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아카이브

[김경재] 우리시대 그리스도인의 성찰과 사명

오방정신에서 본 한국 개신교의 자기성찰과 시대적 과제

광주YMCA 제2기 오방학교 , 2012년 11월9일

[1] 들어가는 말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강연자에게 주어진 숙제는 ‘우리시대 그리스도인의 성찰과 사명’이다. 여기에서 우리시대라 함은 해방이후 현재까지 이지만 특히 1960년대 이후 2012년 년말까지 약 50년동안 한국 현대사의 시대적 기간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성찰과 사명’이라함은  한국개신교의 발자취와 오늘의 현황을 자기성찰의  과점에서 비판, 회개, 개혁의 가능성을 언급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비판적 성찰과 과제인식을 어떤 입장에서, 혹은 어떤 관점에서 할 것인가 질문 한다면, 신학적 진보와 보수입장을 떠나, 오방 최흥종목사의 기독교신앙의 자세가 암호처럼 집약된 그의 아호 ‘오방’의 정신에서  말하려고 한다.
 
첫째마당은 ‘오방’의 아호 속에 깃들어있는 최흥종목사의 기독교적 영성의 알짬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둘째, 지난 50년동안 양적으로 급진적 성장을 이룩했다는 한국 개신교가 왜 오늘날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신뢰를 잃고 걱정거리로 전락하게 되었는지  ‘오방정신’의 빛으로 검진하려고 한다. 셋째, 크게는 인류문명이 크게 털갈이하는 문명 전환기화기 이기도하고,  한국 사회는 당장 12월19일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한국 개신교의  과제가 무엇인가 성찰하려는 것이다.

[2] ‘五放’의 아호(雅號) 속에 깃들어 있는 최흥종의 기독교적 영성의 알짬

최흥종 목사(1880-1966)의 생애를 전후반기로 대별 할수 있는 1935년은 그가 광주 YMCA회장직 사임, ‘사망통지서 ’발송, 거세수술, 그리고 ‘五放’이라는 아호를 쓰기 시작한 해이기 때문에 ‘五放’은 단순히 ‘아호’임을  넘어서 특히 그의 신앙을 이해하는 ‘암호’ 같은 것이라고 본다.
 
‘五放’이라는 호는 동양문화에서 흔히 이름대신 부르는 ‘아호’로서의 일상적 의미보다 더 진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1935년은 최흥종의 년령도 50대 중반을 지나는 때이며, 그동안 겪은 인생경험, 사회정치경험, 종교계 경험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후이며, 그야말로 그의 생에에서 ‘삶의 전회’가 이루어진 사건의 표징이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五放’ 이라는 호가 의미하는 올바르고도 심원한 이해를 충분히 했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아마 가정 원만한 해설로서 명노근교수의 해설을  큰 반론없이, 그리고  부담없이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자의 지팡이』를 쓴 문순태교수도  최흥종목사가 자식처럼 사랑했다는 이영생님의 ‘오방’ 해설을 소개했는데 그 내용도 명노근님의 해설과 큰 차이없이 같다.
 
“뜻한바 있어서 거세수술을 하고난 뒤 스스로 ‘오방’이라는 호를 지어 부르면서 자기의 뜻을 펼치기 위해  혈육의 정에 얽메이지 않고(家事에 放漫), 사회적으로 구속을 받지 않으며(社會에 放逸), 경제적으로 속박받지 않고(經濟에 放棄), 정치적으로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며(政治에 放棄), 종파를 초월하여 정한 곳 없이 하나님 안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宗敎에 放浪)는 의미를 거기에 부여하고, 그것을 생활신조삼아 시종여일하게 살아온 자취에서 만도 그분의 사람됨됨이 어떠했던 가를 우리는 쉽게 엿볼 수 있다.”

우리는 명노근 ․ 문순태 교수가 해석하는 ‘五放’이라는 아호의 의미해설에 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오방’이라는 아호가 가정생활 무시와 혈연부정, 사회생활에서의 무규범주의적 자유방임 혹은 아나키스트적 사상,  경제적 물질가치의 죄악시, 역사도피적인 정치 무관심주의, 복음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종교혼합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지해야 한다. 오방선생 자신이 자기 호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을 한적 없지만, 그가 남긴 중요한 유고들, 예들면 「愛的 轉融性」글이나 「山上寶訓 天國論 槪念」을 보면 ‘오방 영성’의 속살을 감지 할 수 있다.  ‘오방’의  의미를  좀 더 천착(穿鑿) 해보면 다음 같은 정신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① 家事에 放漫
  
‘방만’(放漫) 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하는 일이나 생각이 야무지지 못하고 엉성함”이라고 규정되어있다. ‘가사’(家事)라는 단어는 “집안 살림에 관한 일, 혹은 한 집안의 내부의 일”을 의미한다. 그 단어 속에는 가족혈연관계, 가족에 대한 애착, 가문의 영광과 명예증진,  가족식구의 의식주 걱정, 그리고 가정을 시작하는데 필수적인  부부간의 생리적 본능 욕구등을 모두 내포한다. ‘방만’(放漫)이라는 어휘가 긍정적 어감보다는 부정적 어감 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 직계 자손들이 ‘가족이나 가정살림에 무관심하고 무책임한듯한 삶을 살으신 목사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오래 가진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가사에 방일’이 의미하는 바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예수 공생에 시작무렵 혈연관계의 가족이 예수를 찾아왔을 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 가장 바른 이해의 첩경이라고 생각된다.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니라”(마12:48-50)

최흥종이 극복하려는 것은 아름다운 형제우애, 효심, 자식에 대한 애정, 가정의 중요성이 아니다.  혈육적 생존및 확장본능이 기초가 되어 사람의 영적자유를 ‘혈연적 가족주의’에 집착하도록 유폐시키는 ‘자기애의 확대 욕망’로부터 해방하여 자유로운 존재가 되려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과 하나님에 뜻에 순명하기 위해서 혈연적 인간관계와 비혈연적 인간관계사이의 차등을 철폐한 ‘同體大悲心’과 ‘아가페적 사랑’의 필수불가결한 요청이었다.
 
문둥병자와 걸인들과  배우지 못한 바닥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값싼 동정이나 시혜가 아니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신적 계명에 순명하기 위해서는  넘어서지 않으면 않되었던 첫 번째 실존적 초월이 바로 ‘家事에 放漫’이었다.  ‘방만’(放漫) 이란 뉴앙스는 무책임이거나 무관심이거나 함부로 대함이 아니라 ‘내 가족이라고, 내 새끼라고 먼저 야무지게 잇속을 챙기지 못하는 어리숙함’이라고 봄이 더 타당하다.    
 
‘家事에 放漫’은 현대사회에서 말한다면 집단 이기주의에서의 해방을 말한다. 현대사회에서의 ‘가’(家)는 혈연지연 집단이기주의, 재벌기업 중심주의, 개교회 이기주의, 정파주의등등으로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② 社會에 放逸

‘방일’(放逸)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행동이나 생활태도 따위가 제멋대로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사회에 방일’이란 부정적 평가개념이 스며들어 있는데, 사회공동체 구성원들이 보기엔  점잖고 교양적이고 표준적이라고 인정하는 행동이나 생활태도에서 일탈하는 뉴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1960년대 영미사회에서 ‘반문화운동’(Counter Culture Movement)이 한창 일때, 청바지 통기타를 둘러매고 젊은 세대들이 기성문화의 허위의식에 저항하는 것도 일종의 ‘사회에 방일’이다.

그러나, 오방 최흥종 목사에게서 ‘社會에 放逸’이란 사회집단에서 기대하는 명예심, 공명심, 존경심, 칭찬이나 비방등에서 일체 초연(超然)하고 초탈(超脫)하겠다는 것을 스스로 다짐하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최흥종목사같은 지식인이나 종교인들이 특별한 재산이나 권력은 없겠지만, 지식인들에게 끝까지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 것은 ‘명예심’이다. 오늘날 지식사회나 종계의 모든 꼴불견한 추한 싸움들이 ‘명예심’ 싸움에서 온다. 명예는 사회가 요청하는 표준적 규범가치를 구현하고 모범행동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러한 ‘규범가치체계’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식적이거나 이중인격자를 만들기도 하고, 그의 자유로운 인간성을 구속하는 속박끈이 되기도 한다.
 
최흥종 목사는 ‘화광동진’의 삶을 살기위해서는 ‘사회에 방일’하지 않을 수 없다. 점잖고 모범적이고, 고상하고, 교양적이고, 품위를 유지하면서는 경양방죽 거지들과 나환자들과 함께 기거 할수 없다. 고급 일력거나 자가용을 품위에 맞게 타고 다니려면 비용도 많이 들고 ‘화광동진’의 삶을 살수 없다. ‘五放’의 호에서 둘째번 ‘社會에 放逸’은 바울이 말하는바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자’(롬 12:1)가 살게되는 생활모습 곧 “ 즐거워 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사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체 하지 말라”(롬12:15-16)는 성경말씀대로 살려고 했던 최흥종 목사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둘째번 실존적 자기초월이었던 것이다.

③ 經濟에 放縱

‘방종’(放縱)이란 단어의 사전적 이미는 “아무거리낌 없이 함부로 행동함”이다. 다시말하면 “함부로 행동하여 거리낌이 없음”을 의미한다. 사전적 뜻이 그러하기 때문에 ‘경제에 방종’이라는 어구는 돈 궁색함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는 대재벌이나  부자 아들이 경제생활에서 펑펑 낭비하며 방탕한 품행을 드러내는 것을 상상한다. 아니면, 정반대로 하루 벌어서 하루먹고 간신히 살아가는 빈곤층 노동자들이 살림살이에 대한 장단기 계획은 세울수 없기 때문에 버는대로 기분나는 대로  낭비하는  경제적 삶의 모습을 연상하게도 한다.

그러나, 최흥종이 말하는 ‘경제에 방종’은  물질적 형편에 속박받지 않고, 물질적 생산 ․ 소비 ․ 활동을  세속적 일이라고 천시하지도 않고, 다만 경제적 물질생활면에서는 ‘자족하기를 터득했다’는 선언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바울의 편지를 인용하여 말한다면 빌립보서 교인에게 보낸 편지내용을 의미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나는 비천에 처할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④ 政治에 放棄

‘五放’의 의미해석에 있어서 넷째와 다섯째 곧 정치와 종교관련에서의 ‘방’(放)의 의미해석은 좀더 조심해야 하고 심층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표층적으로 이해해버리면 최흥종 목사의 삶 전체와 그의 신앙 전체를 부정하거나 욕되게 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방기’(放棄)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버려두고 돌보지 않음, 내버려둠”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 역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지나 관여 태도 보다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듣는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사실이다.  ‘정치에 방기’라니 그러면 최흥종이 1935년 사망선고의 해 이후부터는, 요즘 용어로 완전한 탈정치, 비정치, 정치무관심, 정치염오를 선언하고  ‘정치’라는 땅 위에서의 세상일에는 더 이상 관심도 미련도 않두고 저 신령계 하늘나라만 생각하겠다는 영지주의적 타계주의자가 되겠다는 말인가?
 
‘政治에 放棄’를 말하는 최흥종목사가 땅 위에서의 정치행위로 말미암아 얻게되는 인간삶의 유한성, 상대성, 죄악성을 절감하고 ‘땅의 도시’를 넘어서는 ‘하늘의 나라, 영원한 나라’를 더 많이 더 절실히 절감했다는 점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1964년에 쓴 ‘유언장’에 다음같은 구절을 생각해보면 그점을 알수 있다.

나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十字架道)를 신앙 함으로 현재를 영원한 미래로 접속(接續)하는 진리를 확실히 철저히 깨닫고, 나는 최후 시각을 대기중이므로 여차(如此)히 유언을 쓰노라. 나의 믿는 바는 사일(死日)이 곧 생일(生日)이다. 현재를 영원한 미래로 연결되는 참 생일이란 말이다.

위의 문장에서 주목해야할 구절은 최흥종신앙의 천국관과 영생관에서 “현재를 영원한 미래로 접속(接續)하는 진리를 확실히 철저히 깨닫고”라는 구절이다. 그의 천국적 영생의 삶은  지상적 현재의 삶을 폐기처분하고, 죽은다음 ‘영혼의 중간시기’를 종말심판때까지 기다리다가, 144,000명 구원받는 자의 숫자가 다 차면 부활한다는 ‘정통신학의 영생관’이 아니다. 그의 영생관은 죽음 직후에, 홀연히 변화되는 은총의 힘으로, ‘현재’가 ‘영원’으로 ‘불연속적인 연속성’ 안에서 승화되고 영화되면서 일종의 ‘존재방식의 형태변화’를 입을 것이라는 확신을 말하고 있다.

“현재를 영원한 미래로 접속(接續)하는 진리”라고 말하는 최흥종의 영생관에서 볼 때 ‘정치에 방기’는 결코 현세부정이 될 수 없고 현세에 결정적 영행을 끼치는 정치에 무관심, 정치염오, 정치부정, 정치초월 같은 덜익은 종교인들의 상투적 ‘정교분리론’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政治에 放棄’를 하겠다는 뜻은 이 땅위에서 정치적 행위와 그로 말미암은 정치적 리상왕국 실현은 불가능하다는 철저한 깨달음과 정치행위에 따르는 권력투쟁, 지배욕망, 영웅주의, 교만심, 질투심을 가지고서는 안된다는 확신이다. 최흥종의 ‘정치에 방기’를 바르게 이해는데는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와 빌라도와의 짧은 대화 속에 그 비밀이 숨겨있다고 보아야 한다(마27:11-14, 막15:1-5, 눅23:1-5, 요18:28-38).   
 
대화의 핵심은 빌라도가 예수에게  묻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것이다. 예수의 대답은 “네 말이 옳다. 내가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이 여러가지로 고발하는 고소내용을 가지고 빌라도가  추가 심문했으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좀 더 추가하여 말하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빌라도가 이르기를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빌라도가 다시 묻기를 “진리가 무엇이냐?”
 
위의 복음서 내용을 바르게 이해함이 최흥종의 ‘정치에 방기’라는 말 뜻을 바르게 이해하는 열쇄가 된다.  예수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네가 왕이냐?”  끈질기게 추궁당한다. 예수는 교활한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대적자들로부터 로마 황제에게 저항하는 ‘정치범’이라고 고발당한 법정에 서서 얼른 생각하면 “나는 왕이 아니다”라고 대답해버리면 될 것을 바보처럼  “내가 왕이다”라고 변함없이 대답한다.  요한복음에만 추가하여 설명하기를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부연 설명한다. 그러자  빌라도는 햇갈려서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라는 말이냐?”라고 다짐하듯이 확실하게 대답하라고 욱박지른다. 예수 대답하기를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다. 내가 이를 위해서 태어났고 세상에 왔다”고 대답했다.
 
위 복음서 증언은 ‘복음’을 탈정치화, 비정치화, 몰정치화 하려는 모든 사이비 기독교 신앙에 “아니!”라고 비판적 쐐기를 박는다. 왜냐하면 예수는 “내가 왕이다. 이를 위해서 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위 복음서 증언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적 정치이념과 동일시하려는 ‘기독교 국가 ․ 문명론’ 혹은 ‘세상도시의 성시화(聖市化)’ 시도에 비판적 쐐기를 박는다. 왜냐하면 예수는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최흥종은 조선왕조 말기 국권상실의 비극이 무엇임을 맛보고 ‘국체보상 기성회 발기’에 앞장선 사람이다. 3.1독립만세 사건에 참여해서 체포구금되어 1년이상 옥살이도 한 사람이다.  볼쉐비키 혁명이 일어난 살벌한 땅에 사회주의 정치현실을 검증하려 함인지 국내 많은 일을 놔두고 두차례나 시베리아를 밟았고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어 40일간 구금도 당했다. 1933년 일제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거나 변절하는 수많은 애국지사와 신앙동지를 보고서 담양 과수원에 은거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최흥종의 삶의 괘적은 그가 하루아침에 ‘정치적 아나키스트’가 되어서 ‘정치에 방기’ 하기로 결단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복음’은 이 땅의 ‘정치 사업’으로 하여금 진정한 정치가 되도록 진리의 빛과 소금과 생명효소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정치행위와 땅위의 정치인 속에 감추어져 있는 생명을 상하게 하는 날카로움(銳), 삶을 번거롭게하는 법망(紛), 뽐냄과 으시댐의 광휘(光), 씨알들(塵) 위에 군림하려는 권위주의를 보았다. 그래서 예수의 삶과 복음은 생래적이고 혈육적인 그러한 본성을 뒤집어서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하신 분으로 보았다. 그것이 성육신 신앙이요, 죄인의 친구요, 죄인을 위해 죽으심이라고 보았다.     최흥종 목사의 인간 속에서 ‘예수의 씨’를 본 백범은 1947년 정치를 넘어선 참 정치를 하려는 최흥종을 알아보고 “和光同塵” 휘호를 존경하는 맘으로 주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최흥종의 ‘政治에 放棄’는 정치 기피자, 정치 아나키스트가 아니고 ‘복음의 생명력’을 ‘화광동진’ 형태를 취함으로써 무릇 정치로 하여금  생명을 살리는 정치 곧 ‘생명, 평화, 정의’의 정치가 되도록  ‘누룩’이 된다는 뜻이다.  

⑤宗敎에 放浪

‘오방’에서 마지막 다섯 번째 ‘宗敎에 放浪’도 오해하기 쉽거나, 우리들의 영성 성숙도가 아직 어린 상태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러나, 최흥종의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참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르게 이해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放浪’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정처없이 이곳 저곳 떠돌아 다님” 이다. 이 어휘 역시 매우 부정적 선입견을 가져다 주기에 알맞은 단어이다. 더욱이 종교인 이라면  자신이 귀의한 신앙이나 교리체계에 확고부동한 태도를 가지고, 초지일관하는 신념을 보여야 마땅할 터인데 ‘종교에 방랑’이라니 오해하기 마련이다. 혹자는 1930년대 일제말기에 수많은 종교인들과 지식인들의 지조변절을 목도하고 ‘종교 그 자체’에 회의를 가진것이란 오해가 가능하다. 혹자는 신비주의 신앙체험자나 동양종교사상에 접하여 소위 ‘종교다원론자’가 된 것 아닌가 하는 오해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오해는 ‘宗敎에 放浪’이라는 뜻에 전혀 상관이 없다. 여기에서 ‘방랑’이라는 단어는 ‘방랑자’가 어느 한곳에 고정적으로 정착하지 않고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는 자이듯이, 은유적으로 ‘종교에 방랑’이란  종교의 교리체계,  교권조직, 신경(信經)등에 예속되지 않고 ‘영과 진리 안에서 자유와 은혜’를 누리며 추구한다는 말이다.
 
최흥종 목사의 신앙경력엔 세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최흥종의 기독교 신앙 입문의 과정에서 기독교 교리나 경전을 지식적으로 받아 동의하여된 것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삶, 인격, 아가페적 사랑’에 부딪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라는 점이다. 벨(Eugene Bell), 윌슨(Robert M. Wilson), 오웬(William L. Owen), 포사이드(Wiley H. Forsythe), 쉐핑(Elizabeth Schepping) 같이 ‘예수를 닮고’ ‘예수 삶을 사는이’를 통해서 기독교가 무엇임을 깨달은 사람이다.  둘째, 그는 평양신학교를 나와  장로교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교단적 조직에 가담하고 중책을 맡기도 했으나. 1920-30년대를 풍미하였던 평양신학교의 ‘근본주의 신학교리’를 강조하면서 선전하는 일이 없다는 점이다. 셋째, 그는 ‘기독자의 신앙’은 곧 ‘기독자의 삶’이라고 생각했기에 남은 여생을 ‘신학교육’에 종사하지 않고 구라사업, 광주의학전문학교 설립, 농촌운동 삼애학원, 사회사업등에 생을 불태웠다는 점이다.
 
매우 놀랍게도   그의 남긴 유고 「애적 전융성」, 「산상보훈 천국론개념」, 그리고 「유언장」내용중에는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교권주의자들이 비판하고 정죄할 래디칼한 발언들이 많은데, 그런 발언들 속에서 그의 ‘종교에 방랑’ 의미를 해석할 단초를 얻을 수 있다. “남을 사랑하되 알 수 없는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곧 사랑이요, 남을 사랑하여 눈 앞에      새로운 삶을 이룩하도록 하는 사람이 곧 종교다.” 

“지상의 교회는 천국의 교회가 아니므로 청결히 하여 좋은 선을 행함으로 가히 천국국민이 된다. 깨끗한 정신생활과 개척 종교사업의 두가지가 같지 않은즉, 천국과 교회는 다시 관계가 없다고 가히 말하여 모든 권한의 시행이 천국이 아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혹 직분이 있다고 목사나 전도사나 장로나 집사라 하는 명칭으로 신자라고 자칭 할 수 없고, 예수와 연합한 자라야만(마7:22-23) 구원을 얻는 것이다.”
                 
종합해보면, 최흥종은 기독교신앙의 자기정체성을 혼잡하게 않고 순전하게 보존하고 지켜야 할 것이지만,  역사적 종교단체로서의 ‘그리스도교’나 ‘교회’나 ‘교단총회’가 곧 천국, 그리스도주권, 복음, 하나님을 대행하는 ‘궁극적 인 것’이 아니라고 확철한다. 최흥종은 알프레드 스미스 교수가 구별하려고 했던 것처럼  ‘축적된 전통으로서 종교’(religion as cumulative tradition)와 참 종교인의 마음 혹은 생명 속에 ‘살아숨쉬는 신앙’(living faith)을 구별하려는 것이다.  함석헌의 표현으로 말하면 “종교란 진리보석을 보관하고 있는 궁궐같은 것이 아니라 봄마다 새 순을 내는 거목같은 것이다”.                
 
최흥종의 ‘종교에 방랑’이란 말은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완결된 교리체계나 교권체계나 ‘축적된 전통’으로 보지 않고 거듭 거듭 ‘영과 진리 안에서’ 새롭게 재해석하고 실천을 통한 “삶 한 복판에서의 초월경험”으로 체험해 가겠다는 말이다. 그의 하나님 체험과 복음진리의 묘미는 그래서 늘 새로움과 경이로움과 감사함으로 넘치게 된다.  요즘 진보 신학계가 말하는 신학적 전문담론으로서의 ‘종교다원론’과는 통하는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노장철학등 세계종교철학사 속에서 출현한 진리담론에 개방적이며 배우려는 자세에서는 통하고, 그리스도교 예수복음 안에서만  ‘궁극적 완성과 성취’를 본다는 점에서는 다른 입장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五放’이라는 그의 아호를 심층적으로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이제 ‘오방정신’ 혹은 ‘오방의 영성’에서 본 오늘의 한국 기독교의 문제는 무엇이며 그 과제는 무엇인가 성찰해볼 준비가 되었다.

[3] 오늘의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자기성찰

『논어』에 “근본이 바로서면 길이 생긴다”(本立而道生)는 말이 있다. “의사 병진단이 바로 내려지면 환자낫기는 반이상 이룬 셈이다”는 노인정에 모인 늙은이들의 경험담도 있다. 문제는 중병에 든 환자가  자기는 건강하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병진단을 잘못내리면 치료도 어렵고 환자만 고생한다. 근본문제를 바로 잡으려 않고 지엽적 문제만 들먹이면 해결될 살길이 생기지 않고 결국 망하게 된다. 오늘의 한국기독교 근본문제를 ‘오방의 정신’에서 성찰하면 다음과 같이 치명적인 ‘5가지 대죄’로 압축된다.

① ‘가사방만’ 정신에서 본 우리시대  한국 기독교의 ‘公敎會 私有化 罪’

사도신경에는 “거룩한 공회를 믿습니다”라는 고백구절이 들어있다. ‘거룩한 공회’란 교회를 교회답게하는 4가지 필수적인 자기정체성 곧 “교회는 하나요(Una), 거룩하고(Sancta), 보편적이며(Catholica), 사도적이다(Apostolica)”는 것이다.
 
오방정신의 첫 번째인 ‘가사에 방만’이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믿는자 답게, 더욱기 목사로서 목사답게 살기위하여 ‘家事’로 상징되는  일체의 혈연적, 혈육적, 사사적(私事的), 자아확장의 죄에서 해방되어 정결하고 공공성에 투철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겠다는 정신이다.   그런 정신을 확철할때만  목사라는 성직자로서, 교회를 섬기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교회의 하나됨, 거룩함, 보편성, 사도성을 바르게 지켜갈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 기독교 첫 번째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公敎會 私有化 大罪’인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성직세습, 성직매매, 개교회중심주의, 개교단 중심주의로 나타난다. 벼라별 명분을 갖다대면서 중대형교회의 담임목사직을 혈연적 관계자에게 넘겨주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중세기도 아닌데 ‘성직매매’(simonism) 관행이 21세기 광명천지에 있을 가 하는 순진한 교인들이나 사회통념에 반하여 부끄럽게도 은밀하고 직간접적으로 전임과 후임의 담임목사 교체과정, 교회안에서 봉사직분자 임직과정, 교단조직체의 교단장 선임과정에서 각종 명분과 감사헌금 형태로 실상이 은폐되면서 자행되고 있다.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죄’(막11:17)를 범하고 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요,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임을 믿습니다”라는 오랜 교회론의 본질은 적어도 한국 개신교에서는 무너진지 오래다. 개교회 중심주의와  개별교회중심주의가 신성로마제국 영토안에 서로 경쟁하면서 존립하던 지방 영주의 소왕국들 처럼 ‘작은 종교왕국’을 세워놓고 그 안에서 왕노릇한다. 보편적 우주적 교회의식도 없고, 진정한 민족평화통일 염려나 인류문명에대한  비젼도 없다. 한국기독교의 대형교회들은 ‘야누스적’인 양면얼굴을 지닌다. 그 대형교회들은 오늘의 한국 기독교 위세를 사회와 세계에 과시하는 실세이면서도 매우 역설적이게도 초창기 한국 기독교 선구자들이 이뤄놓은 ‘위대한 신앙유산들’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한국 기독교의 변질을 가속화시키는 ‘도둑의 소굴’이 되고 있다.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이나 자기희생적인 순수한 ‘아가페사랑’을 느낄 수 없다. 한국사회는 우리시대 한국개신교를 ‘집단적 이기심에 사로잡힌 특정종교 집단’으로 평가 할 뿐이다. 

② ‘사회방일’ 정신에서 본 우리시대 한국 기독교의 ‘거듭남 없는 명예욕 탐익 대죄’

오방정신에서 ‘사회에 방일’정신은 결국 일체의 사회적 관계에서 양반체면, 자기위장, 품위유지, 명예직 연연,   ‘노블레스 오블리쥬’(no․blesse o․blige) 수행 따위를  다 버리고 초연(超然)하고 초탈(超脫)한 삶의 태도를 말한다.  순수 씨알로서 살겠다는 진정한 출가자  삶의 태도에로 복귀를 말한다.  그렇게 된 사람의 자연스런 삶의 모습이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삶이다.
 
‘사회에 방일’이라는 오방의 영성에서 보면, 우리시대 한국 기독교의 둘째번 대죄는 ‘거듭남 없는 명예욕 탐익대죄’에 빠져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왜 경건의 모양새는 있는데 경건의 능력은 없는가? 우리시대 한국 기독교 성직자라 칭하는 사람들에게서 ‘出家者정신’을 찾아보기 어렵고,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신도들 중에서 ‘거듭남(重生) 체험정신’이 살아져버렸기 때문이다.
 
기독교란 어떤 종교인가? 라고 묻는다면 간단하게 두가지로 대답할 수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 없다”(요3:3-5)고 주장하는 종교이고, 그 ‘중생체험’을 한 사람에게는 세계관의 가치전도가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큰자가 섬기는자 되고, 으뜸되는 자가 꼴찌의 종이 되는 종교”이다라는 것이다.  최흥종이 만났던 광주지역의 초기 선교사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출가정신(出家精神)은 유독 삭발하고 세속 인연끊고 불교에 귀의하려는  불자(佛子)에게만 해당되는 정신이 아니다. 무릇 모든 참 종교안에는 출가정신이 핵심이다. 종교학적으로는 ‘통과의례’(通過儀禮)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용어로 말하면 사도바울의 고백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갈2:20)라는 구절에서 정형화 되고 있다.
 
그런데 근본문제가 무엇인가? 우리시대 기독교인들이 종교생활 한다는 신앙인으로서 ‘통과의례’가 없고 너무 쉽게 세례의식이 남발되어 ‘짝퉁 기독교인’을 양산해 냈다는 점이다. 더욱 심각한 근본문제는 적어도 목사나 장로직 신분으로 교회를 섬긴다는 지도자들에게 출가자 정신도 없고, 중생경험도 없고, 경건을 위장하면서서  끈질긴 명예욕과 자기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경건한 무신론자들’이 되어간다는 점이다. 문화관광부에 종교단체나 사단법인체라고 등록된 ‘대한 예수교장로회 **’라는 명칭교단이 수십개에 달하고, 소위 ‘한국기독교총연맹’에 가입되어있는 단체들이 수십개에 달하는데, 그 교파분열과 교권투쟁의 중심엔 ‘명예욕’이라는  블랙홀이 있고, 예수 복음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높은자가 섬김 받겠다’는 반기독교적인, 아니 실질적 적그리스도적인 경건을 가장한 무신론자들이 득실거리기 때문이다. 

③ ‘경제방종’(經濟放縱) 정신에서 본 우리시대 기독교의 ‘맘몬숭배, 성장신화 숭배대죄’

오방정신에서 ‘경제에 방종’이란 한마디로 인간이란 정신과 육체의 통전존재이지만, 육체가 요구하는 물질성․ 오감충족 ․ 계량화 법칙에 끌려 다니지 말고, 정신성 ․ 자기초월성 ․ 주체적 사유능력이 주도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물질, 육체, 경제, 돈이 본질적으로 악이거나 죄라고 보는 마니교적 종교가 아닌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떡”이 필요함을 인정하지만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마4:4)임을 철저히 믿고 그렇게 사는 것을 말한다.  최흥종은 나병환자 돌봄, 결핵환자 치료병원신설, 거지들의 의식주 문제 해결, 한민족의 빈곤문제를 풀기 위해서 ‘경제’문제, 다른 말로 ‘황금’(돈)이 얼마나 필수불가결한 요소인가를 뼈저리게 경험한 지도자이다.
 
경제문제의 중요성을 부인하거나 너무 쉽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은 진정한 종교인이 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물질과 돈과 맘몬의 위력을 견디지 못하여 아예 그것과의 투쟁을 포기하는 나약한 기권자 인 것이다. 예수의 광야시험의 제일 의제가 될만큼 경제위력은 막강하고, 위력적이고, 매혹적이며, 가히 하나님말씀과 대결을 요청할만큼  마성적인 것이다. 장공 김재준목사의 ‘교역론’ 강의에서 목사가 여자문제, 돈문제, 명예욕 문제에서 해방되면 목사노릇 가능하고 그 유혹에 패배하면 목사직을 수행못한다고 경고하셨던 말씀이 진실임을 실감한다.
 
우리시대 한국 기독교의 대죄중에서 후세에도 길이 길이 지적될 문제가 “1960년대 이후 반세기동안 한국 기독교는 치열하게 복음전도하고, 치열하게 교회성장 시켰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맘몬숭배자가 되고  무한경쟁과 성장신화의 충실한 추종자가 되버린 대죄를 범했다”고 훗날 교회사가는 틀림없이 기록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변명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교회는 깨끗하고 일부 타락한 교회만 그렇다고 자기변호해서는 않된다. 우리시대 한국 기독교는 출애굽시절 아론과 그 백성처럼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춤추고 노래하며 ‘하나님의 거룩’을 더럽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 기독교만이 아니라 세계지구촌 문명전체가 ‘황금숭배 문명시대’에로 퇴보 전락한 패역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시대 기독교의 대죄가 ‘맘몬숭배요 무한경쟁 성장신화 추종죄’라 함은 공공연한 것이되었다. 근대철학의 기본패러다임을 놓은 르네 데까르트의 ‘정신/물질 이원론’에 의하면  ‘물질’의 본질적 속성은 ‘연장실재’(延長實在, res extensa) 것이고, ‘정신’의 본질적 속성은 ‘사유실재’(思惟實在, res cogitance)라고 규정했다. ‘연장실재’란 글자그대로 크기와 길이와 양측정이 가능한 실재란 말이다. ‘사유실재’란 계량측정이 불가능한 생각 ․ 사상 ․ 가치․ 의미 ․ 진선미, 영혼같은 실재란 말이다. 그런데, ‘연장실재’는 사람의 오감에 자극을 주고  실증할 수 있는 것이기에 자연히 거기에 더 큰 일차적 관심과 신뢰를 부여한다. 
 
우리시대 기독교는 노골적인 맘몬숭배, 물질숭배, 크기와 속도 숭배자가 되어버린 셈이다. 교회당이 크고, 신도숫자가 많고, 교회예산이 크고, 교역자가 타고 다니는 자가용의 배기량이 크면 성공한 교회요, 복음적 교회의 표징이요, 금생과 래생에 구원보장을  확실히 해주는 영생보험회사다. “잘 살아보세”와 “더 잘살게 해주겠다”는 정치가의 약속이면 정의, 인권, 민주, 생명가치, 진실 따위는 이차 삼차 순위로 밀어두고 지지해주고 지도자로 삼는데 앞장서서 충성한 정권친위부대로 자처하고 위세까지 부린 모습이 우리시대 한국 기독교의 자화상이다.
 
우리시대 한국 기독교가 맘몬숭배종교라는 확실한 표징은 교계신문이나 일반신문에까지 ‘교회를 팝니다’라는 광고가 버젓이 나오는 현실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거나 팔아지지 않는 영적 ‘교회’가 아니고 ‘교회당, 교회터’를 만부득이한 형편으로 매도한다는 말이겠지 하고 부정하고픈 심정이다. 그러나, 현실로는 교회당 건물이나 건뭍터만이 아니라 ‘교인머리숫자’가 매매가에 중요평가 요소로  작용하고, 특정교회가 은행융자를 받을 때도 융자금 ‘상환능력’감정 평가기준에서 교인숫자와 교인들의 경제적 사회계층분포도가 평가기준에서 작용한다는 말을 들을 때는 ‘절망’하게 된다.
 
우리시대 한국 기독교가 왜 맘몬숭배와 무한 성장신화  추종자가 되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장황한 경제사회학적인 전문지식을 이 자리에서 반복할 필요가 없다. 세계를 휘쓸고 있는 소위 말하는 ‘세계화’, ‘신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지배’, ‘국경을 초월한 금융자산과 다국적기업의 황포’,  ‘국제무기상들과 에너지 독점지배자들의 야합’ 등등 현실적 시대상항을 이류로 댄다고 헤서 거룩한 ‘하늘기관이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맘몬숭배자와 무한경쟁 숭앙자로 전락하는 대죄에  ‘관용과 용서’의 빌미가 될 수 없다.
 
우리시대 한국 기독교는 회개해야한다. 맘몬숭배자였음을 회개해야 한다. 가난해 져야 한다. 피묻고 더러운 탐욕에 절여진 헌금이라도 제단에 바쳐지고 성직자가 성별기도하면 모두 ‘성화’된다는 주술적 마술신앙을 벗어던져야 한다. ‘갈릴리 예수의 생명과 진리의 복음’을 ‘기복신앙 종교기업체’로 변질시킨 ‘종교의 물상화(物像化)’를 철저히 혁파해야 새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 새순이 돋아 날 수 있다. 전체 기독교 교세가 1천만에서 500만이나 300만명으로 감소되더라도 두려워말고 가난해지고, 낮아져야 한다.  위세부리고  공격적이며 점령하는 ‘십자군적 영성’을  청산하고 비우고 낮아지고 섬기는 ‘십자가의 영성’에로 전환해야 한다, 초대 이 땅에 온 의료선교사들 처럼, 그리고  한국 교계 지도자 안창호, 조만식, 이승훈, 김약연, 최흥종, 이상재, 김용기, 함석헌, 김재준, 한경직, 장기려등 청빈하고 겸허했던 지도자들처럼 ‘화광동진’의 영성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④ ‘정치방기’(政治放棄) 정신에서 본 우리시대  교회의 ‘정치이념과 정치권력에 결탁대죄’

오방 최흥종 목사에게서 ‘정치에 방기’하겠다는 진정한 뜻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탈정치화, 비정치화, 몰정치화등 결국 정치적 아나키스트가 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실정치를 초월한 ‘영원한 하나님의 정치’에 참여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선언임을 앞에서 살폈다. 어거스틴의 역사해석으로 말하자면 세계역사 안에 있는 모호한 두역사 물줄기의 긴장갈등관계 곧 하나님사랑을 근본으로하는 ‘신의 도성’과 인간자기사랑을 근본으로하는 ‘땅의도성’의 두 긴장갈등에서 단연코 인간의 오만, 자기자랑, 폭력적 힘에 의존하는 ‘땅의 도성’을 ‘放棄’하는 것이다.
 
시대 따라 변하고 제한받는 인간 정치학의 정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태초부터 행하시는 하나님의 세계정치에만 참여하겠다는 선언이다. 그 ‘하나님의 정치’는 현대신학의 용어로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선교’란 하나님이 기독교라는 종교 교세를 확장하려고 전도한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세계 살림’을 제대로 영위하기 위하여 오늘도 세계현실 한복판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신학적 고백이다.   그 ‘하나님의 정치’의  정강정책은 無爲의 정치, 사랑의 정치, 화해의 정치, 대동의 정치,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정치, 생명을 치유하고 살리는 정치,  ‘현재를 영원한 미래로 접속 시키는’ 정치다.
 
‘정치에 放棄’하는 최흥종의 ‘오방영성’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시대 기독교의 大罪는 有爲의 정치, 左右를 편가르는 정치, 和解가 아닌 적개심을 부추기는 정치,  派黨의 정치, 하늘과 땅을 갈라놓는 정치, 兄弟殺人도 마다하지 않는 전쟁불사의 정치, 현재와 미래를 단절시키고 정치적 현실에만 충성하는 죄이다. 이러한 대죄를 지난 50년간  짓고 있다.
 
지난 50년동안 이땅의 70 %를 차지하는 보수적 기독교는 말로서는 ‘정교분리’를 주장하고, 교회는 ‘영혼구원’에만 전념한다고 말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가장 노골적으로 ‘땅의 정치, 땅의 나라’에 정치적으로 충견처럼 복무하였다. 해방정국에서 남북분단을 저지해보려는 김구를 버리고 미국이 지지하는 이승만을 한국 기독교는 선택 지지했다. 해방정국에서 북한의 교조적 공산주의자들의 박해를 몸으로 체험하고 남하한 후, 남북한의 화해를 포기하고 공산국가 박멸의 극우파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정권의 강력한 보루가 되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유신체제 철권정치를 할 때도 예언자적 비판소리는 그만두고 진보적 기독교형제들의 고난을 종북 좌파세력 집단 “빨갱이 앞잡이”라고 몰았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때 남북화해와 교류협력을 통한 전쟁방지 평화구축의 점진적 노력을 ‘빨갱이 정권의 북한퍼주기 정책’이라고 비난하는데 나팔수 노릇을 보수적 한국 기독교주류세력이 자행했다. 베트남전쟁과 이라크전쟁 파병에  ‘자유 ․ 평화 군대’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인간살상이라는 국가간 합리적 살인 행위에 아무런 양심가책도 없이 ‘전투군파병’에 지지 찬성했다. 4년전 대선 때에는, 장로대통령을 세워야 나라가 복받는다고 도덕적으로 검증되어야 할 많은 의문들을 덮어버리고 순진한 교인들을 설득하여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일등 공신이 되었다.
 
지금 MB정권 말기에 MB정권이 저지른  온갖 실정과 비리가 드러나는데도,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용비어천가’를 불렀던 한국 개신교 대형교회 지도자들이라 자처하는 교역자들중 그 아무도 ‘도덕적 책임’을 통감한다는 대국민 참회 언급이 없다. 도리혀, MB정권과 차별화를 시도한다해도 그 정당 그 정치뿌리인 현재 여당 정권 재창출에 지지세력으로서 정치전선을 재구축한다. 오방 최흥종의 ‘政治에 放棄’ 라는 정신에서 보면 큰죄를 짓는 파렴치한 태도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시대 한국 기독교는 냉전시대가 이미 끝난지 30년이 지났는데도, ‘역사의  시계바늘’을  냉전시대에 고정시켜 놓고,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방해하면서 극우 정치이념을 우상처럼 섬기고, ‘날씨는 분별할 줄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줄 모르고’(마16:3) 탐욕과 권력욕에 맛들인 ‘어용사제단’들이 되어있다.  

⑤ ‘종교방랑’(宗敎放浪) 정신에서 본 우리시대 기독교의 교회의 ‘동굴의 우상’에 빠진 대죄

최흥종의 ‘오방영성’에서 ‘종교에 방랑’이란 김삿갓의 ‘방랑삼천리’ 노래가사와는 아무관련도 없고 학술적 ‘종교다원론 담론’과도 관계없는 것임을 앞에서 살폈다. ‘종교에 방랑’이란 역사적 종교형태로서의 제도적 ․ 교리체계적 ․ 교권적 기독교 왕국은 ‘하나님의 나라’(천국)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마음의 깊은 지성소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며’(요4:24), 삶 한복판에서 임재하시는 ‘일상속에서의 초월경험’에 예민하여 ‘몸으로 산제사를 드린다’(롬 12:1)는 자세의 영성을 말한다.
 
더 래디칼하게 말하면 칼빈이 경고한대로 인간이란 ‘우상제작소’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하나님으로 예배하고 영광돌리라는 제1,2,3계명을 어기고, 기독교라는 역사적 종교 ․ 성경이라는 종교경전 ․ 정통신학체계 ․ 교권성직질서 ․ 심지어 교회당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우상화하기 일수이다. 최흥종의 ‘종교에 방랑’이란  ‘역사적 종교로서의 기독교라는 종교동굴’에 갇히지 말자는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 POLITEIA』제7권에서 저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통하여 인간이 진리와 참실재를 알기전에 ‘동굴’로 상징되는 인식론적 패러다임과 해석학적 제한성에 얼마나 쉽게 갇혀 살기 쉬우며 그 ‘동굴’ 밖의 진리의 세계가 실재한다는 진실을 받아드리기 어려운 것인가를 비유를 통해서 실감나게 교육한바 있다. 탄생 후 한번도 동굴밖 태양이 빛나는 세상을 나가본적 없는 노예는 동굴의 어스름한 불빛의 조명도가 눈에 익숙해지고 편안해지며, 동굴밖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소식이 도리혀 불안해지고 고통을 준다. 사도바울의 경험을 예로 들어말한다면 가마리엘 문하에서 배운 거룩한 유대교의 율법종교도 ‘눈에 덮힌 비늘 같은 것’(행9:18)이 되어 ‘십자가의 복음의 빛’ 그 자체를 방해한다. 플라톤의 고전적인 저 ‘동굴의 비유’와 사도 바울의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상에서의 회심경험에서 상징적으로 말하는 ‘눈에 덮힌 비늘’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우상중에서 제일 무서운 우상은 ‘종교우상’이라는 것이다.
 
‘종교’는 ‘하나님 ․ 진리자체 ․ 궁극적 실재’를 가리키는 손가락들이요, 매개체들이요, 경험한 체험담들이다. 그것이 종교경전이요, 신학체계이며, 예배공동체로 조직화되면 ‘그리스도교 라는 교회단체’가 된다. 이 손가락들과 거룩한 매개체들은 단순히 ‘지시기능’ 만 하지않고 궁극적 실재의 힘과 의미에 ‘부분적으로 참여’하는 상징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상징물’과  ‘상징하려는 궁극적 실재자체’를 동일시하거나 혼동하는 유혹을 쉽게 받는다. ‘그리스도교’라는 역사적 종교와 ‘교회’도 같은 유혹을 받는다. ‘새하늘과 새 땅이 성취되면 거룩한 성 안에는 “성전을 볼 수 없다.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양이 그 성전이시기 때문이다”(계21:22). 
 
‘역사적 종교’를 우상화시킬 위험은 각종교들에게 모두 있지만, 그리스도교에서 특히 강하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10:30)말씀하시고 “나를 보는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다”(요12:45)고 말씀하지만 “내가 곧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신 적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보다 크신 이(마12:6)’이지만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요14:28)고 증언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매우 역설같지만, 가장 하나님에게 열심이고 충성하는 기독교가 도리혀 그 열심히 지나쳐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기독교 우상화, 성경 우상화’라는 신성모독죄에 빠져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그 이름을 욕되게 하는 현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동굴비유’가  말하는바 처럼,   ‘기독교라는 역사적 동굴’에 갇힌 사람들 당사자들만 그 사실을 모르거나 느끼지 못한다.
 
우리시대 한 신학적 거장 폴 틸리히는  그의 생애 마지막 무렵 매우 중요한 말을 남겼다.  첫째, 모든 위대한 역사적 종교들은 각각의 종교들을 역동적이게 만드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그 특수한 자기정체성을 쉽게 버리거나 약화시켜서는 않된다. 둘째, 그러나 동시에 역사적 종교들은 각각의 종교들이 지닌 특수성을 통해서 궁극적인 것을 지시하거나 매개하기 때문에, 자신의 특수성을 절대화하지 말고 돌파하여 뚫고 들어가서  그 깊이에 들어가야 한다.   셋째, 깊은 중심의 그곳 거기엔 모든 역사적 종교들의 특수성을 상대화시키면서, 그것들을 영적 자유에로 고양시키고 동시에 다른 것들 속에 현존하는 ‘영적현존’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만든다. 틸리히가 말하는 그 자리가  바로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리”(요4:21-24)가 아니겠는가?

[4] 나가는 말 :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방정신’ 혹은 ‘오방의 영성’의 자리에서 우리시대 기독교의 적라라한 모습을 성찰해보았다. 혹자에게는 너무 편파적이 아닌가, 너무 부정적인 견해가 아닌가, 너무 가혹한 진단이 아닌가라고 비판 할 수 있다. 물론, 바알에게 무릅꿇지 아니한 하나님이 감춰두신 7천명이 있음을 믿는다. 그들이 있기에 오늘의 한국사회와 한국 기독교가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의인들은 극히 에외적인 경우이고, 대부분은 철저하게 개혁되어야하고  다시 죽고 살아나야 한다.
 
오방실에 걸려있는 백범의 휘호 ‘화광동진’(和光同塵) 4글자를 다시 음미함으로서 결론을 대신하기로 한다. 잘아시다 시피 ‘화광동진’은 “和其光 同其塵”의 축약어이다. 노자 도덕경이 말하는 ‘진리자체인 道’의 존재방식이 그러하고, ‘道’를 터득하고 ‘道’를  생명체로서 살아가는 참사람의 삶의 스타일이 그러하다는 말이다. ‘도’를 철학적으로 말하면 ‘진리자체’요, 종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요, 기독교 신앙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진리 ․ 생명 ․ 사랑 ․ 은혜’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남으로서 그 생명이 안팎으로 ‘빛으로 환해진 사람’을 일컫는다. 종교의식상 세례를 받았느냐 아니 받았느냐, 정통교리신조를 받아드리느냐 않받아 드리느냐 따위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가 과연 ‘빛으로 조명당한 존재이며, 그 자신의 속에 빛이 어둡지 않고 밝게 빛나고 있느냐가 문제이다. 그 빛은 너무나 황홀하고 빛나서 그대로 사람 눈의  동공에 들어가면 시력을 상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道人, 眞人’은 눈부신 빛을 누그러뜨려서 상대방의 시력을 편안하게 해주는 배려까지 하게 된다. 그것이 ‘和其光’이다. ‘和’ 라는 글자 속에는 낮춤, 겸손, 감춤, 약해짐, 평등과 평화, 그리고 밥을 함께 나누어 먹는 식탁공동체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먼저 해야 할 일은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가 보라!”(눅11:35)는 예수님 경고말씀을 듣고 아직도 내 안에 빛이 꺼지지 않고 있는지의 여부를 점검할 일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교회사 속에서 참된 경건주의 운동과 신비주의 운동이 강조하려는 핵심이다.  둘째는,  만약 조금이라도 그 빛이 내안에 있다면 낮추고, 겸허해 지고, 비우고, 약해지고, 평화를 위해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탐심중에서도 가장 나쁜 탐심이 ‘영적 탐심’임을 절감해야 한다.
 
둘재구절 ‘同其塵’에서 ‘塵’이란 먼지, 흙, 바닥사람, 사회적으로 관심밖에 있는 힘없는 존재자들, 민중, 씨알들을 말한다.  ‘同’이란 동참, 동화, 동일화, 함께 거함, 성육신을 말한다. 그러면 누가 어떤 존재가  ‘흙속에 묻힌다’는 말인가? 제대로 수정되어  알곡으로 영글지 씨가 흙속에 묻히면 함께 썩어버릴 뿐 새 싹은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  도대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삼위일체의 둘째 위격이시고, 동정녀몸에서 나신 이요, 내 죄를 대신해 죽어주신 이요, 부활하시고 다시 오실 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예수믿음’이라 하는가? 그렇게 인정한다고 해서 내게 오는 변화가 무엇인가? “에수믿음‘이란 글자 그대로 예수를 믿는 것이지 ‘예수에 대한 교리와 정통신학 주장’을 머릿속에 지식적으로 수용하는 일이 아니다. 

 ‘예수믿음’이란 예수라는 사람을 깊이 속마음까지 아는 일이요,  알수록 사랑하게 되는 일이며, 사랑하면 할수록 그의 뜻과 맘을 닮고자 하는 열망이 일어나서, 마침네 예수를 내 생명으로서 살게되는 생명사건을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 앎, 예수사랑, 예수 닮음, 예수살이, 그 네가지는 단계적이면서도 동시적이다. 그렇게되면  그 예수쟁이 생명 속에는 “죽어도 죽지 않고, 살아서 그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하는 생명”(요11:25) 영적 DNA 가 영글게 된다. 바로 그 생명체가 바닥사람들, 먼지와 흙 속에 묻혀야 60배 100배 결실을 맺는다.  씨앗이 영글지 않으면   아무싹도 아니 나오고 먼지속에 살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내 속에 영생하는 속생명이 영글어 가는지 확인할 일이요, 둘째는 민중의 흙속에 묻히는 일이다.

12월 대선은 또 한번 하나님이 한민족과 한국 기독교에게 주시는 시험장이다.  ‘시험장’은 기회이면서 글자그대로  유혹자로부터 ‘시험받기 딱 알맞은 때’이다. 지난 한국 현대사 50년동안 다섯가지 대죄를 지어오던 한국 주류 기독교가 회개하고 속죄하는 기회로 삼을 것인가,  유혹자의 달콤하고 그럴듯한 ‘시험’에 또 한번 넘어가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인가는 하나님도 강요하지 못하시고 지켜보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받지 않으시는 분이기에 “무엇을 심든지 심는데로 거둘게 할 것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는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자는 육첼부터 썩어질 것을 가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가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7-9)


[참고서적]

1. 광주YMCA역사편찬위원회, 『화광동진의 삶』(오방기념사업회, 2000)
2. 문순태, 『성자의 지팡이』 (다지리, 2000)
3. 선한용, 『성어거스틴에 있어서 시간과 영원』(성광문화사, 1986)
4. 플라톤(박종현역), 『국가』(서광사, 1997)
5. W.C.스미스(길희성역), 『종교의 의미와 목적』(분도출판사, 1991)
6. 폴 틸리히(송기득역),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한국신학연구소, 1983)
7. Paul Tillich, Christianity and the Encounter of the World Religions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3)
8.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한길사, 1983)
9. 김경재, 『내게오는 자 참으로 오라: 함석헌의 종교시 탐구』(책보세, 2012)
10. 장회익 외, 『내게 찾아온 은총: 깨달음을 통한 주체적 신앙』(한국기독교연구소, 2012)
11.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분도출판사, 2003)
12.. 김동춘, 「박정희시대의 민주화운동」, 유신과 다시 맞서는 목요기도회 모임특강(장공기념사업회, 2012)
13. 변상욱,  「신자유주의 시대의 저널리즘과 영성」(장공기념사업회, 2012)
14. 김경재, 「장공의 교회론을 다시 생각한다」(장공기념사업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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