼룩진 불의와 빈곤 속에서,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폭력 속에서, 우리의 무관심과 이기심으로 망가진 생명들과 생태계 위기의 현실 속에서, 그리고 우리 한반도의 남과 북으로 갈라진 현실 속에서 애타게 찾는 것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이 평화입니다.

주님 안에 하나 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를 찾아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평화를 원합니다. 같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오랜 시간 서로의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말과 판단, 그리고 행동으로 생겨난 오해와 편견의 벽을 넘어서, 서로를 잘 알지 못했으면서도 서로를 외면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우리의 좁은 마음을 넘어서 함께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우리만의 구원과 우리만의 해방을 위해 이 평화를 찾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평화, 우리가 찾고 있는 평화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폭력과 증오로 물든 사회 현실 속에서, 도덕과 가치가 상실되고 있는 이 땅의 어두움 속에서, 이기심과 교만으로 편향된 종교적 현실 속에서, 가진 자의 욕심으로 인한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적 모순 속에서, 그리고 불의와 탄압으로 의사소통이 단절된 세상 속에서 참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찾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은 결코 저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저 세상의 상급은 우리 곁에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베푸는 작은 사랑과 희생과 같이 이 세상에서 나누는 사랑과 화해, 용서와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한국의 모든 그리스도인 여러분,

우리 한국 교회는 어느 덧 세계 교회 어디에 나서도 부끄럽지 않은 교세와 신앙적 열성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서구 유럽 교회와 아시아 교회는 한국 교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순교적 열정과 근대화의 초석으로 다져진 한국의 천주교와 개신교, 그리고 정교회가 애초부터 신앙적 교리나 제도로 인한 갈등보다는 한반도의 분단된 상황 속에서, 독재 정권의 폭력 앞에서 함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 현장에서 서로 손을 마주잡은 소중한 체험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합리적이고 추상적인 논리보다는 마음을 울리는 공감과 감동의 언어로, 결론 없는 논쟁과 타협보다는 몸으로 부대끼며 만나온 현장의 언어로 일치 운동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함께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로서 선교적 협력과 교회적 관심을 표현해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참된 평화를 선포할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세상에 파견된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로 일치하고자 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피조물들과 하나가 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한국 그리스도인의 일치의 경험은 먼저 우리 안의 친교와 기도로 시작되지만, 그것이 일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이 갈망하고 있는 평화를 살아가는 도구들이자, 참된 사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일치 기도회에서 우리가 함께 나눈 소중한 경험들을 마음에 깊이 간직합시다. 그리고 우리 이웃들에게 전합시다. 우리의 일치가 세상의 일치, 더 나아가 하느님과의 긴밀한 일치를 이루는 작은 씨앗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시다. 아멘.

2009. 1. 18.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추기경 정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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