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본지 편집고문) ⓒ베리타스 DB |
“부자연스럽다”는 말은 오늘날과 같은 과학기술 세계에서는“인공적이다”라는 말과 동의어다. 우리는 오늘날 ‘인공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이러한 인공의 세계를 우리는 문명의 세계라고도 부른다. 문명의 세계의 특징은 과학과 기술이 지배하는 세계를 뜻한다. 즉 과학기술과 더불어 산출된 세계가 “인공의 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과학과 기술에 기초한 “인공의 세계”(人工의 世界)는 18세기 유럽에서의 과학과 기술의 급격한 진보와 더불어 가시적으로 나타났다. 증기기관차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기술혁명은 급속하게 우리의 자연적 삶을 인공적 세계로 이끌어 갔다. 교통수단에 있어서도 그 이전에는 걸어서 가거나 아니면 말을 타고 다니던 삶이 기계에 의해서 움직이는 기관차나 기선을 타고 다니는 삶이 되었다.
이러한 인공의 세계를 의식주의 차원에서 생각해 보자. 나뭇잎이나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던 자연의 세계에서부터 우리는 베틀이라는 기계를 만들어서 손발을 움직여서 천을 짜냈다. 지금은 엄청난 속도를 가진 기계들이 우리의 옷감을 짜주며 그 소재들도 광물질이나 합성소재 등 이전의 사람들의 상상을 불허하는 것들로 되어 있다.
또 과거에는 우리의 식생활의 주된 원료는 자연산 식물의 열매나 뿌리 그리고 가축들의 고기였다. 이러한 음식물의 가공기술의 발달은 점차 인공조미료와 인공염료에서부터 시작해서 거의 모든 식품이 가공된 상태에서 공급되고 있다. 이것은 가공기술과 저장기술의 발달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거의 인공 혹은 가공식품을 먹고 살고 있다.
주택도 마찬가지이다. 농경사회에서 도시사회로의 이전을 통해서 과거에 는 나무나 짚 같은 자연의 소재로 집을 짓고 살던 시절은 사라지고 인공적인 건축자재들, 시멘트나 벽돌, 철근과 같은 것들로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다. 요즘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토지의 부족으로 고층 아파트를 지어서 거기에서 살고 있다.
그 뿐인가? 교통통신 등 우리의 삶을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인공의 세계”며 점차 “자연의 세계”는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과거에는 걸어서 가거나 짐승을 타고 여행했지만 지금은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자동차나 비행기로 먼 세계를 여행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인편이나 파발마를 통해서 소식을 전했지만 지금은 전화 등 간편한 통신수단을 통해서 지구의 다른 편에 있는 사람에게도 몇 초 동안에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과학기술의 제2의 혁명을 가져온 컴퓨터의 발견은 인간의 인공적인 지적 능력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를 의심하게 할 정도이다.
이러한 인공의 세계 즉 과학과 기술의 세계는 우리에게 엄청난 편리와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인간들을 중노동에서 해방시켰고 또 다양한 통화의 수단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인간은 원하기만 하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만들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로데(Rothe)는 말하기를 증기기관차의 발견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는 초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의 발견보다 더 위대하다고 갈파했었다. 자유주의 신학자인 그는 자연과학과 기술의 발전이야말로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실현되어 가는 구체적 증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인간 이성의 조작을 통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보다 살기 좋은 세계를 만들어 줄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에로 연결될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과학과 기술의 확대만이 우리의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보다도 과학기술에 대한 신앙이 더 확실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전능하신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이 전능하며 하나님이 무소부재 한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이 무소부재하다는 것이다. 믿음이 산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중장비가 산을 옮긴다. 믿음이 물위를 걸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이 공중을 날아 별에까지 사람을 날라다 준다. 묵시록에 나오는 무저갱의 짐승이 인류를 몰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의 위대한 결실인 핵무기가 인류를 파멸로 몰아갈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보호하심보다도 핵의 보호를 더 믿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핵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핵이라는 엄청난 파괴력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 보다 거기에 더 두려워하고 경외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러한 과학과 기술이 가져다 준 참화는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인간의 교만과 자기 확장 즉제국주의 혹은 식민주의의 강화였다. 서구제국주의 세력들은 이러한 과학기술의 혁명적 성과를 인류의 복지에 사용하지 않고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고 식민지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었다. 만일 이러한 과학기술의 지원이 없었다면 그들은 그렇게 많은 영토를 식민지화하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살상하고 노예화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총알과 대포의 발견은 전쟁에서 익명적 살상을 가능하게 했고 이것이 대량학살의 원인이 되었다. 누구의 총알과 대포알에 적이 죽어 가는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인간들에게 도덕적 책임감과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었다. 1.2.차 세계대전은 군인들에게서 인간됨의 책임성과 죄책을 빼앗아간 전쟁이다
그 뿐인가? 오늘날의 과학기술에 대한 광적인 신뢰가 가져다 준 결과는 어떤 것인가? 이들이 필요로 하는 원료의 채취와 그것들의 가공에서 발생하는 오염물질이 지구를 어떻게 만들어 놓았는가? 수질오염, 공기오염, 땅의 오염 등을 통해서 인간의 삶 자체를 위협하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공해의 근본적 원인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공의 세계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공해는 인간에게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 독성이 자연과 동식물의 세계에까지 침투되어서 자연이 가지고 있던 연계들을 파괴하고 먹이사슬을 타고 다시 인간에게로 돌아온다. 이 자연이라는 유기체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온갖 독성에 대해서 그 독성으로 인간에게 보복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의 발전은 곧 우리에게 파라다이스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와 가톨릭의 보수파들인데 그들을 우리는 신보수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공화당 지지자들이며 소위 ‘적극적 사고’를 생활신조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은 과거의 구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하나님 나라를 향한 필수적 조건이라고 믿고 있다. 과거의 보수주의자들이 진보 및 과학기술 적대적이었다면 이들은 그 반대로 과학기술에 인류의 미래를 건다. 미국의 전자산업의 중심지인 실리콘 벨리는 마치 이러한 파라다이스의 성지와 같이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과학기술의 발전과 개발만이 살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공해추방운동과 개발을 반대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을 가리켜 어리석고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학기술의 미래의 비극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이러한 광적 신뢰는 우리나라의 보수적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지원을 받는 기업인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박정희로부터 시작되는 이러한 산업화에 대한 광적 신뢰에 찬사를 보냈던 것은 한국의 대부분의 보수적 기독교인들과 대기업을 운영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왜곡된 기술세계에 대한 신앙이 우리의 삶 전체를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나아가서 경제영역에서는 빈익빈 부익부의 모순된 사회를 낳고 있다. 여기에서 식수, 농산물, 축산물, 해산물 등 우리의 삶과 직접 관계되는 모든 것에 “인공적인 것”이 첨가되고 이것은 우리의 삶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공적 소재를 주로 개발해서 살아가는 대기업들은 자연을 훼손하고 오염시킬 뿐만 아니라 과도한 이익을 얻기 위해서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오늘날 인공의 세계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무엇이 가능하냐가 아니라 무엇이 필요하냐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사람들이 사려 없이 가능한 것만을 추구하고 따라서 필요한 것을 꼭 상실해 버리는 것이다. 가능한 것에 복종하는 것은 이성이고 필요한 것에 복종하는 것은 신앙이다. 그것은 창세기에서의 물음 하나님 같이 되려는 인간의 유혹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자연스런 삶을 거역한 인공의 세계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인간의 시도(Versuch)에서 온 유혹(Versuchung)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윤리적 도덕적 의미에서‘부자연스러운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과학기술의 세계에서 “부자연스러운 것”은 “인공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윤리적 도덕적 의미에서 이 말은 “인위적이다”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될 수 있다. “인위적”이란 말은 엄격한 의미에서는‘허위적’이라는 말과 일치한다. 과학기술 시대의 인공적 삶에 강요된 사람들에게는 윤리적 차원에서는 그것들이 인위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위적 사건의 원초적 모델은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하체를 가리기 위해서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인공적” 행위로서 옷을 만들어 입는 것은 ‘인위적’ 행위로서의 수치를 가리려는 도덕적 형태와 일치해서 나타난다. 여기에 과학기술에서의 인공적인 것과 윤리도덕에서의 인위적인 것의 일치가 존재한다. 그러나 윤리 도덕적 차원에서의 인위적인 것은 그 내용이 허위적이라는 데서 인공적인 것과는 구별될 수 있다.
우리가 “자연스런 삶”의 문제를 논할 때 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도덕적 차원에서 “인위적인 것”으로서의 부자연스런 삶일 것이다. 과학기술에 세계에서의 인공의 세계가 물질적 문제와 관련이 되었다면 윤리 도덕적 세계에서의 인위적인 것은 명예와 관련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서 자연스러움을 벗어나서 인위적이 되려고 하는 유혹은 대개는 존재하지 않거나 보잘것없는 명예를 과장하려고 하는 데서 생겨난다. 불필요한 권위를 부리거나 무지를 숨기려고 할 때 부자연스럽게 인위적인 표현을 한다. 그것은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지위를 과장하기 위해서 무리하게 큰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장사꾼들에게서도 나타난다. 흑인은 열등의식을 숨기기 위해서 흰 양복에 화려하게 장식된 흰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과도한 옷치장이나 여성들의 화장들도 인위적이어서 결국은 여성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적 욕구의 충족이라고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여기에도 허위(과장) 의식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윤리 도덕적 영역에서의 인위성과 허위의식은 우리 사회에서는 체면문화를 그 근간으로 삼았던 유교의 전통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친다든지 양반은 얼어 죽어도 잿불엔 쪼이지 않는다든지 하는 속담들은 유교선비의 고고함을 말해주는 것 같지만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왜곡된 허위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마치 국회의원은 소나타를 탈 수 없다든지 국장은 프라이드를 탈 수 없다든지 하는 말과 같다. 자동차는 자연스런 삶의 영역에서는 이동수단에 불과하다. 그것이 어떤 부의 정도나 계층의 높낮이를 재는 척도로 오용되는 것은 인위적이며 허위적인 것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가능한 것과 필요한 것의 구별이 가능한 이성적이고 자연적인 삶의 자세가 요청된다.
나아가서 종교적 차원에서 부자연스런 것은 어떤 것일까? 여기서는 부자연스럽다는 것은 긍정적 의미에서는 뭔가 초자연적인 것을 경험한 상태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계시를 받았다든지 방언을 한다든지 기적적으로 병이 치유되었다든지 하는 것은 자연스런 삶의 현상이 아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의미에서는 뭔가 광적인 것을 경험한 신앙상태를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의 영역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뭔가 특수한 것, 부자연스런 것이 신앙의 깊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것은 믿음이 약한 것이며 특수한 것은 믿음이 강한 것으로 과장되게 해석되기도 한다.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삶의 형식들에 속하는 담배를 피운다든지, 술을 마신다든지 하는 것은 종교적이 아니며 그런 것들을 금하는 것이 종교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일상적 삶을 살면서 집에서 기도하는 것보다는 높은 산과 같은 곳에 가서 기도하는 것이 더 신앙적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적 예배에만 참석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부흥집회만을 찾아다니는 것이 더 신앙적이라고 생각한다. 또 믿지 않는 남편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신앙 생활하는 여성보다는 믿지 않는 남편과 충돌하면서 그것을 박해로 인식하고 교회에 더 열성을 보여야 신자다운 신자라고 칭찬을 받는다.
따라서 뭔가 자연스런 신앙생활은 뭔가 불 신앙적 생활로 간주되는 것이 우리의 신앙풍토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뭔가 부자연스럽다할까 아니면 특별난 것이어야 하는가? 다시 말하면 신앙생활의 영역과 세속생활의 영역이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어야만 하는 것인가? 기독교인은 뭔가 자연스럽지 않고 별난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전철에서 큰 십자가를 몸에 감고 “예수 천당, 불신지옥”하고 시끄럽게 소리치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이 진정 믿음을 많이 가진 신자들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심각하게 숙고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독일의 순교자 본회퍼 목사는“복음의 세속적 해석”을 제창했다. 특수한 종교적 메시지인 복음을 자연스러운 언어로 해석하고 자연스런 방식으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유별난 신앙생활이 아니라 “자연스런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나치의 폭압에 투쟁한 것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독재자에게 항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시민의 권리며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다. 우리나라의 잘 믿는다는 성직자들 가운데 한경직, 조향록, 길진경 같은 사람들은 박정희 전두환 같은 독재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을 두둔하다 못해 찬양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매우 자연스럽지 못하고 오히려 비정상적인 이상한 행위가 아닌가?. 김재준, 한석헌, 장준하, 법정스님 같은 사람들은 독재자들에게 항거했고 그로 인해서 박해를 당했다. 그런 행위들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따라서 불의에 항거한 기독교인의 삶이 자연스럽고 오히려 독재자들을 찬양 고무한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따라서 가장 기독교적인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믿음이 좋은 젊은 신자가 갑자기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고 하자. 우리는 유족을 찾아 같이 슬퍼하고 위로한다. 같이 슬퍼하고 위로하는 것은 세속에서도 흔히 하는 행위며 매우 자연스런 삶의 자세이다. 그러나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면서 죽은 젊은이가 평소에 믿음이 좋았으니 천국에 갔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러한 자세는 대단히 종교적으로 보이지만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런 경우 슬픔을 당한 자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겠는가? 오히려 세속적으로 같이 슬퍼하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라고 했다.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삶과 종교적인 삶이 크게 다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슬픈데 슬퍼하지 않는 것, 기쁜데 같이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의 도리도 아니고 또 종교적 도리도 아니다. 이것은 단지 부자연스러울 뿐이다.
한국의 종교인들 특히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종교의 이름으로 뭔가 특수한 것, 뭔가 부자연스러운 것을 내세우고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척도가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이런 종교인들일수록 교회 안에서 특수한 것을 요구하고 따라서 많은 문제들을 일으키고 성직자들은 그런 신자들로 인해서 골치를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것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종교적인 삶”이란 가장 “자연스런 삶”이라는 것이다. 가정, 직장 그리고 사회에서 가장 정상적으로 사는 자연스런 삶이 종교인들의 삶이어야 한다. 뭔가 특수하고 부자연스럽고 비정상적으로 종말론에 매어 달리고 특별한 은혜경험에 몰두하고 또 방언과 같은 특수경험을 갈망하는 것은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은 아니다. 휴거파나 오대양파나 다 특수한 집단으로서 “부자연스러운 것”에서 신앙의 본질을 찾으려고 한 데서 비극적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가장 자연스런 삶이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자연스런 삶이야말로 기독교적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