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근래 이명박 대통령이 새로운 헌법재판(이하 헌재)소장으로 추천한 이동흡의 청문회를 보고 필자는 다시 한 번 아연실색했다. 임기 초반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이명박은 정상적 상식을 가진 국민들로서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인간을 다시 고위공직자로 추천한 것이다. 그는 어디에서 그렇게도 국민의 상식이나 바람과는 정 반대되는 인물들을 찾아내서 추천할 수 있단 말인가.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그의 주변에는 그런 인간들만 모여 있는 것인가! 이동흡 같은 인간이 존재하는 것 자체도 기가 막힌 일인데 그런 사람이 오랫동안 판사라는 공직을 수행해 왔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그런데 이명박이 다시 그런 인간을 헌재의 수장을 만들려고 한다니 말이 나오지 않는다. 도대체 이런 인간들이 공직자로서 판치며 사는 대한민국이란 어떤 나라란 말인가! 상당수의 공직자들이 가난한 국민들이 낸 세(공)금을 자기 쌈지 돈처럼 쓰고 있다니 가난한 국민들은 허탈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도 이런 사람만을 신통방통하게 찾아내서 고위공직자로 만들려는 이명박이란 인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절망한다.
이 헌재란 곳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가? 여기서는 제반 법률들 가운데 헌법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되는 법조항들을 심의하여 위헌 내지는 헌법불합치 판정을 내리는 최고의 기관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헌법,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헌법정신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과 관련해서 필자는 신학자로서 헌법에 대한 문외한이지만 헌재가 내린 위헌판정들 가운데 하나의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그 문제점을 부각시켜보려고 한다.
헌재는 2002년 8월 29일에 소득세법 55조에 의해서 부부가 함께 벌어들인 소득을 합산해서 과세한 것을 위헌으로 판결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대략 이러하다. 남편은 의사로서 년 간 약 5억 원을 벌었고 부인은 사업가로서 그도 약 5억을 벌었다. 이 부부는 1년간 10억 원을 벌었고 국세청은 약 35000만원의 세금을 부과했다. 그런데 당사자들은 부부소득의 합산과제가 부당하다하여 헌법소원을 제기하고 헌재는 그것이 위헌이라 하여 부부소득을 분리 과세하도록 했다. 그래서 이들은 각각 약 4천만 원씩의 세금을 냄으로써 모두 8천만 원의 세금을 냈다.(이러한 계산은 정확하지 않고 다만 과세형태에 따라서 세금납부액수가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는 것만을 예시한 것이다).
이러한 부부소득합산과세가 갖는 위헌의 논거로 헌법 36조 1항의 “혼인과 가정항목”과 헌법 11조 1항의 “평등조항”을 제시한다. 헌법 36조 1항은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라고 되어 있다. 부부가 결혼했다고 해서 그들의 수입을 합산해서 과세하는 것은 “평등원리”에 저촉된다고 봐서 헌재는 그들의 합산과세를 위헌 판결한 것이다.
그런데 헌법 36조 1항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은 결혼한 부부 개인들 사이에서의 지켜져야 할 존엄성과 평등성을 말하는 것이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원리와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헌법 11조 1항에서 말하는 평등원리도 일반적 평등원리를 제시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평등원리는 다른 부부에게는 합산과세를 하지 않고 그들에게만 합산 과세했을 경우에만 성립된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면 하나의 삶의 단위로서 책임과 의무를 지닐 때만 국가는 그 결혼을 보장한다.
예를 들어서 외국에 살고 있는 부부가운데 한 사람, 예를 들어 남편이 범죄행위를 해서 추방당할 경우 그 부인이 그 나라에 살 권리를 갖고 있다면 남편을 강제로 떼어서 추방할 수 없다. 따라서 부부가 이룬 가정은 하나의 책임과 의무의 단위며 따라서 독일 같은 경우 산술적으로 부부소득의 합산과세는 하지 않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독신들과는 다른 세금부과 범주에 들어가 많은 세금을 내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단위이기 때문이다. 이 때 부부는 진정한 의미에서 국가의 보호를 받는 생활단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헌재는 단순히 “평등”원리만 내세워서 결혼한 가정의 남편과 아내를 완전히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처럼 분리해서 적게 과세하게 함으로써 부부의 공동체성을 해체시키고 납세의 의무를 경감시킨다. 이러한 모순에 근거해서 부유한 사람들이 부부가 같이 살아가면서도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서 재산을 부인명의로 옮겨놓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부부소득 분리과세와 대비되는 법의 내용이 사회적 약자들을 지원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나타나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하면 그 대상은 부양할 수 있는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 그 자녀(들)가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행방불명이 되었어도 - 그 대상에서 제외된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부부의 경우는 헌법의 “개인의 존엄성”과 차별을 금지한 “평등권”에 의해서 소득의 합산과세는 위헌대상이 되지만 부모와 자녀의 경우는 자녀를 부모와는 분리될 수 없는 의무관계로 묶어서 자녀들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제기되는 가족관계의 구성과 그 상호간의 의무관계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 것인가?
가족이란 기본단위로서 부부와 그 자녀들로 구성된다. 여기에 첨가해서 보모님을 모시고 살 경우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현제들로 구성된다. 물론 이들은 종적으로 볼 때 양육과 함께 부양의 의무를 지는 동시에 상속과 재산분할 청구의 권리도 갖는다. 따라서 가족은 부양과 양육의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갖는 것이다. 그런데 소득세법에 의하면 부부는 상호 의무를 지지 않는 독립된 관계로 규정하고 부모와 자식은 상호의무를 지고 부양해야 하는 의존적 관계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수입을 갖고 있는 사회적 강자들에게는 세금혜택을 주면서 개인의 존엄성과 평등권을 내세우고 사회적 약자들을 지원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부모를 자식과의 관계에서 개인의 존엄성을 부정하고 부양의무자로 묶어 놓고 나아가서 타인들이 누리는 사회적 혜택에서 제외시킴으로서 평등권을 침해하고 있다. 왜 헌법에서 가족구성원들에게서 부부 사이에서 개인의 존엄성은 인정하고,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개인의 존엄성은 부정하는가? 사회적 강자의 권리는 인정하고 사회적 약자의 권리는 부정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헌법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성서는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성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정반대로 말하고 있지 않는가? 성서는 결혼한 남녀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 된다고 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보면 결혼의 신비 혹은 법적 관계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창 2:24). 신약성서에서도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19:5-6). 여기에서 보면 부부관계는 부모와 자식관계보다 더 밀접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부부는 결혼해서 한 몸이 되는 것이며 그것을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모와 자식관계는 오히려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남녀는 부모를 떠나서 결혼함으로써 한 몸이 된다고 할 때, 부부가 결혼하는 것은 곧 부모와는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의 경우 부부간의 사이와 부모와 자녀 사이를 우리와는 정 반대로 규정한다. 예를 들면 자녀가 18세에 성인이 되면 사회보장법체제에 의거해서 부모로부터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하여 살아가야 한다. 자녀가 18세가 되는 날부터 부모의 부양의무에서 벗어난 자녀는 대학에 가거나 직업학교에 들어가면 정부의 장학금으로 살며 공부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실업자로 등록하여 실업보험금으로 살게 된다. 아무리 자녀들이 많아도 부모는 자녀들의 경제적 지원에 의해서 살지 않고 독립해서 연금이나 연금이 없는 경우 사회적 지원금으로 살게 된다. 따라서 부모도 자식에 대한 부양의무에서 벗어나며, 자식도 부모를 보양할 의무를 지지 않는다. 독일이나 유럽 선진국들에서는 우리나라처럼 부부 사이는 경제적으로 독립된 개체로 갈라서 과세함으로써 세금을 감면해주고 부모자식 사이는 경제적으로 연좌제로 묶어놓아 경제적으로 무능한 자식의 존재로 인해서 가난한 부모들이 사회보장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의 헌법을 비롯하여 각각 법체계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한국의 법체계는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부르주아사회의 낡은 법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따라서 앞서 본바와 같이 한편 세법에서는 철저하게 사회적 강자들을 중심으로 되어서 부자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나아가 세법 구멍을 빠져나갈 수 있게 하는 반면 사회복지 법에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보다는 그들을 옥죄는 조항으로 가득 차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제반 갈등들, 이데올로기 갈등, 세대 간의 갈등,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의 갈등 등은 이러한 낡은 부르주아적 법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없이 사회적 강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데서 기인한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노동법이나 사회보장법 등이 더욱 그러하다.
둘째 소위 자유민주주의 사회 혹은 부르주아적 사회에서는 사적 재산과 사적 행복은 전적으로 국가가 책임지게 되어 국가나 국가의 법질서는 재산을 가진 부유한 사람들의 권리와 행복을 추구하고 보장해 주는데 복무하게 된다고 칼 마르크스는 그의 초기작품 “헤겔의 국가철학비판”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우파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헌법정신과 국가관을 들고 나오는데 사실상 그들이 말하는 국가정체성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강자들의 권익을 보장해 주는 국가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 헌법에서 민주주의를“자유민주주의"로 고치고자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과거 부르주아 계급이 봉건영주들에게서부터 쟁취한 자유를 오늘날의 국가에서 사회적 강자들의 자유로 만들자는 것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계급 즉 부유한 사람들은 국가를 자기들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국가로 만들어 자기들 마음대로(자유로이) 통제하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국가란 모든 국민의 권리가 아니라 부유한 사람들의 권리와 재산을 일차적으로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전근대적 사고에 기인한다. 얼마 전까지 대통령취임선서에 상투적으로 등장하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라는 표제어가 바로 이런 낡은 부르주아 국가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서 국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권만 보호하지만 부자에게는 생명과 재산권도 보호해준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국가는 불평등국가이다.
이 점이 바로 우리나라 헌법에 국가의 성격이 나타나있다고 보인다. 필자는 신학자로서 한국의 헌법 그리고 헌법정신에 대해서 전문적 연구를 하지 못한 문외한이지만 그 동안 한국의 헌법 제1조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 대해서 비판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독일헌법에서 국가의 성격을 말하는 기본법 20조에 보면 “독일연방공화국은 민주적이고 사회적 연방 국가이다.”(Die Bundesrepublik Deutschland ist ein demokratischer und sozialer Bundesstaat). 여기서 말하는 대한민국과 독일연방공화국의 국가성격의 차이는 한국은 민주공화국으로서 국민의 정치적 자유는 보장하는데 비해서 독일은 정치적 자유뿐만 아니라 경제적 평등까지를 보호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국체인 민주공화국이란 곧 민주주의에 기초한 선거와 의회주의에 기초한 국가라는 뜻이고 독일의 국체인 민주적-사회적 국가란 의회민주주의에다 사회적 약자들의 보호체제를 갖추고 그것을 지향하는 국가라는 뜻이다.
이렇게 독일은 1880년대부터 시작하여 1900년대 초에 완성된 사회보장제도와 1918년도에 도입된 민주주의 정치체제 의해서 국가를 운영해 오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민주주의, 즉 3권 분립을 통한 국가운영을 넘어서 독일은 요람에서부터 무덤에까지 모든 국민의 삶을 보장해주는 국가라는 점이다. 그들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이후 거의 완벽하게 4대 보험을 실시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실시하고 있으며 사회주택을 통해서 국민의 주거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고 있다. 여기에 독일이 갖는 국가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는데 국가는 국민들의 전반적 삶의 문제들을 거의 다 해결해주고 있다.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와 함께 국민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경제적 조건들을 충족시켜주는 “사회적 국가”가 바로 독일헌법에 나타난 국체, 국가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이것이 지난 대선에서 논의되었던 이른바 경제민주화의 실현된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제적 민주화는 (강자의) 위로부터의 시각을 가진 부르주아적 사고에서가 아니라 약자의 “밑으로부터의 시각”(디트리히 본회퍼)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반영한 사회적 약자들을 우선시 현대적 민주주의의 요체이다. 따라서 민주공화국에서 경제민주화가 이루어지는 민주사회국가로 나아감으로써만 우리에게는 참된 미래가 주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