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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 안봉호 박사의 “大學(⊕)習”에 대한 논찬

이승구 교수(합신대)

2012년 10월 5일 기독교학술원 월례발표회 논찬

그 동안 <聖經神學>으로서의 <誠敬神學>을 잘 제시하시고, 그 이후에도 늘 깊이 있게 생각하시고 귀한 논의를 통해 우리를 더 깊은 생각과 실천에로 인도하시는 안봉호 박사님의 귀한 글에 대해서 논찬할 수 있음에 대해서 감사드리면서, 귀한 글을 써 주시고 미리 읽을 수 있도록 해 주신 안 봉호 박사님과 기독교 학술원에 감사드립니다.

1. 찬동과 감사의 말

먼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자연 법칙과 함께 부여해 주신 영적 법칙이 있음을 분명히 하시면서 제시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1). 자연과학자들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주신 자연법칙을 찾아보려고 하는 것과 같이 우리들이 이 세상에 주어진 영적 법칙을 찾아 젯제시해 보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특히 안 박사님께서 친히 강조하신 바 “자연 가운데 숨기어 있는 신령한 진리는 복음적 신학적 진리의 脚註(footnote)”라는 논의와(2) “지옥은 우리 주님의 무한한 슬픔이면서도 동시에 거룩한 진노의 화염이다.”(10)는 논의, 그리고 “과연 하나님의 말씀 聖經에 自啓示되신 하나님을 우러러 뵈니 역사는 하나님의 이야기(Gottes Geschichte, His Story)임을 알겠다.”(10, n. 11), 또한 “우리 인생들이 배워 마침내 永生에 이를 큰 배움[大學]은 알파와 오메가이신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이시다.”(20), 그리고 “永生은 永遠無窮絶對 사랑이시며 영광이신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과의 영원무궁절대한 친교다”(72) 등의 논의들은 아주 중요한 영적인 진리에 대한 귀한 통찰을 드러내어 주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또한 믿는 신자들은 언제나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1) 강조해 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또 이신칭의를 버려 버리려고 하는 신학적 세계 가운데서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와 믿음을 분명히 천명해 주신 것에(14, 20, 62["실로 以信得義는 놀라운 福音인 것이다."], 81)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더구나 “신학 교육은 重生한 先生(앞선 자)으로부터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97)을 강조해 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또한 이와 연관해서 “우리 인생의 조부라운 머리를, 理性을, 모든 것의 잣대로 삼고자 하는 ‘역사비판적 방법’의 근본 전제를 거부한다. 여기에서 ‘역사비판적 방법’을 넘는 聖經 읽기가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 주신 것에(100) 대해서 깊이 찬동하면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성경의 중심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와 교제하게 하는 데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이 놀라우신 성삼위 하나님을 믿어 우러러 사랑하게 함에 소홀하거나 해찰하는 모든 신학은 이제 더 이상 신학이라는 이름값을 못함인 줄 알고 신학이라는 場에서 물러나야 한다.”(5)고 강하게 주장해 주신 것에 대해서도 깊이 동의하게 됩니다. 그런 잘못된 신학들은 “바로 지옥으로 인도하는 사망[永滅]의 문들”(5, 69)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도 동의하며 감사드리게 됩니다. 칼시돈적인 확신의 중요성을 잘 천명하시면서 “이 기독 신앙의 진리 말고 다른 기독 신앙의 이해 방식은 있을 수 없고 또 있어서도 안 된다.”(8)고 선언하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계시의 점진성”을 드러내는(5, 35) 성경계시의 성격에 잘 주의하시면서 신약에서는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주로 계시되었으면서도 “구약에서부터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도 鮮明하게 계시되심을 본다”(5)고 하시면서 잘 예증해 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異敎의 여러 사상으로 혼합주의적 혼돈이 내재하는 위험을 가진 향심 기도(Centering Prayer)보다는 철저적으로 聖經的인 성심(聖心/誠心/) 기도들 삼가 제안한다.”(90)고 하신 것에 대해서 향심기도와 관상 기도의 문제점을 잘 드러내어 주시면서 제대로된 기도를 강조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이 토대 위에서 소위 “예수 기도”가 수용될 수 있을 것 같은 시사를 주신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합니다. 더 나아가 “<성심 기도>를 基本으로 하여 화살 기도, 야곱의 얍복강가의 씨름과 같은 기도 등이 나온다.”(91)고 하신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안 박사님의 논의는 서양 신학을 철저히 잘 이해하시고 그것을 동양적 정황 가운데서 적절히 표현해 주신 귀한 신학이기에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 안 박사님의 성경(誠敬)신학은 다음 세대에 한국 신학이 가야 할 바를 선구자적으로 잘 시도하는 한국형의 정통주의적인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Cornelius Van til과 박 윤선 목사님을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自啓示書인 聖經을 窮究한다, 하나님의 自啓示를 의존하여 思索한다”(111)고 강조해 주신 것에서 그것이 잘 드러납니다. 이를 가장 잘 표현하는 내용들은 바로 다음 같은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삼위 하나님은 더 이상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없으리만큼 크신 분(Quo maius cogitari nequit)이시다. 이 때 우리 주님을 最大者라 할 때 단순히 공간적인 크기에 있어서 최대자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를 무한히 넘어 가시는 분, 곧 우리를 무한히 超越하시는 분이시란 뜻이다. 그렇다고 우리를 그냥 超絶하시는 분이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를 무한히 超越도 하시면서 동시에 內在도 하시는 분이시다.(9)

우리 주 하나님()은 永遠無窮絶對하시고 必然的 존재시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은 아니 계신 적이 없으셔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성삼위 하나님으로서 永生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이를 성경이 증거하고 정통신학이 증거한다. 그러니까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은 內在的으로도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 성삼위 하나님이시다(immanent Trinity). 그리고 시간 가운데 經綸的으로도 처음부터 끝까지 성삼위 하나님이시다(economic Trinity). 실로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그리고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은 無窮하시다. 無所不在하시다. 어떤 차원에서도 계신다. 살으신다. 全知全能하시다. 遍在하신다.(11)

주 성삼위 하나님()은 至高善(sumum bonum )이시다.(13)

사랑의 우리 주 하나님은 共同體的이다. 이 놀라우시고 거룩하신 사랑의 神性을 주 예수()를, 하여 바야흐로 주 성삼위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배워야 한다. 닮아야 한다.(17)

23-24, 46, 67쪽의 논의

이렇게 세계를 예정 창조 보존 통치 섭리하심에서 성부와 성자가 동역하신다. 물론 성령님도 동역하신다. 그러니까 성삼위 주 하나님()께서 세계를 예정 창조 보존 통치 섭리하신다.(29)

오늘날 성령 시대에 우리가 살다 있다 하니까 성부와 성자하고는 직간접적으로 실제적으로는 상관이 없고 이제 성령 한 분만 모시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것은 誤謬다. 더군다나 성령은 성부의 영이시고 또한 성자의 영(롬8,9)이 아니신가.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 하나님을 모신다는 것은 바로 성부와 성자의 영을 모시는 것이매 바야흐로 성부와 성자를 동시에 모심에 다름 아닌 것이다.(50)

우리는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을 따라 덩따라 脫中心 脫理性을 부르짖지 않고 이제 오히려 바로 이렇게 우리 인간에 대하여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한계상황적 좌절 가운데서 우리 인간의 지금까지의 안타까운 모든 몸부림들을 내려 놓고 크고 작은 모든 역사를 주재 주관 통치 섭리하시는 주 하나님() 앞으로 안에서 더불어 나아가야 할 것임을 예언자적으로 선포하지 않을 수 없다.(108)

우리의 조부라운 理性을 무한히 넘어서시는 분이시라서 인간 로고스 가지고서는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理性을 무조건 무너뜨리시기 보다는 包越하신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 하나님의 로고스(요 1,1-18)는 포스트모더니즘의 脫理性을 넘어선다. 하여 이제는 우리의 理性을 包越하시는 우리 주 하나님의 로고스를 이제는 믿어 우러러 받듦을 강조하여 마지않는다(Log-in ).(110)

2. 질문

이 논문을 읽게 된 후에 누구든지 가지게 되는 문제에 대한 큰 질문으로 서론에 “이 믿음을 죽기까지 잘 보존하는 경우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음을 본다.”고 하신 말씀과 관련하여 그렇지 못한 경우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칼빈주의에서는 이런 경우는 사실은 믿음이 없었고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경우리고 여기고,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실제로 참된 믿음이 보존되지 못한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안 박사님의 입장과 그에 대한 논의가 나타나 있지 않기에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참으로 믿던 자들이 종국적으로 믿음에서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하시는 것인지요? 14-15쪽에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가 없이 믿는 자들의 행함이 강조되었고, “우리가 行함으로써 우리를 구원할 진리”(4)와 같은 표현 때문에 이 질문이 점점 더 심각해집니다. 특히 64쪽에서 “여기에서 루터의 로 止揚(aufheben)되어야 하겠다.”(114쪽에도 비슷한 강조가 나옴)고 주장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아주 심각한 질문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표현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신학사적으로는 천주교회의 Semi-Peligianism에서 즐겨 사용하던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안 박사님이 모든 형태의 만인구원설을 배제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3, 22 참조). 안 박사님은 “원죄로 말미암은 영멸의 저주를 도말해 주는 것이 주 예수의 갈보리 십자가”(3)라고, 또한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의 연합과 친교가 없이는 우리에게 심판과 저주가 오고 마침내는 永滅을 피할 길이 없다.”고(11) 아주 명백하게 천명하셨고, 또한 “만인구원설은 너무 安易하고 浪漫的인 환상임을 알 것이다.”(3)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종교의 추구에 대한 안 박사님의 분명한 평가는 다음 구절에서 아주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가[儒家] 같은 데서도 나름으로의 만유를 一統하는 주재를 더듬었음[撫望]을 인정하지마는(cf. 행17,27), 유효하게 섬기는 所望(시78,7)은 친히 擇定하시어 스스로 말씀하시는 하나님(誠敬神)으로 自啓示하신 聖經神에게서나 발견된다고 할 것이다. 肉眼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하늘의 주재를 우러러 더듬는다는 것, 그것만도 여타의 동식물들하고는 판이한 과연 위대한 인간의 인간다운(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몸짓이라 할 것이다.(64)

칼 라너(Karl Rahner)의 내포주의적 이해에 대해서도 안 박사님은 비판적이십니다. 그러나 그와 연관해서 “비록 자신은 의식하지 못해도, 다른 종교 안에서 신실하게 산 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형태의 내포주의(inclusivism)에 대해서는 안 박사님의 대답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 큰 질문은 안 박사님의 성(誠) 신학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 논문에서도 “이 모든 것이 이제 <誠> 아닌 것이 없다.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의 모든 살으심과 말씀은 <誠>이다.”(16, 또한 각주 18)고 천명하셨는데, 이것은 윤성범 교수님의 성(誠) 신학과 어디까지 같이 갈 수 있고, 어디까지 같이 갈 수 없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각주 24에서 간단히 설명해 주셨으나 오히려 이점을 상술하셨더면 더 도움이 되었을 듯합니다.
     세 번째 큰 질문은 안 박사님의 만유재신론에 대한 것입니다. 논의의 과정을 통해서 안 박사님은 “凡內在神論(Panentheismus)을 말하게 된다.”고 하시면서 “여기에서 만유는 한 아버지 하나님을 모신 同氣間과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66). 과연 이것이 견지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오늘 날의 만유재신론의 여러 문제를 보시면서도 이를 제안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매우 안타깝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 논의의 과정을 통해서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을 “< 사랑(誠敬神)의  삶(Universitas)> (=誠敬神Universitas =Tri-universita =⊕”으로 제시하셨는데(119),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 이라는 표현보다 오히려 더 이해하기 어렵게 하며 오해하도록 하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할 것입니다.
    
네 번째 큰 질문은 피안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를 구별해야 하지 않을까에 대한 질문입니다. 안 박사님은 피안과 하늘 나라를 거의 동일시하면서 논의하셨습니다(특히 68쪽 이하에서). 그것이 한국 교계의 일반적 동향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천국(하늘나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여러 논의가 있은 후에도 계속해서 이렇게 피안과 천국을 동일시하면서 논의하는 것이 좋을까에 대한 질문입니다. 천국에 대한 예수님의 신포와 천국의 현재성에 대한 논의를 하시면서도(68쪽) 이런 피안적 천국 이해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3. 작은 질문들

논의의 과정 중에 혹시 지나친 알레고의의 위험이 없는 지가 걱정되어 질문을 드립니다. 얼듯 보면 좋은 비유적 표현이지만 예를 들어서 “모천은 生水의 根源(렘 12:13; 17:13) 되신 우리 주 하나님 아버지를 지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태평양 바다에까지 가서 거기서 모천까지 다시 회귀하는 <길>은 길이요 진리시며 생명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요 14:6)를 지시하는 것이었다.”(2)고 하신 데서 혹시 자연에 대한 알레고리 해석적 모습이 보인다고 비판받지 않으실까 조금은 걱정되어 질문을 드립니다. 이런 문제는 예를 들어 다음 같은 수사적인 논의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우리 인생을 영멸로 낚는 원양 어업인들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주 예수를 믿어 아버지 하나님께로 나아감에 우리를 교묘하게 유혹들하는 허다한 종교들과 철학들과 사상들 및 異敎 문화들이 아닌가. 그렇다. 생수의 근원 되신 아버지 하나님께 생수의 통로(요 14,6) 되신 주 예수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나아가는 永生의 역사를 방해하고 가로막는 모든 세력들은 사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영혼들을 호시탐탐 낚는다(3).

그러므로 성경 해석에서의 알레고리가 문제이듯이 자연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데서도 알레고리적 해석이 나타나 우리의 생각을 왜곡할까 걱정이 됩니다.
    
둘째로, 주해와 표현의 문제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이르는 사닥다리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5)고 하신 것과 관련해서 여호와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칭호로 보며 이를 잘 드러내는 칼빈 선생님 등의 모범을 따라 표현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제안을 해 봅니다.
   
셋째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통찰 가운데서 “거룩한 사랑의 親交 가운데 영생하시는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을 이제 우리는 상징적으로 <⊕>라고 표할 수 있을 것이다.”(6)고 하시는 것은 흥미롭고 좋은 논의이나 이것의 상대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실런지가 궁금하다.
    
넷째로 베네딕트 16세가 과연 안 교수님께서 평가하신대로 “주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성도”들 가운데 하나일까를(100) 묻게 됩니다.

4. 마치는 말

귀한 논문을 통해서 우리를 더 깊이 있는 세계에로 인도해 주신 안 박사님께 다시 감사드리면서, 이 논문의 다음 편인 天路()歷程과 TULIP에 대한 논의를 기대합니다. 부디 건강하셔서 귀한 작업을 계속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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