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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곤 칼럼] 교회는 신앙공동체냐 조직공동체냐?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

-교회의 참 모습을 찾아서-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교회>의 진정한 본질은 무엇이냐? 라는 문제가 때로는 자주 논의의 중심 이슈가 되는 그 이유는, 교회가 그 본래적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면 자주 이 문제가 중심이슈로서 떠오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구원의 길을 찾아 교회에 출석하는 지상의 억조창생, 그들 개개인의 그 <구원>문제를 생각할 때에는 더더욱 그러하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를 단지 인생에게 매우 필요한 단순한 <종교적 친교단체> 정도만으로서 그 의의를 느끼고 더 이상의 것, 이른 바, <인간구원> 문제나 <창조주 하나님(하느님)과 나와의 특수 관계> 문제 같은 것에는 별로 개의하지 않는 사람들, 이른 바, 자칭 자유로운 지성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이런 이슈가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왜 ‘나’는 ‘무’(無)가 아니고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유[有])’인가?> <과연 나는 어디로부터 왔고 또 왜 나는 여기 이렇게 지금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왜 나는 불가피하게 시간에 묻혀 늙어지고 마침내는 영면(永眠)하게 되는 것인가? 더욱이 그 다음(beyond)은, 그 어느 누구도 모르는 이 ‘인생’이라는 존재란 과연 무엇인가?> <인생은 과시(果是)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묻는 사람들에게는, 실로, 인생의 근원(根源)을 하나님(하느님)이라고 믿고 있는 <모임> (ekklesia)인 <교회>의 진정한 본질이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이 세상은 누군가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거나, 아니면, 우연히(?) 생겨나서 수억 년(137억년?)동안 자발적 진화를 해온 것이거나 하여,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Heidegger, M)가 인간실존은 이 ‘세상에 던져진 것’(‘thrown into world’)일 뿐이라고 말하였듯이, 그렇게, 이 세상[宇宙萬物]도 또한, 어쨌든, ‘던져진 것’(Geworfenheit)이니까, ‘던져진 그대로 사는 그것이 최선’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신(神)을 믿으며 그 신(神)의 뜻을 궁구(窮究)하며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자연친화적인 순리(順理)대로 사는 그것이야말로 최선이 아니겠느냐? 라고도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 무엇보다, 인간은, 성서가 말하는 대로라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들어 생기(生氣)를 불어넣어 이룩하신 하나님의 ‘소유물’이다(창 2:7; 시100:3b).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묻게 되고 또 인간과 그것을 둘러싼 이 모든 것을 <있게 하신 그 첫 원인>(the first Causer)에 대해서 묻게 된다. 이러한 문맥에서 보게 되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공동체’인 이 교회를 주목하게 되고 그것의 진정성이 무엇인지를 묻고 논(論)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러한 논의(論議)의 출발점으로서 <‘교회’는 ‘신앙공동체’(Gemeinschaft; faith-community)냐? 아니면 ‘조직공동체’(Gesellschaft; incorporated company/society [Inc.])냐?> 라는 질문을 그 논의의 주제로 선택하여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여기서 내가, 우선 그 두 개의 대칭적인 용어의 공동언어를 ‘공동체’(共同體)라고 말하는 그것은, 그 둘이 ①그 구조에 있어서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 때문이고 그리고 또 ②그 상호유사성을 극대화하여 각자 자기 길을 계속 가면 극단적 ‘다른 극단’[異端]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그 구조적 유사성이 일으킨 폐해의 예를 우리는 지금 목하(目下) 한반도 안에서 명약관화하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세습 왕조체제의 종교화를 공공연하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삼위일체적인 유일 왕조세습체제는 그리고 그 이념적 기반인 ’주체사상‘ 신앙/교조는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 내지는 삼위일체 유일신 교조체제를 그 형식상 꼭 빼닮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한 모사(模寫)현상을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성서세계에서는 ‘이교(異敎)의 우상종교’라고 강력히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십계의 그 열 계명 중 무려 첫 세 계명이 모두 우상숭배(神의 形象化)금지를 유독 강조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야훼주의‘(Yahwism)와 ’바알주의‘(Baalism)를 극단으로 대치(對峙)시키고(왕상 18: 21,39), 특히 예언자 호세아는 이러한 모사(模寫) 현상을 가리켜서 <야훼의 바알화>라고 예리하게 말하였으며(호 4:11-12, ’음란한 마음‘ 참조), 신약에서는 이것을 ’메시아 비밀‘(마 16:20 -25; 막 8:29-33; 눅 9:20-24)이라는 베일(veil)로 엄히 분리하여 감추어두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이 둘은, 즉 야훼신앙과 바알신앙, 및 그리스도와 벨리알(=그리스도의 탈을 쓴 ’사탄‘)은 결코 동일시될 수는 없는 것이다(고후 7:15-16a).

그러므로 나는 북한의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3대 세습 왕조체제를 ‘거짓 공화국’ 또는 ‘거짓 민주정부’라고 부르며 그 세 인물의 화상(畵像)이나 조각상(彫刻像) 앞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신종[현대판] ‘우상 종교’라고 부른다. 동시에 이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만든 북한 땅의 ‘봉수교회’와 같은 교회를 위장(僞裝)교회 즉 ‘거짓교회’라고 부르며, 이와 극대조적으로, 골방에 숨어서 드리는 기도이지만 김일성-김정일 초상화를 감히! ‘뒤집어 엎어놓고’(!!) 목숨을 걸고 하나님[神]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그 기도내용은 비록 기복적[祈福的]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런 그 ‘지하교회’를 나는 단언하건대 ‘진정한 교회’(참 교회)라고 부른다.

오늘의 지상교회들, 즉 공산권 밖에서(!) 자유롭고도 거침없이 십자가 첨탑을 곳곳에 높이 세워서 그 위용을 당당하게 자랑하는 맘모스(mammoth) 교회(=교회주의 교회)를 참 예언자들이 어찌 아니 ‘거짓교회’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암 4:4-5; 5:4-6; 호 6:6; 사 1:12; 렘 7:4,11a passim) 이것이 예수 오신 후, 2000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않고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욱더 이 세상이 어둡고 부패해지는 바로 그 근본 이유인 것이다.(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이러한 의문[疑問]은 질문하지 않는지 그리고 교회는 왜 이러한 물음[質問]은 참회하며 묻지 않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신앙공동체(Gemmeinschaft: faith-comunity)와 조직공동체(Gesellschaft: Incorporate company)는, 그러므로, 본질적으로는 서로 다르다. 즉 그 두 공동체는 그 구조 조직에 있어서는 둘 다 ‘교회’라는 이름 아래 병존할 수는 있으나, 그러나, 전자는 구원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지만 후자는 구원공동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점에서는 엄격히 구별된다. 둘 다 그 겉모양(그 법적 이름)은 모두 ‘교회’일 수는 있으나 전자(faith community)는 ‘참 교회’이고 후자(incorporate company, Inc.)는 ‘가짜[僞裝] 교회’이다. 전자는 비록 자기 약점을 가지고는 있어도 어디까지나 최선을 다하여 교인(양떼)들의 구원을 지향하는 ‘구원지향 교회’(faith community)이지만 후자는 비록 사회적 공헌과 기여가 매우 큰 것처럼 보이기는 하여도 기업적 이윤을 지향하는 ‘마켓지향 교회’(market church)일 뿐이라서, 이른 바, 하루가 바쁘게 늘어나는 일종의 ‘생선가게’[生鮮廛]와 같다고 하겠다. 생선전(生鮮廛)은 생선전이어야 하고 교회는 교회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그리고 벨리알(anti-Christ, viz., devil, Satan, 신 13:13; 삿 19:22; 삼상 1:16; 2:12; 10:27; 25:17; 삼하 16:7; 나 1:15 고후 6:15; 살후 2:3)은 그 본질상 서로 조화 화합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고후 6:15-16a).

물론, 순수 ‘신앙공동체’(Gemeinschaft)만으로서는 이 험난한(험악한, 창 47:9) 세상을 이겨내기가 여간 힘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사람들은(특히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사람들은) 조직공동체(Gesellschaft)의 요소를 적절히! 가미하면 차라리 어떻겠느냐? 라고 ‘베드로처럼’ 동병상련(同病相憐)하듯 간(諫)하기도 한다(마 16:22; 막 8:32). 그러나 메시아 예수님의 대답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수제자 베드로에게마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 16:23; 막 8:33)라고 냉혹하게 힐책하실 뿐이다. 바로 여기에 초대 교회가 끊임없이 제기하였던 물음, “누가 [메시아의 파루시아{자기계시}를] 막느냐?”(mi ma‘aqev[히브리어]/to katechon[헬라어], 살후 2:6)에 대한 메시아 자신의 결연한 대답(마 16:23; 막 8:33)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슴으로 우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모태신자(母胎信者) 또는 초 신자(初 信者)라는 신앙의 초기과정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에, 신도들에게는 ‘참! 신앙’ 그리고 ‘참 교회 관’에 관한 진지한 탐구가 부단하게 필요하다. 그런데, 지상교회들은 탐구를 하지 않는다. 여기에 근원적인 문제점이 있다. 그러므로 예언자 호세아는 “내 백성이 지식(知識)이 없으므로 망(亡)하도다.”(호 4:6a)라는 저 유명한 예언의 말씀을 남겨 놓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논의의 여지없이 <하나님이 계시하신 뜻에 대한 바른 이해>를 말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 지식이 없다는 말은 호 4:6의 문맥상으로는 이 지식을 “버린다.”(호 4:6b)는 말이고 동시에 “잊는다.”(호 4:6c)는 말인데, 놀랍게도, 이 버리고 잊는 자는 다름 아닌 <제사장>(호 4:6b)들이다. 즉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바른 뜻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거나 잊는 것을 예언자가 비판하고 있는 상황을 말한다.(cf. Wolff, H. W., Hosea,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4, Pp. 78-80) 이것은 기원전 8세기의 북 이스라엘의 종교상황[祭儀情況]을 적확히(的確) 반영하는데 그것은 틀림없이 현대교회의 상황을 또한 적확히 반영(反映)한다고 하겠다.

온맘닷컴(onmam.com)의 섬김 이가 온맘닷컴을 사용하는 자들에게 보내 준 2013년 2월 첫째 주 기독교뉴스에 의하면, 교인들이 교회에 안 가는 이유에 관한 설문(設問, 앙케트) 조사가 또한 주로 <교회가 그 진정한 본질로부터 이탈하는데 대한 불만 때문인 것>으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었다. 설문 조항들은 모두 5가지였는데, 그 중 한 가지를 보면 (1)시간이 없어서라는 이유는 2004년에는 전체의 30%를 차지하였는데 반하여 9년 후인 2012년에는 15%로 줄어들었다고 조사되었는데, 즉 시간이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신자들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는데, 반면, 나머지 네 가지는 교회 자체가 신앙형성과 발전에 도움이 못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즉 (1)가정에서 신앙 동료들과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라고 한 반응이 2%에서 9%로 4배 정도 늘어났다는 것이고 (2)헌금을 강조하기 때문이라는 반응도 4%에서 17%로 약 4배 정도 늘어났으며 (3)교인들이 배타적이고 이기적이라서 라고 응답한 사람들이 또한 7%에서 17%로 2배 정도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4)목회자들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아서라고 대답한 사람들이 6%에서 19.6%로 약 3배 이상 늘어났다고 보고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가 2004년에서 2012년 사이에 즉 9년 사이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놀랍다! 교회는 대형화되는데(교인 수는 늘어나는 데)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의 교회에 대한 불만의 그 이유는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교회가 그 본질에서부터 점점 이탈한다는 데 있었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마음에 새겨 눈여겨 볼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언자들의 교회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예언자적 비판을 성서를 통해 고찰 분석해 보면,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하박국, 예레미야, 에스겔 등등으로 이어지는 예언자들의 비판이 모두 교회예배/성전예배가 모두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가르치고 실천하는 데 있지 않는다는 데 있음을, 즉 신앙공동체적 성격(Gemeinschaft)을 지향(指向)하지 않고 세속 기업체(Gesellschaft: Inc.)적 성격을 지향한다는 데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소위 교회의 종교전쟁(교회 확대주의) 성향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 역사적 반성의 엄연한 결과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예가 기독교의 십자군 전쟁(crusade: 聖戰)과 이슬람의 ‘지하드’(jihad: 聖戰)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이것은 분명코(!!) 마태 28:18-20a에 대한 교회 지도자들의 성서해석학적 오류에서 비롯된 것임이 확실하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昇天)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언(遺言)의 말씀인 마태 28:18-20은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예수의]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시니라.

현대 교회지도자들의 상당 부분의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유언(遺言)을 기독교의 양적 확대 내지는 더 과격하게는 <십자군 전쟁>(십자가를 받을 것이냐 아니면 칼을 받을 것이냐 라는 위협, cf. 코란을 받을 것이냐 칼을 받을 것이냐 라고 위협하는 이슬람의 지하드 논리)을 명령하신 것으로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잘 못된 가르침(잘 못된 성서해석)은 참 교회운동이 아니라 거짓 교회운동이다.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이다(시편 1:6; 마태 5:20; 7:13-14). 이것이 교회가 ‘신앙공동체’(Gemeinschaft)가 되어야 하고 ‘조직공동체’(Gesellschaft)가 되지 말아야하는 그 이유이다. 이것이 또한 그 어떤 온건한 지성인들이 조심스레 마치 중용지도(中庸之道)를 가르치듯, ‘신앙공동체’와 ‘조직공동체’의 적절한 종합을 권유하는 그 온건 노선도 위험하다고 내가 감히 말하는 그 이유이다.

물론 참 교회의 모습인 <신앙공동체>도 마치 <선생과 제자 관계>가 불가불 존재하듯이 사회적 (계급) 조직이 필요하다. 목사(감독, 교황, 주교, 등등)-장로-권사-집사 등등의 조직도 필요하고 그 이외의 여러 부서 조직도 필요하며 그런 조직의 기능이 원활하게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것(교회법, 장로회 정치의 올바른 운동 등등)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중심구조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삼위 일체 하나님>이어야만 한다. 목사, 감독, 주교 등등이 교회의 머리가 되어서는 (종세교회의 교황처럼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목사, 감독, 주교 등등을 하나님으로 대신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최대의 모욕(신성모독)이요 기독교의 우상종교화이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은 결코 삼위일체적인 유일신이 아니고 따라서 그 동상 앞에 절을 하는 것은 ‘멸망 받을 가증한 것’(to‘evah), 즉 ’적(敵) 그리스도적인 것‘일 뿐이다.

호세아의 다음과 같은 예언의 말씀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한다. “내 백성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da‘ath ’elohim)이 없으므로 망하도다. 네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버렸으므로[바르게 가르치지 않으므로]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호 4:6)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마 27:54b; 막 15:39; 눅 23:47)께서도 예레미야 예언자처럼(렘 7:11) 교회 또는 성전[하나님의 집]을 “도적의 굴혈”로 보지 말 것(마 21:13; 막 11:17; 눅 19:46)을 열렬히 강조하셨던 것이다. 이 말씀 속에, <왜 예수 오신 후 2000년 세월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예수님의 ‘파루시아’(재림, 자기 계시)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확연히 지적되어 있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여야 한다. (Let the church be the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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