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증후군을 극복하고 냉철함을 되찾아야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 ⓒ베리타스 DB |
흑룡의 해라는 격동의 임진년이 지나가고 2013년 새해가 시작된다. 대선 이후 한국사회의 진보진영 안에 신경성 질환 같은 ‘소진증후군’이 열흘 남짓 한반도를 전염병처럼 휩쓸더니, 이제 조금씩 조금씩 절망의 저기압권을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소진증후군’(Burnout Syndrome)이란 개인이나 집단이 어떤 일에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몰두하다가, 기대하던 그 일이 갑자기 실패로 끝나던지 아니면 심리적, 정신적인 극도의 누적된 피로감 때문에 무기력증, 자기염오, 직무거부, 열정상실, 의미상실 감정 등 소위 말하는 심리적 붕괴(멘붕)를 경험하는 정신질환 증후군을 말한다.
신문도 TV도 보기 싫고, 누구에게 전화를 걸기도 싫고 받기도 싫다. 신경은 민감해지는데 일에 집중력은 떨어지고 모든 것이 귀찮아진다. 짜증도 잘나고 이유없이 가까운 집사람에게 화도 낸다. 정권교체 실현운동에 앞장선 열심도 내지 않았던 필자도 열흘 남짓 ‘소진증후군’을 앓았는데, 하물며 이번만은 새 시대, 새 정치, 새 세상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고 온몸을 던져 헌신한 문재인 후보자를 비롯한 민주인사들, 그리고 새 정치 출현을 앙망하던 시민들과 기독교계 진보적 신앙인들의 ‘멘붕’ 충격이 얼마나 클 것인가 생각하면 ‘소진증후군’이라는 신조어 심리학 용어가 현실적으로 실감난다.
그러나, 사람은 너무 오랫동안 소진증후군 병리현상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않된다. 지나친 오랜 기간 동안 그 증후군에 빠지면 정말 병자가 된다. 극단의 경우엔 절망적인 삶의 포기에 이르기도 한다. 대선결과 이후, 4명이나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사회 양극화 현상의 심각성이 얼마나 극한적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는가의 표징이다. 그러나, ‘생명’이란 살라고 하는 지고한 명령이다. 경박한 현실수용이나 비겁한 현실타협이 아니더라도 다른 제3의 길이 있다.
패배가 아닌 실패, 역사퇴보가 아니라 진일보
정권연장과 정권교체 양단간 싸움에서만 보면 2012년 대선결과는 한국의 보수정당인 새누리당의 승리요 상대적으로 진보정당인 민주통합당의 패배라고 말한다. ‘대권투쟁’이라고 부르는 민주주의 선거방식의 밑바탕에 놓여있는 정치철학엔 그 나름대로 논리와 명분이 있겠지만, 유권자 51.6 % 획득정당은 승리요, 48 % 득표정당은 패배라고 부르는 용어자체를 필자는 받아드릴 수 없다. 이것은 완전히 ‘승자독식’의 정글의 논리이지 민본주의 논리는 아니다. 진보세력은 집권에 실패한 것이지 정치적 이념이나 비전이나 미래의 희망의 씨앗 뿌리기에서 절대로 ‘패배’한 것이 아니다.
‘실패’(失敗)란 일이 뜻한바 대로 되지 못하거나 그릇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말한다. 실패의 반대는 성취이거나 성공이지 패배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패배(敗北)란 싸움이나 겨루기에서 짐으로써 스스로를 포기하고 자신감을 상실한 것이다. 패배주의가 더욱 해로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다시 한번 분명하게 구별해두자. 한국사회의 진보세력은 2012년 대선에서 정권교체 혹은 시대교체에서 실패한 것이지 패배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실패와 패배를 혼동하면 유권자 48%라는 절반 가까운 깨어있는 시민의 정신과 성의와 열망을 너무나 쉽게 짓밟고 무시하는 태도인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실현하려는 그분의 뜻이 그 당시 현실조건에서 당장은 ‘실패’로 보인 것뿐이지 사실은 실패가 아닌 것이다. 더욱이 ‘패배’란 더욱더 아니다. 예수가 정말 실패했거나 더욱이 패배했다면 숨을 거두며 “다 이루었다”(요19:30)는 선언은 패배자의 구차한 자기변명이란 말인가? 필자는 2012년 대선에서 정권교체에 ‘실패’한 이유를 철저하게 성찰하고 바르게 원인 분석하는 일은 절대로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패배감에 사로잡히는 것은 절대금물이라고 본다.
자기 밥그릇과 부동산값 하락과 투자주식의 주가하락을 염려하여 보수정권의 집권연장을 선택한 50-60대 유권자들의 현실적 욕망과 집단이기심을 ‘대의’(大義)와 ‘공의(公義)’로서 설득해내지 못한 정성의 부족은 진보정당이 철저히 반성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타협하거나 아부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것을 마치 ‘현실정치 감각 부족’이라고 자괴하는 자기기만을 저질러서는 않된다. 정치정당은 그렇게 할런지 모르지만 진보기독교 집단은 다수 대중의 뜻이 반드시 옳거나 천심이라고 보지 않는다. 예언자정신은 대중의 소리와 하나님의 뜻을 혼동하지 않았다.
더욱이나 진보진영의 입장에서 볼 때 대선 실패결과를 놓고 마치 역사가 방향을 잃고 후퇴하였다고 섣불리 단정한다거나 역사엔 뜻이 없고 오직 양육강식의 힘의 논리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역사냉소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자세히 보면, 정당정치중심에서 집권투쟁에서 분명히 실패했지만, 역사는 분명히 지난 대선 기간중 한발자국 앞으로 전진하였다.
2012년 1년 동안 한국 언론계(MBC,YTN,KBS,국민일보)에서는 동시다발적인 장기간의 언론노조투쟁이 있었다. 똘똘 뭉친 수구보수언론의 집단적 마취약 투여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흐리멍텅하게 잃지 않고 정권교체와 시대교체와 정치패러다임 전환을 주체적으로 참여하면서 뜻을 모아준 1480만표의 의미를 결코 가볍게 해석해서는 않된다.
말이야 바르게 말하지만 김대중정권이나 노무현정권의 집권방법처럼 보수와 진보정당의 합종연횡(合從連衡) 결과물도 아니었다. 새로운 정치의 출현을 갈망하는 자생적 안철수 지지 시민세력과 민주진보세력의 ‘대의와 미래역사 비젼’에 대한 공감대로서 이뤄진 정치연합운동이었다. 이것은 역사의 퇴보나 역사방향의 실종이 아니라 비록 집권엔 실패했지만 역사의 뚜렷하고도 의미 깊은 ‘진일보’(進一步)로 보아야 한다. 역사과정엔 우연은 없다. 향후 5년 후에 또 한 번의 변혁을 시도한다면 1480만명의 역사의 진일보를 전진시킨 그들의 살과 혼 속에서 새로운 꽃이 피어날 것이다.
수구언론의 자기반성 없고, 기회주의자를 내세운 국민대통합의 문제
2012년 대선에서 새누리당의 재집권 일등공신은 개인이 아닌 한국의 수구보수언론 단체들임을 깨어있는 씨알들은 모두 알고 있다. MB권력은 보수정당의 집권연장을 위해서 지난 5년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언론장악에 공을 들였다. 필자는 대선결과를 심층분 석하는 정치학자나 정치가들 그리고 사회저명 인사들의 집단좌담 속에서 ‘한국 수구언론 권력집단’의 공과에 대하여 아무런,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20세기 후반 한국사회에서 언론인으로서 재야지도자였던 함석헌 옹이 어디에선가 말하기를 오늘날 언론의 사명과 영향력은 중세기 종교가 하던 일을 감당할 만큼 중요하고 지대하다고 했다. 동시에, 그러므로 언론의 타락과 권력야합과 여론조작과 국민기만은 국민의 판단능력에 혼동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국민의 두뇌 속에 서서히 마취약을 투입해서 정상적 판단을 못하도록 만드는 마약상 같은 천인공노할 반인륜적 기능을 한다고 혹평한바 있다.
어차피 민주주의 선거제도를 통해서 집권당을 결정하는 한국의 현질서 에서 박근혜 정권의 탄생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당선자 박근혜님에게 두 가지만을 진심으로 권고하고 싶다. 진정으로 국민대통합을 이뤄보려 한다면, 새누리당의 집권의 일등공신인 수구보수 언론기관을 국민전체의 눈과 귀가 되도록 제자리로 돌려놓도록 하시라. 문재인씨를 지지한 유권자의 48%를 다분히 ‘친북성향, 좌빨 집단’이라고 너무나 쉽게 몰아붙이는 수구보수언론을 그대로 놔둔 채 국민대통합은 절대로 불가능하며, 성공한 대통령이 되지도 못할 것이다.
둘째 권고는, 국민대통합 위원회의 중책자 담당자로서 호남출신 정치인 한모씨와 김모씨를 임명하셨는데, 그러한 인사정책과 주위의 추천 조언자들을 옆에 두고서는 국민대통합은 불가능할 것이다. 앞서 거명한 두 분의 개인적 정치역량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박근혜님을 지지하지 않은 광주시민 유권자 90%중 거의 모두는 국민대통합추진위원회 위원장과 수석부위원장 명단을 보고서 박근혜님이, 대선에서 표를 주지 않은 48%의 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지, 알고도 아예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국민대통합을 위한 첫발걸음으로서 화해의 손내밈은 강한 권력에 의해 피해당하고 상처받은 약자들의 집단과 피해자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이다. 현실권력을 쥔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그렇게 스스로 손을 내밀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진정성을 진솔하게 삶과 행동으로 보이면서 기다리는 일 뿐이다. 더 이상의 적극적 유도나 선도는 강제요 꾸밈이요 선전이요 제3류 연극이 될 뿐이다.
마지막으로 진보적 기독교계 진영이 진지하게 생각할 점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 자신들도 모르게 빠져든 흑백논리, 선악 이원 캠프론, 빛의 자녀들/ 어둠의 자녀들 등등 이분법적 도식에서 우리스스로 해방되어야 하겠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다.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라인홀드 니버가 경고한대로 도덕적 유토피아니즘에 빠지지도 말고 정치적 냉소주의에도 빠지지 말아야 한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전13:6). 현실에서 불가능한 사이비 중용론에로 도피하지 말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2)는 성경의 말씀을 순명해야 한다.
진보적 기독교 사회운동 동지들이 분명하게 의식해야 할 것은 1970-80년대의 시대가 지나갔고, 분명이 30년을 단위로 하는 한 세대가 지나고 새로운 세대가 이미 동텄고 진행되고 있다는 역사의식 전환이 필요하다. 지난 30년 한세대의 중심화두는 ‘민주화, 인권, 민족화해’이었다면 지금 새 세대의 화두는 ‘생명, 평화, 정의’이다. 신학적으로 높고 숭고한 이 화두를 현실정치 언어로 번역하면 ‘민생, 보편복지, 공공성’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로 압축되는 높고 숭고한 비전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항상 구체적인 현실정치의 정책적 이념인 ‘민생, 보편복지, 공공성’ 보다는 ‘생명, 평화, 정의’라는 화두가 추상적으로 들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걸어온 그 길을 가야한다.
모두가 맨 처음에 그랬듯이 모두가 빈 맘으로, 초연 초탈한 자유인으로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선언하시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 예수를 바라보며”(히12:2) 다시 신들매를 고쳐 매고 서로서로 손을 내밀어 마주잡고 일어서서 걸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