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사학계의 거목 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의 성지순례 연재가 시작됩니다. 이제껏 성지순례하면 당위성에 붙잡혀 그 의미를 놓치기 십상이었습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성지순례의 의미를 곱씹어 성지순례의 형식 뿐 아니라 내용도 채우는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 편집자주
Ⅳ. 이슬람 종교와 정권의 팽창
▲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마호메트가 40세 때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받고, 수도 멕카에 운집해 있던 잡종 종교를 쳐부수어 없애는 전쟁을 일으켜 기원 630년에 이슬람 종교를 창시했다. 유대교와 기독교만은 유일신 종교로서 존속시키는 정책을 섰으나 제한된 선교의 자유를 주었다.
마호메트는 그의 언록인 ‘코란’이라는 경전을 성경으로 삼고 그 종교를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과 나라를 무력으로 정복하여 2년 만에 아라비아 반도 절반을 정복했고, 북진해서 다메섹을 점령하고(635) 그리고 예루살렘을 또한 638년에 점령했다. 632년에 마호메트가 죽었으나 그가 계시로 본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났던 큰 바위가 예루살렘에 있었는데 그 바위들 가운데 두고 이슬람 사원을 세운 것이 오늘날의 황금색 원옥 사원이다. 그리고 옛 예루살렘 성전 자리가 쓰레기 장으로 되어 있던 곳에 이슬람 사원을 세운 것이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사원인데 이 두 큰 사원이 예루살렘의 이슬람 즉 모슬렘 도시의 표적처럼 되어 있다. 이제 예루살렘에는 이슬람과 기독교와 유대교 교인들이 공존하는 도시가 되었으나 그 도시는 이슬람 정권 아래 통치되었다.
이슬람 정권은 무력으로 중동의 사산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일색의 세상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유대교와 기독교 외의 모든 기존 종교들이 다 멸절하게 되어서 잡신과 우상숭배가 사라진 것은 하나의 공적으로 칠 수 있다.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은 제한된 종교자유를 감수했는데 이슬람 종교를 훼방하거나 이슬람 신도와 결혼하거나 또는 전도하지 못하게 엄명하였고 그 밖의 여러가지 권유사항을 만들어 기독교 교세의 확장을 막았다.
이슬람 정권은 무력으로 중동 일대는 물론, 북아프리카 전역을 점령했고(700) 로마 제국의 영토 2분의 1을 점령했다. 이러한 전쟁으로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의 기독교 성지 순례가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럽의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이 예루살렘 성지의 순례의 자유를 위하여 성지회복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이 십자군 전쟁이었다,
Ⅴ. 제1차 십자군 전쟁
1099년에 교황 우르바노(Urbanus) 2세가 예루살렘 성지의 순례의 자유를 위해 십자군 운동을 일으켜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영주들이 군인 5만명을 동원해서 출전하였다. 총 지휘자 보에몽(Bohemund)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과 아들과 조카들과 기타 영주들이 가담했는데 수도사들과 순례자들도 끼여 있었다. 실로 먼 거리의 원정이었으므로 중도에 전사하거나 낙오된 사람들도 많았다. 이슬람 영주들의 성들을 점령하거나 평화적인 협상으로 진군해 가다가 에뎃사 성에 도달하였는데 이 성은 아르메니아인 기독교인 영주가 소유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성의 영주가 십자군에게 양보하였다.
에뎃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최대의 이슬람 도시는 안디옥이었다. 여기는 12km의 긴 성벽과 400개의 무장한 탑이 있는 곳이어서 점령하기 힘든 곳이었는데 그 성 안에 살고 있던 한 기독교 사제가 밤에 성 밖으로 밧줄을 몰래 넘겨주어서 십자군이 용이하게 성 안으로 들어와 성몬들을 열고 하루만에 그 성을 점령했다.
십자군이 유럽을 떠난지 3년이 걸려서 이제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동안 군대의 3분의 1을 중도에서 잃었다. 예루살렘의 성벽은 4km이고 그 성벽은 여러번 개축되어 견고하였다. 어떤 수도사의 권고를 받아 들여서 십자군이 맨발로 단식하고, 3일간 그 성 밖에서 성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아무튼 3일만에 예루살렘 성을 십자군이 점령하고 이슬람 군대를 물리쳤다. 성 안에는 기독교인은 없었고 유대인들이 살해되었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병력은 모두 합쳐서 기마병 삼백과 보병 이천이었다. 예루살렘 도시는 무참하게 파괴되었고 방화와 살생이 자행되었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고드프루아는 라틴 왕국의 왕좌를 거부하고 ‘성묘사원 수호자’라는 명목으로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되었고(1100년) 교황청이 예루살렘을 교황청의 영지로 만들자는 요청을 거부했다.
고드프루아가 죽고 그의 동생 보드앵이 이 작은 왕국의 제1대 왕으로 취임한 후 88년 동안 예루살렘과 그 주위의 십자군 점령 도시들과 항구들이 평화를 유지하고 성지순례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예루살렘 도성은 재건 되었고, 성당들이 서고 그리고 아르메니아인 교회와 희랍 정교회 성당들이 세워졌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