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본문
창세기 45:4-8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나는 당신들이 애굽으로 팔아넘긴 동생 요셉입니다. 그러나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실제로는! 당신(형님)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형들에 의하여 ‘애굽 노예’로 팔려갔었던 동생 ‘요셉’이 그를 애굽에 노예로 팔아 넘겼었던 그 비정(非情)한 형들 앞에서 외친 말이다.
요셉은, ― 그 옛날, 참으로 참혹하리만큼 외롭게, 형들에 의하여 종으로 팔려 이방나라인 애굽 땅으로 내어 쫓김을 당하였었다. 그 애굽 종살이 시간은 요셉에게는, 정말!,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참담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모든 시련(試鍊)과 역경(逆境)을 기적적으로 다 잘 이겨내고, 지금은, 일약! 이 큰 대국(大國), 이른 바, 당시 중동세계의 대표적 초강대국인 애굽 대제국의 국무총리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 그는, 실로, “운명 극복”의 기적을 일구어낸 매우 보기 드문 행운의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기세 등등,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같은 피를 나눈 친동생조차 조금도 불쌍하다는 생각을 않고 단돈 은 스무 냥에 잔인하게 노예로 팔아먹었었던 그 형들은, 지금은 오히려 매우 영락(零落)하게 되어, 춥고 배고픈 유랑민의 신분으로, 끼니조차 이을 양식이 없어서 멀고도 먼 그 사막 길을 도보로 걸어서 여기 애굽 땅에까지 양식을 사러 온 낮고 천한 난민의 처지가 되어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매우 운 나쁘게, 총리의 은잔을 훔쳤다는 누명(陋名)과 또 남의 나라의 기밀(機密)을 정탐(偵探)하러 온 “간첩”이라는 혐의까지 받고, 체포된 몸이 되어, 총리 앞에 끌려 온 신세가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총리의 말 한 마디만이면 순식간에 목숨이 달아날 “경각의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리하여 이 형들은 그 옛날 동생에게 행한 그 씻을 수 없는 죄 때문에, 지금은 지존의 총리각하가 되어 있는 동생으로부터 추상같은 “복수의 칼”을 받게 될지도 몰라, 거의 죽을상이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피비린내가 요동칠 살벌한 국문 장의 분위기였다.
숨을 죽이듯 긴장의 정적(靜寂)이 감도는 이런 상황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통쾌한 “복수드라마”의 연출을 예상하게 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요셉은 여기서 우리 같은 범인들로서는 감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말을, 확신을 가지고, 형들을 향해 말하였다.
“형님들, 형님들이 나를 애굽에 종으로 팔아넘긴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 일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사실, 저를 이곳으로 보낸 자는 형님들이 아니라! [실제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생명을 저 극심한 기근에서 살려내시려고 오래 전부터 계획하셔서 저로 하여금 우리 가문을 ‘살리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저를 형님들보다 ”앞서“ 이곳으로 보내신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저를 이곳에 노예로 팔려오게 하신 분은, [실제로는,]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 이셨습니다.”라고 하였다. 놀랍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놀라움은 요셉의 저 바다같이 넓은 관용의 행위에 대해서 느끼는 놀라움은 결코 아니다. 진정한 놀라움은 오히려 이것이었다. 그것은 같은 피를 나눈 친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긴 저 반 인륜의 악한 행위가 결단코 형들 때문에 생겨난 인과(因果)의 결과가 아니라!, 실제로는! 단지 ‘선하신 하나님’ 자신께서 깊은 뜻이 계셔서 친히 계획하셔서 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네의 일반적인 신앙세계에서는 전혀 이해하기가 힘든 ‘참으로 놀라운 신앙의 경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신앙세계에 의하면, <빛은 선(善)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어둠은 악(惡)한 신(神)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믿는 그런 것>인데, 그러나, 요셉의 이 신앙고백에 의하면, 이와는 전혀 달리!, 형들이 저지른 저 악랄한 반인륜의 악행과 그로인하여 동생 요셉이 겪었었던 저 참혹하리만큼 고통스러웠던 그 불행스런 삶이 결코 그 어떤 악마의 짓이 아니고! 오히려! 그 선(善)하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이며 더욱이 그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계획하셔서 이루신 일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의 이 신앙고백 속에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그런 일반적인 고정관념 속에 붙박여 있는 그런 통속적인 신앙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다음과 같은 심오하고도 차원 높은 신앙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신앙은 바로 이런 신앙이었다. 즉 그것은 이 우주 역사의 모든 사건이란 오직 “한 분으로부터만 비롯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 이를테면, 이 온 우주를 만드시고 통치하시며 이끌어 가시는 분은 오직 한 분! 이시라는 것, 말하자면, 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신은 둘이거나 셋이거나 또는 그 이상의 여럿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 만이라고 믿는 신앙, 이른 바, 유일신 신앙(唯一神 信仰, implicit/practical monotheism), 그것이었던 것이다.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한다면, 이 모든 세상사들은,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가릴 것 없이, 그 모든 것들은 전적으로 오직 한 분!! 창조주 하나님 그분 한 분의 뜻에 의하여서만! 일어나는 것이지 결단코 그것이 그 무슨 선(善)한 신(神)과 악(惡)한 신(神)이 따로 따로 있어서 그 두 신(神)에 의하여, 즉 좋은 것은 선한 신에 의하여 일어나고 나쁜 것은 악한 신에 의하여 일어나는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幸福은 善한 神으로부터 오고 不幸은 惡한 神으로부터 온다.
富饒는 善한 神으로부터 오고 貧困은 惡한 神으로부터 온다.
健康은 善한 神으로부터 오고 疾病은 惡한 神으로부터 온다.
平和는 善한 神으로부터 오고 戰爭은 惡한 神으로부터 온다.
밝음은 善한 神으로부터 오고 어둠은 惡한 神으로부터 온다.
라는 따위의 그런 이원구조는 결코! 아니!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본문은, 같은 혈육의 동생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넘기는 그런 반인륜의 악행과 불행이라 할지라도, 성서의 唯一神信仰의 눈으로 다시 보면, 즉 성서적 신앙의 눈(eyes of faith)으로 새롭게 다시 보면, 실제로는!!, 형들이 저지른 악행도 아니고 악마의 장난도 아닌, 전적으로 그것은 ‘역사의 유일한 주인이신 한 분 뿐이신 하나님 한 분의 신비한 역사 섭리와 역사 경륜에 속한 일일 뿐’이라는 그런 말씀이었다. 즉 선도 악도, 밝음도 어둠도, 평안도 환난도, 생명도 사망도 실상은 모두가 다! 하나님 한 분, 그 분께서 홀로! 주도하시는 일일 뿐이라는 그것이었다. 말하자면 의인 욥이 깨달았던 것처럼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지만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욥 1:21)이시라는 것이다. 또한 신명기 신학자도 각성하였던 것처럼 “살리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만 죽이시는 이도 하나님” “낫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지만 병들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신 32: 39; 삼상 2:6-7)이시라는 것이다. 흥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지만 망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 생사의 모든 여탈권이 전적으로 오직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 있다는 그런 말씀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이 세상사를 결단코 마귀나 악마나 사탄과 역할분담을 하여 일하시지는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홀로!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서의 증언은, 그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어려운 질문을 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만일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모두가 다 선하신 하나님 한 분께서 홀로! 하시는 일이라면, 정녕 그것이 그러하다면, 선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하나님 자신의 세계 안에 왜 악이니 불행이니 비극이니 고통이니 질병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냐? 라는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악, 불행 등등도 또한 모두 선하신 하나님, 그 분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우리가 애써 정의니 선이니 하는 그런 것들을 지키려고 애쓸 필요가 무엇이 있겠느냐 라고 하는 그런 매우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요사이 젊은 세대들인 소위 N세대라고들 하는 청소년들은 말하기를 <자신을 가장 모욕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제는 착한 애야!”라고 하는 말>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할 정도로, <착하다>라는 말이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는 오히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매우 모독적인 말로만 들린다고들 하는데, … 이런 논리가, 이런 질문의 문맥에서 보면,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만일 이처럼 악이 난무하는 세상사들 속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작용하고 있다면 그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라고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우리의 성서는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성서는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결코 모호한 태도를 취하지는 아니 하였다. 즉 결코 <틈새의 신(神)>이론으로 맞서지는 아니 하였다. 또는 성서는 이러한 현상을 결단코 인간의 원죄(原罪) 때문에 생긴 결과라는 매우 진부한 생물학적 유전적 원죄이론으로 대답의 본질을 흐리게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오늘 읽은 우리의 구약 본문에서는 두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요셉의 입을 빌려 이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구하시기 위하여! 나로 하여금 노예로 팔려서 이리로 오도록 만드신 것입니다.”라고 5절 하반 절에서 말하고 있고 그리고 또 “하나님은 큰 구원(救援)으로 형님들의 생명을 보존해주시고 또 형님들의 후손을 세상에 살아남게 하시기 위하여!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곳에 노예로 팔려오게 하신 것입니다.”라고 7절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그렇다. 여기서 특별히 강조된 말씀은, 논의할 여지 없이, “생명을 구하시기 위하여!”라는 말씀과 “세상에 살아남게 하시기 위하여”라는 말로 반복해서 선포된 그 말씀이다. 말하자면, 성서의 하나님은 본질상! 우리를 정죄하시고 심판하시는 신(神)이 아니라! 우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살리시려고 하시는 신(神), 심지어는 죄 없는 동생을 이방나라 노예 상에게 팔아넘기는 그런 반인륜(反 人倫)의 악을 이용하여서라도 인간생명을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생명창조와 생명보존의 신(神)이시라는 그런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의 채찍>으로 치고! 징계하고! 심판하고! 하시는 그것은,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 고난의 재앙을 마구 쏟으시는 그것은 결코 ‘심판을 위한 심판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불완전함이나 실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의 채찍>으로 치고! 징계하고! 심판하고! 하시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훈련(訓練)의 성격을 띤 징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심판이란 어디까지나 구원을 위한 예비 작업이요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준비작업>일 뿐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 땅으로 인신매매(人身賣買)되어 종으로 팔려가서 그런 잔인한 불행에 빠지도록 하신 것은, 요셉의 죄를 징계하시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그게 그런 것이 아니라, 야곱 가문과 요셉 가문을 저 가나안 땅에 임한 그 살육적인 흉년으로부터 살려내시기 위한!! 구원경륜의 한 예비조치(豫備措置)였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구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죽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서의 주장은 소위 말하는 <자연선택적 진화론>(호킹, 밀 등등의 무신론자들의 주장)과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겠다.
그렇다. 이 신비한 비밀을 알리려고 필자는 감히 이러한 성서신앙으로 무신론자들과 맞서고 있는 것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비록 인간의 눈에는 ‘심판의 하나님’으로도 보이시기는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제대로 그 의미를 잘 들여다보면, 그 하나님은 전적으로 ‘구원의 하나님’이실 뿐이라는 그런 말이다.
그렇다. 우리가 믿는 성서의 하나님, 즉 창조주 하나님은, 본질상!, 생명창조와 생명보존의 신(神)이시지 결코, 그 무슨, 우리를 심판하시려고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숨겨진 죄들을 샅샅이 다 찾아내어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심판하시는 그런 심판의 신(神)은 결코 아니시라는 것, 이것이 바로 다름 아닌, 성서의 고유한 중심적 증언이다. 요셉 이야기는 바로 이 사실을 증언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는 성서언어다.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도록 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이 하나님은 잘 알고 보니 야곱 가문 전체를 살리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넘기는 <고난을 통한 교육방법>으로 전체 야곱 가문보다 <앞서> 내려가게까지 하셔서 야곱 가문인 이스라엘을 저 가나안 땅의 살인적 흉년의 기근으로부터 구원해 내시려 하신 <구원의 하나님>이시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참 신앙인은, 이 세상의 이러한 잔혹한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그 배후에서 활발하게 움직이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그 구원섭리의 손길을 볼 수 있는 신앙의 눈(eyes of faith)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신(神)의 저주처럼 느껴지는 참혹한 불행 속에서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 불행 한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셔서 그 불행을 매개로 하여서라도! 우리를 철저히 훈련시키신 다음, 그 불행을 극적인 방법으로 행복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그 역설적(逆說的) 구원섭리를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역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오직 한 가지의 뜻이란!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회개하는 자에 대한 용서요 회개하는 인간에 대한 구원이라는 것을 성서는 줄기차게 증언하여 왔다. 실로, 우리의 이 인간세계는 “악”이 득세하는, 정말 세상살 맛이 안 나는, 그야말로 그 미래가 불확실한 세계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단코!, 이 인간세계를 악하다 하여 단념하시거나 포기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그것을 웅변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이 세상을, 그가 창조하신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인간들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천문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137억년 동안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 구원의 때(카이로스)를 결코 포기함이 없이 기다리신 것이라 하겠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복음이다. 요셉 이야기는 바로 이 복음을 증언하고 있다고 하겠다.
신약성서의 요한복음도 이러한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의 본질을 증언하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결단코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하여 이 세상이 구원받도록 하시기 위함이다.”(요 3:17)라고 증언하였던 것이다. 한 사람도 놓치지 않으시려는 것(요한 6:39)이 하나님의 뜻이요 동시에 그의 아들의 뜻이라고 증언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피를 나눈 형제까지도 노예로 팔아넘기는 그런 반인륜(反人倫)의 이 인간세계라 할지라도 결단코 단념하시거나 포기하시거나 하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그런 악의 역사를 “고난의 채찍으로 연단시키셔서”(호 2:6-7[8-9],14-15[16-17]) 구원의 역사로 변화시키실 뿐이다.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다(창 50:20).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시다(출 34:6). 우리의 하나님,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같은 혈육의 동생까지도 노예로 팔아넘기는 이 잔악한 형제갈등의 반윤리적 악행 속에서도 오히려 사랑의 생명이 싹트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는 찢고 싸우고 전쟁하며 자살 테러를 식은 죽 먹듯 하면서 핵폭탄을 던져서라도 다함께 자멸하자라면서 ‘자살 사이트’를 크게 열어놓고 죽음을 독려하면서 다함께 망할 그 종말을 향하여 빠른 속도로 경쟁하듯이 달려가는 저 고삐 풀린 말 같은 무지한 인생들의 그 절망적 미래를 한사코! 한사코! 한사코! 막으시고 <생명 사랑의 묘약(妙藥)>으로 치유해 주시는 그런 분이 성서의 하나님이시다. 이분이, 이 아버지(어머니) 하나님이!! 바로 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셨던 그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는 아들을 정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네 하나님의 자녀들을 심판하시지 않으신다. 물론 이 말은 신의 심판이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심판은 있으나 하나님의 심판은, 예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성서를 다시 읽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원을 위한 연단교육의 예비 작업일 뿐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버지(또는 어머니)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식들인 우리들을 사랑의 채찍으로 교육-연단시키셔서 결국은 우리 모두를 <한 사람도 남김없이 살리셔서>(요한 6:38-39!!) 기어이!!! 구원해내시고야 마실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에 대한 [죽음의] 심판(롬 5:12)은 인간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보응이 아니라! 인간행위가 불러들인 <부메랑>(boomerang) 형식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일 뿐(갈 5: 15; 6:9)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