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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종교이해: 새 문명출현과 종교혁명

[함석헌 탄신 107주년 기념 심포지엄, 한국언론재단 강당, 2008. 3.17]

       함석헌의 종교이해: 새 문명출현과 종교혁명

[목차]
1. 함석헌 사상에서 종교는 시작, 과정, 그리고 마침
2. 문명과 국가사회변혁은 종교혁명으로부터
3. 새로운 종교혁명이 지향해가야 할 5가지 점
   (1) 복잡한 외면성의 확장에서 단순한 내면성의 심화에로
   (2) 과학없는 종교에서 과학과 함께하는 종교에로
   (3) 개인의 감성적 기복종교에서 공동체의 지성적 역사종교에로
   (4) 다원종교의 병존상태에서 ‘하나’ 지향의  생명평화 종교에로
   (5) 현학적 엘리트종교에서 ‘뜻’을 체현하는 ‘지금-여기’의 씨종교에로


1. 함석헌 사상에서 종교는 시작, 과정, 그리고 마침

  현대 20세기 한국사회 속에서 사상가로서 함석헌의 자리매김은 다양한 스팩트럼을 지닌다. 동양고전연구가, 역사철학자,  시민사회 운동가, 시인이요 문필가, 언론인등등이 그 사례들이다. 그러나, 그 어떤 모습을 강조하던지, 함석헌 사상은 그의 종교이해를 떠나서는 바르고 심도있게 이해 할 수 없다. 그는 본래적 의미에서 종교인이요, 그래서 한 시대의 목자(牧者)였고 예언자였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종교는 문명의 원시고대나 초현대 기술과학문명의 발전단계와 관련없이 인간 삶에서 필연적 인 것, 인간임의 혹은 인간됨의 존재론적 구성소이다. 종교가 역사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패러다임엔 여러 가지 모습이 있지만 한민족이 옛부터 그렇게 알고 불러온  ‘하나님’이라는 말로 ‘종교’를 대신하여 호칭한다면,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나님을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내가 대하려면 대하고, 아니
     대하려면 아니 대 할 수 있는 이가 아니다. ...... 하나님은 내게 필연이고 나는
     하나님에게 필연이다..... 그는 내가 찾아낸 이가 아니요, 내 생각이 생각해 낸 이도
     아니다. 그가 자기를 버리는 데서 내가 생겼고, 그가 생각을 하시므로 내 생각이
     일어났다. .... 내가 그를 생각하지만 알 수 없다. 알 수 없음이 그를 앎이다. 그러나
     그는 내게 대하여 계신 이다. 원인도 이유도 없이 계시다. 무신론이 뭐라거나 그는
     내게 계신이요, 나와 대하자고 다가드는 이다.

  함석헌에 있어서 종교는 무신론자와 유신론자의 토론대상이 아니다. 아니 그들의 토론을 가능케하는 존재지반이다. 함석헌의 종교론에 있어서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의 언어적 희론은 취미가 없다. 종교는 그런 토론의 성패로 운명이 갈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이 존재하는 곳에 중력이 작용하고, 물과 공기와 햇빛이 필수적으로 존재듯이, 뜻을 추구하고 의미를 묻고 가치를 창조하고 윤리적 삶을 실천하려는 ‘사람다운 삶’의 기초존재론적 매트릭스가 종교이다.
  함석헌 사상에서는, 직접 종교를 언급하던 아니하던 항상, 폴 틸리히가 갈파한대로 ‘궁극적 관심’으로서 종교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의 사상의 알파와 오메가는 종교이며, 그 사상전개의 모든 과정도 종교를 전제하고 있다. 불교, 유교, 이슬람교, 힌두교, 기독교, 천도교등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종교인가는 둘째문제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인간’이라고 본다. 그리고, 현대 계몽주의시대 이후 세계문명의  가치관의 혼란, 특히 사회윤리적 무규범적 현상(anomie)의 근본 이유도 따지고 보면 현대인들이 종교를 ‘개인의 사적 일거리’로 넘겨버리거나, ‘삶의 변두리 문제’로 내몰아 버린데서 찾는다.

2. 문명과 국가사회 변혁은 종교혁명으로 부터만 가능함.

  함석헌의 종교론에서 다시한번 유의할 점은 ‘종교’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순간 우리마음에 떠오르는 선입견이나 전이해들 곧, 종단체계와 경전권위 성직질서와 각종 예배의식 성전사찰건물 등으로 표현되는 ‘축적된 종교 전통’을 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된다는 점이다. ‘축적된 전통으로서의 종교’와  사람의 맘의 지성소에서 숨쉬는 살아있는 ‘정신적-영적 체험으로서의 믿음’을  혼동해서는 아니 된다고 강조한다.
  역사속에서 전통으로서 굳어진 종교들이 생동하는 인간정신의 자기초월적이고 창조적인 생명약동을 담아내지 못하고 도리혀 억압하게 될 때, 인류는 반종교운동의 이름으로, 혹은 종교의 심층내부에서 종교개혁의 이름으로  종교비판을 해왔다. 전자의 대표로서 우리는 니이체나 마르크스를 대표로 들 수 있고, 후자의 대표로서 예언자들과 신비운동가들과 휴매니스트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어느 경우이던지, 왜곡되고 변질된 종교들에 대한 혁명인 것이다. 그러한 비판적 저항자체가 사실 진리(참)를 추구하는 열정인 것이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형식적 무신론자, 무종교인, 반신론자는 있어도 실질적 비종교인은 한 사람도 없다.
  문명과 종교, 국가(정치)와 종교의 근본관계를 함석헌은 어떻게 보는가? 프로이드는 문명은 본능의 억압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았듯이 함석헌도 “문명은 옷이다”라고 갈파한다. 옷은 사람의 피부를 더위와 추위와 맹수의 찢음에서 보호하는 기능도 있지만, 그러한 실용적동기 못지않게 옷은 더 신비로운 인간학적 동기가  있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옷은 본질적으로 알몸을 가리우고, 덮고, 가둠이기 때문이다.

   문명은 옷이다. 사람이 문명을 짜냈건만 문명은 사람을 삼켰다. 문명은 사람 위에
   씌우자는 것이지, 결코 벗겨서 그 속을 드러내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무의 무늬는
   그 겉 껍질(樸)을 벗겨야 나오고, 보석의 빛이 그 겉의 돌을 갈아야 나타나는 모양으로,
   참 문명도 벗겨야 한다. 벗기고 벗겨 아주 바탕이 달라지는 때까지 근본 바탕 그대로가
  나오는 때까지 달라져야 한다.

   문명의 현실 속에, 인간성의 도야와 개발성숙과정도 있지만, 인간성의 본래 바탈을 인위적인 그 무엇으로 덮어 가리우고 가두고 변질시키는 면이 있다는 점을 통찰하는 점에서 함석헌의 통찰은 서구 비판적 철학조류를 타고 나타난  ‘의심의 해석학’ 대가들과 같은 면이 있다. 문명의 현실적 기관차가 정치라고 한다면, 정치는 일종의 필요악으로서 사람의 본바탈을 가리우는 역기능을 수행한다. 특히 근대국가 성립이후, 얼마나 많은 전쟁과 독재정치과 인간성 억압을  국가권위의 이름으로 자행했는가를 생각하면 명약관화하다.
  종교를 ’사적 일거리‘로 몰아내고 그 자리를 ’국가’가 대신했고, 합리성과 이성적 인간의 성숙성을 주장하면서 ‘종교’를 삶의 변두리영역으로 내몰아버린 현대사회가 합리성, 실용성, 과학성, 능율성의 명분아래 결과적으로 인간을 ‘경재적 동물’과 일차원적 기능인으로 소외시킨 점을 함석헌은 주목하면서 ‘혁명’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함석헌의 종교사상 속에는 동양지혜철학의 알짬과 기독교 예언자종교의 역사적 용광로가 절묘하게 통섭되어 있다. 문명의 중심에 자고로 종교가 있다면, 종교 또한 창조적 기능만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인간의 본바탈과 생명의 본래모습을 가리우고, 덮어버리고 억압하고 위장하는 역기능이 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나무는 끊임없이 나무껍질을 벗겨내고 속살 속에 나이테를 그려나가듯 종교야 말로 ‘혁명’이 필요한 영역이라고 본다.

  4.19혁명과 5.16 군사혁명을 겪으면서, 시대정신의 목자(牧者)로서 혹은 기독교적 예언자 정신으로서 그는 ‘혁명’에 대한 언급을 많이 했다. ‘혁명’이라는 단어를 든는순간 보통사람들은, 가장 저질적 혁명, 가장 그 본질에서 벗어난 저급한 혁명, 바람직하지 않는 혁명을 연상한다. 곧 혁명이란 총칼을 동반한 강제적 무력을 이용하여, 기존의 질서와 삶의 규범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것을 연상한다. 그 단어에서 보통 우리는 변혁에 동반되는 격렬성, 급진성, 강제성, 폭력성, 생명살상, 권력다툼등을 연상한다.

  그러나, 함석헌은 ‘혁명’(革命)이라는 글자의 본래적 의미를 상기시키면서  문명과 종교, 국가와 종교의 바른 관계의 재정립을 촉구한다. 우선 ‘혁명’이라는 한문글자에서 앞글자 ‘혁’(革)은 짐승을 도살한 후 얻는 껍질에 붙은 온갖 오물, 기름층, 굳어진 근육조직을 걷어내고 마름질하여 ‘가죽’이 본래지닌 질기면서도 신축성과 유연성과 보온성 통기성을 고루 갖춘 재료로 만들어내는 공정과정 및 그 결과물을  뜻한다. 다음글자 ‘명’(命)은 말 할 필요없이 생명, 목숨, 사람 본성의 바탈을 말한다. 그래서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다:

    참 혁명은  반드시 종교의 혁신에까지 이르러야 할 것이다. 혁명의 명(命)은 곧 하늘의      말씀이다. 하늘 말씀이  곧 숨, 목숨, 생명이다. 말씀을 새롭게 한다 함은 숨을 고쳐 쉼,      새로 마심이다. 혁명이라면 사람 죽이고 불놓고 정권을 빼앗아쥐는 것으로 알지만, 그것      은 아주 껍데기  끄트머리만 보는 소리고, 그 참 뜻을 말하면,  혁명이란 숨을 새로 쉬      는 일, 득 종교적 체험을 다시하는 일이다. .... 생명은 자기를 실현하자는 것, 자아의 본      성 바탈을  드러내자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살림에 무엇이 잘못되었다 것은   결국 바      탈을 잃어버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잘못을 고치자는 노력인 혁명은 바탈 찾음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본다면,  문명의 새로워짐과 국가사회의 새로운 변혁은 문명의 이기(利器)를 발전시키거나  경제생활수준의 향상에 있지 않고 자아초월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기실현과 자기바탈의 새로운 회복에 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로 시작한 사회주의 이념이 역사적 실험속에서 실패하고 지구촌 전체가 ‘세계화’라고 듣기좋게 부르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체제에로 재편된 것은, 공산주의 이념의 ‘자유와 평등과 정의로운 사회실현’주장이 잘못되거나  마르크스 자본론의 경제이론상의 오류보다는, 그들이 혁명을 하겠다고 하면서 사회의 정치경제 제도개혁만 보았지, 인간성 바탈의 혁명을 무시하거나 무지했기 때문에 받은 결과이다. 

   함석헌에 의하면, 새 문명과  새로운  사회의 출현은 새로운 종교의 출현없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종교의 출현이란 새로운 메시야가 나오거나, 새로운 종교학자들의 이론적 종교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혁명’에서 부터만 나온다. 새문명, 새사회의 탄생을 앞에 두고  산고의 진통이 가속화 되어가고, 잘못하면 문명사회전체가 죽음에 이를지 모르는 심각한 문명사적 위기상황의  근본원인도 따지고 들어가보면, ‘혁명’의 참다운 전위대로서 문명사회의 나아갈 바를 선도해야 할 종교들이 ‘자기혁명’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스로 충실한 맘몬숭배자가 되고,  지난 2000년-2500년동안 누려온 영광과 신성한 권위만 지속하려는 종교의 타락과 종교의 자기집착 때문이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둘다 보존된다”(마태, 9장 17절 )

  기성 종교지도자들은 남한 대한민국의 인구 51%가 각종 종교에 귀의하고 있으며, 우리사회의 집단체중에서 불교, 그리스도교, 유교, 천도교등 실질적 교세가 흥황중인데 함석헌의 말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함석의 눈에서 보면, 기존의 종교는 과거 영광의 껍질들이다. 그 종교들이 스스로 ‘혁명’하지 않으면 그 종교의 미래가 없을 뿐 아니라 새문명의 출현과 새국가 사회의 성립도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나무껍질은 수령이 길수록 두껍고 경외감 마져 들게한다. 그러나, 껍질은 ‘축적된 전통으로서 종교’ 일 뿐 새 문명을 배태하거나 이끄는 씨앗도 아니고 새순도 아니다. 참으로 혁명이 필요한 영역은 ‘종교’라는 것이다. 종교가 혁명되면, 사회와 문명이 혁신되고 새로워진다. 본바탈을 되찾고 하늘 숨을 다시 쉬는 생명적, 역동적, 창조적 문명사회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모방사회, 소비사회, 천박한 물질문명 사회, 약육강식의 동물적 정글문명만이 판을 친다.

3. 새로운 종교혁명이 지향해가야 할 5가지 점

(1) 복잡한 외면성의 확장에서  단순한 내면성의 심화에로

  종교혁명이 지향해가야 할 제1과제는, 지나간 역사동안 발전해왔고 그만큼 복잡화를 거치는 동안 사상적으로나 기구 조직면에서 외면적으로 확장된 종교들이, 이제는  내면적으로 수렴과정을 거쳐 단순화 해감으로서 정신적-영적 심화단계에로 전환해가야 한다.  무릇 모든 생명운동이 그러하듯이 ‘확장-수렴’운동은 생명의 불가결한 운동법칙이다. 

  민족종교나 부족종교는 그만두고서라도, 소위 세계적 보편종교라고 일컫는 불교, 힌두교, 이스람교, 유교, 그리스도교등 세계 5대종교들은 그 초창기 단순하지만 생명력에 충만했던 역동성이 약화되고  그 대신 교학, 교리, 신학, 의례, 종교기구의 조직체계화가  발달하게 마련이다. 그것이 이른바 ‘축적된 전통’이 강화되고 더 일방적으로 심화되면 종교의 ‘물상화’(物像化)가 초래되고 만다.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종교까지도 부정되어야 종교다. 내용으로는 어떻게 고상한
      진리를 알았다 하더라도 “이것은 절대 진리다” 하는 순간 그것은 거짓이 돼버리는
      것이요, 남이 보기엔 어떻게 열심있는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내 믿음은 절대
      정신(正信)이다” 하는 순간, 곧 불신이 되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자꾸
      새로워질 수밖에 없다......종교는 구슬이 아니요 씨다. 썩어서 새싹으로 나와 자라서         열매맺어 퍼져나가야 할 것이다.

  새 시대 종교혁명은 기존의 보편적 세계종교를  떠나서, 신흥종교를 만들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기존종교들이 축적된 전통으로서의 신성한 종교물상화를  부정하고, 초창기의 순수하고 단순하고 심원했던 영성의 샘터에로 되돌아가는 일이다.  사찰이나 교회당 건물을  크게 건축한다거나, 신도들의 숫자를 많이 모이게 하여 대형집회를 통해 위세를 과시한다거나, 현학적인 교리나 신학이나 경론서를 많이 발간한다거나, 신성한 법복을 입고 장엄한 종교의례를 준행한다고 해서 종교가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특히 종교적 전당을 크게 화려하게 짓는 일은 종교발전단계의 말기 현상이라고 본다. 그것은 누애고추가 뽕잎을 많이 먹고 잠들기 전에 명주실 같은 것을 빼내서 감옥같고 묘혈같은 고추집을 짓는 일일 뿐이다.  종교의 본질은 외면성에 있지 않고 내면성에 있다.

(2) 과학없는 종교에서 과학과 함께하는 종교에로

   종교혁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종교들은  현대과학이 밝혀놓고 성취한 지식들을 경청하면서 종교와 긴밀한 대화 및 협력을 해야 한다. 현재 생존하는 세계적 보편종교들은 과학을 낳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역할을 했지만, 인류정신사 속에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가 성숙한 단계에 접어들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종교와 과학의 만남의 유형은 크게 3가지 모델로 대별할 수 있겠다.: 과학적 유물론과 경전 문자주의가 서로 대립 충돌하는 갈등이론, 사실영역과 가치영역을 이원론적으로 구별함으로서 서로 무관심하는 독립이론, 실재에 대한 공동탐구와 체계적 융합을 지향하는 대화통합이론이 그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객관적 사실의 세계에 대한 탐구요 종교는 삶의 의미와 가치와 초월에 대한 탐구이므로, 연구영역이 다르고 연구방법이  다르므로, 서로 비판 할 필요도 없고 충돌할 필요도 없이 각자 자기 영역에 충실하자는 입장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현대과학의 눈부신 발달과 정신과학의 해석학 이론들은 ‘사실영역과 가치영역’이라는 편리한 이분법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과학이 종교영역을 관장한다거나, 종교가 과학영역을 간섭하려는 태도는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양자를 완전 분리시키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과학과 종교가 탐구하고 묻는 실재․ 진리․ 존재는  각각 별도로 존립하는 서로 다른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우주천문학, 양자론적 물리학, 분자생물학, 뇌과학, 자연생태학등등 여러전문분야 연구결과는 종교적 실재탐구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다. 함석헌의 종교사상에서 특징은 그가 과학의 소리에 항상 열린 맘으로 경청하면서 그의 종교사상을 전개시켰다는 점에 있다. 함석헌은 그의 대표적 저술물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넷째판 서문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고난의 역사를 처음으로 말 할 때에, 내 심정은  약혼받은 거러지 처녀같은 상태였다.
     그에게 가진 것이라고는 부끄러움과, 사랑과, 곧음 밖에 없는 모양으로, 아무 것도
     준비한 것이 없이 역사를 가르치자고 교단에 선 나에게는 가진 것이 있다면 믿자는
     의지와, 나라에 대한 사랑과 과학적이려는 양심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위 인용문에서 말하는 ‘과학적이려는 양심’이란 일차적으론 역사를 가르치는 역사학도로서 가장 학문적태도를 견지한다는 각오이지만, 현대 자연과학이 밝혀주는 과학적 통찰에 더 신뢰를 보내며, 기존 종교전통의 교리나 독단 및 신화적 세계관, 계시적 진리라고 무조적 맹종을 요구하는 기성종교의 권위주의를 거부한다는 말이다.  특히 함석헌은 역사학자로서, 역사는 인류문화사나 지구학, 그리고 진화론적 생물학 이론과 불가분리 관계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종교사상들은 당시로서는 가장 첨단적인 과학사상과의 깊은 진리공명 혹은 통전 속에서 이뤄진 것들이다.  경전에 대한 문헌비평적, 역사비평적 연구방법의 수용 또한 자명한 일로 받아드린 것이다.     

   오늘날 한국종교들이, 특히 그리스도교 계통의 교파들이 정통보수신학의 고수라는 기치를 내걸고, 과학적 진실을 외면하려는 태도는 새시대 문명의 종교로서 기능을 스스로 포기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예들면, 창조론이나 창조신앙을 지켜간다는 명분아래 진화론을 비진리인양 가르치는 태도, 그리고 적당한 타협형태인 ‘창조과학’ 이라는 ‘반(半)과학적 신앙’ 혹은 유사신앙적 과학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허허막막한 대 우주 속에서 유일한 녹색별로서 지구의식을 공유할 때, 종교들은 오랜 역사적 당파성과 축적된 전통의 사이비 종교이데올로기에서 해방 되어, 참 진리를 가르치는 영적 종교로서 거듭날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미국 유니온 신학교 특별강연에서 이렇게 말 한 적 있다: “과학은 진리와  이해에 대한 영감으로 완전히 젖어든 사람들에 의해서만 창조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의 원천은 종교의 영역에서 솟아난다........종교없는 과학은  다리를 절고, 과학없는 종교는 눈이 먼 것이다”. 위의 비유적 경구는 신체 장애인에게 대한 폄훼감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려는 우리시대 석학의 경고임을 명심 할 필요가 있다.

(3) 개인의 감성적 기복종교에서  공동체의 지성적 역사종교에로

  종교의 본래적 기원이 우주 속에서 개체인간의 고독과 실존의 불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설도 일리가 있다. 뿐만아니라, 앞에서 살핀바 처럼, 종교는 인간심령의 지성소 곧 개체의 정신깊이의 차원이기 때문에, 공동체에 참여하는 면을 가지면서도 늘 홀로 사색하려는 ‘단독성’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종교인이  실존의 깊이에로 들어가 종교적 진리체험을 내면성 속에서 파지하려는 것과, 종교를 개인의 사적(私的)일거리로 생각하고, 개인의 안심입명만 추구하려는 기복주의적 성향과는 구별하여야 한다. 또, 종교란 영혼 깊은 곳에서의 실존적 체험이기 때문에, 이론보다는 체험이 중시되고, 설명보다도 이해가 강조되어야 함도 당연하다.

  함석헌에 의하면, 한민족의 민족적 심성속에 착함(仁) , 날쌤(勇), 평화사랑하는 맘,  풍류심(風流心)같은 좋은 점이 있지만,   중요한 결점이 있는데 곧  생각하는 힘의 부족, 심각성의 결여, 깊은 사색력의 부재라고 본다. 그리고 그 결점 때문에 한국 종교들은 큰 문제에 직면하고 마땅이 이루어져야 할 참다운 종교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한국 사람은 심각성이 부족하다. 파고들지 못한다는 말이다. 생각하는 힘이 모자란다는       말이다. 깊은 사색이 없다. 현상 뒤에 실재를 붙잡으려고, 무상(無常)밑에 영원을 찾으
     려고 , 잡다(雜多) 사이에 하나인 뜻을 얻으려고 들이파는, 캄캄한 깊음의 혼돈을 타고
     알을 품는 암탉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얼이 부족하다. 그래 시없는 민족이요, 철학없       는 국민이요, 종교없는 민중이다.

  함석헌의 위 지적은  혹자에게 기분이 상할 지라도 진지하게 들어야 할 말이다. 우리에게 전혀 철학이 없는 것 아니다. 원효, 의상, 퇴계, 율곡, 다산, 수운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주임엔 틀림없지만, 민족 대부분 생활태도가 깊은 생각을 동반하기보다는 감정적이고, 토론문화보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사경회로 시작한 기독교는 경전을 깊이 생각하면서 진리말씀을 듣던 종교집회가 어느틈에 심령부흥회로 변질되어 대중심리와 종교적 흥분이 주도하는집회가 되어 버렸다. 외래 선교사나 중국 인도에서 온 대법사가  전해주는 정통가르침이 절대불변의 진리규범으로 변하고, 그 규범을 가지고  동족의 깨어있는 사상가들의 창조적 사상을 억압하고 단죄하기 일수였다.

  깊은 진리를 구하는 구도자적 사색과, 감정과 의지마져 넘어선 지성의 깊은 심연을 드려다보지 못하는 한민족의 종교적 현상은 불교나 기독교를 막론하고 ‘개인 기복적 종교’가 되어있고,  역사적 삶의 공동체적 책임과 역사현실에 대한 빚진자로서의 양심은 미약하다. ‘고난은 생명의 한 원리’(함석헌)라고 깨닫고, 고난을 정면돌파하여 도리혀 창조적 삶을 영위시키려는 종교의 본래임무는 변질되어, 고난을 면제받게 해주거나  선민적 축복을 얻게해준다는 사이비 기복종교가 사회의 저변에서 맹위를 떨친다. 

   함석헌은  ‘종교혁명’은 대중속에 자기를 던져넣고 생각하기를 중단해버린 기존종교로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전체를 생각하는 이해지평의 확대심화, 역사적 존재로서의 공동책임의식과 역사참여의식의 고양없이는 불가능할 것으로 경고한다. 

   새시대 새문명의 종교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라야 하고 동시에 ‘신앙을 추구하는 이해’(intellectum quaerense fides)라야 한다. 함석헌은 종교생활에서 성숙한 이성적 기능을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래의 새 종교를 위해서는, 계몽주의시대에 이성의 한계를 모르고 이성의 절대를 주장하던 경박한 이성주의가 아닌 성숙한 이성, 계산하고 추리하는 수학적 이성만이 아닌 존재론적 이성이 복권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새 종교는  어디까지나 본래적 이성의 기능인 이해하고 깨닫고 꿰뚫어 비치는 능력을  더 높이 고양시킨 종교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함석헌은 종교에서 감정의 중요성과 영적 신비체험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 체험이란 아무리 신비적 경험일지라도 ‘이지적 특성’(noetic quality)을 내포하는 것이라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무당의 황홀경 속에서 자아도취하는 비윤리적 망아상태만 발생할 뿐이다.

   이러한 보다 한단계 높은 차원에서 이해되는 고양된 이성, 즉 ‘황홀한 이성’(ecstatic reason, Paul Tillich)과 신비체험 중에도 지속되는 ‘이지적 특성’(noetic quality, William James)을 능히 내포한 ‘이성적 종교’를  함석헌은  새종교가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이며, 그 정신적 상태를 “뚫려 비췸” 이라고 보았다. 종교적 이성의 ‘뚫려비췸’ 기능이 바르게 되살아 날 때, 지금까지 인류의 철학과 종교가 부딪혀온 이원론적 갈등들 예들면 영과 육, 계시와 이성, 안과 밖, 의식과 무의식, 자율과 타율, 율법과 은총, 세간과 초세간의 이중구조가 통전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혁명은 기복적 신앙에서 지성적 신앙에로, 개인적 안심입명 신앙에서 공동체의 지성적 역사신앙에로 탈바꿈해가야 한다.

(4) 다원종교의 병존상태에서 ‘하나’ 지향의 생명평화 종교에로

  함석헌의 종교사상에서는, 새문명과 새시대 종교는 ‘하나’를 지향하는 것임을 누차 강조한다. 세계 종교사 속에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무릇 모든 인간 정신적 활동은 역사적-문화적 제약을 받으며, 그것들 안에서 체험되고, 그것들을 통하여 표현되고, 그것들과 함께 발전해가는 살아서 자라나는 나무와 같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종교들은 그 종교시발이 계시에 근거하거나, 신비체험에 근거하거나, 깊은 사색과 깨달음에 근거하거나, 특정시대 역사문화적 ‘실재관의 패러다임’에 담겨지기 때문이다. 진리체험일지라도 인간은 정신 활동은  해석학적으로 말해서 각 시대의 실재관이 지닌 이해의 패러다임에 의존적이라는 말이다. 함석헌의 말을 들어보자.

   나타나 뵈는 것은 그 때 세계관의 규정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계시로 왔거나, 생각해 얻     음으로 왔거나, 일단 사람들의 맘 안에 들어 올 땐 벌써 테두리를 쓴 것이다. ‘직접’ ‘직     접’하여  제 각기 저는 직접 하나님을 만났노라 하지만 직접이란 없다. 경험을 하고 생각     을 한다 할 때 벌서 정신이니 말이니 하는 매개를 타게되지, 그것을 타지 않고 나와 절     대자와의 직접이란 있을 수 없다.

  위의 인용문에서, 함석헌은  순수직접적 계시(진리)체험이란 없는 것이고,   체험하는 순간부터, 아니 체험 그 자체가 이미 정신적․ 언어적 구조와 기능에 제약당하고 그것을 매개로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정신적-언어적 구조와 기능, 포괄적으로 말하면 정신적-문화적 제약성과 특성을  ‘이해와 체험의 해석학적 패러다임’이라 부를 수 있다.  자연과학자의  자연이해가 동시대 주류과학 이론체계인  ‘정상과학’ 법칙이나 원리로 구성된 ‘과학적 패러다임’이 보여주는 것만큼 자연을 이해하고 설명하듯이, 진리체험이나 구원체험으로서 종교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지질기후풍토, 삶의 먹거리와 공동생활방식, 언어체계, 역사체험이 각각 다른 인도문명, 에집트 바벨론문명, 중국문명안에서는 각각 그 문화적-역사적 매체를 통한 특색있는 종교들이 나타났다.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가 각각 고유한 특이성을 갖추는 것은 단점이 아니라 당연하고 귀중한 것이다.
   지구촌에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하고, 다양성에 대하여 존중과 관용정신을 지녀야 한다는 것은 20세기 포스트모던니즘 정신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종교만큼 전통에 집착하는 것도 찾기 어렵다. 종교전통과 체험이 그 종교에 귀의하는 당사자에겐 그만큼 귀중하고 궁극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의 개혁은 어렵고, 종교의 하나됨은 난해한 것이다. 그러나, 새시대의 종교는 ‘하나’를 지향해야 한다고 함석헌은 강조한다.   세계와 인류정신문화가 깊은 의미에서 우주적 하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가 하나되도록 하는 종교에 종파문제가 있을 리 없다. 기성종교의 귀에는 아쉬울지      몰라도 앞날의 종교는 하나일 것이다. 하나님이 한 하나님인데 종교도 한 종교일 것, 정      한 일 아닌가? .... 이사야를 일으킨 성령이 또 맹자를 일으키고 희랍의 성인을 일으켰겠      지 누가 했을가? 동양도 사람으로 길렀겠지, 그랬기에 기독교 진리를 들을 수 있지, 유      대인만이 홀로  하나님을 알았고 그 외 이방인은 몰랐다면, 설혹 기독교가 유일의 종교      라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종교는 하나다 하는 것을 거부하려는      종교는 앞으로 몰락 할 것이다. 바다가 싫다는 냇물은 마를 것 아닌가? 나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나를 돕는자라고 예수는 생각하셨다.

 위의 문장만을 보면, 흔히 종교다원주의를 오해하는 사람들이거나, 피상적 코스모폴리탄들이 잘못생각하는 다음같은 세가지 오류를  함석헌은 경계한다. 

   첫째, ‘종교의 하나됨’이라는 명제는 기성종교의 장점을 모두 합하여 하나의 종교를 만들자는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다. 기성종교나 종파를 하나로 통일하여 세계종교를 인위적으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산 종교는 모자이크가 아니고, 조립품으로 조성되는 인위적 진리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는 받아들일 것이지 만들 것이 아니다. 종교는 의식적으로 되는 인위(人爲)의 산물이 아니다” 라고 단호히 말한다.

   둘째, ‘종교의 하나됨’이라는 명제는 종교에 대한 무책임한 생각, 즉 분별력을 포기한 값싼 관용주의나 ‘모든 종교는 결국 동일 한 것이다“라는 피상적 하나됨을 의미하는 것 아니다.  땅위엔 절대 순수한 종교는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종교들은 다 존엄하고 무조건 존경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종교가 다 하나라 하니 어느것을 믿으나 일반이란 말이 아니요, 어느종교나 다 그대로 완전하다는 말도 아니요, 진리를 나타내는 정도에 차이 있는 것을 부인 하는것도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셋째, 자기자신이 귀의하고 있는 종교를 종교등급을 판별하는 규준으로 삼거나 규범으로 삼는 종교문화 제국주의적 종교우월론을  용납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개인의 실존적 지성소에서 일어나는 매우 주체적 진리체험과 구원체험의 사건이기 때문에, 개인과 공동체의 실존적 문제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가 귀의하는 종교가 정해질 수 있으며, 그래야 바람직한 것이다. 보편적 우주종교인이란, 말처럼 쉽지도 않고 구체성을 결여한 보편성이란 무책임한 책임회피의 구실로서 작동 할 뿐이다. 미래의 새종교는 기존의 특정종교에 귀의하더라도 결국엔 ‘영과 진리 안에서’ 자유하는 종교, 인격적이고 윤리적 종교, 이성적이고 깨달음의 종교, 마음이 변화되고 수행하는 종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전체생명, 하나의 생명, 하나됨의 지구윤리 의식, ‘하나’를 깊이 의식하면서 각각 서로 한 몸의 지체인 것을 깨닫는 평화의 종교가 미래의 새시대 새문명의 새종교인 것이라고 함석헌은 말한다.

(5) 현학적 엘리트종교에서 “뜻‘을 체현(體現)하는 ‘지금-여기’의  씨종교에로

   새문명의 출현과  새종교의 도래를 기다리고 전망하는 함석헌의 종교사상에서 마지막으로 생각해야할 중요한 주제는 하늘의 ‘뜻’을 땅위의 ‘지금-여기’에서 체현(體現)해가는 씨알들의 종교여야 한다는 테마이다.
   함석헌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책 제목을 바꾼 동기가, 특정종교 기독교 냄세를 제거하고 일반 독자층을 넓히자는 의도이거나, 또다른 경박한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대체로 한국동란 체험이후, 그러니까 1953-1963년어간 약 10년 기간에  함석헌의 종교사상은, 기본적으론 기독교 신앙유산 안에 자기를 스스로 세우면서도, 기존의 정통적 기독교 울타리를 넘어선다. 그는 참의 진리를 제도적 종교보다 더 사랑하기에 스스로 이단자가 되기를 작정한 것이다. 특히 교회주의, 수행과 실천과 희생없는 “값싼 대속신앙‘, ’종교의 성직주의, 예전주의‘등을 비판하고 넘어선다.  동시에 그가 일본 유학시절 큰 영향받은 무교회적 ‘오직 성서만!’의 기독교의 울타리도 벗어난다. 그 상징적 사건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이라는 말을 “뜻으로 본”이라고 바꿈으로서  표현되었다.

    하나님은 못믿겠다면 아니 믿어도 좋지만 ‘뜻’도 아니 믿을 수 없지 않느냐? 긍정해도       뜻은 살아있고 부정해도 뜻은 살아있다.  저서도 뜻만 있어도 되고, 이겨서도 뜻이  없      으면 아니된다. 그래서 뜻이라고 한 것이다. 이야 말로 만인의 종교다. 뜻이라면 뜻이고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고 생명이라 해도 좋고 역사라해도 좋고 그저 ‘하나’라 해도 좋       다. 그 자리에서 우리 역사를 보자는 것이다.

  함석헌에서 종교란 결국 ‘뜻’을 추구하는 인간개인과 공동체의 삶이다. ‘뜻’이라는 순수 우리말은  ‘의미’와 ‘의지’라는 두가지를 동시에 함의한 것이다. 일상생활의 작은 일거리부터 시작해서 종교적 관심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뜻’의 존재라는 말이다.  기성 기독교를 비판 부정하는 니이체, 마르크스, 프로이드, 도킨스도가 기존 기독교를 부정하는 이유인즉 자기 나름대로  참 진실과 진리를 말하려는 반증이다. 무신을 주장하는 자도, 신이 없어주어야 진실이라는 ‘참 뜻’을 나타나도록 하려는 것임을 주장하는 것이니까, 그 나름대로 뜻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뜻 그 자체’는 곧 하나님, 진리, 생명, 하나(unum)와 동의어라는 것이다. 

  미래의 참 종교는, 진리를 거듭 거듭 살려내고 만나고 표현하기 위하여,  기존 종교의 권위와 축적되어온 위대하고도 신성한 전통(tradition)을 용감하게 부정하고 두꺼운 외투를 벗어버리는 정도만큼  진리를 드러내는 새 종교가 되는 것이다.   그 전통이나 법복이란, 물론 기성종교가 형성해온 진리체계, 교의, 경론, 신학, 예전, 제도, 수행법, 예술문화 양식등이다. 

   그런데, 뜻․하나님․진리․생명․하나등등 이름이야 어떻게 부르던지, 그 실재자체가 너무 크고 직접적인 것이고 살아 있는 것인지라, 어느 특수 계층이 독점하거나 분배권과 해석권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진리 뜻, 하나님은 ‘공개된 비밀’이다. 여기에서 함석헌은 성직주의자들의 엘리트의식, 지식인 철학자들의 선민의식을 일체 부정한다. 그야말로 ‘만인 사제직’(마틴 루터)을 실천해야 할 시대가 왔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함석헌의 종교사상에서 중요한 세마디 말은 ‘하나님의 뜻’,  ‘지금 - 여기’,  ‘ 그리고 땅 중의 땅인 민(씨)의 가슴(맘)’이라는 것이다.  종교마다 표현과 강조하는 순서가 약간씩 다른 듯 하지만,  결국 알고보면 ‘하나님의 뜻’이란 眞․善․美 ․聖이 온 누리에 햇빛처럼 가득히 차서 생명이 평화를 누리는 대동적 삶의 실현에 있다. 그것의 실현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종교들은 죽은 다음 천국이나 극락에서 완성을 바라거나 역사시간 끝점 종말로 연기하거나 하지만,  살아있는 종교는 언제나 ‘지금 - 여기’를 중요시 해야한다. 

    지금․ 여기․ 오늘․ 우리시대의 인류 운명공동체 문제를 외면하고 개인의 실존내면성으로 도피하던지, 종교를 타계적․ 초세간적 현학(玄學)체계로 만들던지, 현재역사를 뛰어넘어  미래 종말만을 바라보게 하는 종교는 새 종교로서 새 문명을 낳을 자격이 없다. 초월적 영계나 사후세계가 없단 말도 아니고, 종말의 미래대망 신앙이 의미없단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종교의 담론은 결국 ‘지금-여기’ 씨의 가슴 한 복판에서 실현되기 전에는, 공상이요 관념이요 아편이요 현실도피가 될 뿐이다.  

   참종교는 ‘친민’(씨어뵘)을 해야지, 씨들을 계도하려거나, 그들 위에 군림하려하거나, 씨들을 항상 종교진리 부스러기를 얻어먹는 피동적 객체로 묶어두려고 해서는 아니된다. “하늘은 무한 망막한  허공에 있지 않고 땅에 와 있다. 땅 중의 땅, 흙 중의 흙이 어디냐? 네 가슴이요 내 가슴 아닌가?” 특히 함석헌 사유체계안에서는 흙 중의 흙, 땅 중의 땅, 하늘이 임하는 장소는 교회당이나 절간이나 예루살렘 모스크가 아니라 민중의 맘, 씨들의 가슴이다. 거기에 하늘이 온전하게 임하기 전엔 모든 것은 미완성이다.  하늘과 땅이 동일하단 말은 아니다. 구별은 되어야 하지만 분리되어서는 아니된다. 새 시대 새 종교는 그 점을 명료하게 깨닫는 종교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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