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5일 기독교학술원 월례발표회 발표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신학은 본래 성삼위 하나님()을 다루는 것이 아니었던가(신학이라 하면서 나중에 여러 신학들로 분립이 된 것은 후대의 일이었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를 씀으로 개신교 신앙에 첫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을 제공한 자인 칼빈도 사도신경을 따라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을 다룸을 그의 신학의 중심으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 또한 신학을 마치 건축 공학적으로 金字塔 같이 쌓아올린 토마스 아퀴나스도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을 그 중심에 두었던 것이 아닌가. 물론 슐라이어마허 같은 이는 그의 信仰論에서 성삼위론을 그 말미에 두고 있지만. 그런데 - 실로 - 神學大典(summa theologiae)을 씀으로 누구 못지 않은 신학의 금자탑을 세운 토마스 아퀴나스였건만 자기의 신학은 자기가 본 하늘의 영광에 비하면 지푸라기 같다고 하면서 絶筆한 사건은 유명하다. 성 니콜라우스 축일 미사 중 어떤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을 보이고 난 후 토마스 아퀴나스(1224.12.5-1274.3.7)는 1273년 12월 6일에 그 동안 밤낮 없이 집중적으로 저술하던 작업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絶筆하였다. 이에 이상하게 생각한 그의 비서 레지날드는 궁금증으로 왜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저술을 그만 두시는 것이냐고 물었다. 이에 “레지날드, 난 더 이상 할 수 없네. 내가 본 것에 비하면 내가 쓴 것들은 모두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아.”라고 대답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그 방대한 신학 작업이 저 하늘의 영광에 비하면 지푸라기에 불과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간 인류의 크고 작은 모든 신학 작업들 또한 그러하다는 말이 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위협하는 모든 異端邪說들을 막아섰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작업이 과소 평가되어도 좋거나 그리 평가되어야 한다는 말일 수는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謙虛하게 <大學()習>으로서의 모든 정통적이고 역사적인 신학 작업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의식 무의식적으로 진리를 가리고 誤導한 모든 이단사설들은 大學()에로의 습작도 아니다.) 하여 중천에 떠오른 진리의 해이신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을 우러러 앎에나 공경함에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물론 우리 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주 되심과 그리고 우리 주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요일4,8.16)이심을 생각하면 칼 바르트처럼 萬人和解說(Allversoenung)은 아닐지라도 萬人擇定說(Allerwaelung)을 주장함이 그럴듯 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가 典據로 삼고 있는 에베소서 1장 4절의 말씀은 구원 받은 성도로서의 <우리>를 근거한 말씀임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순결한 백성들은 다 천국 백성의 영광 가운데 나아감에 대하여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계22,15)는 시퍼런 심판의 말씀이 살아 있음에서, 우리는, 인간의 이성을 동원하여 감 나와라 대추 나와라 할 것이 아니고 바울처럼 고백해야 될 것이다 :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 33-36).
여기에서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45,15)는 말씀에서 하나님은 계시되신 하나님(Deus revelatus)이시면서도 숨어 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이심을 역설하는 루터와 뜻을 같이 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의 정신에 의해서도 우리는 <大學()習>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거듭 말하거니와 <大學()習>이라 하니 聖敎會를 異端邪說로부터 지켜온 하나님의 사람들의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모든 신학적 노력이 별 것 아니라고 경박하게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를 어지럽히고 심지어는 무너뜨리는 모든 이단사설들은 물론 <大學()習>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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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류로서 더 이상 큰 배움[大學]이 - 알파와 오메가이신 -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 말고 달리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큰 배움에로 다만 새끼새가 흰 솜털로 퍼득임으로 나아감의 모습일 수밖에 없음[大學習]을 말하였다.
그리고 바로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시매 우리를 그냥 거기 놔두시지 않으시고 우리와 한량 없이 긴밀한 親交(남편으로 신랑으로 우리와 친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를 나누곺으신 분임을 聖經의 啓示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이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은 <聖經이 계시하는 하나님[聖經神]>으로서 聖心(거룩한 마음)이실진대 聖心敬愛해야 하는 것이리라(그리고 이 성경이 증거하는 聖心을 誠心이라고 할 수 있을진대 바야흐로 誠心敬愛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리라).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심()敬愛>를 <大學()習> 다음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리고 성경이 계시하는 <大學()>을 힘써 가르칠 뿐만 아니라(마28,20)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3,14) 라고 하는 명령에 따라 힘이 닿는껏 가르치기도 해야 하고 배우기도 해야 함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현실적으로는 안타까운 일들이 자주 벌어진다. 루터파로 개종한 변호사 아버지를 둔 칼 맑스는 어이 없게도 루드비히 포이엘바흐의 기독교 본질(Das Wesen des Christntums)을 읽는 가운데 辨證法的 唯物論으로 돌아서고, 한 때 촉망 받는 젊은 이로서 장학생으로 카톨릭 신학을 2년 간이나 수학했건만, 결국은 사신 하나님() 대신에 존재(Sein)를 부르짖는 하이덱거가 되었으며, 나찌 정권이 유대인 아내와 이혼할 것을 권하는데도 온갖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선량한 사람인 듯이 보이는 야스퍼는 짐짓 포괄자(das Umgreifende)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특히 하이덱거는 존재를 사신 하나님() 대신에 주창하는 철학적 우상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말하기를 우리의 현존(Dasein)은 존재(Sein)에 從屬(gehoeren)하는 것이니 현존인 우리는 이 존재의 음성(Stimme des Seins)를 들음(hoeren)으로써 참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면서 이 존재의 음성을 듣는 시인(횔덜린)과 이를 해석할 수 있는 철학자(하이덱거 자신)를 ‘위대한 독일민족’은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독일 민족심리에 아부도 마지않았다. 그러면서 하이덱거는 나름의 극장(Theater)을 開店하기를 획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야스퍼스는 객체적 사물 일반을 포괄하는 객체적 포괄자로서 세계를 말하고 이 모든 것을 의식하는 주체적 포괄자로서의 의식일반을 말하는 가운데 이 모든 主客 분열 이전의 즉자적 존재로서의 포괄자(das Umgreifende)를 말하는 것일 때, 그는 사신 참 하나님으로서 알파와 오메가이신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 대신에 나름으로의 포괄자라는 우상을 세우고서 그 소리를 듣고 그 암호 해독(Chiffrelesen)을 해야 하는 것임을 주창하고 나서면서 또 다른 극장(Theater)을 개점하기를 획책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여기에서 ‘Es ist Es selbst'(그것은 그것 자체이다/ 그것 자체만이 있을 따름이다)를 주창하는 하이덱거류(야스퍼스도 말은 달라도 사신 참 하나님()을 우러러 믿어 사랑함에 나아가는 것이 아닐 때 근본적으로 하이덱거와 五十步百步라 할 것이다)의 聞道(자기들이 설정한 참 하나님 이외의 우상들의 음성을 듣노라 하는)主唱들이 여기 저기 亂舞한다.
비단 현대 철학자들만이 나름의 聞道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의 온갖 종교들과 궁극적인 진리 인식으로서의 철학을 제창하는 자들도 나름의 聞道를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인간들의 허다한 人造神들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임을 高唱함들에 맞서, 사신 하나님으로서의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으로서의 誠心敬愛를 말해야 하는 것이리라. 이 때 誠心은 聖經이 증거하는 바 聖經神으로서 만유를 예정 창조 보존 섭리하시는 사신 참 하나님이신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렇게 誠心()敬愛는 大學()習 다음에 올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 성심경애의 수행 과정으로서의 - 天路()歷程이 올 것이며, 마침내 천로역정을 마치었을 때 도달할 저 復樂園(계22,1-5)으로서의 T()ULIP(無窮花)가 올 것이고 바야흐로 이 復樂園 운동으로서의 天國 운동(물론 우리 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으키시고 2000년 전 우리 주 예수로 말미암아 혁혁하게 계시된 성삼위 하나님()의 운동)을 展望하고자 하는 執筆 계획을 가졌었다.
그런데 大學()習을 마무리하면서 유가의 四書三經의 하나인 大學의 三綱領과 八條目(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을 확인하던 중 주자가 대학의 삼강령과 팔조목은 유가사상의 뼈대임을 말하고 있음을 보았을 때 무언가 번개가 치는 듯했다.
우리도 진리로서의 알파와 오메가이신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을 우러러 받들어 모심에 <大學()習>, <誠心()敬愛>에 이어 <天路()歷程>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誠心()敬愛>에서는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형식적으로 저 삼강령과 유사한 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성심경애>의 수행과정으로서의 <天路()歷程>으로서의 聖幕(출 25-40)[성막문 - 번제단 - 물두멍 - 성소(금등대 떡 진열상 분향단) - 지성소(법궤)에서의 쉐키나]은 팔조목하고의 형식적 유사성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이렇게 유가의 뼈대라 일컬어지는 대학의 삼강령과 팔조목하고 우리의 언술(대학습-성심경애-천로역정)의 유사성은 偶發的인 것이지 의식적으로 기획된 것이 아님을 여기서 밝히는 바이다.)
자료제공: 기독교학술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