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회설교, 2001.4.8
성서본문
마가 11:1-10, 15:25-32
설교문
1. 나귀를 탄 메시야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부활절 직전 주일을 종려주일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종려주일의 유래는 마가복음 11장의 보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즉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제자들과 수많은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새끼 나귀를 한 마리 빌려오게 합니다. 방랑설교자로서 가난한 삶을 살았던 예수님은 나귀 한 마리조차 소유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새끼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왜 하필이면 새끼나귀일까요? 마태복음은 히브리 성서 중에 스가랴 9:9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합니다. 즉 스가랴는 다음과 같이 예언했던 것입니다:
"시온의 딸('딸 시온'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임!)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슥 9:9 희랍어 번역판, 마 21:5)
* 히브리 성서 본문: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여기에서 예언자 스가랴는, 전차와 말과 활을 없애고 민족들에게 평화를 수립해 줄 메시야 (슥 9:10)는 '평화의 왕'으로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온다고 예언했습니다. 새끼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이 바로 스가랴의 예언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것임을 몸으로 증언하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은 것처럼 보도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다.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8-10)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은, 고대 관습에 따라 메시야를 환영하기 위해 예루살렘 도성으로부터 나온 무리가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요 12:12)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예수를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영인파는 예수와 함께 온 순례자들 무리였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수에 대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마가에 의하면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적대자들의 처소(막 3:22, 7:1)였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환영인파와 대조적으로 바리새파가 훼방을 놓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눅 19:40)
사람들이 겉옷을 길 위에, 즉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고난의 길 위에 펼쳐놓습니다. 그들은 그 길이 영광의 길인 줄 알고 있었으나, 사실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들이 외친 "호산나!"는 '구하여 주십시오'의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로서 찬양의 감탄사입니다. 이 외침은 축제의 분위기와 함께 예수께 대한 유대민중의 기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다윗왕국을 재건할 정치적인 메시야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찾아간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민중들을 종교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하고 있던 성전 사업을 살펴보고, 일단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와 베다니(예루살렘으로부터 2.8km 쯤 떨어진 마을)로 떠나십니다.
그러나 이튿날 이른 바 성전 숙청 사건(막 11:15-18)이 발생합니다. 예수께서는 성전 뜰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면서 성전이 민중을 착취하는 본거지, 즉 '강도의 소굴'로 되었음을 비판하십니다. 종려주일은 우선적으로 본격적인 종교개혁을 위한 혁명운동의 시작이었던 셈입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심판이 드러나는 장소가 될 것임을 예언하십니다. 즉 예수께서는 수십 년간 건축된 웅장한 헤롯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을 예언하십니다(마가 13:1-2,).
예루살렘에서의 일주일은 대제사장, 율법학자들, 장로들, 사두개파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시의 종교체제와 종교지도자들은 인간을 해방하려는 하나님의 뜻에 봉사하지 못하고 정치지배자들과 결탁하여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데에 가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대의 종교귀족들에게 저항함으로써 살해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기자는, "저녁때가 되면, 예수와 제자들은 으레 성 밖으로 나갔다"고 보도합니다(11:19).
그러나 예수께서는 결국 제자인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예루살렘 성 밖에 위치한 감람산에서 대제사장의 무리들에 의해 체포되고 맙니다.
2. 조롱받는 메시야
대제사장이 예수를 처형할 구실을 찾기 위해(! 막14:55) 유대인 자치기구인 70인 의회(산헤드린)에서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묻습니다: "그대는 찬양을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요?"(막 14:61)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바로 그이요. 당신들은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62)
그러자 대제사장은 옷을 찢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소."(64) 결국 대제사장은 신성모독죄로 예수를 사형에 처하도록 결정하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처형을 집행할 것을 요청합니다. 메시야가 종교지도자에 의해 신성모독죄로 심판받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빌라도는 정당한 재판절차 없이 사람들을 십자가에 처형함으로써 악명이 높던 자로서 결국 훗날 파면되고 맙니다. 그 빌라도가 역시 정당한 재판절차 없이 예수를 십자가형에 넘기고 맙니다.
체포되어 밤새 심문과 고문 그리고 조롱을 받으신 예수께서 아침 아홉시경에 십자가에 못박히고 맙니다. 거의 즉결처분에 가까운 조처였습니다. 빌라도가 공식적으로 내걸은 처형구실은 '유대인의 왕'을 자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를 모욕합니다: "아하!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자기나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너라!"(막 15:29-30)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도 조롱합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여라!"(31-32)
마가에 의하면 곁에 달린 동료 사형수들도 예수를 모욕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던 수많은 무리들이 떠나고 제자들마저, 베드로마저 예수를 버렸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주변에는 그의 죽음을 조롱하는 무리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만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홀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기다리는 예수님의 외로움과 고통은 조롱하는 웃음소리들로 인하여 더욱 예리하게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의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의 내면세계에서 전개되던 갈등과 투쟁을 심리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죽어가던 예수께서 정신의 혼미한 상태에서 악마의 마지막 유혹을 받았다고 그리고 있습니다. 그의 소설에서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잠시 졸도한 상태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포기하도록 유혹받습니다. 예수께서는 구세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포기하고 지상에서 결혼하여 많은 자녀들을 낳고 평범한 삶을 살면서 늙어가는 환상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와 영혼의 투쟁 가운데서 예수께서는 초인적 의지로 육체의 욕망을 극복하고 메시야로서 십자가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후에 영화화되었는데, 예수님의 신성을 모독하였다 하여 논란이 일었습니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답게 예수님의 고난에서 영혼과 육체의 갈등을 이끌어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을 정작 고통스럽게 하던 '최후의 유혹'의 정체를 다른 곳에서 찾아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조롱들 속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던 저 사탄의 음성이 다시 들리지 않습니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마 4:6) 만일 십자가에서 뛰어내린다면 사람들은 모두 회개할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순식간에 실현되지 않을까요? 만일 그 자리에 우리가 서 있었다면, 적어도 조롱은 아니라도, 우리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기적을 통해 뛰어 내림으로써 자신이 메시야임을 홍보하도록 갈망하지 않았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수님을 구해달라고, 기도의 응답을 보여달라고 간구하지 않았을까요? 의인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절규하지 않았을까요?
이미 경건한 히브리 신앙인들은 의인들이 겪는 고난에 직면하여 이렇게 절규하였습니다(시편 22:1이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1)
.....................
나는 사람도 아닌 벌레요, 사람들의 조롱거리, 백성의 멸시거리일 뿐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빗대어서 조롱하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면서 비아냥댑니다.
'그가 주에게 그토록 의지하였다면, 주가 그를 구하여 주겠지. 그가 그토록 주의 마음에 들었다면, 주가 그를 건져 주겠지'합니다.(6-8)"
동료인간들의 사악함 때문에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최소한의 인간적인 동정심도 없이, 하나님이 구해주는지, 혹은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하는지 시험삼아 '구경'하는 자들의 이른 바 '신앙'의 논리가 고통받는 의인의 가슴을 찢습니다. 결국 그가 당하는 고통과 고난은 하나님의 무능력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스스로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임을 입증하는 사건으로 간주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죄한 의인을 살해하는 자들이 스스로의 행위를 '신앙'의 논리로 정당화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신앙'의 논리를 깨뜨리고 세상을 순식간에 혁명상황으로 몰고가고 싶은 욕구, 그래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스스로의 무죄를 입증하고 싶은 갈망 - 그것이 최후의 유혹이 아니었을까요? 아니, 그러한 '신앙'의 논리로 메시야를 처형한 '신앙인들'이야말로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이야말로 저 '최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 아닐까요?
결국 예수께서는 오후 세 시경에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셨습니다. 마가는 저 시편 22편의 고통스러운 절규, "엘로이 엘로이 라마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절규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고 전합니다. 그것은 절망과 무기력감에 사로잡힌 사형수의 절규였습니다.
3. 우리가 찾는 메시야
우리는 이 시간, 예수님을 조롱하던 무리들과는 구별되게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깊은 슬픔을 지니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 누구 앞에 나온 것입니까? 우리의 갈망을 모두 들어주는 전능하신 분, 우리의 기도에 즉각 응답하시는 구원자를 찾아 나온 것은 아닙니까? 그분이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있는지 구경하던 구경꾼들처럼 모여든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주님은 다름 아니라 바로 십자가 위에서 무기력하게 조롱받던 그 예수님입니다. 바로 이분, 즉 조롱받고 있는 구세주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만찬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뜻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칼과 불로 인간을 심판하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폭력과 탐욕이 망쳐놓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또 다른 폭력과 탐욕을 무기로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인간에게 내어주십니다. 스스로를 인간의 조롱과 비웃음에 내맡겨 스스로를 희생시키십니다. 바로 이것이 성서의 하나님이 일반 종교의 신과 다른 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일반 영웅들과 달리 우리의 구세주가 되는 이유입니다. 슈퍼맨이나 배트맨이 인류의 구세주가 되지는 못합니다. 미국의 패권주의가 인류를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오직 스스로를 내어줌으로써 인간들의 죄를 폭로하시고, 인간들의 철저한 회개를 요청하시는 하나님만이,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무기력한 사형수로 죽어간 예수님만이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호산나'를 부르던 무리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전지전능한 능력과 기적으로 세상을 구원하기를 갈망했던 사람들은 떠났습니다. 그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가 수치의 상징, 패배의 상징, 환멸과 절망의 상징일 뿐입니다. 그들의 사고 구조, 그들의 신앙의 구조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조롱하던 무리들의 사고 및 신앙의 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슈퍼맨처럼, 배트맨처럼 우리의 삶의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주기를 기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사고 및 신앙의 구조도 무기력한 메시야를 조롱하던 자들의 사고 및 신앙의 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메시야는 십자가에서 고난받는 메시야입니다. 우리의 기대를 깨뜨리고 고난받는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 인간 예수, 그 유대청년이 우리의 메시야입니다. 예수님을 영광의 주님으로 묘사하려는 모든 기대들 속에는 "만일 십자가에서 뛰어 내린다면, 믿겠다"던 자들의 기대가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원하던 메시야,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전능한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살해되었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오늘날 한국교회를 찾아오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요? 행여나 그분의 모습이 우리가 원하던 모습과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의 갈망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또 배척하게 되지는 않을까요?
최근에 영국 BBC방송은 영국 맨체스터대학 연구팀이 첨단 법의학과 컴퓨터 기술을 동원하여 그려낸 '예수의 얼굴'을 공개했습니다. 이 모습은 최근 발굴된 1세기 유대인들의 두개골을 바탕으로 얼굴 윤곽과 턱수염 등을 복원한 것입니다. 연구팀은 "예수의 두개골을 사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의 얼굴은 아니지만 실제 모습을 추정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예수의 얼굴'은 그동안 우리가 상상하던 모습과는 너무 차이가 납니다. 창백한 피부, 마른 체구, 이지적인 얼굴, 그리고 긴 금발 머리카락을 지닌 백인 미남청년을 상상하던 우리에게 이 '예수의 얼굴'은 너무나 뜻밖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커다란 눈, 구릿빛 피부, 둥근 코와 두툼한 입술, 검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지닌 그의 모습은 결코 탁월한 지도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얼굴모습은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서양교회가 전해준 예수의 모습과는 판이한 모습에서 우리는 유대인 예수의 모습만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을 처음부터 다시 추구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선입견과 기대를 버리고 역사적 예수께 정직하고 진솔하게 다가가도록 요청받습니다. 우리는 상상의 예수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살았던 예수, 무엇보다도 십자가 위에서 저 '최후의 유혹'마저 극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한 예수와 함께 살아가도록 요청받습니다.
{한겨레신문}의 김선주 논설위원은 이 '예수의 얼굴'을 보고 "'예수없는' 한국교회"라는 칼럼을 썼습니다. 그는, 한국 개신교 목사들 가운데 65%가 담임목사직을 자녀에게 세습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는 어느 조사 결과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예수없는' 한국교회를 개탄하며 글을 끝맺고 있습니다:
"이틀동안 책상 앞에 걸어놓고 바라본 복원된 예수의 얼굴은 첫인상과 달리 친숙해졌다. 눈은 고통과 연민으로 가득해 보이고 코는 울먹울먹하여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기독교신자가 아니더라도 인류가 사랑했던 '사람의 아들' 예수가 한국의 대형 교회 앞에서 지금 출입금지당한 채 울음을 터뜨리고 있을 것만 같다."({한겨레신문}, 2001.3.31. 제6면)
예수께서는 인간들의 호기심과 욕망을 채워주는 메시야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실망시키는 메시야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메시야를 우리의 기대와 욕망에 맞추어 주문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 메시야가 고난받았으면, 고난받는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한가운데 계셨다면, 이제 우리는 고난받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들과의 연대를 통해서만(!) 고난받는 메시야와 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