얍복나루터의 브니엘체험
창세기 32장 27절-31절
그분이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너의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야곱이 말하였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그는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하면서 그 자리에서 야곱에게 축복하여 주었다. 야곱은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옵고도 목숨이 이렇게 붙어 있구나"하면서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하였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솟아올라서 그를 비추었다. 그는 엉덩이뼈가 어긋났으므로 절뚝거리며 걸었다.
마태복음 6장 9절-13절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 나라가 임하게 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성서에서 야곱은 의지와 야망의 사나이요, 배포가 크고 비젼이 넓고 가슴이 뜨거운 정열을 가진 이스라엘 족장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고향이던 유프라테스강 근처 하란땅에 거주하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머슴살이 겸 데릴사위 노릇을 마다하지 않고 14년을 살면서 재산을 모았습니다. 20년 가까이 얹어 살면서 착실하게 부를 축적해가는 동안 일에만 열중하였습니다. 형에게 쫓기다시피 외롭게 광야를 거닐면서 돌베게를 하고 들판에서 잠들다가 꿈에 체험한 벧엘체험과 하나님과의 약속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본처 레아와 라헬, 그리고 후처 빌하와 실바사이에 난 12아들과 딸들 그리고 수천마리 소떼, 양떼, 낙타떼를 이끌고 금의환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고 피와 땀과 노력과 집념에 가까운 쟁취물이었습니다. 어찌 감회가 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그 모든 것들을 자기의 소유로만 알고, 자기의 힘으로 쟁취한 것으로 알고, 자만과 혈기 그대로 거룩한 약속의 땅으로, 하란땅에서 오물 묻은 신발 그대로 팔레스타인 경지로 넘어들어서려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 사이엔 화해나 평화가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식구들과 소유를 먼저 강건너 보내고 작은 나루터에서 홀로 마지막 밤을 세우는데 어떤 분이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했고, 야곱의 도강을 막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은 강줄기 하나, 얍복나루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우리 개인의 인생이나, 민족이나 인류가 반드시 한번은 건너야 하는 불의 강이요, 변화의 강 이요, 정화의 강이요, 새로 거듭나야 하는 강입니다. 야곱이라는 혈율적 인간, 야 곱이라는 사람이 영적으로 한번 죽고 거듭나서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시험과 도전에 겨루어 이겼다"는 의미의 이스라엘로 바꾸어지는 통과제의적 계 기를 거치는 영혼의 어둠의 밤입니다. 씨앗이 싹을 트려면 어두운 캄캄한 땅속에 서 두꺼운 씨앗의 겉껍질을 벗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야곱의 얍복나루터의 밤은 그의 영혼의 씨앗껍질을 벗겨내야 하는 밤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인이 지금 당면한 'IMF' 위기상황은 현실적으로는 금융위기로 인해 한국 민이 직면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위기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우 리는 신앙적으로 좀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믿는 자들은 이번 이 민족적 위기 상황을 한민족의 자만과 혈육적 인간집단 그 대로서는, 21세기 새로운 문명시대, 새로운 지구시대, 새로운 민족 통일시대를 들 어가지 못하다는 역사의 하나님의 메세지로 받아야합니다. 신실과 생명의 하나님 이 야곱을 호되게 치신 것처럼, 20세기 지구상에 야곱과 같은 한민족의 도강을 저지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강을 저지하고 계신다고 믿어지지 않으면 역사가 그렇게 한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하나의 생명현실을 맨 위에서 보면 하나님의 얼굴이요, 맨 바닥에서 보면 민초들의 얼굴이요, 그 움 직이는 과정에서 보면 역사라는 세계사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20년 타향살이 라반삼촌댁에서의 피눈물나는 노력처럼 우리 한민족도 지난 30년 열심히 일하고 뛰었습니다. 야곱이 부모형제 일가친척도 잊은체 일하 고 일가를 이루고 부를 축적하느라고 뛰어야 했듯이 우리도 오로지 물질적 가치 와 부의 증대를 위해서 사회와 인륜의 모든가치를 내 팽개치다시피 뛰었습니다. 야곱이 형제 간의 우의를 손상시키고 화해하지 않은체 20여년을 살아왔듯이, 우 리 한민족도 사회 계층간 남북 민족간 불화와 갈등을 전혀 개선하지 못하고 살 아왔습니다. 무엇보다도 야곱이 자기가 이룬 부의 축적과 습득을 통하여 자신도 모르게 자만하고, 자고하고, 의기양양했듯이 우리도 수많은 제3세계 가난한 나라 사람들과 국가들을 향해서 우쭐대고 자만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얍복강은 하나님의 저지선입니다. 하나님이 멈추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얍 복강은 무엇입니까? 같은 사회안에 존재하는 빈부 계층간, 정치세력 집단간의 엄 존하는 갈등과 불협화음입니다. 기업현장에서는 노조와 경연진간의 대립전선입니 다. 젊의 세대와 기성세대간의 갈등입니다. 무엇보다도 남북간의 넘어 설 수없는 경계선입니다. 종교간의 특히 개신교와 한국 타종교간의 넘어 설수 없는 배타적 인 분계선입니다. 인간이 자연과 벌리는 개발과 환경보존이라는 생태학적 분계선 이기도 함니다. 이 모든 것이 20세기 야곱이랄 수 있는 한민족을 가로막고 있는 작은 얍복강의 실체입니다. 이 모든 문제를 금융경제 문제차원에서만으로 다 해 결할 수 있다고 보는것은 매우 피상적 생각입니다.
얍복강은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무엇입니까? 왜 하필이면 강이고 나루터입니 까? 물리지질학적으로 보면 강폭도 좁은 작은 물줄기에 불과할 터이니 텀벙텀벙 건너갈 수 있겠지만, 그것은 짐생들이 물을 마시고 무심코 건너는 건넘이지 영적 존재인 인간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물인 영 적 존재 인간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닮은 형상을 이루기까지 여러번 혈육적 허물 을 벗겨내기 위하여 인생기간 여러단계 통과 제의를 장치해 두셨습니다. 탄생, 선년식, 세례, 결혼, 질병, 사별, 죽음, 영적 은혜체험,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마침네 얍복강은 사람이 거듭나는 물의 상징으로서 세례를 상 징하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보혈의 강을 의미 합니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인류공동체이든 이 신비한 얍복강 앞에서 한번 멈춰 야 하고 하나님의 도전장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과 씨름을 해서 통과되어야만 생 명의 땅,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될 때까지 시련의 고통이 길고 험난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야곱이 그 시련의 밤을 견디 어 내고 통과한 이후, 두가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제 자기 이름이 옛 사람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것. 둘째는 어제저녁 보았던 산천초목과 떠 오르는 태양이 전혀 새롭게 보이고 어제밤에 그의 시련의 그 고통 속에서 하나 님을 뵈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브니엘이라고 명명했다는 것 아님니까? '브니엘'이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는 옛 혈육적 야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새로 거듭나고 중생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제까지는 악착같이 내새끼, 내가족, 내 소유만을 확보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경주해온 인생의 외골행로를 바꾸어 하 나님이 그의 삶 과정 속에 동행하고 현존한다는 사실은 문득 개안하여 느끼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거룩한 성스러운 그 무엇이 이 속된 현실 속에, 영원이 시간 속에, 신성이 인간성 속에 순간 순간 접촉하고 화육하는 현실을 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그의 속사람의 눈이 뜨였을 때, 야곱은 이스라엘민족을 이루는 열두족장의 시조가 될 수 있었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구원의 그릇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들판에서 씨름상대가 되어주면 서 힘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아보듯, 하나님은 시련속에서 인류를 앞에서 부르 시고 뒤에서 밀어주시는 보이지 않는 유인자요 신비한 고난의 동행자이신 것입 니다. 참된 부모는 돌짝밭에 넘어져 우는 아이가 안쓰럽지만 함부로 달려가 일으 켜 세우지 않습니다. 스스로 일어서는 법과 용기를 터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지금은 어떤 때입니까? 우리가 진솔한 맘으로 주기도문을 맘 깊이 음미 하면서 바르게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 게 하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 이다." 우리의 혈육적 욕심보다는 하나님의 의와 뜻, 곧 정의렵塵?화해렌燻?과 같은 가치가 먼저 우리 민족 속에 구현되도록 민족모두가 거듭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때입니다. 너무 염려하거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구인류이 절 반이 넘는 30억 가량의 사람들이 지금 오늘도 그릇 몇가지와 밥짓는 솥 한개만 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민족은 얍복나루터에 이르렀습니다. 야곱처럼 혼신의 힘을 다하여, 환도뼈가 위골 될 때까지 씨름하여 하나님의 연단, 역사의 시험에 통과해야 하겠 습니다. 뿐만아니라 이 시련의 밤이 지나고 야곱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로 변화 하듯, 민족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새로워지는 변화의 체험을 경험해 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뒷날 그 때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구나하고 후일 에 깨달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아닙니다. 지금은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움걸어오는 신비자와 환도뼈가 이즈러질 때까지 씨름해야 할 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