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 33장
▲김이곤 박사 |
씨름을 통한 야곱과 하나님과의 <만남 이야기>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야곱의 인생여정 결론부분에 나오는 또 하나의 <만남 이야기>(창 33장)는 <원수> 사이가 되어 헤어졌던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의 극적인 해후(邂逅) 이야기(창 33:1-17)로 구성되어 있다.
20여 년이라는 그 긴 세월을 흘려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풀지 못해 맺혀있는 그런 <원수 관계>가 <대 화해>로 봉합되는 일이란, 그렇게 쉽게, 그 무슨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룩될 수 있으리라고 하는 기대(期待)란 하나의 허상(虛想)에 불과하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경험이 매우 웅변적으로 잘 설명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형과의 이 만남에서 야곱이 취하였던 다음의 몇 가지 행동들, 즉 ① 가속(家屬)들을 몇 떼로 나누고 서열(序列)을 지어 자기 뒤를 뒤따라오게 한 것, ② 대열(隊列)의 맨 앞에서 형에게로 나아 갈 때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을 한 것>, ③ 형, 에서와 만나 서로 껴안고 입을 맞추며 울면서 인사를 나누고 또 자신의 온 가속(家屬)들을 형에게 인사시켰던 일, ④ 준비한 예물(=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사양하는 형에게 진정성을 기울여 기어이 전달한 일, ⑤ 형님의 얼굴을 마주 대할 때 그 형님을 향하여 야곱이 말하기를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라고 고백한 그 일, ⑥ 형님과 평화롭게 헤어진 일, ⑦ 형님과 헤어진 후 어느 한 곳에 이르러 자기 집 및 가축을 위한 집을 짓고 그 곳 이름을 <숙곳>이라고 이름 붙인 일, 등의 행위들은 어느 정도는 인간적 냄새를 내는 <제스처>가 들어있었다고는 하여도, 그 전체의 상황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화해사역(和解使役)>이라는 문맥 안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에서와 야곱의 <해후>(邂逅)는, 이러한 문맥에서 보면!, 그 무엇보다 야곱의 인격변화를 보여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위에서도 시사(示唆)한 바와 같이, 이 <해후>(만남)는 분명 앞에서 일어났었던, 즉 저 얍복 나루터에서 일어났었던 <하나님과의 화해의 만남>을 전제(前提)하지 않으면, 아마도, 야곱의 그 모든 행위들(7가지)은 그 진실성이 매우 의심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얍복 나루터에서 만났던 그 <하나님과의 그 만남>은 옛 야곱을 청산하고 새 야곱인 <이스라엘>로 거듭나게 한 사건이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과의 만남> 다음에 일어난 이 <만남>은 지난 날 경험하였던, 또 지금 경험하고 있고, 그리고 앞으로도 경험할 그 <이웃과의 만남>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야곱과 그의 형 에서와의 이 극적인 <화해의 해후>, 즉 앞에서 경험한 그 <하나님과의 해후>를 전제하고 볼 때, 야곱의 이 완연한 변화(결코 간교한 속임수적인 제스처가 아닌 진정한 변화)에 대한 이 표현은 위의 ②와 ③ 그리고 ⑤항에서 발견된다. ②와 ③의 경우는 이러하였다. 즉 ②의 경우를 보면, 먼 타국에서(메소포타미아 땅의 평원, 밧단 아람에서) 자수성가(自手成家)하여 거부(巨富)가 된 그런 야곱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는, 개선장군 마냥, 어깨에 힘을 주고 거만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를 않고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이른 바, 전형적인 종의 자세(vassal의 자세)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 일곱 번 허리를 굽히는 자세는 고대 문서(기원 전 14세기경의 문서로 추정되는 문서)인 텔 엘-아마르나 (Tell el-Amarna)문서에서 입증된 바, 주종(主從; suzerain-vassal) 관계에 있는 <종>, 즉 군신(君臣) 사이의 신하가 취하는 전형적인 자세(the oft-occurring formula of homage)였던 것이다. 즉 야곱은 여기서 형의 축복을 속여 빼앗든 그 오만한 자세가 아니라 자신을 <종> (vassal) 만큼이나 낮추는, 그러나, 단순한 종의 자세보다는 진심어린 사랑과 화해의 심정을 가진 자의 형제지간의 우정 내지는 애정의 자세(cf. 삼상 20:35-41)를 취하며 나아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굴종의 자세로 단순히 상대방의 긍휼을 일시적으로 끌어내려는 자세라기보다는 진정한 형제간의 관계로 돌아가 진정한 화해를 이루려는 기본자세였던 것이라 하겠다(C. Westermann의 입장도 이와 동일함).
야곱의 이러한 염원이 그의 형과 만나는 순간에 <즉각>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그 다음에 이루어지는 ③의 경우였다. 즉 <[동생 야곱과 그의 전 가속이 진심어린 뉘우침과 한없이 자기를 낮추어 용서를 비는 에(禮)를 갖춘 것을 본] 형, 에서는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끌어안고 목을 어긋나게 맞추며 그와 입 맞출 때, 서로들 다함께 울었다.>(창 33:4=눅 15:20=Enuma Elish[고대 바빌론의 아주 초기 창조신화], I, 2. Pp. 53f. 참조)라고 성서는 기록하였다. 성서기자는 여기서 고대 중동의 전형적인 <갈등해소 문학양식>을 빌려서 이 장면을 묘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야곱의 불안해하였던 긴장이 바로 이 순간에 극적으로 풀리게 되었다는 것이다.(cf. C. Westermann, Genesis 12-36, P. 525) 즉 형 에서가 아우 야곱의 허물을 용서해 주면서 <함께 울었다>는 것이다. 막혔던 대화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와 두 사람의 가슴이 열리는 극적 장면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야곱의 가슴에 응어리졌던 불안의 긴장도 또한 이 순간에 해소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긴장해소의 그 근본 근원은 어디에 있었을까? 동생 야곱이 취한 최선을 다한 형에 대한 따뜻한 영접(창 32:13-15[14-16])과 그리고 자신이 행한 과거의 허물에 대한 진심어린(genuine and honest) 잘못 인정(the avowal of guilt, cf. 창 33:3) 등에도 그 원인이 있었겠지만, 동시에, 동생의 그 옛 허물이란, 다시 생각해보면, 20여 년 전,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것으로서 지금의 형에게는 더 이상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점(cf. 창 27:44-45)에도 또한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 이러한 극적 화해를 이끌어낼 수 있는 <현실적인 요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 이스라엘과 에돔 민족 사이의 뿌리 깊은 그 반목관계(cf. 시 137:7)가, 즉 20여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병(私兵) 400명을 거느리고 저토록 먼 길을 동생을 치려고 마중 나오리만큼 강렬한 저 살육적 반목감정이 단지 그러한 몇 가지 현실적 요인들 때문에 그토록 완벽하게 해소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형 에서가 용서를 선언하고 동생의 귀향길을 <에스코트>(escort)하겠다는 친절한 제안을 동생 야곱이 감히 두 번이나 사양하였다는 점(cf. 창 33:12-16)은 야곱의 마음에는 아마 아직도 여전히 불안의 요소가 남아 있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볼 때, 야곱이 의지(依支)하였던 바, 형제간의 저토록 오랜 반목의 긴장을 <진정으로 풀어 주었던 그 근원>은 오히려 딴 곳에 있었다고 하겠다. 즉 창 33:5,8,10, 11,15에서 다섯 번 반복된 <은혜>(히브리어로는 <한눈>과 <헨>)라는 말이 아마도 그 <대 화해 사건의 근원지>가 어디인지를 잘 암시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창 33:5와 33:11은 하나님(엘로힘)으로부터 이미 받은 바의 그 은혜(한눈, grace)를 말하고 있고, 창 33:8.10,15는 형 에서로부터 기대하고 있는 은혜(헨, favor)를 말하고 있다. 물론 히브리어 <한눈>(은혜)과 <헨>(호의, 은혜)의 의미를 구약성서가 하나님의 것과 형제(이웃)의 것 사이의 것으로 엄격히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여기서는 <엘로힘>(하나님)이라는 말을 특별히 연결시켜서 구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즉 야곱은 여기서 <화해의 진정한 근원>을 <하나님의 은혜>에서 기인(起因)된 <형님의 은혜[호의]>(하나님→형님)에서 찾았던 것임이 분명하며, 성서 보도자(報道者) 또한 그의 고유한 수사법적인 표현을 구사(驅使)하여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하려고 의도(意圖)하였음이 분명하다. 실로, 야곱은 여기 얍복 나루터에서 목숨을 걸고 벌인 하나님의 은혜(축복)를 추구하는 씨름에서 얻은 그 기적 같은 역설적(逆說的) 승리를 전적으로 <은혜(=축복)를 획득한 사건>으로 믿고 있음이 분명하다.
말하자면 이러한 ②③의 과정에서 얻은 결실(結實)이 바로 ⑤의 사건이었다고 하겠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형[제]의 은혜가 한 데 연결되어 그 융합된 <은혜>의 물결이 야곱의 가슴에 와 닿는 순간, 야곱의 입에서는 마침내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내가 형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게 되고 보니, 형님(원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됩니다(형님→하나님).(창 33:10b)라고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고백에 접하자, 문득 필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 유대인 사상가 마틴 부버(M. Buber)의 「나와 너」(Ich und Du/I and Thou)라는 저서가 증언한 바, <우리 인간은 우리의 이웃(you)을 통하여 영원 자 당신(Thou)을 만나게 된다.>(you→Thou)라는 뜻 깊은 증언 앞에 서게 된다. 즉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며 또한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어디까지나 <자신을 감추시는 분>(사 45:15, Deus absconditus)이시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보고서 살 자는 없다고까지 성서는 증언하였다(출 33:20). 목숨을 건 씨름판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스라엘(=야곱)이 그의 하나님을 향하여 던진 질문,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라고 한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단지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창 32:29[30])라고 하시며 그 대답을 거부하셨고 또 출애굽 민족 지도자 모세를 이집트 땅으로 특별한 사명을 맡겨 파송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모세로부터 받으신 자신의 이름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도 또한 역시 그는 <나는 나다.>(I am who I am, 출 3:14)라는 매우 그 뜻이 불투명한(cf. the circular idem per idem construction in Ex. 33:19) 대답을 하셨으며 이스라엘의 대표적 사사(士師)인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던진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또한 하나님(의 사자)은 <내 이름은 기묘(奇妙)/비밀(wonder/a wonderful/You cannot understand./what surpasses human comprehension)이다>라고 대답하셨다는 것(삿 13:17-18), 이것이 바로 성서의 진정한 현실이다. 이러한 성서현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러한 성서의 현실은 고대 중동이나 그리스 세계에서는 분명 매우 특이하고 예외적이다. 그러므로 아테네 시(市)에 있는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사도 바울이 행한 설교(행 17:16-34; 특히 23절)에서는 성서의 하나님이란 중동이나 서구 세계는 결코 <알지 못하는 신>(아그노스토스 데오스, an unknown God)이라고 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말하자면, 그 무슨 <힉스 입자의 발견>에서처럼, 신(神)도 마침내는/드디어는 천문 물리학의 과학자들에 의하여 언젠가는 발견되고 입증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인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왜? ― 그 대답은 최근 가장 강력한 반(反)종교적 목소리를 내고 있는 무신론자 도킨스(R. Dawkins)가 빈정거리며 비난조(非難調)로 사용한 소위 <트리클-다운(trickle-down) 창조론>이라는 논리가 말해주듯이, 즉 <창(窓)은 창 제작자가 자신을 만드는 과정을 볼 수는 없다.>라고 한 그 논리대로,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을 만드신(=자신을 만들었고 또 아직도 만들고 계시는) 창조주(Maker)를 볼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호킹(S. Hawking) 박사가 말하는 <자발적 창조자로서의 인간 뇌> 이론(인본주의적 진화이론)도 또한 역시 137억년의 세월동안 조금씩, 조금씩 진화해 온 결과물인 피조물, <인간 뇌>가 다름 아닌 바로 그 창조자 자신이라고 말하는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고 하겠다.
성서는 마치 이러한 모순현상을 이미 오래 전부터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었던 것처럼, 놀랍게도, 구약이나 신약이나 간에 모두가(!) 철저하게 창조주 하나님의 불가시성과 불가해성을 주장해 왔었던 것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구약의 세계는 아주 초기부터, 마치 무신론의 논리에 빠질 위험까지도 아랑곳 하지 않는 듯, 구약의 그 마지막 시기까지 신(神)의 형상화(形象化)나 가시화(可視化)를 결사반대하여 왔다는 것(출 20:4-6; 32:25-35)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잘 직시하여 외치고 있었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우주]의 주인이시므로 사람[피조물]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 여러분의 시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도 ‘우리는 하나님이 낳으신 자녀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낳으신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을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새겨서 만든 것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결단코 안 됩니다.”(행 17: 24-25, 28-29)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도 입증할 수도 없는 존재라고 하겠다. 우리는 단지(!) 그분을 그분 자신이 계시하신 그 자기계시(自己啓示)를 통하여서만 볼 수 있고 또 인지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하겠다. 그 자기계시는 단지 세 가지, 즉 ①자연(自然)계시 ②역사(歷史) 계시 그리고 ③말씀(神言; 로고스=예수그리스도) 계시로서만 우리에게 이루어진다. 그분의 본체는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사 45:15).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그분 안에서 살며 기동하는 존재>(행 17:28)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자기 계시>를 통하여서만! 그를 볼 수 있을 뿐이라고 하겠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이 사실은 최소한 다음 두 가지는 반드시 말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 하나는 ①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창조물(행 17:28)인 우리 인간 사이에는 특별한 생명 연대(連帶)가 있다는 것이고(cf. 창 2:7 !!) 그 다른 하나는 ②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이웃들(형제, 자매들)은 결코 우리의 원수일 수는 없다는 것, 아니, 그들은 오히려 그들 자신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하나의 교량(du→Du)이라는 것(창 18-19장; 히 13:2; 마 25:40,45; 요 14:8-14; 요1 4:12; 5:1 참조), 이 두 가지 사실만은 확고히 증언하고 있다 하겠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를 걸려넘어지게 하는 화해 불가능의 반목과 갈등의 부조리라는 늪 속에 우리가 파묻혀 살고 있다고는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소생>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는 자들인 우리에게는 성서의 이 증언이야 말로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요 또한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된다고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원수(형제)들의 얼굴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한다(Sollen)고 하겠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창 1:26.27)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이와 같이, 하나님(창조주)과 우리(창조물=피조물)사이의 이러한 관계론 적 유비를 허락(!)하셨다는 것(창 2:18; 1:27)을 증언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즉 you(형제와 이웃)→Thou(하나님)의 공식을 받아들여 믿는 것을 성서는 우리에게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고 하겠다.
실로,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명제(命題)도 또한 근본적으로는 바로 이러한 신학적 논리 위에 기초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사실이 여기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러한 명제(命題)가 야곱에게 있어서는 단순히 옛 신앙전통이 물려 준 하나의 교조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적 삶의 체험의 결론으로서 인식된 명제(命題)라는 그 점에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