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청년 김재준과 송창근의 역사적인 첫 만남

<만우 송창근 바로보기3>

송창근이 1919년 3월에 피어선 성격학원을 졸업했을 때, 마침 남대문교회의 조사(전도사)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조사였던 함태영 씨가 3.1 만세 사건으로 수감됨으로써 그 자리가 빈 것이다. 그런데 송창근이 그 자리에 발탁되었다.

이는 당시 기독교계에서 송창근에 대해 지니고 있었던 평가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함태영은 연륜과 관록을 함께 지녔던 당대의 거물이었다. 대한제국 시기에 이미 검사와 판사를 역임했던 분으로서, 사회적 위상은 물론 종교적으로나 나이로도 까마득히 위인 대선배였다.

그런데 그의 후임자로서 송창근이 선택되었다는 것은 피어선 성격학원 재학 3년 동안에 송창근이 기독교계에서 스스로 크게 두각을 나타내는 데 성공했음을 의미한다. 송창근은 남대문교회 조사가 됨으로써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직업을 갖게 되었다. 그는 열정을 갖고 조사로서의 업무를 수행해 나갔다.

그러던 중 1919년 3월에 3.1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으로 인해 일본의 대조선 정책이 크게 달라졌다. 무단정치를 일삼던 육군파의 사내정의 총독이 갈리고 그 후임으로 해군파의 재등실 총독이 1919년 9월 1일 부임했다.

그러나 조선 민족은 재등실 총독이 편안하게 부임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그가 일본에서 건너와서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상경하여 남대문 정거장에서 내린 뒤 폭탄 투척사건이 일어났다. 기차에서 내린 그가 마차에 올라서자 강우규 의사가 폭탄을 던전 것이다.

재등실은 혁대에 탄피가 맞았을 뿐 무사했지만 다수의 사상자가 났다. 신임 총독의 부임길에 발생한 폭탄투척사건을 미리 방지하지 못해서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일제 경찰은 조선인 혐의자들을 마구잡이로 검거하여 사납게 신문했고, 거기에 송창근도 걸려들었다. 폭탄이 북쪽에서 왔을 것이라는 이유로 북쪽 인사들을 주로 잡아다가 취조했다고 하는데, 송창근도 북쪽 출신이라서 잡혔던 것 같다.

당시 송창근은 남산 왜성대에 끌려가서 신문을 받았는데, 낮에는 취조하고, 밤이면 벌거벗겨 나무에 묶어 놓아 모기들이 밤새도록 피를 빨아먹게 하는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 때의 고초가 어찌나 컸던지, 뒷날 송창근은 두고두고 그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김재준의 회고에 의하면 “그 때 경시청은 남산, 지금의 외교구락부 언덕 위에 있었다. 만우는 유치장에 갇혔다. 샅샅이 조사한다. 밤에는 벌거벗겨 바깥 나무에 꽁꽁 묶어 놓는다. 남산 사는 모기란 모기는 모두 들러붙어 생피의 향연을 즐긴다. 꽁꽁 묶였으니 모기를 때릴 수도 없고 가려운 데를 긁을 수도 없었다. 밤 새고 낮에는 조사 받고 먹을 생각도 없어 죽고만 싶었노라 했다”는 것이다.

9월 1일에 폭탄을 던졌던 강우규 의사는 9월 17일에 자수했다. 자신이 잡히지 않고 있음으로 해서 무고한 사람들이 붙잡혀서 갖가지 고문을 당하는 것을 전해 듣고 그냥 견디고 있을 수가 없어서 자수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송창근도 풀려났는데, 불과 며칠 사이에 얼굴을 몰라볼 정도로 몹시 상했더라고 한다.

그로부터 넉 달 뒤인 1920년 1월에 송창근은 다시 일경에 잡혀 들어갔다. 이번에는 무고한 혐의를 뒤집어 쓴 게 아니었다. 실제로 독립운동에 관련된 창가를 배포한 일 때문에 빚어진 사건이었다. 현재 국가기록원에 그 사건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1920년 3월 19일에 선고된 판결문의 원본이 소장되어 있다.

창가를 직접 지었던 박인석 및 그와 함께 그 창가를 6백 부 인쇄하여 각 학교 생도들에게 반포한 송창근에게 적용된 법률은 ‘정치범죄 처벌령’과 ‘출판법의 위반’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실형이 선고되었다. 박인석은 징역 2년, 송창근은 징역 6월이었다.

6개월 뒤 그는 감옥에서 출감하여 고향에 근친하러 갔다. 그가 감옥에 있던 6개월 동안 근심걱정으로 마음을 태웠을 부모님을 안심시켜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때 귀향한 김에 그는 고향인 웅기는 물론 인근 도시인 회령 등지의 여러 교회를 돌면서 ‘강연회’를 열어 연설을 했다. 당시 강연회는 4백여 명의 청중들이 몰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송창근의 나이 22세. 이 때부터 그는 타고난 재능으로 기독교계만이 아니라 일반 사회에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감옥살이를 하고 고향에 근친하러 온 길에 고향 일대의 도시들에서 강연회 연사로 초창받고 그 일이 서울에서 발간되는 신문에 실리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가 회령의 강연회에서 4백여 명의 청중을 상대로 강연할 때 “심원한 이상과 격절한 어조는 무한한 감상을 야기케 하였다”고 하니 매우 성공적인 강연회를 가진 것이다.

송창근 목사(왼쪽)와 김재준 목사(오른쪽)

송창근이 김재준을 처음 만난 것이 바로 이 당시의 고향 방문 시기였다. 그 때 만났던 김재준의 회고담을 보면, 송창근은 매우 밝고 의연하고 당당했다. 아직 청청하게 젊은 나이라서 6개월의 감옥살이쯤은 아무런 상처가 되지 않았던 듯하다. 김재준의 회고담은 다음과 같다.

내가 만우 송창근 형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19년 12월 크리스마스 가까이였던 것 같다. 그 때 내 나이는 19세, 함경북도 웅기항에 있는 웅기 금융조합 서기로 근무하고 있었다. 기독교 신자도 아니었고 사상적으로 계발된 데가 없는 한 청과 같은 소년이었다. 그래도 3.1운동 직후라서 상해로부터 또는 만주, 시베리아를 거쳐 잠입하는 독립신문도 가끔 읽을 수 있었고 두만강 저편으로 건너가기 위해서 잠깐 들리는 독립지사들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래서 민족의식이 약간 싹트기 시작하였다.

만우형은 나보다 두살 위였으나 교회인, 사회인으로서 이미 성숙한 청년이었다. 그는 그 다시 서울 남대문교회 조사(전도사)로 시무하면서 3.1운동에 가담했다는 것 때문에 6개월 징역을 치르고 출감한 후 근친도 할 겸 고향 교회들도 예방하려고 웅기에 온 것이었다. 그는 재치 있는 미남으로서 연설도 잘하고 좌담에도 능숙하고 교제 솜씨도 세련된 품위 있는 청년이었다. 나는 교회와는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그가 웅기 교회에서 연설을 했다고 들었지만 별 흥미도, 관심도 없이 넘겨보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내 하숙집 방에 일부러 찾아와서 정중하고 첫 인사를 하고 “말씀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인사라도 드리고 가려고 이렇게 실레스러운 방문을 했습니다”하고서는 곧 떠났다. 이튿날 나는 거리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좀더 구면인 친밀감으로 나를 대했다. “지금 3.1운동 이 후에 우리 민족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천운은 갔다가도 반드시 돌아옵니다. 김선생 같은 유능한 젊은이가 그저 이런 데 묻혀 있을 때는 아닙니다. 용감하게 정리하고 서울 와서 공부를 다시 하십시오”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고 결단의 용기 같은 것을 느꼈다. 그래서 몇 달 후에는 직장이니 뭐니 다 치워 버리고 서울에 모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송창근과 김재준의 첫 만남이었다. 김재준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 계기를 증언하는 위의 일화는 송창근이 지닌 바 인품을 잘 드러내고 있다.

송창근은 천성적으로 ‘설계자’로서의 특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큰 눈으로 현상을 보고 본능적으로 그에 대한 대비를 하는 사람이었다.실제로 그는 몇 년 뒤에 ‘자기건축(自己建築)’ 곧 “자기 자신을 어떻게 설계하여 운용할 것인가?”하는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써서 세상에 발표했다.

송창근이 지닌 그러한 특성은 나이나 경력과 상관없는 것이다. 천품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때 불과 만 22세의 나이였다. 보통 사람으로 치자면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며 그에 대응하기에도 힘겨워할 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창근은 달랐다. ‘인재발굴’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과 실천력이 있었다. 송창근이 실천했던 인재발굴 작업은 “민족을 일으키려면 사람이 필요하다”는 절박함을 지니고 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시도되었다. 이는 ‘인간 송창근’이 지닌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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