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본문: 창세기 2:7; 3: 19; 시편 90: 1-3; 요한 14:1-6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
‘죽음’의 본질과 실체가 무엇이냐? 라고 하는 것은 철학이나 종교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 분야가 다 깊이 관심하고 있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종교적 확신이나 기타 몇몇 학문 분야들이 제기한 이론적 가설이 있는 것 이외에는, ‘죽음’의 실체에 대하여 확실한 객관적 입증(立證)!을 해준 분야는 우리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과 또 우리가 언젠가는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지각을 갖기 시작한 그 때부터 이미 인간이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고, 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총 망라한 기독교 경전인 성서 전체의 입장을 살펴보니, ‘죽음’은, 정확히 표현하면, ⓐ신의 명령에 따라 ⓑ흙으로부터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일 뿐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점은 ⓐ죽음은 <신의 명령이라는 것>과 그리고 또 ⓑ죽음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 이 두 가지 점이다. 이 두 가지 점은 사실 둘이 아니라 하나다. 즉 <죽음>은 철저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소관(所管)이고 사람의 소관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에 성서의 중심관점이 있다. 즉 죽음은 본래부터 하나님께서, 즉 신(神)께서 정하신 운명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죽음은 그 원인이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점이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기독교 신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주요 오해점이다.
그 오해는 근원적으로는 창세기 3장의 인간 타락에 관한 기사와 특히 창세기 3:19에 대한 해석학적 오류에서 왔던 것이다. 즉 태초에 타락한 인류의 선조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징계의 말씀인,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ki)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즉 흙으로 돌아갈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만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흙이므로 흙으로 돌아갈 따름이기 때문(ki)이다.”라고 하신 말씀(히브리어 ki는 이유를 설명하는 particle)에 대한 해석학적 오류로부터 왔고 그리고 또 이 잘못된 이론에서 비롯된 잘못된 교조인, 이른 바, <유전적 원죄론>에서부터 왔다고 하겠다. 즉 <죽음>은 인간의 타락 때문에 인간에게 내려진 신(神)의 영구형벌(永久刑罰)이라는 논리는 치명적인 해석학적 오류라고 하겠다.
특히, 신약성서에 와서는 로마서 5:12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말씀, 즉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또한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라는 바울의 증언에 대한 해석학적 오류에서부터 그러한 오해가 왔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이 말씀은 마치 사도 바울이 인간의 죽음을 인간의 죄 때문에 온 것이라는 의미로 말했다고 보고 또 모든 인간이 누구나 다 죽는 것은 첫 인간의 타락이(原罪?가) 생물학적 유전을 하는 것으로 바울이 본다고 오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명명백백한 성서해석상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
사실, 경전(經典)에 대한 해석학적 오류가 그 경전을 사용하고 있는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그리고 얼마나 큰 오해와 또 얼마나 많은 본질 이탈을 하게 하는 악영향을 끼쳐왔는지를 많은 종교지도자들과 많은 종교인들이 다들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 중의 놀라운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한 오해를 일으키게 한 그 대표적인 근원지는 역시 창 3:19이다. 그러나 문제의 본문인 창세기 3:19의 말씀, 즉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ki)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흙이므로 흙으로 돌아갈 따름이기 때문(ki)이다.”라는 말씀은, 비록 인간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말씀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문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징계의 내용이 아니고! <흙으로 돌아가는 그 때까지! 얼굴에(=코에) 땀을 흘려야 비로소 낟알을 먹게 되는 것> 즉 노동의 고통, 그것이 징계의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본문을 히브리어 원문을 축자적으로 번역해서 옮겨 놓으면, 그 뜻은 더욱 분명해진다. 즉 “네 얼굴(코)에 땀을 흘려야 너는 네가 땅(아다마)으로 돌아갈 그 때까지 빵을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ki) 너는 땅에서 취하였기 때문이다. 즉 너는 [그 본질이] 흙(아팔)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ki)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이 타락하였으므로 받게 된 그 징계의 내용은 <아담[인간]이 아다마[땅]로 돌아가는 그 동안까지! 코[얼굴]에 땀을 흘리며 고통하는 수고를 하여야만 빵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그것>이고 그리고 인간이 왜 하필 땅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그 이유[인간이 왜 죽느냐는 그 이유]는 전적으로 인간이 본래 온 그 곳이 땅이기 때문에 즉 인간 본질이 땅이기 때문에 땅으로 돌아간다는 그것이지, 그 무슨 인간이 본래는 <불멸의 존재>였지만, 타락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사멸의 존재=죽는 존재>가 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라 하겠다. 말하자면 인간 본질은 창조주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그저 흙일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自然死>은 분명 <인간의 타락> 때문에 온 것은 아니고! 전적으로 그 <죽음>은 흙으로 이루어진 인간 본질 때문에 겪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말하자면, 로마서 5:12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다>는 말씀도 또한 그 무슨 <인간이 죽는 것은 죄 때문에 비로소 죽는 것>이라는 의미로 한 말씀은 결코 아니! 라는 것을 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고 하겠다. 즉 바울의 이 말씀은, 학술적 언어로 말씀드리면, 사도 바울의 <아담-예수> 동형론(typology)이라는 한 해석학적 이론에서 기인된 것으로서, 이른 바, 아담이 저질은 범죄의 그 전염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의 그 영향력을 동형론적으로(typologically) 설명하는 데서부터 비롯된 것일 뿐이라고 하겠다. 즉 태초의 인간이 타락하여 죄를 지어 그 범죄가 후세대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처럼! 그러한 형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도 또한 이 세상에 들어오시므로(incarnate하시므로)! 그의 의(義)의 영향이 후세대에까지 끼치게 되었다는 그런 말일 뿐이다. 그것은 결코 생물학적 유전으로 전수되는 그런 것은 아니(!)라 하겠다. 그러므로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 즉 인간이 마침내 그 수명을 다하고 죽는 것은 인간이 본질상 죽을 존재인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죽는 것이지, 그 무슨,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본래는 불멸의 존재였던 인간이 비로소(!) 그 때부터 사멸적인 존재로 떨어진 그런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기독교 경전인 성서 고유의 신앙관, 즉 히브리적인 신앙관에서 볼 때 더욱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창세기 3:19에 나오는 바, 인간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선언은, 흔히들 오해하고 있듯이, 창세기 2:17의 경고, 즉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죽음에 이른다고 하는 경고에 근거를 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창세기 2:7에 나오는 구약의 가장 고전적인 인간학적 진술인, 이른 바, “야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아팔 민 하아다마, from the dust of the ground) 사람(아담, human)을 만드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아담, human)이 생명을 가진 생명체(네페쉬)가 되었다.”라는 말씀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하겠다.
물론, 죄 때문에 인간이 형벌을 받게 되고 그 형벌이 <죽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구약의 <사형법>(mot-yumath 법, 출 21:12-17; 22:18-20 등등)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고 그리고 심판을 예언한 구약의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또한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바의 논리를 마치 사람이 죄를 지어도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는 않는다는 말로 오해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타락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형벌선언은 <흙에서부터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일생>(a life-time)을 고통 없이 평안히 살지 못하고 얼굴에 땀을 흘리는 고통을 거쳐야만 비로소 땅의 소출을 먹으며 살 수 있다는 것> 즉 인간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형벌은 단지 <인간(아담)의 근본인 땅(아다마)에 대한 저주>(창 3:17,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로 인한 <노동의 고통>이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의 인간징계 행위는, 진실로, 그의 창조물인 인간에 대한 창조주의, 즉, 인간을 만드신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은총의 결과로 보아야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을 만드신 창조자의 <모성적 사랑> 같은 것을, 즉 아버지 같은 하나님보다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속성, 이른 바, 모성 속성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다. 이를 근거로 하여, 구약성서는 창조자 야훼(One who causes to be: One who creates) 하나님의 대표적 속성을 <긍휼>(라훔)이라고 보았고 그 하나님을 <긍휼의 신>(엘 라훔)이라고 했는데(출 34:6), 여기서 말하는 <긍휼>이라는 히브리말은 <라훔>으로서, 이 말의 히브리어 어근(레헴)이 갖고 있는 뜻은 어머니의 <자궁(子宮)>를 의미하였다. 즉 창조자 야훼 하나님은 <모태속성> 즉 <모성 속성>을 가지신 분이라고 구약은 이해하였다고 하겠다.
그렇다. <흙으로부터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창조자(=야훼)이신 하나님께서 태초의 창조 때(창 2:7) 설정하신 하나의 <창조질서>요 <자연 질서>이지, 그 무슨, 인간의 타락과 범죄의 결과는 결코 아니었다는 그런 말이 된다. 창 2:7은 이 사실을 확고하게 선포한 <절대적으로 중요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었다. 즉 <인간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든 유한한 존재, 즉 하나님께서 코에 불어 넣어주신 그 <생기>(生氣, 숨) 때문에 비로소 일정기간의 삶(주어진 생, a limited life-time)을 살다가 마침내는 그 근원인 흙으로 돌아가야 하도록 되어있는 그런 하나의 <생명을 가진 존재,> 즉 하나의 생명체(네페쉬 하야 : a living being/a living creature, 창 2:7; 창 1:20,21,24)일 뿐이다.>라고 확고하게 계시/선언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창 3:19도 바로 이 창 2:7의 말씀에 근거한 말씀이었던 것이다.
창 2:7의 이 고전적인 인간학적 진술은,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사실들을 확고히 규정하고 있었다. 즉 (1)첫째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창조물인 피조물>이라는 사실, 이른 바, 사람은 결코 창조주가 아니라 창조된 존재(=피조물)라는 사실이다. (2)둘째는, 사람은 그 구성 본질이 <땅의 먼지, 즉 흙>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본질상, !! 결코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영적(靈的) 존재일 수가 없고 사멸(死滅)하는 육적(肉的) 존재(mortal being)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즉 인간은 육신(肉身; 빠살, basar)이지 신(神/靈/불멸의 영혼)이 아니라는 사실(창 6:3)이다. 그리고 (3)끝으로 셋째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생명의 기운> 때문에 비로소 생명을 가진‘생명체’(네페쉬, nephesh, cf. 창 1:20,21,24 = 창 2:7)가 된 존재일 뿐이므로 생명을 부여해주신 그 신(神)에게 운명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 즉 하나님께서 살리시기도 하고 죽이시기도 하실 수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신 32:39; 삼상 2:6, cf. 마태 10:28)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과 <죽음 이후>의 문제에 관한 성서의 대답은 우선 바로 이 창 2:7의 증언을 우선 먼저 듣고 이해한 후 그것을 근거하여 상고(詳考)하여야 할 말씀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종교와 철학 그리고 자연과학까지를 포함한 모든 학문 분야가 다 한 목소리로 만장일치를 이룬 견해(unanimous consensus)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다음의 <가설>들은, 비록 매우 매력적인 <가설>이라고는 하더라도, 그것은 결단코 진실이라고 믿기는 어려운 가설이라고 하겠다.
1. 그 첫째로는, 죽음이란 <육체의 붕괴>를 의미하고 죽음 이후는 이 육체의 붕괴 때, 그 육체 속에 감금되어 있었던 불멸의 영혼이 비로소 그 육체로부터 탈출 해방되어 영원토록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라는, 이른 바,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저 유명한 영혼불멸의 가설 및 그 사상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깊이 생각해보면, 이 논리는 비록 고상하기는 하지만, 매우 천박한 코미디 논리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설과 이 사상은 동서양의 사상세계와 동시에 동서를 총망라한 지상의 모든 인류를 심히 미혹(迷惑)해 온 대단히 잘못된! 사상적 <오류>요 동시에 초대교회의 기독교가 전파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가장 혼란하게 만든 기독교 최대의 <이교 사상>(heresy, 異端)이라고 하겠는데, 그것은 다음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분명하고 명명백백하다.
우선 이 가설이 지닌 최대의 문제점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영생불멸의 영혼>(immortal soul), 즉 몸은 죽어도 영혼은 결코 죽지 않는 영생불사의 신(神, god or ghost) 또는 신적 존재라고 본다는 점에서이다. 그래서 지상의 인류들 대부분은, 정말 아무런 증거가 없으면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은 죽으면 <신(神)> 또는 <귀신>이 된다고들 믿어 왔었다. 심지어는, 철저한 <윤리종교>인 동양의 유교 정신세계에서도 조상을 신(神)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전수받았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인류 역사 초기, 즉 아주 원시시대의 사람들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초목 그리고 무생물까지를 포함한 자연계의 모든 사물들도 모두 각각의 정령(精靈, spirit)을 갖고 있으며 이 정령들이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으며(animism) 인간의 육체 속에 감금된 혼백은 인간의 육체가 낡아지거나 또 그 육체가 운명을 다 마치면 육체는 썩어지지만 혼백은 남아서 영원히 구천(九泉, 구약의 스올’사상과 신약의‘게헨나/하데스’사상 참조; 눅 12:5; 16:23)을 맴돈다는 속설(俗說)을 철석같이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영혼불멸 신앙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받았을 때 만면에 웃음을 띠며 죽었는데, 바로 그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반면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심히 고통스러워하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울부짖으며 죽으신 그 <예수의 죽음>을 비교하면서, 이 경우, 누구의 죽음이 참 죽음이고 위대한 죽음이냐 라고 묻는 그런 불경스럽고도 웃지 못 할 코미디가 연출되기도 한 것이다.
야사(野史)이기는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그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 그들 선생님의 영혼불멸 가설에 의문점을 제기하며 <정말 영혼이라는 것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저 유명한 인류의 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대답이, 어이없게도,“나도 몰라!”라고 대답하였다는 속설(俗說)이 있다는 것은 주목해 볼만한 이야기라고 하겠다. 이러한 속설이 잘 말하고 있듯이, 인간의 본질이 <불멸의 영혼>이라고 하는 가설은 전혀 사실이 아닌 인간의 헛된 희망이었을 뿐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인간 생명은, 그것이 영혼(soul)으로 표현되었건, 단순한 생명체(네페쉬, living creature / living being; 창 1:20,21,24)로 표현되었건, 그 인간생명은 그 자체로서는 본질상 결코 <불멸의 신(神)>이거나, 더욱이, <창조자>이거나 <정령(精靈)>이거나 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 성서의 확신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곧 신(神)이라는 가설은 결코 우리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보한다고는 볼 수 없는 하나의 <미로>(迷路)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2. 그 둘째로는 불교의 사상 중에, 소위, <삼사라>(SAṂSĀRA) 사상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는 <환생>(還生, Re-incarnation) 또는 <윤회>(輪廻, transmigration)이론이라고들 말하는 사상이다. 이는 인도의 토착종교인 이른 바, 힌두이즘(Hinduism), 부디즘(Buddhism), 자이니즘(Jainism)으로 정리되는 불교종교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주요 사상으로서 이 사상은 기독교의 <부활>(復活, Resurrection)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불교의 환생 또는 윤회사상은 <인간이 죽으면 다른 생물로 변형(變形)되어 다시 태어난다.>는 사상이지만, 기독교의 부활신앙은 <육(肉)을 본질로 한 인간이 죽은 후 그 죽은 인간이 다시 육(肉)을 가진 인간으로 창조자에 의하여!! 새롭게 재(再)창조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기독교(성서종교)의 이 <부활> 신앙에 관해서는 조금 후에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불교의 환생/윤회사상을 <죽음>의 문제와 관련시켜서 일별(一瞥)해보자.
불교의 주요사상인 <삼사라>(Samsara, 還生/輪廻)라는 사상은 <업보>(業報)원리에 의하여, 즉 윤리적이고도 도덕적인 행위에 따른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에 의하여 인간의 생(生)이 <죽음>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인과의 순환>운동을 반복한다는 사상으로서, 흔히 <윤회>(transmigration)법칙이라고 부르는 원리를 그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다. <삼사라>라는 말은 산스크리트(Sanskrit)語인데, 그 뜻은 <연속적인 상태의 연결고리에 따라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계속 돌고 돈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그러나 불교의 시조인 석가모니(釋迦牟尼,Siddhartha Gautama)가 본래 궁극적으로 추구한 바는 어떻게 하면 이 인간의 운명적인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사슬에서부터 벗으나 해탈(解脫, extinction/release/emancipation)하느냐? 즉 어떻게 하면 생로병사라는 인간번뇌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느냐(break free)?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그가 마침내 <깨달음>(覺)에 도달한 것이 바로 <니르바나> (Nirvana; 涅槃; 解脫; 入寂; 入滅)사상이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의 주요 관심과 우리의 중심 주제인 <죽음>과 <죽음 이후>에 관한 문제와 관련해서 볼 때, 가장 중심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①첫째로는 <출생과 죽음의 연결고리가 부단히 반복, 계속되는 이 인간현실> 즉 번뇌와 고통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하는 고해(苦海)와 같은 이 인간현실에 대한 진단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고 ②둘째로는 이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서 어떻게 인간이 이러한 고해(苦海)를 헤치고 건너갈 수 있고 또 건너가 도달할 그 목표 지점은 도대체 어디냐 라고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불교의 <삼사라> 사상은, 우선 먼저, 고해(苦海)와 같은 이 세상을 정의(定義)하기를 <태어나고(birth)-죽고(death)-다시 태어나고(rebirth)-다시 죽고(redeath)-다시 태어나고-다시 죽고 … …>를 시작도 끝도 없이 반복하는 <윤회>의 운명적 사슬에 매여 있는 것이라고 정의하였고 그리고 여기 이 반복운동에 <윤리적 인과(因果)관계/업보(業報)관계>라는 윤리적이고도 종교적인 성격을 결부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생이란 이 생[此岸]에서 살아온 그 덕(德)과 부덕(不德)의 그 소행(所行)에 따라, 그 생(生)이 이 생[此岸]으로 끝나지 않고, 저 생[彼岸]의 다른 생(生)으로 이행(移行, transmigration)될 때, 그 이 생의 형질이 형태변화를 하여 다음 생에서는 다른 생물로 자리바꿈을 한다는 것이다. 그 이행(移行)의 방식은 하나의 <등잔>에 다른 등잔의 불꽃을 옮겨 붙여서 옮겨가는 것 같은 형식을 취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불교가 말하는 <죽음>이라는 것은, 대체로 말하면, 윤회운동 때 이생에서 저생으로 <넘어가는 한 시점(時點)> 즉 <이행(移行)과정 때의 한 시점(時點)>에 불과하다는 논리가 된다.
그러나 이 사상이 가진 문제점은 이것이다. 즉 인간 자아(自我)의 본질(entity)은 변형된 다른 자아로 <끝없이(!) 이행만 한다는 것=순환의 연결고리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회전(回轉=輪廻)만 한다는 것> 그것이다. 즉 그 태어난 생(birth)은 일시적(impermanent)이며 동시에 고통과 슬픔 뿐이지만, 그 윤회의 연결고리가 중단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불교가 추구하는 인생구제(人生救濟)의 그 궁극목표(the soteriological goal)는 이러한 <삼사라(Samsara)의 고통스러운 연결고리로부터의 해방>, 즉 이 <인생고해로부터의 탈출>이 그 궁극목표가 된다. 석가가 오랜 참선(參禪) 끝에 내린 결론도 바로 이것, 저 끈질긴 인생 고해의 끈을 끊고! 그 끈의 고리로부터 탈출/해탈하는 것, 그것이 그 궁극목표였던 것이다. 그 해탈의 극점(極點)을 석가세존은 <니르바나(Nirvana: 涅槃)>, 즉 <도를 완전히 이루어 모든 중생 고(衆生 苦)와 번뇌의 고리를 끊은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른 바, 그 궁극의 경지를 입적(入寂, 涅槃)이라고 보았다. 이 입적(入寂=니르바나)은 과연 무엇인가? 고매한 철학적 사상의 극치라고 할 만한 이러한 불교 신앙의 그 궁극목표인 그 <니르바나>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실로, 불교는 <탈출과 해방이 거의 불가능한! 인생>이라는 <인간 생의 고통과 번뇌의 회전 고리>를 끊고 거기서부터 탈출하는 것을 그 구극목표로 하는 철학적! 종교이다. 그러나 불교가 말하는 중생의 고통스러운 그 <사파>(裟婆)세계는 본질상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윤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한(無限)의 <무(無)>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또는 종교 수련의 궁극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른 바, 기독교가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는 불교에서는 바로 이 <죽음의 무(無)>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근본적 문제는 고통도 없고 슬픔도 없는 무념무상의 그 무(無)라는 세계가 <죽음>을 가리킨다는 점에 있다. 즉 불교가 <각>(覺)에 도달하게 되는 그 세계, 그 니르바나가, 이른 바, 그 입적의 세계가 불교에서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무(無)인 <죽음>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즉 도(道)의 경지가 높은 고승(高僧)들은 입적(入寂)과 더불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불태우고 사리(舍利/佛舍利)만 남기고 없어지는 것이다. 아마도 불교 윤리의 극치는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도달하기 어려운 그 <무소유>(無所有)의 경지를 터득하고 또 죽음에 해당하는 그 <입적>(入寂=無)을 진정으로 반길 수 있는 경지를 터득하는 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의 현실적인 중대한 문제가 있다. 즉 지상의 인류가, 이른 바, 우리네의 범인들이 ⓐ그 지극히 어려운 <무소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과 또 ⓑ<죽음의 무>를 기쁘게 반길 수 있는 도(道)의 경지에 도달하여야만 한다는 것, 그 점에 있다. 왜냐하면 그 경지들은 우리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되고 그것은 또한 궁극적으로는 어디까지나 <허무주의의 찬양>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복된 소식, 즉 복음일 수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실로, <죽음>을 찬양함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비록 불교의 이 심오한 도(道)가 구약성서의 말미(末尾)를 장식한 <전도서>에 어느 정도는 근접하는 듯한 형국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구약성서의 전도서는 이 허무주의라는 거대한 원을 다 그린 다음에(전 1-2장; 특히 2장 끝 절에서) 즉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의 성공(成功)도 또한 모두 허무하다고까지! 탄식한 다음에, 마침내, 그 허무의 굴레를 벗어나는 그 길을 구약성서의 전도서는,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창조주 신앙>으로 귀의(歸依)하고 있었다.
놀랍다 아니할 수 없다! 즉 전도서 끝 장(終章)은 다음과 같이 고백/진술되고 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前)에, 또 나는 아무 낙(樂)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前)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前)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前)에 그렇게 하여라.” … “할 말은 다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너는 단지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전 12:1-2, 13)라고 전도서 기자는 결론지었던 것이다.
(3) 세 번째,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 인간을 포함한 이 모든 만유(萬有)를 만들어낸 전체(全體)의 과정, 즉 이 우주 전체의 기원(起源)문제에 관한 천문 물리학적 관찰의 문맥에서 우리 인간의 <태어남-죽음-죽음 이후>의 관계를, 과연, 과학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관찰하고 또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한 번 일별(一瞥)해 봄으로서 우리의 주제인 <죽음과 죽음 이후>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우리의 출생,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에 관하여 천문 물리학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137억년의 세월을 거쳐 온 위대하고 고귀한 존재>(cf. 마태 16:26)라고 말한다. 이러한 우리, 비록 수증기 한 방울만 있어도 죽일 수 있다고들 말하는 이 허약한 인간인 우리, 이러한 이 <우리>라는 보잘 것 없는 인간존재가 이 땅에 이렇게 존재하도록 하기 위하여서는, 우주과학이 말해주는 바에 의하면, 마치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라는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詩)에서처럼, <빅뱅>(Big Bang, 大 爆發)의 시작과 함께 이 은하계들이 형성되고, 별들의 생성소멸(!) 운동을 통하여 끊임없이 확장되어 온 이래, 137억년이라는 억겁(億劫)의 그 엄청난 세월을 그토록 영고성쇠(榮枯盛衰)의 운동을 거듭하며 겪어야 하였다는 말은 참으로 경이롭고도 감동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우주 과학은, 137억년이라는 우리의 연치(年齒)를 산출해낼 만한 그 뛰어난 천재적 계산능력을 가지고서도 우리 인간존재의 <정체(identity)>를 적어도 2012년 현재까지는 분명하게 입증, 정의하지는 못하고 있다. 비록 우리 인간이 지금부터 137억 년 전에 있었던 그 <원인(이유: why?) 모르는 대폭발(Big Bang)>과 함께 탄생한 그 최초의 기본 입자(粒子, quark/lepton)들이 질량을 부여받아 오늘의 이 우주를 만들기 시작할 때에, 이미 인간 인자(因子)도 또한, <탄소>(물리학에서는 생명 구성의 오대 원소를 수소, 산소, 질소, 탄소, 인 이라고 말한다.)라는 원소(元素)에 기초를 두고 양자(量子)운동을 통하여 형성되고 또 억겁의 세월동안 진화(進化)를 거듭해서 오늘의 우리와 같은 이런 <인간>이 여기 이렇게 존재하게 되었다고, 탄생하게 되었다고, 아니, 나타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천문 물리학에서 말하는 바에 의하면, 반드시 질량을 부여받아야만 비로소 <빅뱅> 때 나타난 <입자(粒子)>들이 지금의 이런 우주를 만들 수가 있는 것이라고 하는 데, 그런 질량을 부여해주는 <입자(에너지 매개 입자)>, 흔히들 <신(神)의 입자(粒子)>라고 부르는 것 또는 영국의 과학자인 힉스(Higgs)가 세운 가설인 <힉스 입자>라는 것이 <있다!> 또는 <없다!>라는 것이, 아직은 완전하게 확인되지 않았으나, 그러나, 비록 이 <신의 입자>의 존재도 조만간 입증될 태세이기는 하지만(2012. 7. 4 스위스 CERN=유럽 입자 물리연구소에서는 힉스 입자가 발견되었다는 발표가 있었음), 막상 <신의 입자>의 존재가 확증된다고 하더라도 <창조론> 문제는 여전히 풀어야 할 중요과제로서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천문물리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저 많은 우주들(은하계들)이 저토록 정밀하게 조정되어 있다는 이 신비현상은 오히려 더욱더 신비해질 뿐, 호킹(Stephen Hawking)이 말한 바, 저 <인간 뇌(腦)의 자발적 창조성>이라는 논리로서는 다 풀기에 너무 벅차고 어렵고 또한 비현실적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러한 논리는 <힉스 입자>의 정체(identity)를 밝히는 문제와 함께 그 <힉스 입자>의 기원(起源) 문제가 또한 성서의 창조론과 뒤엉켜 더욱 풀기 어려운 난제(思考의 惡循環/vicious circle)로 거기에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21세기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인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의 그 <인간 뇌의 자발적 창조성> 이론은 호킹 자신의 <복수 우주(multi-universe)이론>과 그리고 소위 말하는 <우주 팽창이론>과도 조화/평행될 수는 없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비록 그 생명이 케임브리지 대학 젊은 수학교수 존 콘웨이가 발명한 저 <생명게임>의 법칙에 의하여, 산술논리상으로는(!), <영원히>!? 진화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그러나, 그 인간이, 그 인간 뇌(腦)가 신의 전능성(자발적 창조성)을 가지고 이 우주를 존재하게 하였을 것이라는 가설은, 호킹 교수 자신도 주장해 온 저 <복수(multi-) 우주 이론>과 <우주 팽창 이론>과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이론이라고 하겠다. 「The God Delusion/만들어진 신, 2007, 김영사」라는 책을 쓴 유전자 연구가요 동시에 무신론의 전도사로 자처하는 과학자 도킨스(Richard Dawkins)가 말한 바의 그 <트리클-다운/trickle-down 창조론>의 논리(크고 엄청나고 명석한 것이 그보다 못한 것을 만든다는 논리)에서처럼, 만들어진 인간/인간뇌가 그를 만들어낸 이 우주, 무한히 팽창해가는 이 우주, 서로 동일하지 않은 이 복수 우주를 창조하였다는 호킹의 논리(그의 책 「위대한 설계」 2010, 까치 참조)는 논리적 모순을 낳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창조자>와 <진화되어 가는 자=인간>가 같은 존재라거나 또는 진화되어 가는 자가 그가 진화되어 나온 그 모체를 만들어낸 창조자라거나 하는 논리도 또한 <트리클-다운 창조론>의 논리에서 볼 때, 결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호킹(Hawking) 박사는 2012년(금년) 8월 30일, 세계가 주목하는 런던의 <장애인 올림픽> 스타디움 단상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 세계를 감동케 한 <장애인 올림픽 축사>를 하였었는데, 그는 여기서도 여전히 인간이 가진 ‘무한 가능성’을 역설하면서 이렇게 말한바 있다.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인간은 우주의 근본 질서를 이해하기를 갈망해 왔습니다. 그것은, 왜? 그것이[우주가] 그런 상태(현재의 중력원칙 상태)에 여전히 있으며 또 도대체 왜? 그것이 그렇게 [그런 상태로] 존재 하는가?에 대한 대답의 갈망입니다.”라고 하면서 여기에 덧붙여 말하기를 “인간의 노력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 그것보다 더 특별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라고 반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가 영생불사(永生不死)하지 않고서는!, 우주의 시작과 그 미래에 대해서 그가 던졌던 물음(cf. 철학자 모티어 애들러가 즐겨 사용한 질문), 즉 <왜? 우리는 무(無)가 아니고 유(有)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 이른 바, 그가 그토록 부인하고 비난한 <성서의 창조주 신앙>을 격파할 이론을 그가 결코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나는 기독교 경전인 성서, 즉 신의 영감을 받아 인간이 기록한 책이지만 그러나 반드시 비평학적 방법으로 해석(주해)되어야만 하는 책인 우리의 성서가 제시한 그 <신의 창조행위>에 대한 신앙 고백적 증언에로 겸손히 귀의(歸依)하는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이것이 우리가 던지 물음에 대한 대답의 출발점이요 종착점이다. 기독교의 경전이 말하는 신(神), 즉 야훼(One who is.가 아니라 One who causes to be. 즉 I am who I am.이 아니라 I am who I cause to be.) 하나님은, 그러므로, 천체물리학에서는 입증단계에 와 있다고 하는 저 유명한 그 어떤 <신의 입자> 그 자체와 일치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하겠다. 오히려 야훼 하나님은 그 <신의 입자>를 이용하여 질량이 없는 <빅뱅> 직후의 <무 질량의 입자들>에게 질량을 부여하여 이 우주를 탄생케 하고 또 이 우주를 지금까지 이끌어 오고 또한 앞으로도 영원히 이끌어 가게 할 그분, 창조주이시라는 것, 그러므로 그분 창조주만을 찬양할 수밖에는 다른 도리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나의 이 주장은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이른 바, 불가역(不可逆)의 신앙적 체험들과 학문적 양심을 가지고 성서를 연구한 그 여러 결과들에 의하여 대답하는 것임을 밝혀두는 바이다.
그렇다.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다.
(1) 첫째로, <태초에 창조주(=야훼) 하나님이 이 온 우주를 있게 하셨다. 왜? 그는 전능자이셨기 때문이다.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그는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다.>라고 고백한다. 이것이 성서 신앙의 출발점이다. 기독교의 대표적 교리인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신앙조목들을 교리적(敎理的)으로 체계 있게 총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신앙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신조의 둘째 항목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만 매우 길게 나열>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출애굽 구원을 <원 신앙고백>(Urbekenntnis)으로 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고대의 짧은 역사신조>(신 26:5-9; 수 24:2-13)라는 가설 속에 나타나는 <출애굽 구원 신앙고백>이 다른 신앙고백의 항목 보다 절대적으로 많은 부피를 점하고 있는 것과도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후대에 와서 최종 완결된 그 두 신조 조문, 즉 ①구약의 역사신조(느헤미야 9:6-25)와 ②기독교의 사도신경, 둘 모두가 다 그 맨 앞에는! 창조주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고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 볼 때 매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현상이다. 말하자면, 그것이 구약종교이든 신약성서의 기독교이든, 우선은 신론(神論)이 출애굽의 신앙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했었다는 그런 말이다. 말하자면, 신(神)의 실재에 대한 확신, 즉 우리를 지으신 분, 우리를 잉태하고 출산해내신 <창조주>의 실재를 믿느냐 아니 믿느냐가 <우리>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알아내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전자(=믿는 자)의 경우는 성서의 현실 속에 있고 후자(=믿지 않는 자)의 경우는 무신론자의 현실 속에 있다. 성서의 현실은 <믿음>의 현실이고 무신론자의 현실은 <입증(입증)>의 현실이다.
성서에 의하면, 신(神)은 본질상 인간에 의하여 <포착될 수 없는 분>(Elusive Presence)이시고(출 33:20,23) 그러므로 그는 동시에 <자신을 감추시는 분> (Deus absconditus)이시다(사 45:15). 그런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철저히 신(神)을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불가시>(不可視)의 존재로 고백하고(출 33:19-23; 요 14:8-14) 신의 형상화를 철저히 거부, 배척한 것은, 도킨스(R. Dawkins)의 <트리클-다운(trickle-down) 창조론>이 잘 말하고 있듯이, <창(窓)은 창 제작자(Maker)가 자신을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없다>라는 원리와도 일치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신의 입자>(힉스 입자)는 입증될 수 있고 또 입증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신의 입자가 아무리 작은 쿼크(quark)의 형태를 띠고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것이 신(神) 자신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의 창조물이고 이 우주를 <있게 하는> 신의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도 신의 도구에 의하여 만들어진 피조물일 뿐임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인생의 <출생>-<죽음>-<죽음 이후>는 창조신의 창조질서에 속하는 것이지 인간 자신의 질서에 속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 하겠다!! 따라서 전능하신 창조주만이 우리를 태어나게 하시고 죽게도 하시고 새로운 창조도 하실 뿐이다. 그러므로 <죽음>도 신의 창조질서일 뿐이고 <죽음 이후>도 또한 신의 창조질서 안에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현금의 대표적 무신론자(무신론의 propagandist)인 리처드 도킨스(R. Dawkins; The God Delusion의 저자)가 왜 기독교의 지도자들과의 공개 토론회를 <거듭> 거부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그의 책 <만들어진 신>(Pp. 173-246)의 “신이 없는 것이 거의 확실한 이유”라는 장(章)에서 그의 무신론 논리를 확신에 차서 그리고 또 시니컬하게 논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그는 <우연론>도 부인하고 <지적(知的) 설계론>도 반박하는, 이른 바, <자연 선택론>(다윈의 진화론)과 <트리클-다운(trickle-down) 창조론>으로 무장하고서 신(神)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에만 열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도 비판하였던 바대로, 결코 그 어떤 <틈새의 신>(God of the gaps)논리로, 즉 인간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틈새>는 모두 신(神)으로 채우는 그런 논리로 신 존재론을 변증(辨證)하려 하지는 않는다. 단지 나는 성서, 특히 구약성서가 그 긴 역사과정 속에서 지속적으로 체험하여 증언하였듯이(cf. 출 33:17-23), 나 역시 나의 삶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체험한 하나님 체험들을 통하여, 창조주 전능자 하나님을 증언하고 성서의 고백에 동참하는 것일 뿐이다.
실로, 성서는 전능자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셨다고 증언한다. 인간은 신의 지음을 받은 피조물일 뿐이라는 것도 또한 증언한다. 이 증언들은 긴 하나님의 약자 구원역사를 반복적으로 체험한 신앙 고백들이다. 구약성서의 증언은 인간의 생사화복, 길흉화복, 영고성쇠가 모두 이 창조신에게 매여 있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하여 체험하였음을 증언할 뿐이다. 물론, 이 모든 구원역사적인 사건들은, 뒤돌아볼 때(post eventum), 그 대부분이 모두가 신의 구원 사건들임을 확신하게 된 그런 것이다. 따라서 성서는 인생의 <출생-죽음-죽음 이후>란 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질서(자연질서=역사질서) 안에 있다고만 증언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증언은 문자주의를 철저히 극복한 역사과학적 비판을 통한 성서연구에서 확인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의 각 절이 끝날 때마다 망치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라는 도킨스(Dawkins)의 말은 성서의 역사비평적인 해석학이 가진 의의를 무시한데서 온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재(再)숙고되어야 한다고 본다. 성서의 창조신앙(그리고 사도신경의 창조신앙 고백)은, 그러므로, 비록 맨 앞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분명코 긴 역사적 경험들의 <최종 결과>일 뿐이다. 즉 신 26:5-9와 수 24:2-13의 신앙고백의 핵심전승이 창세기 1장[더 고대의 자료인 2장도!]의 창조신앙 고백 보다는(경전 편집 역사의 문맥에서 볼 때) 훨씬 오래 전의 것이라는 사실은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그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1967」(3 vols. vol. 1, Pp. 182-186)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3대 구성 요소 중 하나를 <자유와 운명>의 역학관계라고 보았는데 반(反)하여, 나는 오히려 그 역학관계를 <운명과 자유>의 대극 관계로 그 선후 순서를 바꾸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비록 인간이 신(神)에 가까운 창의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여도, 인간은 어디까지나 창조된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경전인 성서신앙의 근간(根幹)이다.
(2) 둘째로는, 호킹 박사가 말하고 있는 그 <자발적 창의성>이라고 말한 그런 기능을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을 수 있을만한 그런 존재가 만일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인간이외의 다른 존재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는 인간창조에 관해서 말할 때, 그 인간을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우주 통치권을 위임 받은 존재)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에 의하면, 그 인간의 구성본질이란 어디까지나 <신적인 것>(영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땅의 먼지인 흙>이었다는 것이고 그 흙으로 빚어진 것 속에 창조주께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자 비로소 그 흙덩이가 <생명을 가진 존재>(네페쉬)가 되었다는 것이다(창 2:7). 즉 구약성서는 분명히 여기서 인간 본질의 이중성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는데, 즉 인간은 ①흙으로 구성된 존재(living being, 창 1:20,21,24; 2:7)임과 동시에 또한②이 온 우주를 하나님을 대리하여 통치하고(창 1:26,28) 관리할(창 2:15) ⓐ권리와 ⓑ의무를 부여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신(神) 또는 영(靈, immortal soul)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단지 신으로부터 이 우주에 대한 통치권과 관리의무를 위임받은 존재(창 1:26,28; 2:15)인 <위임 통치권자 및 관리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비록 창의성을 가진 존재라고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인간은 단지 <피조물>일 뿐이라고 하겠다.
(3)셋째로는 그러므로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즉 <흙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흙(=땅의 먼지)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죽음>이라는 운명은 전혀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해 있었던 것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과 영고성쇠(榮枯盛衰)가 전적으로 신(神, 하나님)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신 32:39; 삼상 2:6; 마 10:28). 그러므로 그 무슨, 인간이 태초에 타락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본래는 불멸적인 존재였었던 인간이 그 때부터 돌연 <사멸적인 존재>(죽을 존재)로 떨어지게 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창 3장의 인간타락 기사를 유전적 원죄(原罪; original sin) 이론의 성서적 전거(典據)로 삼는 것은 치명적인 해석학적 오류라고 하겠다.
(4)끝으로, 그렇다면, 우리들, 흙으로 된 인간에게 있어서 <희망>이라는 것이 만일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성서의 신앙세계는 이 세계(宇宙)를 그리고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구별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성서에 의하면 ①육(肉)이 죽어서 비로소 영혼이 해방 받는다는 것도 아니고 ②그렇다고 인간의 생이 끊임없이(!!) 형태변화를 하며 거듭 거듭 환생, 윤회하는 것도 아니며 ③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발적 창조성>을 가지고 <자연선택!>을 하며 영원히 진화하는 것(cf. 도킨스의 진화운동>도 또한 아니라는 것이다.
성서에 의하면, 이와는 전혀 달리, 태초에 거기에는 단지 신(神, 하나님)만이 계셨고 그리고 거기에는 또한 우리(사람과 존재하는 모든 것)를 위하여 신이 마련한, 즉 우리가 거주할 <도움을 줄 거주지>(마온ma‘on, 시 90:1; God’s habitation, 암흑물질/암흑에너지: E=mc제곱, 아인슈타인의 질량 에너지 보존법칙을 나타낸 방정식=절대로 창조될 수도 없고 소멸될 수도 없는 그런 그 어떤 것)가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유한하고 연약한 인간에게 <희망>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희망을 분명한 언어로 정의한 것이 시 90:1-3이다. 이 시인(詩人)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여, 주님은 [실로] 우리의 거처(居處, 집=宇宙)이셨습니다. 그 <거처>는 대대로 영원히, [우리가 거기서 나오고 또 거기로 돌아갈] <우리의 집>(居處, our habitation)이었습니다. 실로, 주님은 산들이 생기기도 前에, 땅과 이 우주(宇宙)도 생기기 前에 주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신(神, el, 엘)>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태초에] 사람을 흙으로 돌아가도록 만드신 후 말씀하시기를, ‘죽을 인생들아(에노쉬/벤 아담), 돌아가거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ki) 주님 앞에서는 [우리는 단지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성서는 말씀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편 90편 시인은 인생이 태어나고 죽고, 다시 창조되는 이 전 과정 전체가 즉 이 우주 전체가 하나의 <하나님의 거처> 즉 <하나님의 집(宇宙)> 안에서 이루어지라!!고 명하셨던 것이라고 증언한다. 모든 것은 모두 이 하나님의 뜻(명령=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집=하나님의 宇宙> 안에 있었고 또 있으며 또한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생성소멸, 영고성쇠가 그 <하나님의 집(宇宙)>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그런 <하나님의 집(宇宙)>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오고 가고, 가고 오는 그 모든 것(불교가 말하는 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윤회>와는 다른 이 세상의 모든 오가는 것)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고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우선, 흙으로 지어진 이 초개(草芥)같은 인생을 향하여 하나님은 명하시기를 그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질서, 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우리 피조물들인 인간이 오고 가고 그리고 가고 오는 것인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죽음도 바로 이 <창조주의 창조질서에 따르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도 또한 역시 이 창조주의 창조질서 안에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는 이런 질서 때문에 <희망> 속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우리를 있게 하신, 우리를 잉태하고 출산하신 그분, 창조주의 집(=宇宙)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만드신 분, 우리를 낳으신 그분은 그러므로 우리를 다시 만드시고 다시 태어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육체로부터 영혼의 탈출이나 또는 순환법칙에 의하여 시작도 끝도 없이 윤회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구약성서가 그 창조주(=야훼) 하나님을 <긍휼의 신>(=엘 라훔, 출 34:6)이라고 증언하였던 것은 신약성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새롭게 다시 창조될 수 있다고 증언한 것과는 결코 서로 별개의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정확히 평행선상에 있는 동일한 것이라고 하겠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영역 안에서(=자신의 <집/宇宙> 안에서) 인간을 흙으로부터 나오게 하시고 또 그 흙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긍휼>/<자비>의 신(神)이시므로 우리를 새롭게 다시 창조하실 것이다. 새로운 창조를 하실 것이다. 어떻게? 출애굽역사-出바빌론 역사-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역사 선상(線上)에서 우리를 다시 창조하실 것이다.
죽음 이후는, 그러므로, 단지, 오직 단지, 창조주 자신의 긍휼/자비 때문에 우리를 <다시 만드시는 것> 그것이다. 재창조와 새 창조를 자신의 통치영역(자신의 집=宇宙, 질량=에너지) 안에서 이루시는 것,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언(遺言)은 놀랍게도 이것이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너희가 신(神)의 존재, 즉 창조주의 실재를 믿으니 그의 보내심을 받은 자인 나도 또한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하나님의 거처=宇宙)에는 거(居)할 곳이 많다. 하나님의 집[하나님의 宇宙, God’s habitation]에는 있을 곳이 많다. ‘팽창하는 우주’는 <신의 집의 무한 광대함>을 약속한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겠다고 말했겠느냐? 그러므로 나는 이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노니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요한 14:1-2) 성서의 신 계시(神 啓示)는 모두가 이렇게 우리를 향한 약속이다. 결코 파기되지 않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는 신의 약속의 영역에 속한다 하겠고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믿음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렇다 태초에 신(神, 하나님)이 계셨으며 태초에 그가 우리를 창조하셨고 태초에 그가 우리에게 돌아가라! 명하셨으며 그리고 그가 또한 우리에게 우리의 새로운 창조를 약속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