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칼빈 없는 칼빈주의?

칼빈 탄생 500주년, 한국의 칼빈 정신은 살아 있나?

정미현 (스위스 미션 21, 여성과 젠더 데스크 의장, www.credo.or.kr)

I. 들어가는 말

한국 장로교의 뿌리가 되는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취리히의 훌드리히 츠빙글리와 제네바의 요한네스 칼빈(존 칼빈, 장 칼뱅)으로부터 비롯된다. 칼빈은 프랑스에서 1509년 7월 10일 태어나고 성장한 사람이었지만, 동료의 권유로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수행했고, 1564년 5월 27일 삶을 마감했던 인물이다. 칼빈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무대(Theatrum gloria dei)인 이 세상에서, 자신이 기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무덤을 알리지 못하도록 했을 정도로 겸손한 인물이었다.

한국 장로교의 도입, 성장과 확산에 직, 간접적으로 기여한 19세기 미국 장로교는 칼빈주의적 청교도 정신과 근본주의적 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칼빈 신학에 대한 이해보다는 오해가 오히려 보편화되었다. 칼빈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2009년을 계기로 칼빈 없는 칼빈주의가 우리에게도 종식되고, 칼빈의 원문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활성화되며, 제도화된 교권주의로부터 벗어나 근원으로(ad fontes) 돌아갈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결코 옛 시대의 모습으로 복귀하자는 것이 아니라, 칼빈의 의도를 우리의 시대 상황에 맞추어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하자는 것이다. 종교개혁이 시도한 것은 종교에 갇히워진 하나님과 인간을 해방하여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되게 하자는 외침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성서로의 눈 돌리기에서 비롯되었다. 성서, 은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강조는 구원의 중재를 위한 인간의 공로와 업적을 도구화하는 당시 교회의 모습에 대한 전면적 도전이었다.

특히 칼빈의 신학은 종교의 개혁을 정치, 사회와 경제상황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끌어 나갔다는 점에서 고찰될 필요가 있다. 칼빈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근면한 책임성을 강조하였고 그 책임성은 곧 인간의 공동체적 연대의식과 사회적 책임의식을 말한다.
                              
II. 칼빈시대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

경제사적으로 볼 때 종교개혁이 있던 16세기 유럽은 하나의 전환의 시기였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물물교환 형태가 지배적 상거래 방식이었으나 새로운 경향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새로 개척된 식민지를 통하여 엄청난 양의 금이 유럽으로 유입되었고, 그 결과 화폐제도가 도입됨으로 물물교환은 해체되어갔으며, 교역은 확대되어갔다.

종교개혁 당시 칼빈이 주로 활동한 스위스 제네바는 14세기 이후 재화와 물자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로서 활발히 발전해 갔다. 그러나 15세기에 이르러 프랑스 왕의 경제정책과 유럽인들의 바다로의 항로개척으로 전 유럽의 교역조건이 바뀌게 되면서 제네바의 발전도 차츰 멈추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제네바에는 수공업 종사자들의 수가 본래 적어서 수공업자 길드의 발달이 저조한 상태였고 1534년 교회의 책임자이자 당시 행정의 책임을 맡은 감독이 그 활동 무대를 다른 도시로 옮겨가면서 이에 따라 많은 수의 귀족들, 상인들, 그리고 수공업자들도 이 도시를 떠났던 것이다.

이처럼 경제적 침체기에 있던 도시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자 파렐(G. Farel)과 칼빈은 이 어려운 경제상황과 씨름하게 되었다. 새로운 경제 정책과 아울러서 도시의 새로운 지도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이들이 우선적으로 고민했던 일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한가지 방안으로, 프랑스와 다른 도시들에서 개혁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박해받거나 쫓겨난 사람들을 맞아들여 자유로이 살 공간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에는 많은 수의 수공업자와 상공업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비교적 수월하게 경제적 삶을 영위하여 나가게 되었다. 이들이 제네바로 이주함으로 경제는 회복의 기미를 띠었다. 당시 제네바에는 주변 가톨릭 지역으로부터의 위협이 항시 존재하였기 때문에, 제네바 시의 효율적 운영과 통제가 시급한 과제였다. 또한, 제네바에서는 일차 생필품에 대해 정부가 가격을 통제하였는데, 생필품의 균등한 배분과 특정인들만이 일방적 이득을 취하지 못하도록 조처를 취한 것이다. 이처럼 정부의 적절한 통제권에 대한 생각은 칼빈의 의도와도 맞는 것이었다. 칼빈의 사회와 경제에 대한 생각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연관되는 것이었다. 칼빈은 정부는 한쪽 사람들의 희생으로 다른 사람이 부를 획득하게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며, 사회 공동체의 공익을 위하여 부의 혜택이 골고루 나누어져야 된다고 보며 정부의 책임과 기능을 강조하였다.

III. “칼빈, 칼빈주의와 자본주의”

칼빈은 루터와는 달리 교회와 세상을 대립되고 분리된 두 영역으로 보지 않았다. 또한, 그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보다는 둘 사이의 조화를 추구해간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물질적 재산까지도 하나님이 그 섭리를 완성하는 도구로써 파악한다. 그 물질적 재산의 대표격인 돈은 실용적 성격뿐 아니라, 영적인 사명도 가진 것이다.

칼빈 이전의 신학자들이 경제생활의 기반을 자연윤리의 토대에서 생각했던 것에 반해서 칼빈은 경제문제를 신학적 관점에서 해명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인들은 그 신앙을 삶의 행위로 표현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경제활동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올바른 관계회복의 자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경제생활을 삶 속에서의 신앙의 표현으로 보기 때문에 조화로운 사회공동체 형성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유용한” 이자와 “해로운” 이자를 구분함으로 교회역사상 처음으로 생산을 위한 가치 있는 자본에 한하여 이자를 허용하였고 이자문제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였던 츠빙글리와 불링거에 이어서 칼빈은 중세기까지 지배했던 돈에 대한 관념을 바꾸게 한다.

막스 베버의 이론 중 칼빈주의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세계내적 금욕주의(innerweltliche Askese)”라는 용어는 (많은 오해의 소지가 있기도 하지만) 비교적 칼빈의 신학적 경제 윤리의 의도를 잘 설명한다. 중세기까지 금욕주의란 공로주의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 특히 칼빈은 아주 새로운 형태의 금욕주의를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만이 하나님 앞에서의 유일한 공로가 되는데, 이 은혜를 입고 새로운 삶을 얻은 자는 성화를 위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해방의 이정표를 따를 수가 있다. 그러므로 금욕이라는 것은 구원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그것은 새로운 훈련으로 드러나는 삶의 절제로써의 금욕주의이다. 즉 중세기의 가톨릭이 세상을 회피하는 금욕주의를 말하였다면, 칼빈은 세상 가운데에서의 금욕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칼빈은 자학적 노력에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통한 구원을 말하면서, 이 세상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근면하고 절제된 삶을 강조한 것이다.

칼빈은 중세기적 사고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켜서, 이분법적으로 노동을 신앙에서 분리시키는 중세기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인간의 직업적 활동과 노동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였다. 또한 그 노동은 일에 시달려서 노예와 같이 소외되는 상태를 말함이 아니라, 그 노동을 위하여 하나님께 받은 소명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노동은 인간에게 부과된 책임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 것이다. 노동뿐만 아니라, 휴식을 주관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안식의 의미(출 20: 8-11, 신 5: 12-15)가 칼빈에게서 강조된다.

가난한 자가 사회에서 받게 될 불이익을 항상 염려하였던 칼빈은 구약의 희년사상을 수용하여 일정연한이 되면 땅을 재분배하고 빚을 탕감하게 하여 줌으로 재산과 부가 사람을 사회적으로 억압하는 수단이 되지 못하도록 노력하였다. 이처럼 칼빈은 사회 공동체를 향한 개인적 책임과 아울러 국가의 적절한 통제를 균형있게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을 칼빈주의로 가두어버리고 현실적 천민 자본주의의 근원을 칼빈에게서만 보는 제한된 시각은 칼빈의 본래적 의도를 왜곡한다.

칼빈이 물질적인 풍요를 하나님의 선물(Gabe)로 여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선물에는 그것을 올바로 간수하고 유용하게 써야 할 책임(Aufgabe)이 뒤따른다. 물질을 풍부하게 소유한 자가 그것을 이기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칼빈은 문제시하였지만, 그렇다고 개인적 차이를 무시한 무조건적 평등을 강조한 것도 아니다. 그는 공동체의 유기체적 연관성을 통하여 서로 서로가 돕고 나누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칼빈 자신은 거의 궁핍에 가까울 정도로 검소하게 살았다고 전해지는데, 그는 설교를 통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격려하고, 부유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부를 낭비하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칼빈이 물질적 풍요를 하나님의 축복이라 한 것만을 강조하는 것은 빈익빈 부익부의 구조체계를 예정론적으로 정당화하는 이론적 도구가 될 것이다. 그러한 해석은 칼빈주의에 입각한 서구 그리스도교와 자본주의가 결탁하여 자기 합리화를 꾀하는 문제적 해석이지 칼빈의 본래적 의도와는 다른 것이다.

IV. 칼빈과 한국 장로교회

한국개신교의 약 69%를 차지하는 장로교회가 칼빈이 빠진 칼빈주의에만 얽매이고 이 사회의 구조악과 사회, 경제정의 문제를 외면한다면 문제이다. 칼빈의 맹목적 이중 예정론에 얽매임은 한국인의 고질병 가운데 한 가지인 이원론적 흑백논리를 더욱 부추기고, 그리스도교인의 아집과 독선으로 타교파와 타종교인과의 협력과 대화의 가능성을 막아 오히려 사회 공동체의 조화를 깨트린다. 오히려 우리는 선택하는 자 자신이 저주받을 것 자체도 스스로 짊어지심으로 인간을 해방으로 이끄신 사건을 기억해야 한다. 이 점이 바로 칼빈의 이중예정론의 문제성을 간파하고 20세기에 칼빈의 신학을 재해석한 칼 바르트의 특기할 만한 신학적 내용이었으며, 우리 또한 칼빈 신학을 단순히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 상황에서 부단히 재해석할 필요와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것이다.

한국교회의 특성인 당회장 중심주의와 비민주적 구조가 갖는 문제와 모순은 또한 칼빈의 신학을 몰이해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칼빈의 직분론(목사, 박사, 장로, 집사)은 유교적 질서와 맞물려서 한국 장로교 뿐 아니라, 개신교 전반에 걸쳐 특이한 교회 내적 위계질서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칼빈이 시도한 것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의 협의체를 강조함이었다. 신학자일뿐 아니라, 법률가였던 그가 꿈꾸고 실행한 것은 신학적인 질적 성장, 교회 행정과 사회로 향한 섬김(디아코니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유기체적 교회 구조였다. 그가 사회 공동체의 섬김을 위한 각종 형태의 기구를 조직했을 뿐 아니라, 이주민들에 대한 보호 정책을 썼던 것은 이주노동과 다문화 사회의 문제가 긴박하게 부각된 오늘날에 더욱 관심을 가져볼 만한 내용들이다. 또한 칼빈이 이후 계몽주의 시대로부터 비롯된 유럽 민주주의의 기초를 마련한 사상가였던 점이 아울러 강조될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여성인권보호와 양성 평등을 위한 기반이 되었을 뿐 아니라, 각종 형태로 드러나는 약자에 대한 배려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창조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장소임을 강조했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의 청지기임을 말할 뿐 아니라, 개발이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이어져서는 않됨을 역설한 것이었다. 또한 인간은 이 창조세계 안에서 “손님”으로 존재하는 것이어서 후속세대를 위하여 이 자연을 본래의 모습대로 보전해야 함을 아울러 뜻한다. 성령의 교제케 하시는 능력을 통한 공동체성을 강조하여 성만찬에 비중을 둠과 아울러 칼빈은 예전가운데 시편 찬송을 무척 발전시켰는데, 그 한 이유는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복음이 주는 해방과 자유함을 기억하고, 기억해야만 하는 신앙 공동체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의 우리의 연대의식과 책임성을 외면할 수 없다. 개발의 논리의 문제성을 지적하면서, 녹색 성장의 가치를 부각시키며, 하나님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자연과의 화해를 추구하는 생태 공동체 운동과 한반도의 자주적 통일을 추구하는 평화 공동체 운동과 양적 성장 뿐 아니라, 질적 성장을 위한 비젼을 갖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기장의 지체들은 분명 칼빈의 후예들이다. 우리는 500년 전에 태어난 한 인간을 기념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칼빈 자신도 원치 않았던 일이다. 그러나 그가 시도했던 “개혁교회는 개혁되어야 할 교회”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 볼 필요가 있겠다.

2009년에 유럽에서는 칼빈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학술적 행사들이 계획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5월 말과 6월 초에 있게 될 세계 개혁교회의 연합 예배와 칼빈과 바르트의 신학을 연결하고, 고백교회의 바르멘 선언서의 의미를 오늘날에 재해석하는 것, 9월에는 츠빙글리의 후계자인 불링거와 칼빈의 신학을 이어주고, 성만찬론을 중심으로 서로 연대와 협력의 가능성을 추구했던 “취리히 합의서(consensus tigurinus)”를 기념하는 행사가 각각 취리히와 제네바에서 두 번에 걸쳐 있게 된다. 이미 수년전에 스위스 개혁교회는 재세례파에 대한 박해와 탄압에 대한 죄책 고백 선언문을 발표했고, 화해를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장로교의 고질병인 분열을 극복하고, 2007년 제주에서 가시화된 장로교단간의 연합의 시도와 “일치 속의 선교(mission in unity)”를 구체화하는 것은 우리가 한반도에서 우리 나름대로 이끌어갈 중요 과제가운데 한가지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분열된 장로교라는 오명을 벗고, 칼빈의 신학이 상황에 접목된 역동적 한국 교회의 긍정적 모습이 새롭게 부각될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1910년 에딘버러 세계 선교대회 백주년을 기념하는 2010년을 준비하는 것과도 맞물린다고 본다. 선교에 대한 새로운 개념정의와 시각의 전환을 촉구해야 되는 한국교회가 서구 선교의 제국주의적, 무분별한 경쟁의 방식을 답습하여 다른 지역에 이식시키고 그곳의 교단분열을 부추키는 것에 대한 죄책 고백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한국인이 갖고 있는 선교에 대한 선한 열정과 서구인들에게 우리가 받은 것을 지구촌 곳곳에서 혜택을 받지 못한 이들과 나누고자 하는 한국인의 아름다운 정신들이 세계 교회의 흐름 속에서 온전히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이다. “돌아보고 내다보도록” 허락된 이 기회를 그냥 놓쳐 버려서는 않될 것이며, 이러한 벅찬 과제를 수행해 가는 그 중심에 한국 기독교 장로회가 서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이 글의 출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회보 500회 특집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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