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본지 편집고문) ⓒ베리타스 DB |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제체제와 거기에 편성한 한국의 재벌경제에 굴복한 경제정책은 김영삼 정부로부터 시작해서 국민의 정부를 내세운 김대중 정부, 참여정부를 자처한 노무현 정부에서도 계속되었고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 그 절정에 달했다. 따라서 한국에서 정권교체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제체제와 거기에 편승한 재벌경제체제에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약간의 개혁시도가 있었지만 근본에 있어서는 거의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다는 반성의 열망이다.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와 거기에 편승한 재벌중심의 경제정책의 결과로 오늘날 한국정부와 공기업의 부채가 천문학적으로 증가하고 서민들의 가계부채는 약 1천조에 달하게 되어 대한민국은 가히 부채공화국이라 불릴 만하다. 서민들이 걸머진 가계부채의 이자는 대충 계산해도 매년 60-70조에 달하고 정부와 공기업의 부채까지 계산하면 그 이자는 매년 약 150내지 160조에 달할 것이다. 정부와 공기업의 부채도 결국 국민들의 세금으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 국민들이 부담하는 세금들은 앞으로 부채탕감에만 사용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이 엄청난 국가부채, 공기업부채, 그리고 가계부채의 채권자들은 누구인가? 채무자가 있으면 채권자가 있게 마련인데 그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 그들은 한마디로 한국의 금융 자본가들과 외국의 금융 자본가들일 것이다. 그들은 매년 모든 한국 사람들로부터 약 150조에 달하는 이자를 받아갈 것이다. 이렇게 정부와 공기업이 막대한 부채에 시달림으로 인해서 그동안 한국의 이명박 정부는 복지정책을 확대해 나갈 수 없었다. 이명박 정부는 이전 정부들에서 일률적으로 지원하던 노인들의 교통수당마저 박탈해갔다. 여기에 대해서 대한노인회가 항의했다는 소식을 들은바가 없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제정책에 충실했던 한국의 역대정부들은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의 돈(이자)을 빼앗아서 부자들을 원조하는 매우 전도된 세상을 만들었다.
18세기 리카도(Ricardo)로 대변되는 구자유주의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은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예로 들어 부자들의 밥상이 풍부해야 거기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많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도 그것들로 배불리 먹고 살게 된다고 하면서 이것이 경제학의 자연법칙이라고 주장했다. 즉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것으로 경제 원리를 설명했었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유주의 경제학에서는 그와는 반대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을 지원하는 것을 경제학의 원리라고 주창한다. 엄밀히 말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을 원조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이 금융체제를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착취해가는 것이다.
경제개발을 시작한 박정희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역대정부와 그 수반들인 대통령들도 정치, 군사, 외교에서 친미자본주의 정책을 견지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정책에서도 한국전쟁이후 미국의 원조경제체제로부터 시작된 자유 시장경제체제의 충실한 추종자들이었다.
그러면 박정희가 시작한 경제개발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실상 60년대 세계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한계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선택한 출구정책이었다. 말하자면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자본주의 경제체제는 급속한 경제성장과 경기호황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딜레마에 직면한다. 첫째는 이념국가들, 즉 소련을 필두로 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존재로 인한 제한된 시장규모로 인한 생산된 물건들의 판매제약과 함께 둘째는 과도하게 축적된 자본의 활용을 위한 자본시장의 제약 등이 그것들이었다. 당시 세계자본주의체제는 우선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를 통한 상업 세계시장의 확대를 꾀하는 동시에 남아도는 축적된 자본을 제3세계의 근대화를 통해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미국이 자본시장확대를 위한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이 이른바 제3세계의 근대화 혹은 산업화 전략이다. 미국은 남미와 아시아 국가들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권위주의적 정권(군사정권)을 지원하여 그들로 하여금 근대화(산업화)를 통해서 국민들의 지지기반을 확보해 준다는 명목 하에 자본시장을 확대하고 동시에 낡아서 처분 곤란한 산업시설들을 처분하는 일거양득의 정책을 추동한다.
따라서 박정희가 추동한 근대화, 산업화는 실은 내재적 필요성도 존재했지만 세계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과도하게 축적한 금융자본의 해소와 함께 낡은 산업시설의 처분이라는 외적 필연성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박정희가 아니고 다른 지도자가 집권했어도 산업화 내지 근대화는 이룩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세계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그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의 근대화 혹은 산업화를 박정희의 독자적인 치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편협한 세계 인식에 기인한 것이고 동시에 그만이 산업화를 이룩해낸 지도자로 칭송하는 것은 다분히 한국의 보수 세력의 이데올로기적 편향에 기인한 것이다.
다른 한편 동시에 고려해야 할 것은 이렇게 세계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필연성에 의해서 시작된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는 어떤 특정 지도자나 특정한 대기업들에 의해서만 추동된 것이 아니라 자기 헌신적 노동자들에 의해서 달성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공평한 시각적 판단일 것이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박정희정권과 결탁한 지금의 대기업들을 통한 경제발전을 위해서 제도적 측면에서나 실질적 차원에서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왔다. 그들은 산업화 초기에 노동자로서 법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열악한 환경에서 낮은 임금으로 희생을 감수함으로써 한국의 산업화에 기여했다. 오늘날 그들의 희생을 통해서 성장한 대기업들은 여전히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으며 그 희생의 강도는 1997년 김영삼 대통령시절 비정규직법과 근로자 파견법이 통과된 이후에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의 산업화는 처음부터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성에서 출발했고 또 권위주의적 정권의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으로 인해서 노동자들의 희생이 강요되었기 때문에 한국은 산업화에 성공해서 경제 강국의 대열에 서게 되었지만 노동자들과 경제적 약자들의 삶은 더욱더 처참해지고 따라서 사회적 경제적 양극화는 심화되어가고 있다. 그 양극화가 이제는 극에 달해서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생존의 벼랑에 서게 되어 자살로 삶을 마감하여 OECD 국가 중에 자살률 제1위 국가의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투자처를 찾지 못해서 현찰을 몇 10조씩 은행에 쌓아놓고 있는데 서민들은 삶의 한계선 상에서 신음하고 있다. 젊은 나이에 정리해고 당하고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 거리를 헤매면서 정부와 가진 자들을 원망하고 있다. 사회적 안전망이 위협당하는 처지에 도달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회 혁명적 사태가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새누리당에서 선거운동을 돕는 김종인씨가 제시하는 경제민주화라는 화두도 이러한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현실을 염두에 두고 제시한 대안으로 필자는 이해한다. 경제영역에서 지금과 같이 부자들의 독식과 가난한 자들의 권리박탈이 계속된다면 우리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가 더 이상 존속될 수 없고 조만간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니 신자유주의적 세계자본주의체제는 이미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그 붕괴의 조짐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에서 거대은행들과 금융기관들의 몰락은 금융자본주의의 붕괴를 경고하는 것이고 얼마 전 미국 뉴욕에서 벌어졌던 99% 1%의 사회에 대한 거대한 저항운동도 그 징표의 하나이다. 현금에 라틴적 유럽 국가들,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에서 일어나고 있는 금융위기도 모두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제체제의 붕괴를 드러내는 징표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모두가 부자들의 탐욕과 독식, 가난한 사람들의 무제약적 착취를 자행하는 금융자본주의의 폐해가 가져온 결과들이다.
이번 한국의 대통령선거에서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제체제가 가져온 처참한 결과들이 경제민주화와 사회복지라는 표제어를 통해서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이나 심지어 새누리당까지도 정권교체를 넘어서 시대교체를 주창한 것은 이러한 세계현실의 징조를 인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승리한 정당이거나 패배한 정당이거나 그리고 투표한 국민 모두가 인식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제체제는 이제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현금의 골목상권까지를 점령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밥그릇까지를 빼앗으려고 하는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젖은 대기업의 총수들도 이 점을 깊이 인식하고 참회하여 탐욕을 버리고 정직하게 기업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미래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승리한 새누리당은 승리에 만취해서 이전처럼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와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계속하면서 경제민주화라는 공약을 폐기하거나 희석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본인들이 말한 것처럼 “시대교체”라는 표제어가 암시하는 “새로운 시대의 징표”가 우리 앞에 다가왔고, 국민들 모두가 여기에 공감하고 그 실현을 염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실패한 민주당도 패배에만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되며 새 시대의 징표를 보다 정확하게 읽고 자기성찰과 자기쇄신에 철저할 때 국민에게 봉사하는 일이요 미래를 약속받는 기회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새누리당을 지지하든지 민주당을 지지하든지 모두 새로운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체제가 종말을 고하고 공공성이 보장되는 정의롭고 공동체적 경제 질서가 새롭게 동터오는 시대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 질서에서는 부자들은 무제약적 탐욕을 버려야 하고 가난한 자들은 먹고 입을 것 걱정 없이 공의롭게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이 되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19세기 중엽 유럽 특히 영국에서 산업자본주의 모순이 극에 달했을 등장한 노동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시대의 징표”를 읽고 쓴 그의 “자본주의 이론” 초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영국 성공회는 그들의 39개 신앙 항목들 가운데 38개를 공격하는 것은 용서할 수 있어도 그들의 수입가운데 39분의 1이라도 빼앗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1850년대 영국의 성공회는 그들의 신앙고백서를 부정하더라도 약자들로부터 적은 것이라도 탐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에서 1990년대 초반 영국 성공회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은 노동당에 입당하여 보수당의 부자중심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며 영국 사회에서의 정의로운 경제정책 실현을 위해서 투쟁했었다.
이러한 전통은 주전 8세기 아모스 예언자에게서 볼 수 있다. 그는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의 제국주의에 의해서 망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정치세력과 거기에 결탁한 종교 세력의 타락에 의해서 망하게 될 것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당시 부자들은“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종교지도자들까지 “모든 제단 옆에서 (가난한 자들로부터)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성전에서 (가난한 자들로부터) 벌금으로 받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아모스 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