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이곤 칼럼] 그녀가 나보다 옳다(義롭다)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

성서본문

창세기 38: 24-26; 마태복음 1: 1-6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우리에게서 참으로 오랫동안 잊혀 져 온 한 여인, 그러나, 우리의 가슴을 참회의 눈물로 젖게 만드는 한 여인, 그녀의 그 슬기와 용기를 기념하면서 감히 기독교적 고난(苦難)의 의미를 새로운 시각에서 되새기는 시간을 한 번 가져 볼까 한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 여인의 이름은 “다말”이다.

이 다말 이야기는 대강 이러하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 넷째 아들인 “유다”는 그의 유랑생활 도중, 가나안의 어느 초원지대에 이르러서는 거기서 잠시 머물게(semi-nomad?/ transhumance?) 되었다. 거기서 그는 그 곳 지방의 여인, 즉 이방여인인 가나안 여인(“수아”)을 아내로 맞은 후 그 아내를 통하여 세 아들을 얻었다. 그 세 아들의 이름은 각각 “엘”, “오난”, 그리고 “셀라”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 아들들이 장성하자 유다는 맏아들 “엘”을 위하여 그 땅 가나안의 이방 여인 “다말”을 며느리로 맞아 들였다.

그 이후, 이 집안에는 원인 모를 불행이 일기 시작하였다. 성서는 그 이유를 단지 “유다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한 일을 행하였다”라고만 말하고 있어서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그 불행스러운 사연은 이러했다. 맏아들 “엘”이 저 가나안 이방 여인 “다말”에게 장가를 든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후사(後嗣)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한 채 갑자기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 사회는 분명 후사를 잇지 못하고 대(代)가 끊기는 것을 가장 불행스러운 일로 이해하는 사회였다. 그러므로 당시의 고대 중동 사회에서는 이러한 불행을 방지하기 위한 특이한 두 관습, 즉 ①“쉬프카”/“아마” 관습(여종을 대리모[代理母]로 하는 관습)과 그리고 ②“레비리트” 관습(형이 대를 잇지 못하고 죽는 경우, 시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후사를 잇게 해주는 관습)이 일종의 <차원 높은 윤리를 지닌 “관습법”>으로서 널리 지켜지고 있었다.

고대 중동 사회에서는 임신능력이 없는 불임 여인(不姙 女人)은 자신의 몸종(히브리말 쉬프카 또는 아마)을 자기 남편에게 씨받이로 내어 주어 그 몸종을 통하여 얻은 자식을 남편에게 대(代)를 이을 후사로서 넘겨줌으로서 자신의 ‘대(代)를 잇는 책임’을 다하는 관습이 있었다(‘하갈’의 경우,). 이러한 관습은 기원전 18-17세기의 것인 함무라비 법전(CH=Code of Hammurabi))에서도 나타나는 고대 중동에서는 널리 알려진 관습(cf. 창 16장의 하갈)이었다.

그러나, 후사를 잇지 못하는 책임이 이와 같이 여자의 불임성 때문에 오는 경우가 아니고, “남자”의 불임성 때문에 오는 경우, 즉 남자가 후사를 낳지 못한 채 아내를 남겨 놓고 죽는 경우, 그 죽은 남편의 형제가 즉, 시동생(라틴어 Levir)이 형수와 결혼을 해서 그 가문의 대(代)를 잇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도록 하는 그러한 관습법이 이스라엘 안에도 널리 시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관습법을 흔히는 “레비리트”(Levirate←라틴어 levir) 율법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관습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오늘 우리 본문(창 38장)의 이야기 말고도 “룻기”에서도 잘 반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신명기 25장 5-10절은 구약 율법 속에 이러한 “레비리트” 율법이 적용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법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 중의 하나가 아들이 없어 죽었을 경우에, 그 남은 과부는 일가가 아닌 남과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시동생이 그 형수를 아내로 맞아 같이 살아서 시동생으로서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태어난 첫 아들은 죽은 형의 이름을 이어 받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그런데, 만일 그 사람이 형수를 아내로 맞지 않으려 할 경우에는 그 형수는 성문 곁 장로들에게 올라가서 이렇게 호소하여야 한다. “나의 시동생이 그의 형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 이어가게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동생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라고 호소해야 한다. 그러면,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타일러보고, 그래도 여전히 그가 굽히지 않고 그의 형수를 아내로 맞고 싶지 않다고 하면, 형수는 장로들 면전에서 그에게 다가서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자기 형의 가문을 이어 주지 않는 사람은 이 꼴이 되어라”라고 욕을 해 주어라. 그 후로는 그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신 벗긴 집안”이라는 별명으로 통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와 같이 한 가문이 대(代)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려는 그들의 의지를 이토록 하나님의 법으로까지 강하게 법제화까지 하여 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한 가문의 대(代)가 끊어지지 않도록 대(代)를 잇는 의무를 감당해 주는 자를 높이 평가하고 그를 “속량 자(贖良 者)라는 말로, 즉 히브리어로는 “꼬엘”(go’el, 贖良者, 代贖者, 救贖者)이라는 말로 불렀고, 동시에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를 속량해 주시는 하나님 야훼도 또한 “꼬엘”이라고 까지 부르기도 하였을 정도이다. 즉 이러한 “레비리트”(Levirate) 관습이 이스라엘에서는 일종 하나님의 구원활동과 동등한 기능을 하는 것으로 까지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스라엘 신앙의 한 양식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바, 유다 가문에서 발생하였던 한 사건도 바로 위에서 언급한 레비리트 관습을 그 배경에 깔고 있는 사건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유다는 그의 첫 아들 “엘”이 후사를 잇지 못하고 죽었을 때, 그의 둘째 아들 “오난”을 며느리 다말에게 장가들게 하고 형의 후사를 그 형수를 통해서 얻어내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 처리는 당시의 이스라엘인으로서는 마땅한 "의무"였다. 따라서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부여하신 신성한 과제요 명령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둘째 아들 "오난”은 이러한 유다 가문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업을 받아들이기를 기뻐하지 아니 하였다. 즉 “오난”은 죽은 형에게 후손을 남겨 주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려고 했다. 창세기 38장 9-10절은 “오난”의 그러한 행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고 형수와 동침하였을 때에 형에게 아들 을 얻게 아니 하려고 땅에 설정(泄精; onanism)하매 그 일이 야훼의 목전에 악하므로 야훼께서 그도 죽이시니라.

대부분의 성서 주석가들은 “오난”의 이 행위가 본질상 “형제애의 결핍”이요 “형수에 대한 사랑과 의무의 결핍행위”라고 해석하고 이러한 “오난”의 행위가 야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요 형제의 가문을 속량하는 자가 되라는 신의 계명을 어긴 행위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말하려고 하는 더 중요한 점은 다음 이야기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엘”과 “오난”, 이 두 아들의 연속적인 요절의 죽음, 그 죽음의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데 대한 이 가문의 어른인 유다의 판단이 얼마나 잘못된 판단이었느냐 하는 것을 보여 주는 데서 나타나고 있다. 창세기 38장 11절은 그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자,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셋째 아들 셀라가 어른이 되어 너의 남편이 되어 줄 수 있을 때까지 너는 친정으로 돌아가 수절하며 기다려다오.” 그러나, 실상 이렇게 말한 유다의 속마음은 막내아들 셀라마저 그의 형들처럼 죽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었다. 마침내 다말은 친정으로 쫓겨나 살게 되었다.>

이 기록이 말하려는 바는 매우 분명하다. 즉 그것은 유다의 두 아들, “엘”과 “오난”이 그렇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씨[後嗣]도 못 남기고 요절(夭折)한 그 결정적인 원인은 며느리로 들어 온 저 이방 여인 “다말”이 운수불길(不吉)한 여인이라서 그렇게 된 것이나 아닌가 하고 유다가 생각했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다 가문에 들어 온 저 이방 여인 “다말”에게 그 무슨 살(煞)이 끼어 있어서, 나의 두 아들이 이유 없이 죽은 것이나 아닌가 하는 참으로 “우둔한 생각”을 유다가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성서는 매우 분명한 어조로 저 두 아들의 죽음은 전적으로 “그들이 야훼 하나님의 눈에 거슬리는,<형제사랑에 인색한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창 38장 7절과 10절에서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뚜렷하게 천명(闡明)해 둔 바가 있었다. 문제는, 사실이 이러함에도, 족장 유다는 자기의 두 아들의 죽음을 전적으로 이 이방인 며느리 다말의 ‘살-기’(煞-氣) 때문인 줄로만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유다의 관념은 고루한 한국의 전통 속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관념이라고 생각된다. 한 가정의 불행을 사람들은 흔히 자기 집에 시집 온 며느리가 그 무슨 재앙을 불러들인 ‘살-기(煞-氣)’ 때문인 것처럼 생각하여 며느리를 마치 ‘마녀사냥’하듯 다루는 그런 잘못된 관행(慣行)이 과거에는 없잖아 있었다. 이와 같이 유다도 자기의 두 아들이 요절(夭折)하는 원인이 그 무슨 며느리 “다말” 때문인 줄로만 잘못 알고 부당하게 며느리를 친정으로 내어 쫓아 버렸던 것이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어느 날 시아버지 유다는 양털을 깎기 위하여 공교롭게도 며느리가 쫓겨나 묵고 있는 친정에서 그리 멀지 않은 “딤나”라는 마을로 올라가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바,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다말”의 막내 시동생 “셀라”가 이젠 다 장성하여 성인(成人)이 되어 형수인 다말을 아내로 맞아 남편의 가문을 이을 후사를 낳아 줄 수 있을 만한 나이가 다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시아버지는 마지막 남은 그 막내아들마저도 혹시 운수 나쁜 이 며느리에게 남편으로 내어 주었다가 비명에 죽게 되는 불운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되어, 비록 그 아들이 다 장성 했음에도 불구하고, 친정으로 보낸 며느리를 불러 올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레비리트 관습법”(levirate law)이 여기 이스라엘에서는 좀 변형된 모습을 갖고 있었다. 즉 우리의 본문 창세기 38장이나 룻기가 공통으로 말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대”(代)가 끊길 위기를 극복해 줄 속량 자인 그 “꼬엘”이 꼭 시동생에게만 국한되어 있지는 않았다. 룻기의 경우는 시아버지의 친척도 상속자를 낳아 줄 의무를 맡을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오늘 읽은 본문 창세기 38장도 시동생이 아닌 시아버지가 속량자 “꼬엘”의 의무를 맡을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이스라엘 사회는 어떤 경우에서도 이스라엘의 대(代)가 끊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되며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대(代)가 끊어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선민(選民) 이스라엘을 통한 야훼 하나님의 세계 구원사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인류구원선교(Missio Dei)를 외면하는 수치를 드러내는 행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가문의 맥(脈)을 이어가야 할 책임을 포기하고 그 책임을 남에게 넘겨 주는 자는 그의 신발을 벗기고 그리고는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저 집안은 신 벗긴 집안이다.” 라고 욕을 하라고 까지 법률로 명하여 놓았던 것이다(cf. 신 25:5-10).

그런데, 여기 우리 본문의 유다는 이러한 신(神)의 율법을 교묘히(!) 피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즉 유다는 막내아들이 장성하여 성인이 되었는데도 그 아들을 며느리에게 남편으로 줄 생각은 물론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아버지 자신이라도 나서서 가문의 대를 잇겠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바로 여기서, 이러한 위기 가운데서 이 위기를 정면 돌파하고 나와서, 이스라엘 가문의 대를 이을 이 막중한 과제를 깨우쳐 주는 일을 개시한 자가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대표적 족장인 유다나 그의 아들 셀라가 아니라 非 이스라엘인 여인, 이른 바, 가나안의 이방 여인 며느리 “다말”이었다는 점이다.

마침내, 이방인 며느리 “다말”은 분연히 일어나 과부 옷차림을 벗어 버리고는 그 대신 “너울”(the bridal veil of temple-votary as a symbol of dedication to the Canaanite veiled goddess; 창 38:14,19)을 쓰고 몸을 가린 후, “딤나”로 가는 길가 “에나임” 성문에 앉아 있었다. 이러한 “다말”의 행위는, 고대 가나안의 종교관습에 의하면, 일반적 매음(賣淫)행위가 아니고 가나안의 신전 여인(神殿 女人, 커데샤; temple-votary/sacred-prostitute, 聖娼)이 결혼 전에 자기 신(神)에게 자신의 정조를 먼저 헌정하는 가나안적 종교행위의 형식을 취하였다는 데 그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창 38:21-22). 즉 창녀(harlot)로 오인한(창 38:15) 시아버지의 그 무절제한 음란 행위를 가나안의 종교행위를 빌려 오히려 “레비리트 관습행위”로 전용(轉用)시키고 또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화대[花代]도 요구 않은 오직 단 한 번의 행위, cf. 창 38:18b,20-22)를 감내(堪耐)함으로서 유다 가문을 일으키는 “구원자”(꼬엘)의 일을 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중동사회에서는 신앙심이 두터운 신전 여인(temple-votary)들이 예배드리러 오는 자들과 신인합일(神人合一)의 행위(sex-cultic ecstasy)를 행하는 가나안의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종교의식(sex-cult ritual)의 방식으로 다말은 시아버지와 더불어 “거룩한 종교적 성행위”(sex-cultic rite)를 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고대의 중동 사회에서는 신앙심 두터운 신전(神殿) 여인들이, 어떤 서약을 한 후, 예배드리러 오는 신도들과 더불어 신(神)을 대신하여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제의행위(祭儀行爲)인 육체관계를 함으로서 신과 합일하는 신비한 입신(入神) 경지의 관계에 들어가는 의식(儀式)을 행하는 풍습이 널리 일반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풍습이 비록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매우 신성모독적인 것이었지만, 가나안사람, 다말에게는 자연스러운 종교의식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다말”의 이 행동은 분명 통속적인 의미의 매음행위와는 전혀 다른 가나안적 종교관습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 할 점은, 가나안에서는 일반화된 “신전 여인”으로 분장한 며느리 “다말”을 시아버지인 유다는 단지 통속적인 의미의 “창녀”로만 잘못 이해하였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창녀와의 육체적 결합을 금지해 온 이스라엘의 율법정신에서 본다면, 이러한 일련의 행위가 유다에게는 자기가 믿는 하나님 야훼에 대한 불충성의 범법행위였는데 반하여, 며느리 “다말”, 즉 가나안 여인 “다말”에게 있어서는 그 행위란 그녀가 신앙하는 신(神)에 대한 충절의 종교행위였다는 점이다. 즉 며느리 “다말”은 의(義)를 하였고 시아버지 유다는 간음 금지법 위반이라는 불의(不義)를 행하였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며느리 다말의 이 행위란 어디까지나 유다 가문의 대를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이 막중하고도 절대적으로 중요한 의무를 지키지 않고 있는 시아버지를 오히려 가나안의 이방인 며느리가 죽음을 무릅쓰고!! 깨우쳐 주는 일을 한 위대한 속량적(贖良的, ‘까알’의) 행위였다는 그 점이다. 즉 “다말”의 이 행위는 결단코 젊은 과부가 겪는 그 어떤 육체적 갈등 때문에 비롯된 그런 그 어떤 범법행위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지!! 자기가 몸담고 있는 가문이 “신 벗긴 집안”이라는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이른 바, 유다 가문의 구원을 위한 위대한 속량적인(까알) 구원행위였다는 점이다.

“다말”의 이 행위가 그와 같이 근본적으로 하나의 구원행위였고 결코 창녀 짓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녀가 행한 다음의 조치들이 그것을 잘 입증해 주고 있었다. 즉 “다말”은 자신의 정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그의 시아버지에게 몸값으로 받을 돈의 담보물로서, 전혀 돈값[花代]이 되지 않는, 시아버지의 목에 걸린 ①인장과 손에 잡고 있는 ②지팡이만을 요구하였다는 사실이었다. 돈이 목적이 아닌 창녀행위가 어디 있겠는가?!

또 “다말”의 이 행위는 단 한번만!! 진행되었을 뿐 결코 그런 일이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었다고 우리의 본문은 18b, 21b와 26절에서 아주 단단히 못 박아 두고 있다는 점에서도 나타난다고 하겠다. 분명코 “다말”의 이 행위는 전혀 육정의 고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단지 죽은 남편의 가문을 건지려는 가문 구출행위였을 뿐, 오히려,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결단을 하고 민족구원을 위한 희생을 단행하였던 “에스더”의 행위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영웅적 구국행위(救國行爲)였던 것이 분명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석 달이 지났다. “다말”은 이 일로 인하여, 신(神)도 감동하셨는지, 즉각 임신을 하는 행운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며느리의 임신 소식을 들은 시아버지 유다는, 이와는 정반대로, 며느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즉 셋째 아들 “셀라”가 성인이 되기까지의 그 긴 세월 동안 버림받은 삶을 살아왔었던 그 죽음 같은 슬픔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또 그리고 과부 며느리가 어떤 경로로 임신하게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조사과정도 전혀 거치지 않은 채 또 자신을 해명할 기회 같은 것은 전혀 주지도 않은 채, 즉각 그 며느리에게 화형(火刑)을 집행할 것을 명령하였던 것이다. 간음한 여인에 대한 형벌은 통상적으로는 “돌로 치는 것”이 최고의 형벌이지만, 유다는 여기서 제사장의 딸이 음행을 범했을 때에나 행하는, 그리고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자기 어머니를 범하는 자에게나 내리는 가장 잔인하고 무거운 형벌인 화형 형벌을 자기 며느리에게 내리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아버지의 불합리하고도 성급한 행동과 비교할 때, 며느리 “다말”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진솔하게 또 그토록 억울하고 수치스러운 상황 속에 있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까지 끝내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형장에 끌려 나가서야 비로소 몸값 담보물을 시아버지에게 내어 보이면서, 자신의 임신은 바로 이 끈 달린 ①인장과 ②지팡이의 주인에 의해서 된 것이라는 것(알리바이)을 밝힌다. 여기에는, 실로, 예언자적 용기뿐만 아니라 한 가문을 살리고 그 가문을 통한 민족과 세계를 살리는 대의(大義)를 위해서라면 여인이 겪을 가장 수치스러운 수모(受侮)의 자리에로 까지도 기꺼이 낮아질 수 있는 그런 지혜와 용기의 지성(知性)이 한꺼번에 눈부시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본다.

마침내, 명백한 증거물인 줄 달린 인장과 지팡이를 본 시아버지는, 즉, 유다 민족 최고의 조상인 유다는 이 순간 결연한 자세로 이 이방인 며느리의 지혜와 용기와 믿음을 찬양하면서, 히브리말로, “차드카 밈멘니!!” “그녀의 義(의)가 나보다 낫구나!!” “그녀는 나보다 옳도다!”라고 선포한다.

놀라운 것은 이 이야기의 절정(絶頂)이라고 볼 수 있는 대목에서, 유다민족의 대표적 족장인 유다는 “의(義, 체다카 tsedaqah)”라는 말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의”(義)라는 개념과는 전혀 다른 “의”(義)의 개념을 우리는 여기서 보고 있는 것이다. 즉 여기서는 한 여인의 “개인윤리”라는 좁은 도덕개념의 차원에서 “의”의 문제를 보지 않고 한 가문의 흥망과 한 민족의 구원(cf. 안중근, 윤봉길의 행위 참조)이라는 “공동체 윤리”의 차원에서 “의”의 문제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의 한 성서해석가인 델리취(Delitzsch)라는 학자는 이 “다말”을 가리켜 “구약성서의 기준에 따르면 그 녀는 분명 聖者(성자)였다”라고 주장하였다. 유다 민족의 대표적인 족장인 유다도 여기서 이방여인인 그의 며느리 “다말”을 “의롭다”라고 칭송하였던 것이다: <그 애가 나보다 의롭구나! 며늘아기가 시아비인 나보다 의롭구나! 왜냐하면, 나는 내 막내아들을 그 애에게 남편으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26a,b절)

그렇다. 그녀는 유다보다 의로웠다. 며느리가 시아버지보다 의로웠던 것이다. 저 이방여인의 행위가 이스라엘 선조 유다보다 더 의로웠던 것이다. 쓰러져가는 한 가문, 대(代)기 끊길 위기에 있는 남편의 가문, 그 가문을 일으키기 위하여 살신성인, 자신을 버려 스스로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자리로까지 내려갔던 한 여인, “다말”이라는 이 한 여인을 우리는 여기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태복음 기자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사라”나 “리브가” 그리고 “라헬”과 같은 이스라엘의 기라성 같은 대표적 선조 어머니들의 이름은 제쳐 놓고, 그 대신, 이 이방 여인 “다말”을 메시아의 족보 속에 당당히 적어 넣어서 그녀를 인류를 위한 대속적인 고난을 자취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조임을 부각시켰던 것이다(마 1:7). 이렇게 하여 “다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고난의 의미를 아주 오래 전부터 온 인류에게 예시해 준 구약의 위대한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다말 송덕문을 하나 지어 바치려 한다.

여자는 죽어지내야 하고 그리고 한 가문의 불운에 대한 모든 책임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오직 여자가 져야 한다는 따위의 인습적 편견을 타파하고 한 가정과 한 가문에서 그리고 한 공동체에서 아내가 지켜야 할 그 본연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하여 감히 과부의 의상을 벗어 던지고 신전여인으로 분장하여 기우는 가문의 불운에 속수무책 방관하는 우유부단한 시아버지를 혹독히 채찍질하였던 여권운동의 선구자, 저 여인, 유다의 며느리 “다말”을 칭송할지어다.

나만 잘 살면 그만이다 하여 이웃과 사회는 어찌되었건 오직 자기 이익추구에만 혈안이 된 이 참혹한 인간세계를 향하여 대아를 위하여서는 소아는 희생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선이요 의라는 것을 증언한 “장차 올 그리스도의 예표,” 저 가나안 이방 여인 “다말”의 슬기로운 믿음을 칭송할지어다.

힘이 곧 정의요 선이라고 믿는, 이른 바, 잘못된 힘의 이데올로기에 노예가 된 인간사회를 향하여는 물리적 힘이 의가 아니라 희생적 사랑으로 이웃을 살리는 사랑과 자비만이 가장 최선의 진리라는 것을 가르치고 계몽해 준 인류의 스승, 저 유다의 며느리 “다말”을 칭송할지어다.

비록 졸문이지만, 이러한 “다말” 송덕문을 하나 지어 “다말”에게 바침으로 나는 감히 수십 세기 인류사를 잘못된 남성지배 이데올로기와 힘의 논리로 병들게 만든 남성중심 문화의 그 잘못과 죄를 조금이나마 속죄해 보고 이를 통하여 비록 불완전하나마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고난의 의미를 좀 새로운 시각에서 되새겨 본다. 실로, 이 여인의 이 아름다움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수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바르게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물론, “다말”의 대속적인 수난은 감히 그리스도의 수난과 동등시할 수는 없는 하나의 대속적인 수난의 “그림자 교훈”에 불과하다. 하나의 몽학선생일 따름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기자는 기라성 같은 이스라엘의 대표적 여성들인 사라, 리브가, 라헬과 같은 위대한 선조 어머니들은 제쳐 놓고 이 이방인 여인 “다말”을 구세주 예수님의 족보에 감히 넣어서 이 “다말”을 메시아의 빛나는 선조로 부각시키는 그 신학적 용기를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지닌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마태복음은 매우 특이한 방법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의(義)는 유다의 의보다 나았던 것이다. 물론, 다말의 이 행위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모방하는 것이 우리 본문의 의도는 결단코 아니다. 단지,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를 관념적으로만 이해하고 감상적으로만 흉내 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정신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교훈하는 말일 뿐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 12: 24; 고전 15:36)라고 하신 바와 같이 자신이 죽어서 자신도 살리고 이웃도 살리는 이 대속(代贖) 정신이 우리의 삶 속에 실제로 생활화되지 않으면 결코 우리는 예수의 제자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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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과 영성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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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해 창조 신앙 무력화돼"

창조 신앙을 고백하는 한국교회가 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신앙이 사사화 되면서 연대 책임을 물어오는 기후 위기라는 시대적 현실 앞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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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묵상(2): 기독교를 능력 종교로 만들려는 번영복음

"기독교는 도덕 종교, 윤리 종교도 아니지만 능력 종교도 아님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실존적 현실이 때때로 젖과 꿀이 흐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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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니체의 시각에서 본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무신론자", "반기독자"(Antichrist)로 알려진 니체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유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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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무종교인들의 증가는 기성 종교에 또 다른 도전"

최근에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무종교인의 성격을 규명하는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정재영 박사(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종교와 사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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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섭리 숨어있는 『반지의 제왕』, 현대의 종교적 현실과 닮아"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의 섭리와 『반지의 제왕』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숭실대 권연경 교수(성서학)는 「신학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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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 탈존적 주체,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 주체

이관표 박사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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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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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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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