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이 책은, 그러나, 필자의 처녀작으로서 <창세기> 연구서인 『신의 약속은 파기될 수 없다』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78)라는 졸저가 출간된 이후, 약 15년쯤 뒤, 다시 <창세기> 연구로 돌아가 『창세기』 (서울: 전망사, 1993)라는 이름의 창세기 주해서(註解書)를 저술해낸 후, 또 다시 이를 기초로 하여 칼럼 형식에 의한 창세기의 케리그마化(=복음 선포化) 작업으로 다시 이어진 것이 바로 얼마 후 출간될 『죽음을 극복하는 길』이라는 책이라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필자가 대학 교수직에서 은퇴(2006년 2월 말)를 함과 동시에 스승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시편 I』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이라는 제목의 <시편 주석서>를 ‘건강을 해치는 무리함’을 무릅쓰고 펴내었었는데, 그러나, 이 일은 그렇지 않아도 병약한 몸으로 간신히 <무사(無事) 은퇴>라는 긴 한숨을 겨우 턱걸이로 넘겼었던 그 나의 건강에게는 결정적인 위기를 불러들이는 불행스러운 계기가 되었다. 더 이상 앉아서 컴퓨터 자판(字板)을 타자할 수 없을 정도로 양 손, 양 팔, 그리고 양 다리가 붓기 시작하여 기동이 어려울 정도의 <류머티즘>(rheumatism)이라는 질병이 찾아 온 것이다. 그 때부터 나는 서둘러 병원들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시작하였는데, 오, 주여! 그런데도 이 모진 목숨이 거미줄에 매달리듯 여전히 살아남아 그 “험악한 세월”(창 47:9)을 생존하게 된 것이, 정말! 기적 같아서, 문득, 이토록 신의 큰 은총이 내게 “잔이 넘치도록”(시 23:5c) 임한 것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어서, 감히(!), 나는 후학 목회자들에게 구약성서를 설교강단의 본문으로 채택할 수 있게 독려하는, 소위, <마르시온주의(Marcionism) 타도의 깃발>을 들고 다시 사력을 다해 일어나 창세기 케리그마(kerygma)를 ‘칼럼’ 형식으로 쓰기 시작하였던 그 결실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러나 바쁜 나의 발걸음을 막듯,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쓸려는 바로 그 즈음(2012년 말경), 뜻밖에도 미국 예일대학교의 셸리 케이건(Shelly Kagan) 교수가 최근에 펴낸 <예일대 공개 명 강의>(OpenYaleCourses)로 널리 선전된 『죽음이란 무엇인가』 (Death,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 Press, 2012)라는 책을! 손에 쥐게 되었다.(비록 이 책이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 강의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이 강의 자료가 2012년에야 비로소 책자로 공개되고 또 한국 독서계에도 매우 신속히 2012년 말에 널리 홍보되었는데, 그러나 이 책은 탈고[脫稿] 직전[直前]에 있는 나의 책 『죽음을 극복하는 길』의 중심주제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는 내용의 책이었다.) 따라서 우선 이 책을 읽고 그 느낌을 간략히 잠깐 이 에필로그에서 언급하여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분명 케이건(S. Kagan)의 책(DEATH)은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의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 강의 저서로 널리 홍보된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New York: International Creative Management, Inc.,2009)라는 책과도 그 스타일이 여러 모로 비슷한 성격의 책이라 할 수 있지만,(나의 책 제 5장에서는 이 문제를 언급하고 비평하였음) 무엇보다 이 케이건(S. Kagan)의 책은 필자의 책(『죽음을 극복하는 길』)의 기본주제와 실제로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케이건(S. Kagan) 교수는 우선 철학분야 교수로서, 전적으로 철학적인 관점에서, <죽음>의 의미를 다루되, ‘질의-응답’→‘질의-응답’→‘질의-응답’을 무수히 반복하면서 자신이 말하려는 주장으로 독자들을 끌고 가는, 이른 바, 샌델(M. Sandel) 교수의 논법과 외형상 거의 동일한 성격의 책이었지만, 이 책이 내린 그 결론은 필자의 책(『죽음을 극복하는 길』)의 중심 주장과 거의 비슷한 결론(cf. 나의 책 <부록 1 “성서에서 본 ‘죽음’과 ‘죽음 이후’”>)에 이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종교적 죽음이해와의 직접적인 대화 및 충돌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피하여갔다는(?) 점에서, 그 결론에 와서는 나의 견해와 달리하고 있음을 본다. 즉 그는(S. Kagan)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영혼불멸 사상>과는 처음부터 예리한 대치(對峙)의 각(角)을 세우면서도 동시에 기독교의 <부활>신앙도 그의 철학적 변증법으로 완전히 부정하고 만다.(cf. 원서 제 6장 “Personal Identity”, 한국어 역서[譯書] 제5장 “나는 왜 내가 될 수 있는가”에서 ‘인간 인격의 정체성’을 논하면서 그는 철저히 인간에 대한 물리학적인 입장만을 대변한다.) 케이건(S. Kagan) 교수는 처음부터(제1장에서부터) 나와 동일한 입장으로 헬라철학의 이원론(인간=육체+영혼이라는 이원적[二元的] 등식[等式] 이론)을 철저히 비판하고 부정하는 입장을 <질의-응답>을 반복하는 특수 논법으로 적절하게(in my opinion) 설파한다. 그의 주장의 전개과정을 요점적으로 간략하게 일별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고 하겠다.
첫 장부터 그는 <삶이 끝난 후에도 삶은 계속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사후(死後)의 생에 관한 문제를 맨 먼저 심도 있게 물어 들어간다. 즉 <육체 없이!! 영혼 또는 정신이 따로 존재하는가?>라는 논제를 문제 삼은 다음, 그 대답은 명백하게 ‘아니다!’(No!)로 결론짓는다. 심지어는,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이원론적 영혼불멸 가설>을 잠정 수용하는 것 같은 논법으로 끌어들인 다음에 그는 곧 단호하게 그의 질의-응답의 반복논법에 따라,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가?>라고 묻고, 그 대답으로서, 마치 신약성서 신학자 쿨만(O. Cullmann)의 반박논리에서처럼, 정신이나 영혼은 악기와 음악의 관계처럼 육체라는 악기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화음(和音)에 불과하다는 논리를 가지고, 그는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주장 뿐만 아니라 정신/영혼을 육체와는 ‘다른 존재’라고 주장하는 현대 철학자 데칼트(R. Decartes)의 이론도 거침없이 반박한다. 그 다음,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인 케베스의 주장(Cebes; 윤회하는 영혼은 비록 소멸 가능성이 낮다고는 하더라도, 수많은 육체를 거쳐 가는 동안 결국은 소멸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게 된다고 주장함)과 심미아스(Simmias)의 주장(육체가 만들어낸 화음[和音]으로서의 영혼이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소멸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함)들과 제휴하면서, 케이건(S. Kagan)은 마침내 <육체가 만들어내는 화음이 육체보다 먼저 존재할 수는 없다>는 점과 <악기에서 나오는 화음은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악기가 부셔질 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화음도 또한 동시에! 소멸하는 것>이라는 견해에 손을 들어주며 육체에서부터 분리되는 영혼의 그 존재성과 그 불멸성을 동시에 부인하고 반박하는 논리로 결론에 이른다. 즉 인간의 ‘인격성’은 육체기능의 소멸과 함께 소멸되므로 ‘인격성 없는 영혼’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케이건(S. Kagan)은 이러한 점에서는 철저히 물리학자들의 입장을 따라간다.(그는 어디까지나 육체의 모든 물리적 기능이 소멸된 상태가 바로 ‘죽음’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위 21세기 최고의 천문물리학자인 호킹(S. Hawking)이 주장하는 이론인 <우리 인간 뇌(腦)가 가진 창조성 이론과 그리고 생명 게임의 법칙(케임브리지 대학의 젊은 수학자 존 콘웨이[John Conway]교수에 의하여 발명된 법칙)에 의한 ‘인간 뇌’의 ‘모형 의존적 진화의 영원성’ 논리>(S. Hawking, The Grand Design, London: Bantam press, 2010, Pp. 171-181)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침묵한다.
분명, 이러한 케이건(S. Kagan)의 이론은, 나의 판단으로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전능성(사도신경의 첫 신앙고백에 대한 성서 신학적/역사 신학적 의미)에 기초한 기독교의 부활신앙과 그리고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역사적인 활동/구원사적인 섭리에 대한 신앙이 지닌 그 의미파악에는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즉 <왜 이 우주가 무(無)가 아니고 유(有)인가?> <왜 이 우주에는 결코 깨뜨릴 수 없는 ‘설계’(design: 設計)가 존재하고 있는가?> <왜 ‘우리’[인간 뇌]가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최종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는 진지한 신 인식론적(神 認識論的) 깨우침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마치 우주 물리학자들이 은하계들 속에 그리고 또 은하계들 사이에도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바, 우주 전체 질량의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는 그 암흑물질(dark matter)의 존재성(me on과 ouk on으로 동일하게 나타나는!! ho on의 존재성)에 대해서는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이 모두를 <있게[존재하게] 하신 자>(One who causes to be=Yahweh; cf. Haupt-Albright theory)에 대한 인식과 그 신앙고백에 대해서는 우주 과학자들과 함께 그도 또한 말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나변에 있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야훼’와 그의 역사적 활동(One who acts in history)에 대한 성서비평학적-성서신학적인 인식에는 그들이 아직 이르지 못한 때문으로 본다.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인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의 야심작인 『신을 옹호하다』(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 Yale University Press, 2007)도 또한 이 시대의 대표적 무신론 논객이며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2006,한국어 번역 2007)의 저자인 저 유명한 무신론의 전도사,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에게는 단지,(!) <‘이성주의적인 환원주의’에 극단적으로 빠져있지 말고! ‘사랑의 [윤리]종교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종용하는 것> 이상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필자의 이 책, 『죽음을 극복하는 길』은, 구약성서의 야훼신앙(=Being의 사역형[使役形] 동사[動詞] 이름이라는 신앙)을 이해하는 자들에게는,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認識)의 길을 뚜렷하고도 확실하게 제시해주고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창 1:1; 시 90:1-3) 2012년 12월 31일 보신각의 2013년 새해를 깨우는 종소리를 들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