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학 목사 |
김동호 목사가 한국교회 내에서 기존 목회자들 중에 개혁적인 이미지로 차별성이 있기에 혹시 많은 성도들이 그분 주장만 옳다고 여기고 다른 목회자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을지, 객관적 사고와 판단력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한국교회가 1,200만 성도에서 지금은 800만 이하로 교회 출석하는 숫자가 매년 감소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과연 한국교회 침체의 그 원인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자리를 돈과 재물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교회에서도 잘 믿는 것과 성공의 기준을 돈과 재물,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지위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특히 순복음교회에서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 는 성구를 모토로 여기는 기류였다. ‘병 고침 받고 범사가 잘되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영혼이 잘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논리가 된다. 예수 믿는 이유가 병 고침 받고 세상에서 복 받고 잘살기 위해서 라는 개념으로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마음을 실현하고 천국을 사모하며 준비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더 잘살까, 더 성공할까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오래 살고 높은 자리에 올라갈까만 집착하고 있다고 보이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17세기 영조, 정조시대 이후 200년 간 쇠락한 정치제도와 파벌 당파싸움으로 국력이 약화되고 빈곤이 누적되었을 때 우리 땅에서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일어나 일제가 승리한 후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은 민비가 23년이나 실권을 잡고 정치하던 시기에 매관매직한 탐관오리들의 착취에 신음하던 민초들의 피맺힌 저항으로 동학혁명이 일어나니, 청나라 군사를 불러들여 자기 백성들을 살육케 하다가 일본군과 충돌한 전쟁으로 민비의 패역에 의한 비극의 역사였다. 그 식민지에서 1945년 해방되어 불과 5년 만에 6.25 전쟁이 일어나 더 철저하게 가난해지고 기근과 굶주림의 보릿고개 시대가 지금의 북한처럼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시대였다.
이와 같은 시대에 병 고침 받고 잘 살게 된다는 복음은 기쁜 소식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교회로 몰려들게 된 것이 한국교회 성장의 배경이었다. 또한 한국교회는 남미국가처럼 서구 선교국가들이 점령군으로 식민지화 하면서 복음을 가져오지 않았다. 오히려 기독교가 복음과 함께 교육과 의료와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해 주었다. 이것이 한국에 기독교가 긍정적으로 정착하고 성장하게 된 이유 중에 하나였다.
김동호 목사는『어느 안티기독교 사이트에서 한국교회 딱 세 마디. ‘모여라! 돈 내라! 집짓자!.’라 했는데 이것이 보편화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큰 교회들이 대기업이나 김일성이 아들에게 세습하는 것처럼 하므로 교회를 우습게보기 시작했고 교회가 추락하기 시작했다고 하며 대기업은 세습을 비난하면 고치지는 않지만 변명하지 않고 여론의 태풍이 지나가기 까지 숨죽이고 기다리는 것이 그들의 지혜인데 교회는 그런 지혜도 없이 대형 일간지 전면을 사서 말도 안 되는 유치한 논리로 변명하고 합리화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소인배나 좌파’로 매도하고 있다고, 우리 한국교회에 치명타를 입혔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고 했다.
쇠퇴의 원인은 맘몬이즘 때문이다. 교회가 부요해지고 권력화, 세속화되면서 복음의 본질과 예수님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재림과 휴거신앙도 도둑맞아 버렸다. 교회는 성장할수록 더 큰 예배당을 짓기에 열을 냈고 주위의 땅과 주택을 매입하여 주차장으로 만들고 부동산을 많이 소유하면 성공한줄 착각하는 듯 했다.
아들을 후임목사로 세우는 교회 중에 개척 설립한 목사가 성도들의 반대의사를 무시하고 강압적으로 한다면 세습이 분명하고 개혁의 대상이 틀림없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의 영성을 이어받아 사역을 잘 감당한다면 이보다 더 바람직한 대안은 없다 생각한다.
아들이 후임목사가 되었다고 모두가 그렇게 비판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특히 초대교회는 박해와 시련 속에서 기독교는 생명력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너무 풍족해져서 대형교회 목사들이 귀족같이 행세하고 있다. 농어촌과 도시빈민지역 빈민들을 섬기는 풀뿌리 개척교회 가난한 목회자들과 너무나 양극화 된 극히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이 예수님처럼 살기는커녕, 호화로운 예배당, 기사 딸린 고급 승용차, 비서가 수발드는 호화 당회장실, 고급 호텔의 값 비싼 음식, 해외여행을 즐기면서 천국의 소망보다 이 세상이 너무 좋아 죽는 것이 아쉬운 지경이 된 목사들도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목 좋은 요지에 크고 좋은 예배당을 건축하고 대형주차장을 마련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그러나 그런 현상이 얼마나 지속될는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그렇게 모여든 성도들은 농어촌 교회와 도시개척교회 성도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지금은 농어촌 교회와 도시 개척교회들이 사라지고, 어린이 청소년들도 감소하고 있다. 아이들은 인터넷 게임과 스마트폰 게임에 도취하여 예수님 말씀도 재미있는 성경동화도 찬양 율동도 흥미를 잃어가고 있다. 이것이 너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기독교안티들이 딱 세 마디 “모여라. 돈 내라. 집 짓자.” 라고 기독교를 비하한다 하는데 과연 한국교회가 집짓는 일에만 몰두했는가. 그렇게 편향적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
첫째. 모여라! - 향기도 없고 꿀도 없는 꽃에 나비나 꿀벌이 날아오지 않는다. 먹을 것이 없는 집에 배고픈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다. 거리에 다니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모여라!’ 라고 아무리 고함치고 강요해 봐도 절대로 모여들지 않는다. 복음의 메시지가 있고, 성령의 감동이 있고, 죄의 고백과 중생의 체험과 삶의 변화가 있으니 모여드는 것이지 누가 강요한다고 모여 드는가.
둘째로. ‘돈 내라!’ 고 목사가 강대상에서 협박하고 애걸복걸해 봐라. 그냥 돈을 내는가? 받은 은혜가 감격해서, 미래의 소망이 있어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헌금하는 것이지 무조건 돈 내라! 고 한다고 내는 게 아니다.
셋째, ‘집 짓자!’는 말. 목사가 얼마나 큰 예배당과 부동산을 소유했는가에 성공인 줄 착각해서는 안 된다. 돈과 재물은 소유하고 쌓아놓으면 부패하지만 생명을 살리는 곳과 복음을 위하여 아낌없이 사용할 때 빛나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중세 종교개혁시대처럼 그렇게 부패했다고 생각하는가? 성전건축과 세습을 침소봉대하여 전체를 매도하면 잃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김동호 목사가 탈북자들의 재활을 돕는 일이나 북한에 쌀 보내기 운동 등을 하는 것과 같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나팔 불고 선전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나 목사가 많이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한국교회의 사회적 섬김을 측정한『2009 한국 교회의 사회적 섬김 보고서』에서 “한국교회의 통계자료를 일목요연하게 취합하는 기관이 없어 현황파악이 쉽지 않다.” 고 하며, 현재 종교별 사회복지재단을 통한 사회지원 현황을 보면 2009년 9월 기준 414개 복지관 중 개신교가 45%(188 곳) 천주교 12%(49 곳) 불교 원불교 합 15%(63 곳) 점유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2008년 출간된 예영커뮤니케이션 발행『좋은 종교 좋은 사회』에서 한국 주요종교의 사회기여도를 통계별로 발표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대북 인도적 지원 : 기독교 51,1% 천주교 1.7% 불교 1.2%
해외 인도적 지원 ; 기독교 64.9% 천주교 3.4% 불교 1.5%
헌혈자 ; 기독교 82.4% 천주교10.5% 불교, 원불교 합1.41%
장기기증자 ; 기독교 27.6% 천주교 6,3% 불교 5.7% 무종교 50.2%
수재의연금 ; 기독교 68.8% 천주교 0.5% 불교 15%
대구 지하철화재 의연금 : 기독교 69.7% 천주교 7.1% 불교 12.7% 라고 발표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 사회기여도에 50% 이상 어떤 면에서는 80%를 담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외선교는 또 어떤가. 2011년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통계에 따르면『한국교회는 169개국에 23,331명의 개신교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이는 미국 다음으로 한국교회가 명실상부한 선교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했다.
이와 같이 탁월하게 선교의 사명과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은 외면하고 부분적인 것을 침소봉대하여 흥분하면 되겠는가.
『세습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또는 독립군이 된 것 같다.』는 등 흥분하여 대응하면 이는 교회내의 싸움으로 비쳐질 것이고 오히려 침체되어가는 교회를 더 어렵게 할 것이다. 좀 더 큰 시야로 문제를 직시하고 수용하는 지혜와 성숙한 신앙인격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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