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성 칼럼] 상인의 마음을 버리는 것이 종교개혁이다

김성 목사·예수원교회

▲예수원교회 김성 목사
종교개혁의 역사는 종교의 역사와 나란히 해왔다. 종교가 부패하고 타락할 때마다 종교개혁의 몸부림은 언제나 있어왔다. 예수 당시의 종교는 어떠했을까? 우리가 흔히 <예루살렘 성전정화>사건으로 부르는 이야기는 네 복음서 모두에 나와 있다. (마태21:12~17, 마가11:15~19, 누가19:45~48, 요한2:13~22) 이 사건은 당시의 종교를 뿌리부터 개혁하고자 했던 예수의 신앙과 면모를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예수께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성전에 올라가셨다. 성전에서 예수께서 목격한 장면은 무엇이었나? 마태, 마가, 요한복음은 모두 매매와 환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간단히 장사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던 매매행위는 희생제사용 제물을 사고파는 행위였고, 환전행위는 성전세를 내기 위해 오로지 성전에서만 통용되는 이른바 두로세겔(두로에서 주조한 성전용 은전)로 환전하는 것을 말한다. 매매상은 희생제물을 일반시가보다 높게 팔아서 이윤을 남기고 환전상은 돈을 바꾸는 환차익을 통해서 이윤을 남겼는데 이 모두 성전관리자인 제사장들과 검은 유착아래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성전은 부당거래의 온상이었고 그 이익은 제사장과 매매상과 환전상이 나누어 먹었다. 이것은 칼만 안 들었지 거룩을 빌미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터는 강도짓이나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예수께서 이들더러 너희가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신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뒤에 가리어진 또 다른 강도가 있다. 매매상이나 환전상만 강도가 아니다. 매매나 환전은 쌍방 간에 이루어지는 일이다. 파는 사람이 있으면 사는 사람이 있고, 돈을 바꾸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바꾸는 사람이 있다. 매매상과 환전상은 공급자이고 그들에게 제물을 사고 성전용 은전을 바꾸는 사람들은 수요자다. 요한복음 본문은 예수께서 공급자인 매매상과 환전상을 내어 쫓는 것으로 나오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다르다. 요한복음 2:14~16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그런데 마가복음을 보면 11:15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로 되어 있다. 매매하는 자란 말속에는 파는 자만이 아니라 사는 자도 포함되어 있다. 매매란 말이 팔고 산다는 뜻 아닌가? 영어성경(NIV)은 보다 분명하다. 마태복음도 마찬가지다. 21:12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영어성경(NIV)엔 마태와 마가에 따르면예수께서는 성전 안에서 장사꾼이든 환전상이든 파는 공급자만이 아니라 사는 수요자도 함께 내쫓아버렸다. 그리고 파는 자와 사는 자 모두를 가리켜 <너희는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라고 준엄하게 질책하셨다.

여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포인트가 있다. 매매상과 환전상은 제사장과 결탁해서 성전 안에서 부당거래를 통해 이윤을 챙기고 있으니 강도짓을 한다는 주님의 책망을 들어도 마땅하지만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희생제물을 사고 성전용 은전으로 환전하는 수요자는 대체 무슨 잘못이 있기에 똑같이 강도의 소굴을 만들고 있다는 책망을 들어야 하는가?

답은 강도의 소굴이란 말에 있다. 강도의 소굴이란 무엇인가? 강도들의 은신처다. 강도들은 토굴이나 무덤같이 사람들의 인적이 뜸한 곳을 자신들의 은신처로 삼았다. 소굴로 번역된 스펠라이언은 무덤이나 토굴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자로가 묻힌 무덤(요11:38)이 스펠라이언이다. 기독교 초기, 신자들이 고문과 박해를 피해 숨는 동굴과 토굴을 가리켜 스펠라이언이라고 했다.(히11:38) 스펠라이언은 피난처, 은신처, 숨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강도의 소굴이란 말은 그 소굴에서 강도짓을 한다기 보다는 이미 딴 곳에서 강도짓을 하고 숨기위해 은신처로 택해서 모인 곳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공급자와 수요자 양쪽 모두를 가리켜 너희가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말의 뜻은 1) 성전 안에서 거룩을 빌미로 매매, 환전하며 강도짓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부당거래를 일삼고 있는 공급자, 장사치들을 꾸짖는 말이며 2) 세상에서 온갖 죄를 다 짓고 나서도 진정한 참회와 회개 없이 그저 하나님의 성전에 와서 흠없는 희생제물만 사서 드리고, 거룩한 은전만 사서 성전세만 납부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다고 믿고 희생제사에 열을 올렸던 수요자, 예배자들을 꾸짖는 말이다. 이들은 세상에서 강도짓을 하고 성전을 은신처로 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 책망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예레미아가 이미 오래전에 이스라엘의 부패한 신앙을 준엄하게 꾸짖은 내용 그대로다. 렘7:8~11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성전 안에서 거룩을 팔아 검은 돈을 버는 장사치들도 나쁘지만 자신의 죄에 대해 진정한 참회와 회개 없이 의례적인 희생제사로 구원을 사고자 하는 예배자도 똑같은 강도다. 양쪽 모두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망친 주범들이다. 

1517년, 교회가 면죄부를 팔아먹는 것에 반대해 비텐베르그 성곽교회 정문에 붙인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는 당시의 강도들에 대한 준엄한 책망이 담겨있다. 루터는 먼저 면죄부를 팔아 돈을 벌려는 당시 교회의 잘못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53조항 <면죄부 판매를 위해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 전파를 금하는 교황은 그리스도의 적이다> 황제도 파문하던 절대 권력을 가진 교황더러 면죄부 판매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일갈했으니 루터도 배짱이 두둑한 사람이다. 그러나 루터는 면죄부를 파는 교회를 책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루터는 면죄부를 사려는 신자들도 꾸짖었다. 32조항. <면죄부를 사므로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믿는 이들은 그들의 교사들과 더불어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다> 48조항. <그리스도인들은 교황이 면죄해주는 데 있어서는 돈보다 경건한 기도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루터는 연보궤에 동전이 딸랑하고 떨어질 때 연옥에 있던 죽은 자의 영혼이 천국으로 날아오른다는 당시 교회의 선전을 조롱하며, 동전이 딸랑 떨어질 때마다 늘어나는 것은 오로지 욕심과 탐욕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면죄부를 사고팔면서 이미 죽은 자의 영혼구원까지 흥정하던 것이 루터가 목도한 당시 교회와 신자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금융거래지 종교가 아니었다. 

예수께서 목도한 1세기 예루살렘성전과 신자의 모습 또한 같았다. 내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희생제물만 사서 바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종교인의 마음이 아니라 상인의 마음이다. 이런 희생제사는 상거래나 다를 바가 없다. 성전이 속죄와 구원을 사고파는 거래소가 되었다. 예수는 말했다. <이 성전을 헐라>(요2:19) 예수께서는 희생제물을 바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발상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이요 불신앙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지 희생제물을 받아서 그 값으로 용서해주시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시고 죄에 대해 오래 참으시며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죄인을 사랑으로 값없이 용서하시는 은총의 하나님이다. 희생제물의 뒷돈을 챙겨야만 마지못해 선심 쓰듯 면죄의 딱지를 발부해주는 고약한 장사치가 아니다. 속죄와 용서,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한다. 루터의 종교개혁 슬로건 <오직 은혜로만>은 바로 그 점을 말한 것이다.

예수의 종교개혁의 핵심은 무엇인가? 제사의식의 개혁이나 보완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속죄와 구원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이다.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상인의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예수의 이 개혁정신이다.

21세기 오늘의 교회는 예수를 희생제물로 삼고 있다. 양과 염소가 예수로 바뀌었을 뿐이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모신다는 영접기도 한마디만 하면 예수의 피로 속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이 보장된다고 믿고 있다. 예수만 믿으면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지, 살아서는 축복받고 죽어서도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고 믿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예수의 삶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주는 속죄, 대속의 신비만을 찬양하고 있다.

오늘 교회의 모습이 <강도의 소굴>이라는 주님의 질책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교회 안에서 내로라하는 신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에서 강도짓을 일삼는다. 정권말기만 되면 대통령 본인만이 아니라 가족, 친인척, 측근들의 비리와 죄가 줄줄이 드러나 더러는 감옥까지 간다. 어느 대통령이건 예외가 없다. 그 중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대형교회의 장로도 두 명이나 있다. 세상에서 전과기록이 수두룩해도 교회에선 버젓이 장로대접 받고 대통령도 된다. 세상에서 강도짓하고도 교회 만 오면 상석에 앉는다. 교회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예수만 믿으면,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모든 죄를 단번에 사함 받고 구원도 영생도 천국도 모두 내 차지라는 참으로 편리하고 염치없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세상에서 아무리 강도짓을 해도 교회만 오면 누구에게나 교회는 평안과 축복을 빌어주고 구원과 영생을 약속해주고 있으니 교회는 오늘도 면죄부를 팔고 있지 않은가?

중세의 성직매매와 교권세습은 오늘도 교회세습을 통해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 교회를 사유재산처럼 세습하는 이유가 뭔가? 교회에 부와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이 없다면, 교회에 가난과 고생만이 가득하다면 제 자식에게 물려주겠는가? 초대교회의 수장은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제자 베드로였다. 사도직은 세습하는 것이 아니었다. 툭하면 시청 앞에 모여서 북한의 세습정권을 악마적이라 규탄하는 자칭 복음주의자들이 기를 쓰고 제 자식에게 교회를 세습하는 것을 보면 저들에게 과연 낯짝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2012년 대한민국의 교회와 신자들은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하는 예수의 경고에 담긴 뜻을 깊이 되새겨보아야 한다. 종교개혁은 목회자와 신자 모두가 상인의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1조항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로 지속돼야 한다>로 시작해서 95조항 <하나님의 나라는 그릇된 평화의 위안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로 끝맺는다. 처음이 참회, 마지막이 고난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얻었는데, 신자가 진정한 참회와 자기십자가 지는 희생 없이도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은 솔깃하나 거짓복음이고 염치없는 상인의 주장일 뿐이다. 교회는 더 이상 달콤한 거짓복음의 주문을 외지 말아야 하고 신자 또한 이 주술에서 깨어나야 교회도 살고 우리의 영혼도 살 수 있다. 오직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예수 말씀처럼 오로지 진리를 구하고 구해진 진리를 따라 살며, 예수의 말씀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삶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예수께서 도달하신 영원한 생명에 다다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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